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2 때 <어둠의 자식들>을 읽었다. 나는 그게 소설인지 몰랐다. 소설은 현진건이나 이상, 나도향, 이광수 같은 사람들만 쓰는 줄 알았다. 그저 좀 ‘세련된’ 무협지인 줄 알았다. 약간 거친 ‘빨간책’인 줄로만 여겼다. 거세고 야한 표현이 많아 그랬다. 작가의 말, 첫 문장은 이랬다. “나는 소설에 대해 좆도 모르는 놈이다.”
당시 책 좀 읽었다는 친구들도 그 책이 유명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잘 몰랐다. 그는 1962년 고등학생 때 <입석부근>이라는 작품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될 정도로 천재였는데, 그런 그가 내게는 조금은 색다르게 다가왔다.
대학교에 들어가 학보사 시험을 치렀다. 그때 나온 문제 중 하나가 <어둠의 자식들>을 쓴 작가가 누구인가였다.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아 ‘황철영’이라고 썼다. 책을 읽을 때 작가 이름을 본 것 같은데 한자가 황철영과 비슷해 그렇게 답을 했다. 한자 晳 (밝을 석)을 ‘철’로 짐작했기 때문이다. 세 글자 중 두 자나 맞췄는데도 오답으로 처리됐다.
당시 시험문제 가운데 하나가 조선일보 4단컷 시사만화 주인공인 고바우 영감의 머리칼은 몇 개인가, 하는 거였다. 신문을 얼마만큼 세심하게 보고 있는지 알아보는 문제였다. 답은 머리카락 한 개. 그 하나로 고바우 영감의 감정을 다 보여 주었다. 화백 이름은 김성환.
그 뒤 황석영 작품을 즐겨 읽었다. <어둠의 자식들>의 스펙타클한 묘사가 그를 좀 더 알고 싶게 만들었다. 단편 <삼포 가는 길>, <객지>, <한씨연대기>를 시작으로 그가 펴낸 책은 거의 다 읽은 것 같다. 그중 장편 <장길산>은 그가 40대 십 년을 공들여 쓴 책이다. 한국일보 연재소설로 기억나는데, 그 소설 덕에 한국일보 부수가 엄청나게 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직장을 다닐 때였으니까 80년대 말, 또는 90년대 초로 기억된다. 2호선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40대 남자가 느닷없이 내게 시비(?)를 걸었다. 내가 들고 있던 책이 기분에 거슬렸던 것 같다. 책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황석영의 책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황석영 그 새끼, 사람도 아니야.” 그 남자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술을 좀 마셨는지 혀가 좀 풀려 있었다. “내가 황석영을 잘 아는데 글만 번드르르하지 사람이 안 되어 있다”고 말했다. 자기가 처남이라고 주장했다. 처남인지 아닌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던 작가를 뜬금없이 그런 식으로 매도해 조금 당황했을 뿐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그는 아마도 황석영의 첫 아내, 홍희담 (깃발을 쓴 소설가)의 처남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몇 해 전 <장길산> 열 권을 다시 읽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열다섯 권을 읽은 뒤, 대작 읽기 도전에 나섰는데 그때 한국 작품으로는 박경리의 <토지>에 이어 두 번째로 고른 작품이었다. 시간을 두고 조정래의 <태백산맥>, <한강>, <아리랑>을 다시 독파했다. 대작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세상사를 잊을 수 있어서였다.
<장길산>을 읽으면서 내 능력이 한없이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황석영이 <장길산>을 쓰기 시작한 때는 내 나이보다 어린 40대 초반이었다. 술꾼이자 구라쟁이인 그는 술값이 없어 한국일보 사장에게 원고료를 미리 받아 충당했다. 하지만 돈만 받고 글은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자 한국일보 측에서 아예 방을 하나 얻어주고 글만 쓰게 했다. 피할 수 없어 쓴 글이 바로 황석영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장길산>이 된 것이다.
그가 사십 대 초에 쓰기 시작한, 현란 무쌍한 작품을 보고 나는 백기를 들었다. 어쭙잖은 글이라도 한번 써보고 싶었는데 도저히 쫓아갈 수 없어 포기했다. 그나마 좀 쓸 수 있다고 믿은 게 바로 논픽션이었다. 그냥 사실만 쓰면 되는 일이라 그랬다.
이제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다. 다다를 수 없는 가상의 세계에 목매지 말고, 내가 엉버티고 살아야 할 현실을 껴안아야겠다. 피안의 세계에 갈 수 없다면, 현실의 세계에서 춤추며 살겠다는 뜻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문학에 대해 O도 모르는 놈”이다. 이 사실을 이제서야 고백하게 되어 많이 미안할 뿐이다.
박성기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재외동포문학상 수필대상·수필집 공씨책방을 추억함 등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