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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적 사유의 열림과 내밀한 영혼의 울림
이명순론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오늘날 우리 한국 수필의 지형은 어떤 지도를 그리고 있을까. 바람 부는 어느 날, 이명순 수필가가 누렇고 하얀 A4지에 출력된 수필원고 뭉치를 가지고 왔다. 나는 작가가 수필집을 낸다는 것을 빚잔치에 비유하곤 한다. 그동안 다른 사람의 수필집을 많이 받아 빚을 졌으니, 책을 내어서 빚을 갚아야 한다는 논리다. 그것은 인정투쟁에 종지부를 찍고 존재증명에 나서는 길이기도 하다. 원고를 읽으며 수필의 지형이나 광맥을 찾아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비평가의 운명이다. 문학수필의 작법은 ‘사실의 소재’에 대한 ‘문학적 사실의 소재 형식’ 만들기에 있다. 본격수필의 작법이 ‘사실의 소재’에 대한 ‘문학적 사실의 소재 형식’ 창작에 있는 이유는 시나 소설과 달리 수필은 태생부터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양식의 문학으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태생적 특징은 수필이 문학적 수필로 진화된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 다만 프랑스 몽테뉴 본래의 수필은 ‘사실의 소재’에 대한 ‘사실적 토의’를 하는 데 그치지만 베이컨식 수필은 ‘사실의 소재’에 대한 창조적 구성작업, 즉 ‘문학적 사실의 소재 형식’으로 변용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문제는 베이컨식 수필이 몽테뉴식 수필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지 이 또한 협의적 관점에서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에 머물렀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명순 수필은 어느 지형에서 그 사유의 광맥을 뻗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이명순이 창조한 사유의 산물인 그녀의 수필들은 본격문학이란 성채를 구축하는 밑돌이 되고 있어 다행스럽다. ‘문학이란 한 편의 의미 있는 이야기의 형상화’라는 것이 본질적 대답이며 또한 문학의 존재 이유가 된다. 문예작법의 핵심은 하나의 창조적 의미를 형상화하기 위한 모든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명순 수필은 문학적 의의를 갖는다. 그녀의 수필은 본격수필이라는 차원에서 몽테뉴식 수필을 넘어섰고, 베이컨식 수필의 한계도 극복하고 있다. 인식의 형상화라는 차원에서 그녀의 수필은 찰스 램으로부터 시작하는 본격수필의 틀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세계를 자아화하는 서정수필과 자아를 세계화하는 교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수필을 ‘자아의 세계화’라는 틀에 묶어두고, 거의 존재론적 사유, 사물에 대한 과학적 또는 객관적 접근을 조장하고 있다. 과학적 차원에서 보면, 토끼는 토끼일 뿐이고, 사자는 사자일 뿐이다. 그러나 예술은 그 같은 과학적 사물존재가 아니다. 예술은 그 존재하는 양상 자체가 창조적이다. 그래서 도올은 ‘작가’에서 ‘작’의 의미는 ‘creative'라 하였고, 김지하는 문학을 ’어불성설‘이라 하였다. 따라서 문학수필은 동양시학의 ’언불진의, 입상진의‘, 즉, 개념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형상적으로 체험하는 편이 보다 우수한 창조성을 가진 작품이 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독자는 ’이것‘을 ’저것‘으로 하는 치환원리가 제대로 적용되고 있고, ’세계의 자아화‘란 서정원리가 시학으로 작동되고 있는 이명순 수필의 진수를 맛볼 수 있으리라 본다.
이명순 수필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체험과 세련된 정신세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글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시적 발상으로 산문적 형상화를 이룬 글이다. 이 수필집의 가치 척도는 여기서 출발한다. ‘공감할 수 있는’의 성질은 문학의 보편성을, 가치 있는 체험은 구체성을, 세련된 정신세계는 날선 인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학적인 형상화는 활어로 디자인된 감각적 표현을 뜻한다. 아마도 문학적 성취를 이룬 글이라면 이런 기준을 충족시켜야 마땅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삶의 창조적 내포를 담고 있는 참신한 의식이 작품 속에 넘실거려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명순의 <장미의 이름으로>는 이런 준거를 충족시키고 있는 글들이라고 하겠다. 그녀의 글은 그녀가 사유하면서 남긴 영혼의 분비물이며, 그것이 형상화되어 한 편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진 삶의 에스프리라는 점에서 따뜻한 감동을 주며,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을 여운을 남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이명순은 삭막한 도시적 기계의 틀 속에서 문명 비판을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적 사유를 추구하는 작가라 할 수 있다. 삶의 문제를 마주한 자아 성찰적 작가가 시간의 길에서 만난 문학혼을 어떻게 수놓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문학신문사 문학연수원 본격수필의 숲에서 만난 KBS ‘우리말 겨루기’ 본선 진출자 이명순 작가의 우리말 실력이 지닌 힘이 어떨지 궁금하지 않는가.
II. 클릭
1. 토포필리아에 핀 분홍빛 그리움
수필은 대체로 세상 읽기의 소산이다. 따라서 수필은 삶의 한 모습인 것이다. 음악으로 말하면 일종의 악보이자 변주다. 이명순이 창조하는 사유의 악보는 절대음악이 아니라 변주를 기다리는 문자다. 그녀가 찾아가는 수필의 행로는 진리에로의 순례이기도 하지만, 사회 현상이나 자연 현상, 그리고 개인적 체험 즉 삶의 체계 속에 내재한 여러 기억들을 주로 ‘고향’으로부터 읽어낸다. 작가는 이러한 장소애, 고향 바라기를 통하여 일상적 삶 속으로 매몰되기 쉬운 본성적 감성을 찾아낸다. 이명순 수필의 첫 배경은 주로 회고적 그리움을 자아내게 하는 공간이다. 그 공간은 개념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꾸며진다. 수필은 삶의 한 모습인 것이다.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정서가 있다면, 그것은 ‘외로움’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외로움과 허전함이 없다면 언제나 만족스럽고 꽉 있다는 느낌 때문에 행복할 수 있을런지는 모른다. 그 행복 속에서 인간은 지향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욕심이 없어지고 편안해질 것이며 평화로와질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이러한 만족감을 오래 누리고 있지를 못한다. 편안하다는 느낌이 오래 지속될 때 우리는 심심해지기 시작한다. 편안함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끝으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정서를 대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작가를 위요한 습관화된 환경이 이명순 문학의 씨앗을 잉태했다고 하겠다.
고향을 떠난 현대적 인간의 특성 중의 하나가 외로움이다. 이 외로움의 감정은 불안과도 오버랩된다. 싸르트르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인간 실존을 표상하는 심리적 기제가 바로 이런 것이다. 외로움의 구체화로써 거리두기를 들 수 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란 말이 있듯이 떠남 역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모습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본질적 모습이다. 미로를 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때로 우리들의 자화상으로 느껴지고 있다는 데서 작가의 세계 인식은 현대적 특성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명순은 방황하는 자아, 방황하는 동시대인의 삶을 ‘할머니의 선물’이라든지 ‘진달래'와 같은 낱말을 구사하면서 적절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수필은 자아와 그리움을 찾아 나서는 작업이다. 현재는 과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과거를 잃고 현재에 묻힐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회상을 하는 가운데서 자신을 찾아 바로 세우는 일이 바로 수필적 생활이다. 그녀는 포근하고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찬 의식의 산실이었던 유년기 속에 있는 흑백 사진처럼 아련히 남아있는 인정을 오늘날의 건조한 풍요와 대비해 촉촉한 모습으로 구체화하는 데 능숙하다. 대단한 필력이다. 다소 안정된 공간에서 이명순이 마주하는 수필적 공간은 유칠십년대의 애환을 담은 애련한 사진으로 인식된다. 하늘을 안고 들어온 햇살이 모인 과거의 모습이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봄에는 고모와 나는 뒷산에 가서 봄나물을 뜯었다. 잔대, 원추리, 고사리, 취나물, 더덕 순이었다. 산에 있는 식물 이름도 그때 안 것이 많다. 내가 고향을 떠나 살 것을 예감했는지 그리움이나 고향에 대한 노래를 불렀다. 고모랑 같이 불렀던 것 중에는 ‘고향 생각’이라는 노래가 있다. 지금도 자꾸 머리 속에서 맴도는 이 노래다. 난 요즘도 외로울 때는 이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를 부르면 외로움이 더 진해져서 눈물이 난다. 그러다가 한참 지나면 마음이 다시 밝아진다.
<작은 꿈>에서 -
그녀는 시린 마음으로 한없이 당고모를 그리워하는, 인정스런 작가다. 이 수필의 결말은, ‘9월이 오면 나는 현숙이 고모를 만나러 멀지 않은 충청도 어느 마을로 달려가리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고독한 세월의 그늘에서 작가의 당고모는 작가가 어릴 때 작가를 업고 논길을 걸어가면서 노래도 가르쳐 주고 재미나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때 당고모한테서 배웠던 ‘아기별’이라는 노래가 오늘날 작가에게 문학의 씨앗을 심어주었던 것 같다. 작가는 ‘수필 속에 반짝이는 게 촛불인 줄 알았더니 아기별이었다’는 노랫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명순의 문학세계를 이루는 가장 두드러진 그림자 형상은 존재에 대한 짙은 외로움과 가시지 않을 짙은 향기다.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유독 그녀에게는 강하다. 그러기에 그녀는 ‘당고모와 함께했던 고향 마을의 추억만큼 따뜻한 곳이 또 있을까’하고 그 시절을 잊지 못하고 산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표현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전반부 대다수 작품들은 과거 회고적 그리움으로 생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야말로 눈물의 습기를 통해 황홀한 기적을 만나는 작가라 하겠다. 수필을 씀에 있어서, 이명순은 소시민적 생활의 애환을 그리든, 병든 사회에의 저항과 분노를 나타내든 간에, ‘문학성’ 속에 그 대상을 용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한 작가군에 이름을 올려놓는다. 그녀가 어둠 속에서도 환히 피어나는 피안의 세계를 가진 작가임은 <진달래>를 통해 드러난다.
봄이 오면 고향 뒷산에도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 꽃은 아이들을 들뜨게 했다. 아이들은 마음껏 산을 누비고 다니고 싶었지만, 어른들은 아이들끼리만 산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진달래꽃이 많이 핀 산에 가면 용천배기가 있다고.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아이들에게 진달래꽃을 꺾어주며 꼬여 잡아간다고 했다. 아이들은 공포에 떨었지만, 가끔 어른들 몰래 진달래를 꺾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주변에는 용천배기한테 잡혀간 아이는 없었다. 어른들이 정말 그렇게 믿었을까. 아이들이 산에서 다칠까 걱정되어서 그렇게 말했을까.
- <진달래>에서 -
<진달래>는 그녀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서도 가장 짙은 ‘아롱다롱’ 추억을 동반하고 있는 작품이다. 아름다운 곡선의 향기가 서려 있던 시간들에 사유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수필의 특성 중 하나가 자조적 성격이다. 수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는 거와 같다. 수필 <진달래>에서 작가는 아름다웠던 추억의 변주곡에 초점을 둔다. 그러면서 평온했던 자신의 처지를 동일선상에 놓는다. ‘희망차고 아름다우며 화사한 봄의 뒤편에는 슬프고 두렵고 괴로운 일도 끼어 있다. 요즘 사람들은 어떤 봄을 맞을까. 일요일에 교회에 가고 싶어도 시간이 없어 못간다는 봉고차 기사 아주머니의 말에 가슴이 짠했다. 그 아주머니는 휴일을 맞아 떠나는 여행객을 실어 나르느라 일요일이 되면 더 바삐 움직여야 한다.’고 고백하는 작가는 이 수필에서 유년의 추억과 자신의 삶을 하나의 끈으로 묶는다.그 운명의 사슬이나 속성에 탐닉하며 타자들의 그늘에 대해서 아파하지만 종국에는 편안하고 행복한 그리움의 정서를 드러낸다.
천수만 일대의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농토는 넓어졌지만,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장소가 없어져 버렸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지 않는가. 중년에게 추억은 삶의 장소다. 추억이 많은 사람일수록 마음이 더 부유해지고 행복해진다고 믿는 나에게 갯벌의 부재는 마음의 영양실조를 의미한다. 그러나 어쩌랴. 이 부재의 상황도 어느 순간 나의 기억의 창고에 저장되고 과거가 되리니. 이 안타까운 상처도 시간이 더 흘러 추억으로 바뀌면 나는 변화된 상황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겠는가.
- <농게잡이>에서 -
추억이 물결치는 수필은 <농게잡이>다. ‘게를 보자 어릴 때 할머니를 따라 처음 갔던 밤바다에서 게 잡이 하던 일이 떠오른다.’라는 작가의 회고는 분주한 현대적 삶 속에서 핀 그리움의 꽃이라 하겠다. ‘밤바다는 어떨까 자못 궁금해서 가는 길에도 마음이 설렜다.’는 작가는 영종도 개펄에다 인간사를 투영하고, 자신의 삶까지도 포갠다. 시골의 딸로 태어난 것을 숙명으로 받아드리는 작가이기에 투사를 통해 짙은 공감의 근원을 개펄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유년의 삶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투영한다. 밤 바다는 자기 존재를 스스로의 눈으로 응시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따라서 이 수필은 자기 응시의 경로를 통해 견뎌온 삶의 향취를 풍긴다고 하겠다. 밤 바다의 추억과 유년의 삶을 연결시켜 정서적으로 풀어낸 것은 이명순 작가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이런 이미지의 결합이 문학적 성과를 거두는 이유는 뭘까. 추억이라는 벼랑 끝 궤적을 연상케 하고, 밤 바다를 낀 서해안 개펄체험을 들려주며, 성장 과정에서 놓쳤던 유년의 추억을 불러내어 치유를 시도하기도 하고, 개발 위주의 문명을 비판하기 때문일 것이다. ‘천수만 일대의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농토는 넓어졌지만,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장소가 없어져 버렸다.’는 작가는 흔들림 없이 지켜왔던 자신의 삶을 밤 바다의 추억을 통해 길어 올리고 있어 감동을 준다.
. 큰길 가에서 고생하는 둥굴레는 경이 언니 같다. 언니는 이십 대 초반에 결혼한 뒤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갔다. 기댈 언덕도 없는 낯선 땅에서 외줄 타기를 하듯 언니는 갖은 고생을 다 하며 살았다. 세탁소를 하다가 슈퍼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슈퍼 할 때 가게에 강도가 들어 총을 맞았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얼굴에 흉터가 남았다. 그 후부터 언니는 항상 돌다리를 두드리며 건너듯 조심하고 늦은 밤에 귀가할 때는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빙 돌아서 갔다고 한다. 지금은 텍사스에서 잘 지내고 있다.
- <둥굴레>에서 -
모든 것이 구족된 환경에서 문학은 설 자리를 잃는 법이다.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를 입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정서가 생겨나는 것이다. 작가가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보따리는 그리움의 범벅인 것이다. ‘옮겨 심은 모종 중에서는 난 자리에서 그대로 크는 모종보다 더 튼튼하게 자라는 것도 많다고 한다. 산을 떠나 도시 한복판에 살게 된 둥굴레가 길가 생활에 잘 적응하고 튼튼히 뿌리를 내려 자손을 퍼뜨리며 잘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어찌 나 혼자만의 생각이랴. 자연은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구원의 보루다. 언니가 여러 어려움을 이기고 타국에서 단단히 뿌리를 내려 잘 사는 것처럼, 둥굴레가 길가에서도 잔병 없이 정착에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소망이 승화되어 한 편의 멋진 수필이 되었다. ‘큰길 가에서 고생하는 둥굴레는 경이 언니 같다.’는 진술은 오늘날 이명순을 본격수필가로 만든 씨앗이 분명하다. 문학은 ‘이것’을 ‘저것’으로라는 치환원리 속에서 피는 꽃이 아닌가. 미국으로 가서 강도에게 총을 맞아 고생한 언니의 삶을 길가에 핀 둥굴레에 비유하여 주제의식을 보이겠끔 형상화하는 능력은 본격수필가로서 그동안 닦아온 실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언니에 대한 기억이 기도가 되어 작가의 가슴에 남아 있다가, 이명순으로 하여금 그리움의 수필을 쓰도록 요구한다. 무릇 작가는 무지개를 쫓아가다가 놓쳐버린 소녀의 안타까움을 지녀야 한다. 둥굴레의 정착을 바라는 마음을 언니에 대한 기도로 전이시켜 작가는 비가시성의 가시화로 의미화한 것이다.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놓고 알이 무사히 잘 있는지, 새끼가 잘 자라고 있는지 그 모습을 지켜보느라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그 근처에서만 맴도는 새. 이리저리 쫓겨 다니면서 다른 둥지를 넘보는 뻐꾸기의 처지가 안쓰럽기도 하다. 뻐꾸기가 운다. 알이 걱정되어서 우는 것일까 낳아놓기만 하고 키워 주지 못한 미안함과 서러움에 슬피 우는가. 부모의 목소리라도 듣고 따라 해 보라고 우는 것일까. 오늘따라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애잔하고 처량하게 들린다.
<탁란>에서 -
위의 <탁란>은 수작이다.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놓고’ 새끼를 키우는 뻐꾸기를 조손 가정의 할머니에 비유한 것이라던가, 국외 입양아로 문제로 비화해나가는 데서 우리는 이명순의 작가적 기량을 엿볼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어미가 누군지도 모른 채 다른 어미한테서 살아남아야 하는 기구한 운명에 놓인 뻐꾸기 새끼’와 양부모의 눈에 들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입양된 아이를 견주는 데서 작가가 얼마나 문학적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가를 가늠할 수가 있다. ‘제 몸보다 서너 배나 큰 뻐꾸기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느라 부리가 닳고 깃털이 다 빠지도록 애쓰는 할미새를 보면, 무엇을 위한 헌신인가 외경심마저 느낀다는 작가는 관찰-고찰-통찰-성찰로 이어지는 사찰의 과정을 거쳐서인지 남의 새끼를 키우는 할미새의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작가는 뻐꾸기 새끼의 등에 떠밀려 둥지 밖으로 떨어져 산화되는 알들을 보며 어린 뻐꾸기의 잔인한 행동에 치를 떤다.
그러나 작가는 결말부에서, ’뻐꾸기가 운다. 알이 걱정되어서 우는 것일까 낳아놓기만 하고 키워 주지 못한 미안함과 서러움에 슬피 우는가. 부모의 목소리라도 듣고 따라 해 보라고 우는 것일까. 오늘따라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애잔하고 처량하게 들린다.‘라고 하면서 어느 편을 들거나 옳다 그르다하는 판단을 유보한다. 직접과 간접의 경계에서 부모가 겪어야 하는 심리적 불안과 애환을 어찌 위 수필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절제된 감정으로 비통하기 그지없는 슬픔을 잘 다스려 서글픈 희생과 헌신을 아프게 터치하고 있는 부분이 공감을 자아낸다. ’탁란‘은 인간사의 굴곡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오늘따라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애잔하고 처량하게 들린다.’는 결말부 진술은 인간적 향기를 진하게 풍겨낸다고 하겠다.
2. 삶의 근원을 형성하는 모성의 원리
이명순은 햇살 내리비치는 볕 좋은 날의 행복한 소녀 같은, 영롱한 빛살들로 가득 찬 그리움의 세계를 가진 작가다. 이명순 문학이 향하는 곳은 근원에 대한 본능적 편향성, 어머니로의 지향성이다. 그 그리움의 귀착지는 오 남매를 키워낸 어머니다. 전반부 작품 하나하나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정서가 없는 게 없다. 한마디로 절절한 사모곡이다. 이는 이명순만의 독특한 정서라기보다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수필들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직조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 지극한 정성, 모정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작품 <박새> 가 입증한다. 겉에서 보면 새소리를 좋아하는 작가 자신의 성향이 화소가 된 것 같은 인상이 강한 작품이나 주제의식은 모정에 있다. 사람들은 물질적 변혁만 이루면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아픔이 허물을 벗고 한 순간에 환한 모습의 꽃으로 피어날지 모른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현란함은 한때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실체는 아니다. 물질만으로는 생명을 틔울 수 없고,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명순의 수필적 정서는 오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인간적 향기라 하겠다.
새는 아무리 급해도 먹이를 물고 와서 곧바로 둥지로 들어가지 않고 좀 떨어진 나무에 앉았다가 주위를 살핀 후 둥지로 들어간다. 이렇게 똑똑한 새에게 어느 누가 ‘새대가리’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제 자식 잘 키워 내보내는 영특한 새를 폄하하면 되겠는가. 제 한 몸 건사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보다 낫다. 박새의 새끼들은 하루에 자기 몸무게만큼 먹이를 먹는다니 여러 마리의 새끼를 키우기 위해 어미 새는 얼마나 바쁘게 움직여야 할까. 우리 오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시던 부모님이 떠오른다.
- <박새>에서 -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 충족의 기쁨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엄숙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씀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적막이라도 따뜻하다면, 차라리 괜찮은 것이다. 이 역설의 낯설게 하기가 주는 미학은 그녀를 무한한 포용성의 얼굴을 가진 작가로 부각시킨다. 삶을 원망하고 현실에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어느 한 순간에 돌변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수필 <박새>는 새소리를 좋아하는 작가가 새집을 지어놓고 새가 와서 살기를 기다리는 부분 제시에서 시작한다. 수필의 발단부나 전개부에 어머니란 단어는 한 단어도 쓰지 않고 전개부 마지막쯤에 가서 여러 마리 새끼를 키우기 위해서 하루에도 새끼들의 몸무게만큼이나 먹이를 물고 날라야 하는 어미 새의 바쁜 몸짓을 어머니의 헌신과 희생에 견주어, 우리 시대 어머니의 상을 다시 반추하는 데서 빛나는 문학적 성취를 확인할 수 있다. ‘새는 아무리 급해도 먹이를 물고 와서 곧바로 둥지로 들어가지 않고 좀 떨어진 나무에 앉았다가 주위를 살핀 후 둥지로 들어간다.’는 진술은 우리네 전통적 어머니상과 버물어져 탄생한 것이어서 공감을 준다.
새를 관찰함에서 출발된 깨달음이 노정된 이 글은 헌신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끈끈한 혈연의 연대라는 것을 이 수필은 말해준다. 순수한 연모와 향기 나는 모성애보다 더 가치롭고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죽음을 무릅쓰는 어미의 마음에 감동했는지 고양이가 슬쩍 자리를 비웠다. 그 사이 어미 새는 벌레를 물어다 새끼에게 먹이느라 문턱이 닳는다. 고양이도 어미 새의 자식 사랑에는 손들 수밖에 없었나 보다.’는 멘트가 살짝 가슴을 찌르면서, 여운의 맛을 준다. 이런 맛이 있어 문학성이 생겨나고 공감도가 형성되는 게 아닐까.
내가 대학 다닐 때 남동생 두 명과 계룡산에 갔을 때도 어머니는 날아오르듯 단숨에 먼저 정상에 올랐는데, 꿈속에 있었던 일이란 말인가. 우리를 품고 감싸 주던 튼튼한 둥구나무는 어디로 가고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 마른 삭정이만 남았는가.
- <삭정이>에서 -
문학성이란 말이 상당히 막연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주제와 구성 그리고 표현의 공감도를 의미한다. <삭정이>란 수필의 ‘우리를 품고 감싸주던 튼튼한 동구나무는 어디로 가고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 마른 삭정이만 남았는가’라는 표현은 그녀의 수필가적 문재를 보여주는 공감의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어떻든 수필은 공감의 문학이기 때문에 멋과 맛뿐만 아니라 반드시 향기를 지녀야 한다. 그 향기는 솔직함에서 나오지 않는가. 또한 작품과 작가는 일치해야 한다. 수필적 삶의 진실이 그대로 자신의 수필 속에 투영될 때, 향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등은 위에서 아래까지 길게 절개되어 등뼈 사이에 철골을 끼워 넣고 단단한 보호대로 꽁꽁 묶여 있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있는 내 눈에 부옇게 안개가 끼었다.’는 대목은 이명순에 있어서 삶의 진실과 수필의 진실이 같음을 증명한다. 일상을 조탁하는 정서의 힘이 멋을 한껏 우려낸 결과라 하겠다. ‘어머니는 대소사가 많던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일 년에 열 번 제사를 모시며 손님치레하느라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설 명절에는 떡국 끓이고 주안상 차려 내느라 부엌을 벗어날 수 없던 분. 다른 어머니들처럼 우리 오 남매 키우느라 평생 고생하신 건 말할 나위도 없다.’는 <삭정이>에서의 진술은 보이지 않는 어머니의 인고를 보이게 ‘삭정이’로 형상화했기 때문에 이 작품은 문학적 형상화가 빛나는 작품이라 하겠고, 작가 역시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겠다.
저녁 무렵, 거리를 걷는데 까마귀들이 다급하게 우는 소리가 들린다. 까마귀는 구급차의 소리를 가장 높은 단계로 올려놓은 것처럼 빠르게 울어 댔다. 까마귀 우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걸음을 멈추고 보니 까마귀 두 마리가 전깃줄 위에서 이쪽저쪽으로 바쁘게 날아다녔다. 까마귀는 발이 전깃줄에 닿자마자 다시 다른 쪽으로 날아가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쩔쩔매는 전깃줄 위의 까마귀와는 달리, 길바닥에는 새끼인 듯 작은 까마귀 한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차장이라 차는 여전히 들락날락하고 있는데, 작은 까마귀는 날아오르려고 하다가 자동차 지붕 위에 떨어져 미끄러지고, 또 떨어졌다.
- <까마귀 울림>에서 -
이 수필의 핵심은 인간 못지않은 까마귀의 새끼 사랑을 파악하는 데에 있다. 부모인 듯한 까마귀 두 마리가 목청껏 쉬지 않고 울어댄다는 문장이 주는 의미에 눈물보다 끈적한 모정의 향기와 간절함의 미학이 펼쳐져 있다. 모성적 원리를 주제로 하는 수필은 현대사회의 특성상 여성의 수필에서 필연적으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날아오르려다 자동차 지붕 위로 떨어져버린 새끼를 걱정하는 건 작가도 새끼 까마귀 못지않다. 이런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보고 작가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동물은 생각이 없다’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할 정도다. 동물이나 인간이나 모성은 위대하다는 것이다. 자식을 안전하게 챙기는 것은 부모의 존재이유다.
타자를 향한 연민이나 측은지심은 일종의 아름다운 격려이자 인간적인 행위다. 그것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도 보람 있는 일이지만 작가적 정신적의 영토 확장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이 수필은 위기에 바진 까마귀의 구출이나 까마귀 부부의 자식 사랑을 보여주는 게 목적이 아니다. 작가는 이런 까마귀 관련 삽화나 예화를 부모님의 헌신을 돋보이게 하는 데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 성취가 빛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비유의 원리에서 새로운 인식의 기쁨을 누리는 희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필시 모성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모성 체험과 같은 자녀와의 관계성은 여성의 도덕적 인식을 구성하는 요체다. 여성에게는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모성성을 요구하는 어머니라는 위치가 가장 확실하게 그녀에게 존재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의 모성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임무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그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사회적 통념을 의미한다. 부모님의 고생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설득을 구하는 전략도 성공적이었고, 문학은 간접화의 원리에 의해 문학성이 생성되는 것임을 보여준 점도 좋았다. 다음 수필에서도 진실한 사랑의 마음자리가 뜨겁게 솟구친다.
할머니는 내게 혼수를 해 주기 위해 십여 년 동안 해마다 목화를 심고 가꾸셨다. 뙤약볕에서 김매기와 순 자르기 등을 하며 정성을 기울였다. 목화를 오랫동안 가꾸어서 그런지 할머니는 목화송이 같았다. 할머니가 하얀 세모시 치마와 적삼을 입고 나서면 한 송이의 목화꽃이 되었다.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가 작은 발에 꼭 맞는 흰 고무신을 신고 걸으면 하얀 모시옷이 더욱 빛났다. 다른 아이들 집에서 아이들이 어른 신발을 신으면 커서 벗어지는데 나는 초등학교 사 학년쯤 되었을 때부터 할머니 신발에 발이 들어가지 않아 못 신었다.
<할머니의 선물>에서-
위 작품은 자식을 향한 할머니와 어머니의 정, 부모를 향한 자식의 정이 어떠한가를 교차적으로 제시해주는 수필이다. 현대인들은 자식들이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불편 없이 살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모의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도 돈이 있고 여유가 있는 부모만이 베풀 수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다. 아무리 황금만능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 간은 물질이 전부일 수 없다. 이명순은 이런 진리를 ‘할머니의 선물’이라는 수필을 통해 잘 보여준다. ‘목화를 오랫동안 가꾸어서 그런지 할머니는 목화송이 같았다. 할머니가 하얀 세모시 치마와 적삼을 입고 나서면 한 송이의 목화꽃이 되었다.’는 문구는 미학적 사유로 나아가게 해서 상상과 연상을 통해 심미적 정서를 유발하게 한 까닭으로 문학적 성취가 빛난다. 할머니와 손녀간에 오고가는 사랑의 화음이 감동을 준다. 목화꽃의 상징성에 뭉클한 감동이 드는 것은 두 분의 애정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혈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할머니와 손녀간의 정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이명순 수필세계가 보여주는 모성의 원리는 따스함이 스며나고 있으며, 진솔한 고백이 반성적 성찰의 원리로 승화되어 나타난다. 할머니는 손녀에게 혼수를 해주기 위해 십여 년 동안 해마다 목화를 심고 가꾸었다고 한다. ‘목화밭에 떡잎이 나오면 그곳은 연둣빛 나비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떼지어 날아온 듯했다’는 표현에는 할머니에 대한 손녀의 순진무구한 사랑미학이 구축되어 있다. 수필 문학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정서를 객관화하거나 비유를 써서 형상화시켜 낸다는 점이다.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소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작가의 형상력이 인정과 사상에 뿌리내려 있어서일 경우가 많다. 이명순 수필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진실성이요, 진한 모성 원리의 표백에 있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성을 담보해 주는 것이다.
3. 사회의식에 닿은 상상력과 미의식
이명순의 수필은 바슐라르의 이론처럼 상상력과 미의식의 관계를 통해 구축되고 있어 평자는 체험이 문학적으로 어떻게 변용되는지 그 과정을 행복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수필집 <장미의 이름으로>를 통해 한 작가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고민했던 갈증처럼 채워지지 않는 추구의 시간을 사색과 사유로 승화시켜내는 지혜를 함께 읽어나갈 수 있었다. <촛불>에서, 그녀는 삶의 영역에서 갖는 사색과 여유의 가치를 ‘촛불’로 형상화하여 비움과 베품의 미학이라는 주제를 잘 의미화하고 있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주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친구 ‘선이’의 ‘선의’를 끌어와 ‘촛불의 미학’을 보여준다. 작가의 말대로 ‘욕심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서 ‘나눔의 실천’이란 선행을 이야기한다. 비움과 나눔으로 얻어가는 정신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의미다.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려는 몸짓이다. 바로 자연의 섭리에 따르려는 삶에 대한 겸허다. 말기암 환자인 친구 선이의 선행을 이야기함으로써 그녀가 던지는 메시지는 ‘여유’요, ‘느긋함’이다. 산다는 것은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려는 원심력과 그것과 대치되는 구심력의 절묘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줄다리기의 위험한 연속행위와 갈등 속에서 오랜 시달림 끝에 마침내 구심력을 향해서 돌아오는 동작구조, 그 회귀행위의 근저에는 스스로 낮추고 한없이 겸허해진 자아가 자리 잡게 된다. 그 겸허한 모습은 자신의 모습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진수이며 삶의 영롱한 에센스가 될 것이다. 이 수필 <촛불>은 무한한 원심적 탄력 속에서 가까이 존재하는 일상의 그것과는 다른 특별한 친구 선이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삶의 영역이며 우리의 지친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이 수필을 읽고 나면, 오랜 집착과 이기적인 파도를 넘어 우리의 영혼이 가장 낮은 자제로 임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여유의 미학, 이명순의 수필세계임을 알 수 있다.
어둠 속을 환히 비추는 촛불을 보며 선이를 떠올린다. 전깃불처럼 환하게 넓은 곳을 밝히지는 못하더라도 어두운 곳을 밝히는 작은 불, 불을 다른 초에 댕겨 주어도 자신의 빛은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인 촛불, 작은 촛불들이 골골샅샅이 그늘지고 어두운 곳에 켜지면 얼마나 좋을까.
- <촛불> 중에서
인용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촛불>은 비움과 나눔이 새겨지는 삶의 자리에서, 유한한 삶 자체에 대한 고민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생활 속의 깨달음을 진리로 연결하는 그녀의 여유에 찬 삶이 주는 감동은 안식의 문학이라는 수필 고유의 특성을 전해준다. 지혜의 보고서라 할 만한 이 수필은 여기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생활수필을 한 단계 업그래이드시키고 있다. ‘불을 다른 초에 댕겨 주어도 자신의 빛은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인 촛불,’은 구체어의 맛을 느끼게 해서 문학 언어가 주는 미적 감동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통한 나눔과 배려의 가치를 전달해주기도 한다. 나눔의 필요성과 여유의 중요성을 관념적인 언어로 설명하지 않고 구체적 진술로 제시함으로써 수필언어가 도달해야 할 원형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었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독자와의 공감대 확보를 위해 작가는 도네이션의 구체적인 액수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설득적 논리는 주제의식의 구체화를 돕기 위한 필수적 장치로서 기능한다고 하겠다.
예술의 가장 본질적 조건이 상상의 문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인지한 작가는 상상력에 의한 수필의 예술성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손>이란 수필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술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에 의한 유추와 상상의 기법을 극대화해 나가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발레리는 문학 속에서 사상이란 과일 속에 묻혀 있는 영양소와 같이 숨겨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엘리어트는 문학은 사상을 장미꽃 향기와 같이 감각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문학의 내용에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시도할지라도 그것이 문학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녀는 ‘사상의 정서화’, ‘이념의 감각화’, ‘내용의 형상화’를 철저히 이루고자 한다. 자신의 큰 손을 좋아하는 사람은 할머니와 부모님뿐이었는데, 결혼하면서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 남편이라는 것이다. 그런 자신의 손에 대해 그녀는 ‘주눅 들어 사는 내 손은 생김새와는 달리 잘하는 것들도 많다.’고 말한다. ‘아무리 예쁜 손이라도 당길심만 많으면 미워 보이고, 손이 못생겼다 하더라도 그 손으로 많이 베풀고 남을 도와준다면 아름다운 손이라는 ’아름다움‘에 대한 재해석이 신선한 미적 감각을 우려내어 감동을 전해준다고 하겠다. 손은 무슨 일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마지막 한마디는 깊은 울림을 주고도 남음이 있다. 사상의 정서화나 이념의 감각화, 내용의 형상화가 아주 잘 된 작품이다.
앤서니 엘리엇은 오늘의 자아가 형성되기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고 표현하는 글이 수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아의 형성 과정이 개개인마다 다르니 글도 사람에 따라서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또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자기규정을 하여야 한다고 했다. 수필 <상처>는 엘리엇이 말하는 자아이론의 핵심이 실린 작품이다. 성찰하는 과정은 삶의 궤적에 관하여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정보를 주시하고 되돌아보는 과정이다. 수필쓰기에는 자아 성찰이라는 과정이 들어간다. ‘꽃 사과나무가 사라지는 걸 보면서 나만을 위한 이기심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는지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나의 언행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남의 잘못을 탓하기에 앞서 나를 돌아보고 정구 업 진언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고백에서 만들어지는 자아발견의 세계는 이명순 수필의 고유한 예술적 기법이 된다. 왜냐하면 소설의 허구성이나 시의 압축적 언어와 달리 이것은 상상 아닌 실제적 사실의 세계를 전제로 하고 그 내면에서 또 하나의 상상의 세계를 상징적 연상으로 병행시켜 나가는 형태이며, 이는 오직 수필만이 가능한 특수한 상상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독자적인 기법은 이명순 수필의 우월성을 확보해 나가게 한다고 할 수 있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은 베고 죽는다.’는 말이 있다. 당장 배가 고프다고 씨앗을 남겨두지 않으면 나중에 큰 배고픔을 겪게 된다는 말이니, 그만큼 씨앗을 중요하게 여겼다.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씨앗이지만, 다른 사람이 심는다고 달라고 하면 서슴없이 내어주는 것이 농부의 마음이다. 씨앗은 돈을 받고 파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다.
- <슬픈 씨앗> 중에서 -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은 베고 죽는다.’는 속담으로 시작하는 이 수필은 ‘슬픈’ 씨앗의정서를 대동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어떤 일이 있어도 ‘씨앗’만큼은 돈을 받고 팔지 않는 것이라는 속담의 인용으로 주제의식의 상상화를 도모하는 대목이다. 작가는 국내 종자회사 대부분이 외국계 회사에 팔려나가 국내 종자의 산업토대가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안타까움의 정도를 넘어 씨앗의 슬픈 현실을 식량주권과 안보 문제와 결합시키고 있다.‘꽃을 피우고 씨를 맺어 자손을 퍼뜨리는 일은 식물이 할 일이다. 그러나 요즘 새로 개발된 채소나 곡식들은 꽃을 피우고 씨를 맺어도 자신과 똑같은 자손을 퍼뜨릴 수 없으니 안타깝다. 이제 노란 장다리꽃 위로 흰나비가 날아다니던 아름다운 모습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라며 씨앗이 제 역할을 못하는 현실을 따갑게 질타하는 공감 확대 전략이 좋았다.
여러 조각으로 마름질 된 천을 이어 하나의 완성품으로 만들어 가는 바느질은 인생살이 같다. 여러 개의 천을 이어야 제 몫을 더 튼실하게 해내는 의류처럼 내 인생도 자주 점검하고 수리하여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할 것이다. 결핍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다. 옷이 터지거나 해질 때마다 그 부족함을 채우는 바느질이 있으니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나는 기운차게 걸어갈 수 있다. 해어지고 올이 풀린 곳을 수선하며 실밥이 뜯어지고 느슨해진 곳은 단단하게 꿰매면서 완성해 나가는 바느질처럼 인생길도 재점검하면서 살아가리라.
- <바느질을 하면서> 중에서
이명순 수필은 우리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서 인간미가 서려 있던 시간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작가는 바느질에다 인간사를 투영하고, 자신의 삶까지도 포갠다. 그렇게 해서 자신 그림자를 드러낸다. ‘재봉틀은 어떤 일이든 순리대로 해야지 억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진술에서 짐작하듯이 ‘재봉틀’은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단초를 제공해준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의식의 세계로 이끌고 나와서 자신의 인격으로 통합하는 것이 인격의 폭을 넓히고, 의식의 시야를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성찰의 바람직한 방법으로 수필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햇볕이 나도 그림자를 지울 수 없듯이 그림자도 우리 자아의식의 중요한 반려자가 되어 있다. 재봉틀의 투사를 통해 작자는 삶 앞에서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한다.‘결핍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다. 옷이 터지거나 해질 때마다 그 부족함을 채우는 바느질이 있으니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나는 기운차게 걸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작가는 바느질을통해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느질은 자기 존재를 스스로의 눈으로 응시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이 수필은 자기 응시의 경로를 통해 문학적 향취를 풍긴다고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바느질은 고난이라고 설정한 부분이다. 스스로 힘을 들여 하는 노동이라는 해석이 뒤따른다. 바느질을 ‘의미 있는 고난’과 연결한 것은 이명순 작가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이런 이미지의 결합이 문학적 성과를 거두는 이유는 바느질이라는 결핍을 연상케 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치유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처음부터 바느질을 통해 큰 사랑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맵시는 없지만 직접 궁리하면 만드는 과정을 통해 기쁨과 평온함, 완성했을 때의 뿌듯함을 길어 올리고 있다. 재봉틀에 몸을 맡기고 고난이라는 바느질에 자신의 삶을 얹어놓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지 않는가.
한 친구는 요즘 바느질하느라 바쁘다. 그 친구는 여성회관에 다니며 다음 달에 태어날 손주를 위하여 유기농 배내옷과 완구를 직접 만든다. 거기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임신부인데 태어날 아기를 안전하게 키우기 위하여 바느질을 배운다고 한다. 개인이 노력하는 집 어린이만 안전하게 키울 수 있다면 바쁜 부모들은 어떻게 할까. 귀한 자식을 해로운 것들 속에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가. 어떤 음식이라도 마음 편히 먹을 수 있고, 임신부가 눈이 아프도록 바느질을 하지 않아도 안심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은 누가 만들까.
- <장미의 이름으로> 중에서 -
삶은 복잡하다. 그래서 세상은 복잡계다. 인생 터에는 ‘곳곳에 해로운 물질이 널려 있다.’것이 이명순 작가의 생각이다. ‘갑자기 혀끝이 쓰리고 아프다. 거울에 비춰보니 혀끝이 팥알만큼 붉게 부풀었다.’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장미의 이름으로>의 이 수필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생의 장을 치열한 생존경쟁이 존재하고 있는 안심하고 살 수 없는 세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금서에 독을 발라놓아 그것을 읽은 사람을 죽게 했던 채, ‘장미의 이름으로’는 어떤 이야기들이 전개될 것인가를 암시하는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다. 사실을 수필의 발단에 깔아, 긴장감을 극대화해 놓고, 작가는 이렇듯 생태계나 자연의 순환에도 명암이 엄연히 존재함을 말한다. 이 수필의 요지는 ‘입을 것, 먹을 것, 사는 집, 탈 것, 생활용품 등 어느 것도 믿고 쓸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한 친구는 요즘 바느질하느라 바쁘다. 그 친구는 여성회관에 다니며 다음 달에 태어날 손주를 위하여 유기농 배내옷과 완구를 직접 만든다.’란 진술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구체적 예시에 힘입은 정서의 객관화가 문학성을 한층 더해 준다. 문학이 독자의 감동을 목적으로 한다는 본질을 생각할 때 이와 같은 간접화는 필수적이며 또 연상으로 복잡한 내면의 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감각적 접근과 함께 다양한 비유의 구사도 필요할 것이다. 수필이 어떻게 사실의 세계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초월한 상상의 예술세계를 이런 기법으로 구축해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의 하나가 바로 <장미의 이름으로>라 하겠다.
태평양의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앤디와 다시 만나 포옹하는 레드의 모습을 보며 몇 년 전에 갔던 멕시코 휴양지 칸쿤을 떠올렸다. 하얀 모래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코발트빛 바닷물이 찰랑대던 카리브해,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지와타네호에서 그가 다시 찾은 자유는 카리브해의 그 바닷물 색깔과 닮지 않았을까.
- <날고 싶은 새> 중에서 -
이 작품에서 결말이 주는 묘미는 ‘하얀 모래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코발트빛 바닷물이 찰랑대던 카리브해,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지와타네호에서 그가 다시 찾은 자유는 카리브해의 그 바닷물 색깔과 닮지 않았을까.’라는 자기 체험적 삶의 용해에 있다. 감옥과 바깥 세상이 교차되면서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인생살이의 명암을 작가는 영화‘쇼생크 탈출’로 잘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물화된 보조관념을 통해 작자가 숨긴 이면적 상징물에 도달함으로써 작품을 미학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문학은 빠르고 정확한 의미 전달만이 아니라 그 전달의 효율성을 따지기 때문이다. 얼마만큼 감동적이냐가 성패를 가르며 그래서 수사적 장치가 필요하다. 만일 감동이 없다면 문학이 아니다. 그런데 설명적인 글은 감흥을 주지 않는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아무런 흥미 유발이 안 되기 때문이다. 독자에게도 역할이 주어져야 한다. 독자의 입장에서 작품을 음미하고, 문장을 소화하며 작품을 완성시켜 나간다면 더욱 좋다. ‘다시 찾은 자유’에 대응되는 ‘카브리해 바닷물 색깔’이 주는 미적 사유 과정의 연상과 상상은 문학이 보물찾기이며 낯설게 하기의 보고임을 증명해 준다고 하겠다.
이 수필의 또 다른 강점은 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질서정연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일반화된 삶에서 두려워 포기하는 삶과 견디며 노력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그 다음에 남쪽으로 차를 달리는 엔디의 모습을 통해 ‘희망’이란 개념을 떠올린다. 그리고 나서 다시 병원에 입원한 이웃 아주머니에게 던졌던 “아주머니, 어서 나으셔서 같이 산책해요.”라는 말로 효과를 봤다는 체험의 제시는 희망으로 향하는 점층적, 단계적 접근법이다. 이 수필은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철저한 전략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 자신의 체취를 느끼며 수필의 매력에 빠지는 독자를 배려하겠다는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이런 일반화에서 구체화로, 구체화에서 일반화로 개념이동이 질서 정연한 것은 이 수필이 가진 여러 장점 중에서 가장 빛난다.
그녀는 외국 여행에서 얻은 지혜를 수필 속에 흩뿌리고 있다. 산다는 것은 떠나는 것이다. 떠남으로 얻은 생생한 느낌은 기행수필이란 이름으로 또 다른 수필의 맛을 전해준다. <잣대>는 인도 여행을 텅해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를 다지는 글이고, <빛과 그림자>는 쿠바 여행의 공포를 겪고 나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미얀마 아가씨>는 싱가포르 여행기이고, <땅을 밟다>는 페루, <과도 한 자루>는 영국 여행기다. <삼동서>는 싱가포르가 배경이다. 그녀의 기행수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이 삶의 진통과 창작의 고뇌 속에서 태어난다. 언어를 부리는 탁월한 역량이 그녀의 수필적 가치를 드높인다. 문장은 수필의 생명이다. 롤랑바르트의 말대로, 그녀는 말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어떤 언어적 물질을 만들어내는 거인인 셈이다. 살아가면서 해외에 나가 다양한 문물과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기쁘고 설레는 일인가. 만남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인연이 시작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의 새로운 운명이 직조됨을 의미한다. 인간적인 삶의 길을 찾는 그녀의 현자적 모습이 성스럽다. 삶의 문학이자, 인간학인 수필은 화해해결구도를 통해 독자들이 타인과 화해하고 세상과도 화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여행과 관련이 깊다.
우리말 달인 프로그램 출연자답게, 이명순 수필의 가장 강한 특징은 유려함이다. 존재의 집으로서 언어의 바름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그녀는 문장미학과 작품성을 동시에 구축한다. 그녀는 참신한 발상과 비유를 무엇보다도 중요시한다. 특히 주제의식의 상상화를 돕는 발단부 묘사는 매우 안정적이다. 발단부에 전개예고 기능을 중시하는 작가의 인식은 수필 감상의 흥미를 더한다. 무엇보다도 이명순 수필을 읽는 매력은 날카로운 관찰을 통한 깊은 명상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 오감을 이용하여 진리를 찾고, 그것을 현실의 삶에 투사시켜 내는 작가의 저력으로 그녀의 작품은 예술적인 향기를 풍긴다고 하겠다. 즉 우리는 물화된 보조관념을 통해 작자가 숨긴 이면적 상징물에 도달함으로써 작품을 미학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명순 수필은 이런 형태를 따른다. 문학은 빠르고 정확한 의미 전달만이 아니라 그 전달의 효율성을 따진다는 것이다. 얼마만큼 감동적이냐가 성패를 가르며 그래서 수사적 장치가 필요하다. 만일 감동이 없다면 문학이 아니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아무런 흥미 유발이 안 되기 때문이다. 독자에게도 역할이 주어져 있다. 존재의 의미를 찾아 끊임없이 사색하는 작가의 내면을 따라가 보는 재미가 솔솔하지 않는가.
III. 로그아웃
이명순 수필은 다양한 물빛깔을 가지고 있다. 이명순 수필들은 맑고 잔잔한 샘물에 비유될 수 있을 정도다. 수필 속에는 잔잔한 감동이 있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정감이 있다. 깊은 깨달음의 경지가 느껴질 뿐만 아니라 수수하면서도 소박하고, 은근하면서도 조용하고 은은한 향취가 풍겨나고 삶의 진솔한 모습이 꾸밈없이 담겨 있다. 그녀는 깊은 의식과 상념으로 감성을 체계적으로 정리 압축하고, 다양한 시각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인간과 삶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다. 이는 평소에 영혼과 마음을 늘상 갈고 닦은 까닭이다. 이명순의 수필의 특성을 분석 판단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첫째 승화된 주제의 설정으로 수필의 품격을 높였고, 둘째 인상적인 구성과 서정적 묘사로 맛을 내고, 셋째 개성적이며 고백적 정신이 진정성과 건강함을 보여주며, 넷째 함축성과 오묘한 여운이 내재된 수필세계로 문학성을 드높인다. 풍부한 감성과 지혜를 수필의 주제와 목적에 맞게 집중해서 더 좋은 수필이 되었다는 점도 덧붙인다.
들뢰즈에 따르면, 존재의 사유를 하는 사람과 되기의 사유를 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자신이 수필가이기 때문에 수필을 쓰는 사람과 수필을 씀으로써 수필가가 되는 사람은 다르다. 이명순은 수필가이기 때문에 수필을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필을 씀으로써 수필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 중의 하나다. 수필을 씀으로써 자기를 위무하고, 나아가 수필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구원하려는 실천적인 자세로 인해 그녀의 수필은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다. 루카치의 말대로, 문학이 총체적 인간의 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우울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므로 문학보다 깊은 철학적 사유와 창조적 사상 속에 생명의 참된 의미와 문학예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수필을 통해 우리는 보여주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제도적 기호체계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응하는 수필가는 본격수필가의 세계관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수필이 문학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수필이 예술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평자가 제시하려고 하는 위대한 작가대열에 작가 이명순의 명패가 놓여 있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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