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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_09_20_금 | +++ 함께 해 주신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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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의 원리: 자족(自足) 론 조현철 신부(예수회) 오쿠다 히데오란 일본 작가가 쓴 『남쪽으로 튀어』라는 소설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가장인 이치로와 그 부인 사쿠라, 두 딸과 아들(요코, 지로, 모모코). 이들은 도쿄에서 산다. 이치로는 급진 운동권 출신이고, 지금은 아예 국가를 싫어하는 일종의 무정부주의자. 그래서 이치로는 경찰이나 공무원들과 사사건건 충돌한다. 마침내 이 부부는 도쿄의 모든 살림을 처분하고 일본 남쪽, 오키나와 옆 야이마란 지역의 이리오모테섬으로 이주를 결정한다.
떠나기 싫지만, 초등학생인 지로와 모모코는 어쩔수 없이 아빠 엄마를 따라 간다. 아이들은 불안해한다, 철없는 엄마, 아빠의 행동을 보면서. “아열대 정글이 바로 옆에 있다는데, 그런 섬에서 어떻게 살지?” “화장실이 푸세식이라는데, 어떡하지?” “케이블 티비 볼 수 있나?” “학교는 있나, 학교에 다니게 해줄까, 우리 엄마 아빠가?” “뭘 먹고 살지, 돈도 없는데?” 하지만 남쪽 사람들이 사는 방식은 아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처음 본 사람들을 마치 자기 가족들처럼 격의 없이 환대해주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소유 개념도 별로 없다. 세간이라고 거의 아무것도 없는 지로의 집에 마치 자기 집처럼 슬렁슬렁 들어와 얘기하다가, “어, 여긴 이게 없네.” 중얼거린다. 다음 날, 뭘 하나 들고 와서는 “이건 우리 집에서 이제 쓰지 않으니까, 놔두고 가야지.” 하는 동네 아저씨와 아주머니들. 그래, 아이들은 점점 깨달아간다. “어? 여기처럼 살면, 국가라는 건 정말 별로 필요 없겠네.” “여기서는 돈도 별로 필요 없네.”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살만하네.” “어, 사는 게 재미있네.” 이 소설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연시하는 여러 전제들에 도전을 제기하고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도 만화처럼, 만화보다 재미있게.난 그렇게 읽었다.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 “먹고 입고 자고.” 그렇게 산다, 우리는. 그런데 살다 보면, 필요 이상으로 먹어서 살이 찌기도 하는 법이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마냥 그대로 내버려두면 점점 피곤해진다, 사는 게. 그런데 참 그렇게들 많이 산다. 그리고는 살과의 전쟁이라고 난리법석이다. 또 살다 보면, 필요 이상으로 무언가 자꾸 생겨나 살림살이가 늘어나는 법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그냥 내버려두면 점점 번잡해지고 피곤해진다, 사는 게. 그런데도 참 그렇게 산다,많이들. 아니, 우리 대부분이 그렇게 살지 않나?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져야 맘이 놓이고, 그렇지 않으면 괜히 불안해진다. 언제나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강박증 속에서 산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많이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게다, 이리오모테 사람들의 삶이 보여주는 건. 그네들의 삶에는 긴장이나 불안이 없다. 느리고 편안한, 사람에게, 좋은 삶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1티모 6,7-8)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다. 바로 여기에 좋은 삶의 원리가 있다. “삶에 꼭 필요한 것, 이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 만족할 줄 알라.” 좋은 삶의 원리는 다름 아닌 자족에 있다. 세상의 경쟁과 긴장과 갈등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은 바로 자족의 정신을 무시하기 때문이 아닌가. 물론, 여기서 “먹고 입을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적절히 살아가기에 필요한 것들을 말한다. 이것은 마땅히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이것마저 계속 자기에게 쏟아 붓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살이 찌는 거다, 고도비만의 시작인게다. 그럼, 이것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쪽으로, 특히 마땅히 필요한 것이 없는 쪽으로 가야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바오로 사도는 계속 말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9-10) 여기서 부자는 바로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 이건 나쁜 삶의 원리다. 나쁜 삶의 원리는 바로 탐욕이다. 사랑의 대상은 돈이 아니라 삶이고, 사람이어야 한다. 돈은 아무리 중요해도 삶의 도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오늘날은 돈이 주인인 세상이다. 이른바, 자본주의!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그렇듯,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 앞에서 맥을 못 춘다. 돈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문제는 돈은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은 끝없이 자기증식에만 몰두한다. 돈의 증식과정에서 사람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상관없다, 돈만 빨리, 많이 불어나면. 힘은, 권력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위해서 사용된다. 돈이 주인인 세상, 자본주의!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겪고 있는 대부분의 불행과 고통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이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제 민족의 명절이라는 한가위를 지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하지만, 없는 사람은 명절이 더 서럽다고 한다. 여기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비롯해 우리나라 곳곳에 명절이 서러운 사람들이 넘쳐난다. 한가위, 한해의 결실에 감사하는 때다. 왜 감사하는가? 세상에 빈손으로 온 우리에게, 사는데 필요한 것들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각자의 노력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감사를 드린다. 감사의 마음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자신만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도록 한다. 아무쪼록, 한가위를 지내며, 우리가 잊고 살았던 소중한 것, 좋은 삶의 원리, 자족의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겼으면 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나중에 도착한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만큼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돌아가는 그런 함께 사는 세상을 향해서 조금씩 나아갔으면. 한가위 둥근 달을 보며 기원해본다. 

소외된 99%를 위해 기도해 주시길... 연대 이야기 조희주 여러분, 추석 잘 보내셨습니까? 성묘도 다녀오셨습니까?오늘 저희 단식 11일차인데 사실 배는 그리 안고픕니다. 하지만 저희도 먹고 싶은 것은 물론 있겠지요. 저는 쌍용자동차 해고자는 아닙니다만 연대차원에서 같이 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2009년 용산참사 범국민 대책위 대표를 맡고 용산투쟁도 같이 했었습니다. 그때는 이강서 신부님이 남일당 본당 신부님이셨지요.
쌍용자동차 동지들 참 대단합니다. 그 동안 철탑농성도 있었고, 지부장님 40일 단식까지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본 것 같습니다. 참 대단합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그 대단함을 다른 분들께 돌리고 싶습니다. 우리 천주교 신부님들, 수녀님들, 그리고 교우님들, 저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용산뿐만 아니라 쌍용자동차, 콜트콜텍, 밀양 그리고 강정까지, 우리 사회에서 핍박 받고 아파하는 곳에서 빠짐없이 이렇게 (미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 쌍용자동차 동지들, 연대하는 동지들, 우리 모두 일어나서 신부님들, 수녀님들, 교우님들께 감사의 큰 박수와 함성 한번 드리면 어떨까요? 정말 종교의 힘은 큰 것 같습니다. 물론 아직 진상규명도 안되고 책임자 처벌도 안 된 미흡한 해결이지만, 그나마 용산이 이렇게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은 천주교가 아니었으면 어려웠을 것입니다. 쌍용자동차의 문제도 이런 종교의 힘으로 빌고 또 빌면 언젠가는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는 해결되리라 믿습니다. 제가 알기로 쌍용자동차 전체 직원이 7-8천명이라고 알고 있는데, 2009년 3천명이 해고된다는 것은, 전체 직원의40%에 가까운 숫자입니다. 해고는 살인이라고 하는데, 이건 대량학살입니다. 그리고 그 3천 명 중 지난 5년의 세월을 지내면서 24분이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자살이라고 하지만 사실 타살이지요, 사회적 타살. 3천명에서 24명이면 0.8%입니다. 5천만 우리 인구의 0.8%라면 40만입니다. 40만 인구가 자살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엄청난 숫자입니다. 
2008년 광우병 파동 때문에 큰 촛불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바이러스로 인해서 1-2명이 죽어도 큰 파동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24분이 돌아가셨는데 언론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이것은 정부가, 언론이, 우리 사회가 이들의 죽음을 자기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많은 자살이 있습니다. 많은 학생들은 입시경쟁으로 자살하고, 빈민들은 빚 때문에 자살하고……. 이 많은 자살은 사실 사회가 책임져야 할 사회적 타살입니다. 이것은 정권뿐만 아니라 사회의 책임입니다. 아까 신부님도 말씀 하셨듯 돈, 탐욕, 이런 문제는 자본주의로 인해서 입니다. 24분의 죽음, 3천명을 해고시키고,학생들이 입시경쟁으로 자살하고, 탐욕, 경쟁에서 살아나야겠다는 탐욕, 돈……. 이것은 자본주의의 문제입니다.그래서 자본주의를 철폐하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1%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99%의 노동자, 민중을 위한 사회를 꿈꾸고 그런 사회를 위해서 오늘 우리는 함께하는 것입니다. 신부님, 수녀님들, 성당에서, 교회에서, 절에서 소외된 99%를 위한 종교 활동 더욱 더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래야 3천명이 해고되지 않고 24명이 죽지 않습니다. 그 동안 70년대부터 80년대를 거쳐 사회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주신 천주교가 이제 한발 더 나아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함께 꿈꾸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쌍용자동차 동지들이 현장으로 돌아갈 때까지 함께 해주시길 부탁 드리겠습니다. 신부님들, 수녀님들 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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