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장 구속사 강해
하나님의 좌소(座所)로서의 성막에 담긴 영적 의미
앞장에서는 성막 건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자원하여 참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백성이 가져 온 물품이 너무 많아 모세는 부득이 더 이상 가져오지 말라고 주문할 정도가 되었다(6-7절). 본 장에서는 이렇게 백성이 헌물한 재료를 가지고 특별히 성막 건설을 위해 선택된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지도 아래 구체적인 성막의 모형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먼저 성막의 공간을 확보하고 외부와의 구별을 위한 휘장과 앙장 및 널판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장막과 장막 문이 완성됨으로서 외형적인 성막의 모형이 드러나게 되었다.
1. 성막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회중과 일정한 간격을 두신 것은 구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독특한 임재 방식이었다. 특히 금송아지 사건 이후 하나님은 회막을 진 밖으로 옮기시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만큼 완전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비록 이스라엘이 언약을 회복하고 성막을 건설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거리를 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만큼 하나님의 임재 방식은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제한성은 성막에서도 적용되는데 성소와 지성소를 휘장으로 구별하는 것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임재의 제한성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무소부재 하심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임재의 제한성은 어디까지나 구속사의 과정에서 적용되는 것뿐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휘장이 갈라지기까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임재를 보이신 하나의 방편이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은 이러한 공간적 제한성까지도 초월하여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결코 제한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막이 비록 제한된 공간이라 할지라도 그 공간이 우주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한다는 점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성막의 성소와 지성소는 하늘 궁전을 옮겨다 놓은 것처럼 하나님은 우주적인 통치권자이시다(25장 구속사 강해 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성막에 임재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나와 경배할 대상이 누구이신가를 바르게 알려주기 위함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 지상의 어떤 것으로도 형식화하거나 가시화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 세계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시화 할 수 없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은 매우 고도한 신관을 필요로 한다.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소와 그룹들은 그곳이 하나님의 궁정임을 상징하지만 바로 거기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사실은 고도한 신관을 갖지 않고서는 이해되지 않는 사실인 것이다.
2. 성막이 가지는 영적 예배의 상징성
앞장에서도 언급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는 쉐키나를 통해 훨씬 쉽게 이해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쉐키나를 향하여 경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제한하는 죄를 범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궁정을 상징하는 성막 안에 임재하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영적 존재인 하나님을 가장 정당하게 예배한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성막은 영이신 하나님의 거처로 구별되어야 한다. 비록 아무리 정교하게 수놓고 아름답게 장식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궁정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그 자리에 좌정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궁정을 설계하고 건축하는 모든 것을 계시하셨다는 사실에서 성막은 하나님의 궁정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성막을 건설함에 있어 이 점은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다.
또 하나 영이신 하나님께서 성막을 건설하도록 하신 것은 인간의 한계를 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에 대한 예배 역시 영적이어야 한다. 즉 가시적인 형태를 초월한 경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현상 세계에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경배를 하나님께 드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가시적인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영이신 하나님께 경배해야 하는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영적인 경배를 드려야 할 인간이 가시적인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는 형편을 감안하시어 성막을 주셨다. 여기에서 인간은 비록 제의에 따라 가시적인 경배를 드릴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영적인 예배로 인정하시고 받아 주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막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제의(cult)는 비록 그것이 물질적이고 가시적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영이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적인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상징한다. 또한 성막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 역시 이 사실을 근거로 가시적인 형태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 점을 무시하고 형식과 절차에 따른 제의를 아무리 정성스럽게 수행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예배로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영이신 하나님은 그러한 물질적인 제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첫 곡식을 드리고 가축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영적인 교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영적 교감이라는 것은 인간이 현상계에 살고 있는 한 항상 가시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삶'인 것이다. 하나님과 영적 교감을 가지는 사람이 취하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이 율례와 법도에서 자세하게 제시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성막의 규례에 따른 제의를 행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나아와 가시적인 형태의 제의를 통해 하나님께 경배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당히 갖추어야 할 삶의 전형이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성막 예배는 하나의 상징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곧 영적 예배의 외형적인 상징인 성막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외형적 상징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성막 건설에 참여하여야 한다. 지금 그들이 각종 재료를 가지고 만들고 있는 성막의 외형적 모형은 바로 하나님의 궁정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이신 하나님을 제한하거나 그 장막 안에 가두어 두기 위해 성막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장막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그 안에 임재하신다는 약속 안에서 그들은 영적인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순결한 삶을 바쳐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드릴 경배의 대상은 영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성막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독특한 존재 의미를 가진다.
출처: 기독신학공동체 글쓴이: 송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