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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하시는 일(요한복음 16:7~11)
몇 년 전 한 신문에 ‘훈계보다 CCTV가 낫다’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습니다. 워싱턴 D.C.에 가면 케네디 예술센터라고 하는 문화공간이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선물 매장이 있는데, 선물 매장에서 많은 관람객들이 기념품을 사가서 케네디 예술센터는 큰 이익을 남겨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선물매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모두 기독교인 자원봉사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물 매장에는 아주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매일 물건을 팔고 마감한 뒤에 그날 매출액을 정산하면 돈이 늘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매장의 매니저는 매일 아침 직원들에게 훈계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정산을 하자 무려 15만 불이나 되는 돈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점원 모두가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대체 누가 돈을 슬쩍하는지 아무도 정직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점원들에게 아무리 훈계를 해도 해결이 되지 않자 결국 매니저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습니다. 긴 시간의 회의 끝에 매니저들은 매장 전체에 CCTV를 설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구역 마다 CCTV를 단 바로 그 다음날부터 놀랍게도 이 선물 매장의 정산액은 정확하게 들어맞기 시작했습니다. CCTV가 있으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범행이 모두 기록될까 두려워 나쁜 짓을 하지 못하듯이 CCTV가 지켜보기 시작하자 매장에서 돈을 슬쩍했던 점원들은 자신들의 도둑질이 들통날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매일 훈계해도 고쳐지지 않았던 점원들의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 CCTV를 설치하자마자 고쳐졌습니다. CCTV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의 행동에 변화가 생기듯, 우리 각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찰하시는 성령님과 함께라면 그 누구도 쉽게 악한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승천하신 후에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장 8절에 보면 그 성령이 하실 일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구절의 명확한 의미는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 인간의 주관적 기준에 따라 규정한 ‘죄, 의, 심판’을 책망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과연 성령께서 우리의 ‘죄, 의 심판’을 책망하시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 무엇일까요?
첫째로, 성령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정한 죄의 기준을 책망하십니다. 사람마다 ‘죄’에 대한 정의는 다 다릅니다. 즉, 죄에 대한 인간의 기준은 주관적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불이익을 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쉽게 ‘죄’라고 규정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면서 없던 죄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와 반대로 인간은 있던 죄를 없애기도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돈을 받거나 이외에도 갖은 이유를 들어 다른 사람의 죄를 말소해주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죄’를 자신의 구미에 맞게 다룰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요한복음 16장 8절이 증언하는 바와 같이 인간이 생각하는 ‘죄’와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죄’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다윗의 선대왕인 ‘사울’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 차이가 얼마나 큰지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사울은 그리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사울은 다만 제사장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제사장이 되어 조금 미리 예배를 드렸을 뿐입니다. 반면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얻기 위해서 우리야를 죽이고, 그 아내를 취했습니다, 사울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살인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사울은 멸망시키시고, 다윗은 그가 회개하자 용서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9절에는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교리에 따라 죄를 ‘대죄’와 ‘소죄’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소죄’는 물건을 훔친다던가 하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지을 수 있는 죄들을 지칭합니다. 그렇다면 ‘대죄’는 무엇일까요? 9절 말씀에 따르면 인간이 지을 수 있는 ‘대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모두 ‘대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도 ‘대죄’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교회를 다님에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한 신학자는 기독교인이하기 가장 어려운 것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성령께서는 혹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를 지을 까봐 우리를 CCTV처럼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우리의 몸이 성령께서 거하는 ‘성전’이라고 증거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성령께서 우리를 축복해주시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경고하시기도 합니다. 한 사업을 하는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은 사업상 고객들에게 술대접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은 고객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접대를 위해 유흥업소에 갈 때마다 늘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래도 내가 권사인데... ’ 술자리가 1차, 2차, 3차로 횟수를 더해갈 때마다 권사님께서는 자신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늘 회의했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께서는 어느 날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간 유흥업소에서 뜻밖의 일을 경험했습니다. 자신에게 술을 따라주던 여 종업원이 ‘아저씨, 교회다니죠?’라는 말을 건넨 것입니다. 여 종업원은 아까부터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이 권사님이 기독교인임을 한 눈에 알아봤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이 권사님은 어쩔 수 없이 타협해왔던 자신의 안일한 태도를 버리기로 작정하고 자리를 박차고 유흥업소 바깥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잘 믿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지 성령님께서 늘 감시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할 때마다 성령님께서는 경종을 울려 우리의 잠자는 영혼을 깨우시는 분입니다.
둘째로, 성령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정한 의의 기준을 책망하십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인같은 의인이 있고, 의인 같은 죄인이 있다” 사람이 생각하는 ‘의’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의’는 다릅니다. 죄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의’를 조작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어떤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 사람을 의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참된 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평한 관점으로 죄와 의를 판단하시기 때문에 무엇이 ‘의’이고 무엇이 ‘불의’인지를 정확히 아십니다.
10절에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저희가 나를 보지 못함이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말씀의 속 뜻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의’라고 증거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우리 인간에게는 ‘의’가 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예수님 없이 우리 인간들끼리 모여서 나름의 의를 추구하고 살아간다면 그 ‘의’는 참된 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저희가 나를 보지 못함이라’라는 구절은 따라서 우리 인간이 예수님 없이 의를 구함으로 인해서 참된 의를 소유하지 못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거짓된 의, 교만으로부터 비롯한 의를 책망하실 것입니다. 혹여나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비롯한 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를 추구하는지 성령님께서는 지켜보십니다.
얼마 전에 저는 캐나다에서 열린 저희 아들의 졸업식에 다녀왔습니다. 모든 짐을 싸서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는 KTX열차를 타러 역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역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아주 어이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출발 및 도착 열차를 알려주는 전광판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타야할 열차가 출발 시간인 2시가 가까이와도 전광판에는 열차가 출발한다고 안내가 뜨지 않았습니다. 저는 매우 놀랍고 당황스러워 대합실로 내려갔습니다. 대합실은 이미 연착된 기차에 대해서 문의하는 승객들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기차가 운행이 멈춰버린 원인은 2시간동안 부산 경남지방을 훑고 내려갔던 태풍 때문이었습니다. 선로에는 이미 물이 찼고, 물이 차지 않는 선로는 유실되기도 했기 때문에 기차가 도저히 다닐 수 없었습니다. 결국 부산에서 올라와야 하는 KTX의 운행이 중지 되었고, 저는 결국 KTX를 탈 수 없었습니다. 리무진 고속버스를 타고 공항에 갈까 생각도 했지만 이미 기차를 이용하지 못한 승객들이 버스로 몰린 상황이라 버스를 타는 것도 좋은 선택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런 대책 없이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저는 ‘반드시 인천공항에 가야한다’라는 생각이 굴뚝같았습니다. 비록 갈 수 없는 상황에도 인천공항에 가야겠다는 저의 방향성은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국 전도사님께 교회차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행히 전도사님께서 시간이 촉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 공항에 시간 내에 데려다 준 덕에 저희 가족은 아들의 졸업식을 잘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상황으로부터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가 비행기를 타야하는 날 아침 부산과 경남지방에 태풍이 닥친 것은 우연적인 사건입니다. 그 누구도 기차가 연착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태풍’이라는 우연적 사건은 결국 저의 삶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인생에는 제가 겪었던 일과 같이 ‘우연적 사건’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 찾아오는 우연은 때로는 좋은 우연일 수도 있고 때로는 나쁜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야하는 날 아침 저에게 찾아왔던 우연은 ‘나쁜 우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쁜 우연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 인천을 향해 가는 것을 포기했더라면 저는 결코 비행기를 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 마음에 ‘나는 죽어도 비행기를 타야한다’라는 생각이 분명하고, 그 생각이 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확실하게 지시했기 때문에 저는 ‘나쁜 우연’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삶의 방향성이 있으면 어떤 종류의 나쁜 우연이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좋은 우연이 찾아오더라도 우리의 삶에 방향성이 없으면 그 좋은 우연이 삶을 망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십억짜리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있다고 쳐봅시다. 마음이 행복하고 기쁘기는 하지만 이 복권 당첨자에게는 갑자기 생긴 엄청난 부를 어떻게 쓰겠다는 방향성이 없었습니다. 그저 갑자기 생긴 일확천금에 눈이 멀어 돈을 흥청망청 쓰기에 바빴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3년 지나니 수십억의 당첨금을 모두 다 써버리고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방향성이 없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좋은 우연은 이렇게 때로는 그 사람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삶이 지향해야할 대상은 무엇입니까? 기독교인은 그 삶의 방향을 어디로 향해야 할까요? 기독교인의 삶의 지향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10절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의’입니다. 우리 삶에 좋은 일이 일어나든 나쁜 일이 일어나든 우리는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무슨 일이든 예수님을 향하고 있는가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가고 있는지 성령님께서 감찰하십니다.
셋째로, 성령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하는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십니다. 인간은 쉽게 타인을 판단합니다. 때로 이러한 판단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머릿 속에서 일어나곤 합니다. 그런데 8절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심판이 다르며, 인간이 과연 심판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판단은 부정확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법을 수십년간 공부한 법관들도 부정확한 판단을 내릴때가 있습니다.
제가 미국 시카고에서 목회할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25년 동안 자신이 진짜 범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실한 수사로 인해 수감되어 있던 사람이 진범이 잡힘으로서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억울한 옥살이에 대해서 수백만 달러의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돈이 그의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아 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일이 제가 시카고에 있는 5년 동안 총 3건이 일어났습니다. 뛰어난 지성과 지식을 가진 법관들이 판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판단은 정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삶에는 부정확한 판단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11절에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이미 심판을 받았음이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말씀의 속 뜻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우리 각자가 심판당할 때, 그 앞에 서기가 가장 부끄러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저는 아마도 판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판사도 하나님 앞에서는 ‘판사’로 설 수 없고, 오직 ‘피고’로 서게 될 것입니다. 판사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 피고’로서 심판의 대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평소 행실을 생각한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저는 의롭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유죄 판결을 받아 죗값을 지불해야 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이미 십자가에서 다 치루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심판의 사건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을 정의롭게 판단하실 수 있는 판사이십니다. 결국 공평한 판사 하나님 앞에서 편벽된 우리가 마음대로 판단을 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입니다. 결국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자의적으로 한 판단에 대해서 책망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심판에 대해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마치 감시 카메라와 같이 성령님께서는 타인을 판단하는 우리의 마음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죄인을 심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죄의 경중을 따질 수 없습니다. 우리를 정확히 심판하실 수 있으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생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19~20절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심판의 권리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타인에게 원수를 갚아서는 안됩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심판하실 것을 믿고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처럼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항상 감찰하시며 우리가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만들어낸 ‘죄, 의,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신앙이 더욱 굳건해 지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안일한 우리의 신앙을 더욱 세심하게 점검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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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날마다 성령을 구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아멘! 성령 안에서, 성령님과 함께 거하며 늘 하나님의 뜻을 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