자기결정권.
헌법에도 나와 있고, 복지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그런 단어입니다. 정의는 많겠지만, 말 그대로 스스로 선택할 권리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어르신 삶의 주인은 어르신 자신이기 때문에 선택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 권리를 지켜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이정순 어르신은 우울증 약을 드시고 있습니다. 배우자의 간병을 3년 넘게 하셨습니다. 간병을 하다 보니 우울감은 더 심해지셨을 겁니다. 할아버지는 고집이 셉니다. 거동이 힘들지만, 모든 의식주를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셔야 합니다. 그 모든 감당은 이정순 어르신이 하고 계십니다. 자녀들은 모두 멀리 거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할아버지의 목욕 도움을 위해 서비스를 신청하셨습니다. 그런데 맞춤돌봄은 신체를 대상으로 한 서비스가 불가능합니다. 사정을 설명해 드리고, 이정순 어르신에 대한 지원만 하기로 했습니다.
첫 전화를 드리자마자 서비스를 거부하셨습니다. 배우자가 병원에 있고, 신경 쓸 일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돌봄을 받을 수 없고, 우울감이 심하시기 때문에 어르신의 결정을 존중해드릴 수 없었습니다. 전화를 걸어 긴 설득을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상담 때를 기억하고 계셨고, 제 이름 역시 알고 계셨습니다. 방문을 부담스러워 하셔서 전화로만 안부를 여쭙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틀 뒤, 이번에는 제 개인 번호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구주영 복지사 전화이지요?”
전화를 걸자마자 이름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르신께서 ‘이거를 못 받겠다’고 하셨고, 저는 이유를 여쭸습니다.
“내가 병원도 왔다갔다 해야 하고, 우리 할아버지도 여간 깐깐한 게 아닌데…. 내가 정신이 하나도 없어. 기억도 하나도 못한다니까. 어제는 오전에 전화를 하면 되겠다 싶어서 그러라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힘들 것 같아요.”
어르신께서는 긴장감이 심하신지 횡설수설 하셨습니다. 우선 천천히 말씀하시도록 한 후 ‘서비스를 거부하시는 이유를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일정한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를 부담스러워 하셨습니다. 또 우울감이 심해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을 꺼려하셨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설득을 했습니다. 자녀들이 가까이 있지 않은 어르신의 상황과 건강을 설명하며 안부를 여쭙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르신의 결정을 존중해드리고 싶었지만, 3년 전부터 이웃과의 왕래도 끊어진 상황이라 서비스를 중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르신께서 일정한 시간을 정하는 것조차 스트레스로 여기셔서 전화를 거는 시간은 따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통화가 가능하실 때에만 받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담당 생활지원사인 박금선 선생님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박금선 선생님은 ‘정해진 시간에 전화를 안 하면 제가 힘들다’고 말씀하셨지만 어르신의 감정을 다시 설명했습니다. 미리 상담지를 읽으셔서 상황은 알고 계셨고, 감사하게도 어르신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하셨습니다. 일정한 시간 없이 아침 일찍이나 점심 시간 이후에 전화를 해보시기로 하고 상황에 따라 같이 의논하기로 했습니다. 전화를 끊기 전 박금선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너무 어렵네요. 제가 잘 하고 있는 걸까요?”
저는 충분히 잘 하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불안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이 생길지 몰랐어요. 말 그대로 맞춤 서비스네요.”
‘맞춤’이라는 말을 저렇게 정의하실지는 몰라서 같이 웃었습니다. 어려운 일을 잘 하고 계신다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선생님께는 잘하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지만, 전화를 끊고 또 고민에 빠졌습니다. 제가 제 판단으로만 결정해서 어르신께 부담을 드린 것은 아닐까. 또 선생님을 잘 지원해야 하는데 번거롭게 한 것은 아닐까. 선생님, 사실은 저도 걱정이 됩니다. 제가 ‘맞춤’을 잘 하고 있지 못 할까봐요.
2021년 3월 5일 금요일, 구주영
첫댓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 한다면 그건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겠지만, 선생님의 행동은 어르신이 선택을 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를 더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강요나 강제가 아닌 설득하는 노력은 배울점이라 생각합니다.
자기결정권이 참 중요하지만 대부분 자기 결정을 잘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어르신과 생활지원사 선생님의 자기 결정권을 무시하지 않고 잘 들어주며 설득한 것 또한 제가 배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