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예언.
시 22:1-31절, 135.136.356장. 3927 Bible 말씀연구소 박봉웅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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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시편은 십자가 수난의 의미와 고난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안목을 갖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모든 고난과 죽음까지도 경험하셨기에 체휼하신 그대로 우리를 이해하시고 받아주시며 위로하심으로써 인도해 주실 수 있습니다.
시인과 그리스도의 고난의 차이점은 시인은 죽음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체험하지만 예수께서는 실제로 죽으셨고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시인의 위기는 자발적이지도 대속적이지도 않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은 대속을 위한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1.고난중의 탄식과 구원을 바라는 간구입니다.(1-21절). 1)시인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으로 절규합니다.(1-5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이 절규는 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처절하고 깊은 고난이 심연에 빠진 시인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2)열조들의 구원을 회상함으로써 스스로 두려움과 낙망에서 벗어나려는 시인에게 그의 믿음을 꺾으려는 시도들이 있습니다.(6-8절),
하나님게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에 벗어나 소망 안에 거하려는 그에게 대적자들의 모욕과 조롱이 퍼부어졌습니다. 그 조롱의 주된 내용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너의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네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현실이 보여주지 않느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롱 때문에 시인은 스스로를 마치 "사람이 아니라 "벌레"처럼 느낄 정도로 처참함에 빠졌습니다. 그가 자신을 "벌레"로 비유한 것은 신체적 고통보다 그의 영혼의 견딜 수 없는 고뇌로 인하여 철저하게 무력감을 느끼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육체적인 연약함을 포함한 외부적인 압제가 아니라 그로 인한 자신의 내면을 뒤흔들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의혹입니다. 사실 그는 고난 속에서 결사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3)대적자들의 악하고 모멸에 기득찬 단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시인은 그가 아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9-11절), 이스라엘의 열조들이 수없이 많은 체험으로 알고 있었던 살아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또한 시인 자신의 체험 속에서는 어떤 분이셨던가를 하나님 앞에 진술합니다.
그는 자신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참다운 신앙 지식. 경험의 지혜로부터 다시 시작하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그의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는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님께서는 그의 "하나님이 되셨던"것입니다.
이러한 회상은 그를 회상은 그를 향한 조롱에 대한 역설적 반응이며 대적들의 조롱을 물리치고 신앙의 기반을 세우는 것입니다. 4)대적자들은 여전히 마치 거대하고 포악한 짐승처럼 기세등등하게 시인을 위협하고 있습니다.(12-18절)
그 위협은 가히 시인을 압도하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정도이기에. 시인은 그들을 마치 자신에게 머리를 들이대고 돌진하며 그 입을 벌려 공격하는 짐승과 같다고 합니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많은 황소" 와 "바산의 힘센 소"는 사납고도 힘센 대적자들을 묘사한 것입니다. 바산이란 장소는 요르단 동쪽에 풀이 무성한 목축지로서 배불리 먹고 자란 양질의 소를 생산하는 곳입니다. 또한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에 대적자들을 비유함으로써 그를 포위하여 급습하는 자들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 그대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고난까지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믿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를 보호하시고 형통케 하실 때만 함께하시는 분이 아니라 극심한 고난중에서도 일하신다는 믿음이 기독교 신앙의 진수입니다.
5)시인은 이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자신을 지탱하는 신앙의 관건은 하나님의 임재 여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거의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19-21절),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멀리 게시지 않고 임재하시기만 하다면 그는 고난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나의 힘"이 되신 주님이 도우시면 상황은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2.간구에 대한 응답과 복 주심에 대한 감사와 찬양입니다.(22-31절), 1)시인은 그를 죽음에 몰아넣었던 고난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22-26절), 그의 영혼은 고난의 강을 힘겹게 건너 압박 가운데 짓눌렸던 긴장상태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영혼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솟아나오는 것은 바로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입니다. 더듬을 수조차 없었던 어두움이 말끔히 걷혀졌기에 그는 큰 기쁨으로.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을 높이겠다는 결심을 하나님 앞에 토로합니다.
2)시인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로 인하여 개인적인 감사와 찬양을 올렸으며 그 찬양을 통해 온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초청했습니다.(27-31절), 이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온 세계에까지 드넓힙니다.
사실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은 우주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성과 경륜과 섭리는 경건한 개인이나.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 민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열방의 모든 족속"에까지 미쳐 그들 모두가 함께 "주의 앞에 경배할 "것을 내다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믿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고난을 겪을 때 종종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고 낙망에 빠집니다.
악인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주님도 세상의 왕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잠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망각할 뻔했던 시인은 자신의 일순간의 어리석음과 대적자들의 오만을 뛰어넘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이스라엘의 찬송 가운데만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하는데서 넘어서서,열방의 경배 가운데 계시며 미래에도 계실 하나님을 분명히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극심한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깊은 회의 속에 빠질 뻔했던 시인은 온 세상이 거짓 신과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을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한다"는 놀라운 소망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가장 어려운 고난의 순간에 이 시편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시를 자신의 기도로 삼으시면서 자신의 대속의 직무를 감당하셨고 결국 승리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 기간이라고 얼굴 찡그리고 고난을 혼자 다 당하는 것처럼 행동하시면 안됩니다.
주님의 대속의 은혜로 우리는 값없이 그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감격과 감사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는 감사의 기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료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