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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학적 접근: 아인슈타인을 넘어서
이제 과학계의 사조가 또 한번 바뀌는 것 같다. 유럽 입자물리연구소(CERN) 에서 빛보다 60나노초(nsec.10억분의 1초) 빠른 물질을 검출하여, 'E(에너지)=m(질량)c^2(광속의 제곱)'으로 대변되는 아인슈타인의 종래 패러다임이 폐기될 위기에 놓여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가령 2011년 7월 26일 홍콩과학기술 대학에서 Du Shengwang이 이끄는 연구팀에 의하면, 광자 하나가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가는 것이 탐지되었다는 AFP의 보도가 있었다. 그런데 좀 더 권위있는 CERN에서 연구발표를 하니 반응이 달라진 것 뿐이다. 사실 빛보다 빠른 물질, 가령 타키온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천체물리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의되었던 것으로, 한 마디로 드문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아인슈타인의 권위가 너무도 거대해서, 이런 발언을 공식적으로 내놓는 용감하고 박학한 학자들이 없었을 뿐이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과학이 마치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기나 한 마냥, '빅뱅'이나 '진화론'처럼 증명이 불가능한 것을 수 백 페이지에 걸쳐 공부하고, 확신한다. 아프리카나 동양의 민속신앙은 우습게 알면서 말이다. 만약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공룡화석보다 더 많은 숫자의 미싱링크들을 발견했었어야 할 것이다. 가령 두더지+박쥐의 중간형태나, 원숭이+인간의 중간형태의 '괴물'들 말이다. 층위학으로 연대를 측정할 때 오차가 무려 300퍼센트에 달하고, 가장 널리 쓰이는 방사선연대측정법도 15% 이상의 오류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대중들은 과학을 왜 민속신앙보다 우위에 두려고 할까? 과학 또한 또 다른 형태의 미신, 신화에 불과할 수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이번 CERN의 발표를 통해 주류 과학 이론 또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뱀장어 새끼가 무엇을 먹는가, 비행기는 어떻게 나는가(베르누이의 정리는 틀렸다고 알려져 있다), 통각이 없음에도 고통을 느끼는 두통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 것인가, 마취제를 맞으면 어떻게 마취가 가능한가, 왜 뜨거운 물이 냉장고에서 일반 물보다 빨리 어는가, 최고의 태양광 시스템도 40%의 에너지 변환율에 불과하는데 어떻게 식물은 75%이상의 에너지 변환이 태양으로부터 가능한가 등 모르는 것 투성이다. 엄밀히 말해 과학이란, 가장 설득력있는 망상을 다루는 법칙일지도 모르며, 이과에서 유일하게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법칙은 수학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미 법칙으로 확신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도 이 문제에서 결코 예외일 수가 없다. 뉴턴 시대에도, 뉴턴의 고전역학은 이미 '법칙'에 반열에 들었었다. 앞으로 뉴턴과 아인슈타인 물리학에 대해서 살펴보겠지만, 요점은 과학은 언제나 기존 모델을 수정함으로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상당 부분이 말이 안된다고 예전부터 생각해왔다. 빛보다 빠른 물질이 있다는 건, 이미 전에도 알고 있었다. 꼭 실험을 해야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동양인들은 전체의 구조를 먼저 보고 부분을 논하기에, 입자실험을 안 해도 사고실험을 통해 이미 그런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빛보다 빠른 입자는, 다름 아닌 바로 인간의 '생각'이다. 그 이유를 이 포스트에서 말하고자 한다. 주로 블로그에서 인문학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는데, 이렇게 자연과학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갖어 기쁘다. UFO의 원리에 대해 나는 (1) 미국이 나치 독일의 과학기술을 통해 UFO를 흉내낸 것, (2) 실제 미확인비행체로서 외계에서 보낸 UFO로 구분하여, 그 작동 메커니즘에 대해 과학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데, 이 장에서는 이런 '초자연현상'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여하간 이 포스트에서 나는 간략하게 아인슈타인을 비판함을 통해, 동양의 연역적 사고방식의 우수성을 논하고,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신과학사조(뉴에이지적 과학모델)를 이야기해볼까 한다.
1. 뉴턴역학에 대해
먼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원리와 일반상대성원리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뉴턴역학으로부터 출발하여 왜 아인슈타인이 뉴턴 역학의 패러다임을 깨려고 했는지 그 전체적인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뉴턴의 고전물리학은 G. 갈릴레이의 자유낙하 이론과 J. 케플러의 행성의 운동법칙에 근거를 두어, 입자의 질량은 일정하므로 어떤 시각의 위치와 속도를 정하면 그 후의 입자의 운동은 완전히 결정된다는 절대적, 또는 획일적 자연법칙론이다. 이것은 중력의 작용방식에 대해 훌륭하게 설명을 해내었다.
그런데 뉴턴의 역학에 문제가 있었다. 뉴턴 역학에서 유도되는 만유인력공식, 즉 F=GMm/r^2 으로 천체의 설명과 중력의 크기가 완벽히 설명되었다고 해도, 뉴턴은 왜 중력이 작용하고 존재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물체의 속도가 무한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아니면 유한한 것인지 그는 그 속성을 고민했다. 뉴턴에 따르면 중력이 작용하는데 걸리는 속도가 무한이라고 암시되어 있는데, 이는 태양주위를 돌고있는 지구가 갑자기 태양이 사라진다면 그 즉시 그것을 감지하고 궤도를 이탈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문제가 되는가? 즉시 안다는 것은 곧 태양과 지구사이의 상호작용이 '무한'의 속도로 오고 갔다는 것이다. 그러한 신호의 속도가 무한인 것이 가능할까? 가령 물리학적으로 생각해보면, 시속 100km로 달리는 차에서, 박찬호 선수가 시속 50km 야구공을 차가 달리는 방향으로 던지면 총합 150km로 속도가 더해질 수 있을 것이다. 상대적인 속도도 마찬가지로서, 동쪽으로 시속 100km 가는 차에, 맞은 편에서 서쪽으로 달리는 기차가 100km로 간다면,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서쪽으로 가는 기차는 200km가 된다. 속도는 덧셈과 뺄셈이 가능하니까 말이다.
뉴턴의 생각을 여기에 적용하면, 속도를 계속 더해갈 수 있다면 무한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속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거리/시간으로 정의된다. 만약 속도가 무한대가 나오려면 시간이 0에 가까운 값이거나, 거리가 무한대가 되어야 결론적으로 속도가 무한대가 나온다. 즉, 같은 시간에 무한대의 거리를 가야하고 반대로 같은 효과를 내려면 0인 시간에 엄청 먼 거리를 가야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시간이 0이거나 거리가 무한대라는 것이데, 아인슈타인처럼 빛의 속도=중력의 속도로 도입하지 않고서는 이 문제를 못 풀게되는 것이다. 뉴턴도 이 문제에 고심했지만, 결국 풀지 못하고 아인슈타인에게 바통을 넘겨주게 된 것이다. 그 직접적 계기는, 수성을 관찰하던 중 수성의 근일점의 이동에서 작지만 뉴턴의 역학을 도입하면 차이가 보이게 된 것이다.
2. 특수상대성원리와 일반상대성원리에 대해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원리와 일반상대성원리를 각각 내었는데, 특수상대성이론은 특수한 경우 즉 물체가 정지와 등속운동을 할때만 적용되는 이론으로 두 개의 기본원리, 즉 상대성원리와 광속도불변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등가원리(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이 같다는 원리)와 리만의 구부러진 공간의 기하학적 구조에 대한 중력이론이 합쳐진 것이 일반상대성원리이다. 이러한 상대성원리는 중력이론으로서는 현재까지 가장 성공적인 이론이며, 천체관측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우주론의 형성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말이 잘 이해가 안된다면,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특수상대성원리'부터 보자. 아인슈타인은 어릴 적에 빛의 속도로 따라가면 어떻게 될까, 하는 문제에 천착한 적이 있었다. 아인슈타인 당시의 실험결과에서는 충격적으로 빛이 언제나 빛의 속도로 갔다. 즉, 우리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해서 빛을 따라가도 빛은 항상 우리에게서 빛의 속도로 멀어지는 것이었다. 빛은 평생 잡을 수 없던 것이다.
그 원리를 아인슈타인이 알아냈다. 우리는 공간상의 이동 뿐만 아니라 시간상의 이동을 같이 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때는 시간상의 이동만 하지만, 움직일 때는 시간상의 이동속도의 일부를 공간상의 이동으로 '떼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빛을 따라가면 시간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시간상의 속도가 공간에 떼어주게 됨으로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달려간다해도 빛은 빛의 속도로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될 것이다. 빛의 속도는 더해지지도 않고, 빼지지도 않으며, 30km/s로 언제나 불변으로, 빛의 속도에 근접하면 물체의 속도가 느려지게 된다. 이것이 '광속 불변의 원리'이며 상대성이론의 가장 큰 전제로, 이것이 부정되면 모든 상대성 이론은 무효로 돌아가게된다.
등속(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것)으로 빛의 속도에 가깝게 운동을 하는 상태에서 A와 B는 서로 '상대적'으로 시간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럼 빛의 속도에 근접하면 시간만 달라질까? 아니다. 길이도 감소하게된다. 길이는 로렌츠 수축 이라는 것을 하게된다. 간략히 말해, 로렌츠 수축이란 빛에 가까운 속도로 달리게 되면 그 달리는 방향으로 길이가 수축하게된다는 것이다.
빛의 속도로 갈수록 길이는 0으로 가게 된다. 시간도 역시 빛의 속도로 갈수록 시간이 0이 된다. 빛의 속도로 가속하기 위해 에너지를 공급하다보면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그 에너지가 질량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물체를 빛의 속도로 가속 하려고 할수록 질량이 계속 증가하고 그에따라 더 에너지를 공급해줘야하고 또다시 그게 질량이 늘어나고 해서 결론은 빛의 속도에 다다를 수 없게된다.
결론은 "상대적으로 운동하고있는 상대는 정지해 있는 상대보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이다.
이제 '일반상대성원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앞서 개략적으로 말한 바와 같이, 일반 상대성원리는 특수 상대성의 원리에 두 가지가 더해졌다고 보면 된다. 등가원리와 중력이론이다.
등가원리는 두 개의 기차를 예로 들어보자. 두 개의 기차가 똑같은 속도로 달린다. 그럼 승객들은 전혀 밖을 볼 수가 없다. 그러면 그 기차가 달리고 있는지, 정지해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알길이 전혀 없는 것이다. 만약에 기차가 속도를 내어 가속도 운동을 한다면 우리는 관성을 느끼고 관성력이 몸에 작용하여 몸이 쏠릴 것이다. "이것으로 달리고있다"라는 인식을 받을 수 있지만 등속일 때는 전혀 모른다. 즉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등속운동은 정지상태와 물리적으로 같으면 구분할 수 없다" 라고 결론짓게 된다.
"중력과 관성력은 구분할 수 없으며 동일하다."는 것이 등가원리인데, 이것이 왜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중요한지 생각해보면, 이 관성력을 바로 중력이라고 생각하게되기 때문이다. 즉, 기차 뒤에 커다란 태양이 있다고 생각하고 가속도 운동을 생각하지 않게되는 것이다. 등속운동과 가속운동을 모두 이야기하면 너무 어려우니, 아예 가속운동시 나타나는 관성력을 중력으로 치부하자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이론이라고 한다. 바로 중력에 대해 쓰여진 이론이기 때문이고, 중력이 곧 가속도운동 시에 관성력이기 때문이다.
곧이어,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중력이 곧 공간의 휘어짐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의 물리학자 존 휠러는 이것을 "물질은 공간의 곡률을 결정하고, 공간은 물질의 운동을 결정한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즉 태양주변에는 공간이 휘어져있다는 것이다. 질량이 있으면 중력도 존재하는데 이 중력이 곧 질량에의 한 공간의 휘어짐인 것이다.
이해가 안된다면 예를 들어보자. 물침대에 커다란 볼링공을 올려둔다. 그럼 볼링공을 중심으로 커다란 구덩이가 파이게된다. 그 구덩이에 탁구공을 올려두면 쪼르르르 굴러떨어져 볼링공에 부딫힌다. 이것이 중력인 것이다. 물침대는 공간, 볼링공은 태양, 탁구공은 지구로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탁구공을 바로 굴리지말고 그 구덩이에 대해 원운동을 하도록, 즉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처럼 탁구공을 굴려준다. 그럼 원운동시 원심력으로 인해 나가려는 힘과 침대시트가 휘어져 볼링공으로 굴러 떨어지려는 힘과 같아지며 계속 탁구공은 볼링공 주위를 돌게 될 것이다. 즉, 태양주위의 공간은 휘어져있고 여기로 지구가 굴러 떨어지려고하지만 돌고있기에 원심력도 있어 태양에 다가가지 않고 돌게되는 것이다. "중력은 곧 공간의 휘어짐이다!" 그것이 곧 중력이론이다.
자, 그럼 처음의 뉴턴의 중력이론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뉴턴은 중력이 도달하는데 속도가 무한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럼 상대성이론에선 속도가 무한이 아닌데 무언가가 잘못이라고 간주하게된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이 전해지는 시간이 빛의 속도라고 정의하게된다.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보자.
탁구공이 침대시트 위에 있다. 그런데 옆에 갑자기 볼링공을 놔두면 움푹파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움푹 파여지는 동안은 아직까지 탁구공은 가만히 있는다. 그리고 이 움푹파인 게 탁구공에 도달하는 순간 탁구공은 볼링공 쪽으로 굴러온다. 분명 시간이 걸린다. 침대시트가 구부러지는 시간, 즉 공간이 휘어져가는 시간이다. 이 시간이 중력이 전해지는 시간이며 즉 시간이 있으면 속도도 무한이 아닌 것이다. 역시 중력은 빛의 속도인 것이다. 즉 아까 맨위의 질문, "태양주위를 도는 지구가 있는데 태양이 사라지면 그 즉시 지구가 알고 궤도를 이탈할까?"라는 질문의 답변은 즉시 이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양이 사라지면 태양에 의해 휘어져있던 공간이 다시 펴진다. 그리고 지구에까지 펴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빛의 속도와 같고, 즉 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의 오는데 걸리는 시간 8분이므로 역시 중력도 8분 걸리며, 태양이 사라진지 8분 후에 지구가 태양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끼게되며 그제서야 궤도를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중력=빛의 속도'라는 개념이다.
그리고 가속도운동, 즉 중력이 있으면 시간이 역시 지연된다. 그러나 이때 시간이 지연되는 것은 아까 특수상대성이론의 등속운동처럼 서로가 시간이 지연되는 그런 상대지연이 아닌, 절대지연이다. 예를 들면 내가 블랙홀주변의 중력이 강한데 있다가 돌아오면 지구에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젊어지게된다. 시간이 느리게 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까 등속운동시는 서로의 기차 속에서의 시간이 느리게가는 '상대성'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럼 상대론의 유명한 쌍둥이 패러독스는 어떻게 될까? 만약 두 관찰자 사이에는 유한한 거리가 존재하며 이 거리를 핸드폰의 전자기파가 통과하는데 분명히 시간이 걸린다면, 이 시간 때문에 항상 두 관측자가 보기에 서로의 시간이 느리게 관찰된다. 즉 아무리 우주에서 빠른 빛을 이용해 통신을 해도 초속 30만킬로미터이고 두 관찰자 사이에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이 거리를 통과하려면 분명 시간이 걸리고 이 시간 차이 때문에 항상 두 관찰자는 서로가 시간이 느려진다. 실제로도 그렇게 관측된다.
그럼 이번에 반대로 서로 만나서 시간을 재보면 어떨까? 기차안에서, 밖에서 각자가 보기에 서로가 시간이 느려졌다. 그러면 이번에 통신도 안되니 두명이 한자리에 한번 만나본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누가 더 느리게 갔었는지 알수 있지 않은가? 바로 여기서 일반상대성이론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두 관찰자는 서로에 대해 등속운동을 하고 있었고, 서로 다시 만나려면 분명 한명 이상이 속도를 바꿔 상대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럼 한명 이상이 가속도운동을 했다는 것이 된다. 가속 운동을 했으면 관성력이 느껴지고 관성력은 곧 중력이고 중력에 의한 시간지연은 절대적인 것이므로 만났을 때 누구의 시간이 더 느린지 보게된다면, 만나려고 가속운동을 한사람이 결론적으로 시계가 더 느리게 가게 된다. 이것이 아인슈타인 일반상대성이론 하에서의 쌍둥이 패러독스의 해결이다.
그러면 상대성원리는 법칙(Theory)로으서 증명이 완료된 상태일까? 수성의 근일점 변화, 태양과 같이 큰 질량 주위를 지나가는 빛이 휘어져 간다는 관측들, 중력에 의한 적색편이, GPS의 적용실례, 중력 측정 위성-B(Gravity Probe B, GP-B)의 사례 등 현재까지의 모든 실험과 관측 결과는 일반상대성이론이 예측한 대로 질량 주변의 시공간이 휘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이 만족하지 못한 것은, 일반상대성이론이 예측한 중력파가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조용한 수면에 돌을 던지면 파동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공간의 급격한 변화가 만들어낸 시공간의 파동인 중력파가 빛의 속도로 퍼져 나가야 한다. 그러나 아직 중력파를 측정하려는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 상대성원리의 대전제인 광속불변의 원리가 빛보다 더 빠른 광자가 존재한다는 사실로서 깨어질 위기에 있으며, 상대성원리를 지원하는 여러 연구들(가령 방금 언급한 수성의 근일점 이동)이 실제로는 다른 원리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닌가하는 비판지점이 가능하게된 것이다. 사실 입자가속기로 아무리 빨리 돌려도 빛의 속도의 99.6%밖에 되지 않는 이상, 빛이 가장 빠르다는 것도 이론에 불과할 뿐이다.
종합하여 말하자면, 200년이나 지난 뒤에 뉴턴역학을 깨고 탄생한 양자역학에 의하면 입자의 양을 측정하여도 일정한 값이 얻어진다고 할 수 없기에 운동은 확률론적으로밖에 정해지지 않음을 보여주었으며, 아인슈타인의 저 유명한 상대성원리는 시간과 공간이 물질과 상호보완적 관계로 성립되어 있으며 상대적인 우주모델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깨지고, 새로운 우주론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아인슈타인의 이론과 반대되는 주장들을 펼칠 것이다.
3. 특수상대성원리를 넘어
아인슈타인의 논제: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물체인 빛은 매질이 없다. 빛의 속도는 30만 km/s로서(더 정확히는 29만9792㎞/s), 빛의 빠르기에 근접할수록 시간이 느려진다.
나의 가설: 빛의 매질은 에테르로 어디에나 퍼져 있다. 빛의 속도에는 제한이 있으나 에테르 자체에는 속도의 제한이 없다. 30 km/s의 빛보다 빠른 물질은 바로 인간의 '생각' 에너지이다.
- 앞으로 새로운 신과학적 패러다임을 제시함에 있어서, 우선 1931년도에 나온 <생명의 실상>이라는 책과 1950년에 출판된 <나의 UFO와의 접촉(My Contact with UFO>라는 책들을 인용했음을 언급해둔다. 왜 이렇게 이른 시기의 책들이 지금과 같은 첨단과학의 흐름을 비판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하면, 오히려 저 당시가 확정된 중력과 빛의 이론에 반대되는 이론들을 논하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부분적으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을 참조했다.
1) 에테르설
고전 물리학에 있어서 물질이라고 이름지었던 것의 개념은 일정한 공간적 용적을 점령하는 형상있는 것이었는데, 그 물질을 다루고 있었던 물리학이나 화학이 마침내 '물질이란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일종의 에너지가 형상으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정도까지 거의 실험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기 때문에, 재래의 유물론은 물질 과학 그 자신의 손에 의해 스스로 부숴지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양자역학적 세계관의 출현이다.
그러나 상대성원리 광속불변의 원리의 이론적 기반이 된 뢰머의 실험으로 부정되기에 이른 '에테르설'은 아직 연구가치가 충분한 것으로서, 속도에 제한이 없다는 생각은 그릇됬다는 것이 내 견해이다.
공중으로 16~20km쯤의 거리, 즉 지표에서 약 11km 이상인 성층권 정도의 높이로 올라가면 거기에는 이미 공기가 없는 것다. '공중'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그곳은 참으로 텅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천체에서 오는 빛의 파장이나 전기의 파장은 그 아무것도 없는 곳을 통과해 온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 전혀 없는 무는 아니다. 빛이나 전기를 전하기 위한 뭔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는 이 아무것도 없다고 보여지는 곳의 물질에 대해 에테르(ether)란 명칭을 붙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태양과 지구 사이의, 별과 별 사이의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는 빛도 없으니까, 완전히 암흑 상태이다. 그 공간에는 온도도 없으니까 매우 차다. 과학자가 측정한 바에 의하면, 화씨 온도계로 500도 남짓으로, 이 지상의 기온보다 찬 것(섭씨 영하 273도)이다. 우리들이 높은 산에 오르면 오를수록 온도가 낮아지는 것은 한랭한 진공권에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다.
공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까지도 빈틈없이 가득 차 있는 에테르라는 실질, 이것이 과학자가 발견한 가장 근본적인 실질인 것이다. 에테르는 공기 등의 이미 만들어진 물질과는 상당히 다른, 정말 공무한 것이다. 또 공기라면 이것을 종이 주머니에 넣어서 주머니 입구를 밀봉하고 그것을 밖에서 눌러 보면 잘 꺼지지 않는다. 그래서 정말 주머니 속에 공기가 있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것이지만, 우리들은 공기를 빼고 에테르를 종이 주머니에 넣고 이것을 눌러 보아도 아무 반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눌러 보아도 반응이 없는 그 속을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는 대단한 고속력으로 달리고 있어도 바람 하나 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니까, 이 에테르란 것은 어지간히 무에 자재한, 일정한 형상에 붙들리지 않는 실질이라고 할 수 있다.
공기는 이 점에 있어서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물질로서 나온 것이니까, 에테르와는 달라서 어지간히 자유로운 성질이 있다. 그것은 종이 주머니 속에 넣어지면 나올 수 없게 되든가, 또한 일정한 무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래로 내려가 고여 있어서 간신히 지구의 표면에 있을 뿐, 우주 전체에 퍼져 있을 수는 없다. 이 공기의 무게는 1평방척(약 30센티 평방은 0.02평방 미터)의 지상에 걸려 있는 용적만으로 1톤이나 된다는 것을 과학자들은 측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에테르로 말하자면 끝없는 하늘 높이 무한히 계속되어 있어서, 그 무게 즉 우리들이 받고 있는 압력은 대단히 클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에테르는 여기에서도 과학자들의 측정기에는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문제를 좀 더 정밀하게 논의해볼 수 있을 것인데, <나의 UFO와의 접촉>라는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살펴보도록 하자.
에테르는 찾지 못했고 찾을 수도 없었다. 빛의 속도에서 검출하려 했던, 에테르의 저항으로 인한 지연 효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에테르가 지구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두 천체가 같은 방향으로 동일한 속도를 낸다면, 똑같은 상대적 위치에 있게 된다. 시스템 밖의 관찰자에게 얼마만한 속도로 보이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똑같은 시스템 안에서의 두 점 간의 상대 속도에 관한 문제이다. 하나의 집단 M 은 어떤 속도로도 회전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집단 안의 두 점이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지 아닌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가장 간단한 예증으로 설명될 수 있다. 파리 한마리가 빠른 속도로 달리는 버스의 뒤에서 출발해 15초만에 앞으로 날아갔다고 쳐보자. 파리가 다시 뒤로 돌아가려면 15초 이상이 걸릴까? 아니다. 파리가 버스 안에서 날아다니기 때문에 시간은 똑같다.
그렇다. 같은 시간이 걸린다. 이제 한 사람이 뒤에 앉아 있고 또다른 사람이 앞에 앉아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한명이 공을 던지면 다른 한명이 그 공을 되받아 던진다고 쳐본다. 공이 매번 같은 속도로 던져진다면, 오가는 게 걸리는 시간이 같을 것이다. 버스의 속도는 외부적인 것이며, 즉 버스 밖의 지점들과 관련된 것이다. 버스 안에서는 속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마이켈슨도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실험을 풀어나가야 했다. 빛은 속도의 변화 없이 버스 안을 오가는 공과 같은 것이다. 공이 버스 안의 공기에 관련돼 어떠한 지연도 일으키지 않은 것처럼, 빛도 마찬가지이다. 버스가 광속으로 이동할 때 공의 속도가 변화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안에 공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그러나 마이켈슨은 비난 받을 이유가 없다. 비난은 에테르가 절대적이고 지구에 대해 정지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그릇된 전제 위에선, 누구라도 똑같이 잘못된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삼단논법의 소전제가 그릇되면, 결론도 틀려진다. 대전제가 연관됐을 때 그런 것처 말이다. 잘못된 이론들은 틀린 결과들을 양산한다. 그 실험에 관한 한 그것은 잘못된 전제였고, 그러한 오류를 토대로 사람들이 전체적인 이론을 공들여 쌓아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의 원리들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마이켈슨은 빛의 속도인 상수를 발견했다. 이 상수가 맞을까? 아니다. 만일 그가 에테르로부터 어떠한 빛의 지연 효과도 발견할 수 없었다면, 그 이유는:
(1) 내부의 모든 점들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에서는 지연이 일어나지 않는다.
(2) 매질이 균등했다.
(3) 측정의 근거가 너무 작았다. (12 야드)
(4) 매질의 저항으로 인한 빛의 지연은 공기나 물 같은 두개의 서로 다른 매질을 비교함으로써 찾아내려 해야 한다.
(5) 빛은 초속 186,000 마일의 속도를 가질 경우에만 보인다.
(3의 얘기는 원리상 지연효과를 찾아낼 수는 없지만, 실험 조건을 변화시키면 약간의 효과가 검출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골렘>이란 책에 그러한 효과가 실험을 통해 검출됐음을 밝힌 내용이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마이켈슨이 찾아내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던 저항은 빛을 반사하는 거울에서 발견될 것이다. 왜냐하면 저항이 장애물, 즉 이 경우엔 거울의 반사의 과정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물에서는 빛의 일부가 흡수되기 때문에 반사가 절대로 완전하지 못하다. 이것은 거기에 압력과 저항, 흡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달을 보면 우리는 이 반사광이 부드럽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경우 가시광의 일부가 낮은 주파수대로 떨어져 장벽에 의한 저항 때문에 보이지 않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빛이라 부르는 것에 달려 있다. 당신에겐 어둠인 것이 나에겐 빛으로 넘쳐나는 것일 수 있다. 안구나 시신경에 가해지는 단일 압력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또다른 주파수 대역을 보는 동물 종들이 있는데 그들에겐 밤이 낮이고 낮이 밤이다. 적외선은 안 보이는 빛의 한 형태로, 속도가 가시광보다 많이 느리다. 화학선 또는 자외선은 안보이는 빛이지만 주파수가 높기 때문에 가시광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이동한다. 속도는 주파수 곱하기 파장이다.
우리는 대기와 물 속에서의 광속의 차이에서 똑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대기 중에서의 186,000 마일과는 대조적으로 물에서는 광속이 초속 140,000 밖에 안된다. 그러므로 농도는 속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지구표면에 닿을 때 보이는 빛은 초속 6,250,000 마일의 속도로 지구의 에테르 외피에 닿는다. 그리고 지표면에 닿을 때 가시광선의 스펙트럼을 넘는 빛은 훨씬 더 높은 속도로 에테르에 닿는 것이다. 태양이 다양한 파장과 서로 다른 주파수들로 에너지를 방사하기 때문이다. 태양의 방사는 결코 균일하지 않다.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올라프 뢰머는 빛이 지구 궤도의 지름에 해당하는 거리를 지날 때 특정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에 주목했었다. 이에 근거해 광속이 초속 186,000 마일이란 점을 계산해냈고, 다른 실험들에 의해 얻어진 결과들과 부합됐다. 그런데 사실 뢰머는 목성에서 200일을 주기로 두 차례의 월식을 관찰했다. 이 동안에 태양은 대략 궤도의 절반을 돌았고 원래 위치에서 6,125,000 마일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태양 위치의 이런 변화가 월식을 다른 시간에 일어나도록 했던 것이다.
만일 위성의 한 지점이 목성에 그림자를 드리웠다면, 200일 동안의 태양 위치의 변동이 그림자의 위치에 몇마일의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만일 위성이 목성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서 공전을 한다면, 이는 월식의 시간 동안 대략 1,000 초의 정도 명백한 지연을 일으킬 것이다. 행성으로부터 위성까지의 거리에 따라서 말이다. 이 말의 뜻은 그러니까, 월식이 예고된 시점에서 위성은 여전히 1,000 초 정도 가야할 거리를 남겨놓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뢰머의 계산이 틀렸던 이유이다.
두번째로, 목성이 지구에서 보여지는 각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월식의 정확한 시간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 행성이 그 시간에 얼마나 멀리 이동했는지를 알 수 있고, 그럼으로써 계산을 정확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월식이 목성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진 시간에 일어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관찰의 각도에 따라 상대적인 지연의 효과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관찰자의 지점으로부터 상상의 선을 그어 두 천체(목성과 위성)와 접선의 지점에서 만날 수 있도록 배열을 해본다. 이 위치에서 천체들을 움직인다면, 선 또한 움직인다. 이 경우 천체 중의 하나가 상상의 선과 접선에서 만나려면 다시 움직여야만 한다. 이것이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결국 모르고 지나쳤을 두번째 요인이다.
뢰머는 이러한 현상들 중 하나로 인해 계산 상의 실수를 저질렀을 수 있다. 어떤 것이든 착오를 일으켰을 것이다.
빛에도 속도가 있다는 갈릴레오의 주장에 입각해, 뢰머는 빛이 지구 궤도의 지름을 가로지르느라 시간이 걸린 나머지 이 지연이 일어난 게 틀림 없다고 추정했다. (이 당시 사람들은 빛이 무한하게 빨라 먼 곳에서 지구로 날아오는 데 시간이 전혀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뢰머는 빛의 이동에는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한 갈릴레오의 견해에 동조했던 것이다.)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도는 궤도의 지름을 3억 킬로미터로 잡고, 지연된 시간인 1,000 초로 나눈 뒤 빛의 속도가 초당 300,000 km.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어떤 경우든, 시간의 지연은 확실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빛의 속도 때문이 아니라, 삼각법으로 명확히 설명될 수 있는 시각적 효과 때문인 것이다.
빛이 공간을 이동할 때 특정한 속도를 가진다는 것을 우리가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뢰머의 시대 이후 많은 연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수정하지 못했던 그릇된 억측을 바로잡으려는 것이다.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 설마 삼각법의 오류를 저질렀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그가 무오류의 과학자로 간주되는 경우에 말이다. 바르건 틀리건 사람들은 그의 결론을 받아들였다.
뢰머의 추론은 그릇된 것인데, 상대성이론이 과연 뢰머의 추론 없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광속은 모든 물리학 이론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계산이 절대적으로 맞다고 단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월식의 시각은 행성이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앞당겨질 수도 혹은 미뤄질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건 광속과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이 책은 빛의 속도는 상황에 따라 다르되, 빛의 매질인 에테르는 시간의 차이 없이 즉각적으로 전달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광속불변원리의 기초가 되었던, 더 자세한 뢰머의 실험들에 대한 방법론적 문제들에 대한 수학적 검증방법은 다음의 웹사이트에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http://kimmo99.com/tr/m1/u/u7.htm
이상의 글을 요약하자면,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할 증거는 없으며 빛의 속도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뢰머의 그릇된 광속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영향을 끼쳤고, 상대성이론은 현대 물리학의 주요 패러다임이 되었다. 아인슈타인과 동시대에 플랑크는 흑체의 복사를 관찰하면서 빛의 파동이론으로는 그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에너지의 불연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론을 만들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받아들였던 과학자들은 시간과 공간에 종속되지 않는 신(에테르)의 개념을 상상할 수 없었으므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선호했을 것이다. 간명하게 말해 이것이 유물론적 과학에 깔린 논거이다.
그러나 나는 빛의 속도에는 제한이 있되, 에테르는 공간을 무한의 속도로 이동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지구가 궤도의 어느 부분에 존재하더라도, 별빛은 항상 그 앞에 존재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구가 그것에 이르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빛이 우주를 가로질러 전달될 때 어떠한 지연도 있을 수 없다는 건 의문의 여지가 없다. 가시광선이 공간 속을 초속 186,000 마일(제곱하면 빛의 속도인 30만 km/s가 된다)로 이동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 속도가 다른 주파수 대의 파동에도 적용된다고 말한다면 그건 틀린 말이 된다.
우리는 이 문제의 특정 양상을 고려해야 한다. 파동이 전파되려면 그들의 주파수와 파장에 적합한 매질이 필요하다. 적외선은 진공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밀도가 높은 매질을 필요로 한다. 가시광선은 반-진공 속을 이동할 수 있고, 밀도가 높은 매질에서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적외선 만큼은 아니다. 완전 진공에서는 빛이 전파되지 않는다. 가이슬러관에서도 관 속의 압력이 매우 낮을 때, 빛이 그림자를 드리우기를 멈추는 것이 관찰된다. 그러나 진공은 가시광선보다 주파수가 높은 파동이 전파되는 데 이상적인 매질이다. 이 모든 것의 매질이 에테르이다.
지구 표면에 도달하는 빛은 조절이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화학선이 생명체를 파괴할 것이다. 이것을 <생명의 지혜>라는 책에서는 '신의 지혜'라고 표현한다. 태양 근처의 행성들에겐 짙은 대기와 에테르를 입혀 보호를 하고, 거리가 멀고 회전 속도가 낮은 행성들에겐 엷은 외피를 준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는 빛과 에테르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시간지연 현상과 특정 속도의 광속은 분명 존재하고 또 그렇게 관측이 되나, 모든 주파수와 파장의 매질이 되는 에테르 자체는 무한하다.
빛보다 빠른 물질이 검출되었다는 연구들이 세계 유수의 대학과 연구진에 의해 발견된 바, 우리는 제한된 속도를 가진 빛 이론을 넘어 동시에 편재할 수 있는 에테르 이론이 좀 더 우수한 이론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에테르설을 적용하면, 신(에테르)은 모든 존재들의 교차점으로서, 부정수로 대치한다면 무한대와 동일하다.
2) 빛보다 더 빠른 입자
만약 CERN이 실시한 근래의 연구처럼, 상대성원리의 기반이 되는 광속도불변의 원리가 깨어진다면, 시간여행도 불가능한 이론이 된다. 그러나 상대성원리가 옳다고 가정해도(즉 이론상으로 시공간이 휘어져 있다고 가정해도) 시간여행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질량에너지 동등성(E=Mc^2)의 공식에 따라 아무리 작은 질량을 가진 입자라도 빛의 속도로 가속시키면 그 질량이 무한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중우주론을 믿는다면 과거로 되돌아 갈 수는 없을지언정, 매순간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른다. 빛보다 더 빠르다는 신의 입자, 즉 '힉스온'으로 불리는 타키온을 통해 말이다. 그 타키온은 바로 우리 뇌 속에 위치해 있다.
타키온에 대해 언급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글을 읽어보자.
의식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전위적인 이론들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프랑스 푸아티에 의과 대학 물리학 교수였던 레지스 뒤테유의 이론이다. 이 연구자가 전개한 이 이론의 요체는 미국 물리학자 페인버그의 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뒤테유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는 구성요소의 운동 속도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우리가 살고 있는 <하광속계>.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으로 대표되는 고전 물리학의 원리를 따르는 세계다. 이 세계는 브라디온 즉, 빛의 속도보다 느리게 운동하는 입자들로 구성되어있다. 둘째는 <광속계>다. 이 세계는 광속에 근접하거나 도달한 룩손이라는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지배된다. 끝으로 <초광속계>가 있다. 이 세계는 빛의 속도보다 빠른 타키온이라는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
레지스 뒤테유의 이론에 따르면, 세계의 이 세가지 유형은 인간 의식의 세 수준에 대응한다. 첫째는 물질을 지각하는 오감의 수준이고, 둘째는 광속 사고 즉, 생각이 빛의 속도로 이루어지는 현세적 의식의 수준이며, 그 다음은 생각이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돌아가는 초의식의 수준이다. 뒤테유는 우리가 꿈이나 명상을 통해서, 또는 어떤 마약들을 사용함으로써 초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깨달음>이라는 더 넓은 개념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우주의 원리에 고나한 진정한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 의식의 속도가 빨라져 타키온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뒤테유의 생각대로라면, <초광속계에 살고 있는 존재에게는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완전히 한 순간으로 통합될 수 있다>. 그리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관념들은 하나로 융화하여 사라진다. 그는 데이비드 봄의 연구를 받아들여, 우리가 죽는 순간 우리의 의식은 육신에서 빠져나가 초의식이 되고, 우리가 살던 세계보다 진화된 다른 차원의 세계 즉, 타키온의 시공간에 합류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무렵에 딸 브리지트의 도움을 받아 훨씬 대담한 이론을 발표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초광속의 차원에서는 우리의 전생과 내생이 모두 현생과 동시에 전개된다고 한다.
그러나 레지스 뒤테유 이론의 문제점이라면, 그가 뉴턴 역학과 상대성 원리를 영적 철학과 꿰어맞춘 느낌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집단무의식에 대한 양자물리학 실험(어미 쥐와 자식 쥐를 먼 곳에 떼어놓고, 자식 쥐를 죽였을 때 어미 쥐가 반응하는 불가사의한 현상같은 것들)들은 우리의 뇌파가 하나로 이어져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제공하며, 그 빠르기는 빛의 속도를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상, 이 우주에서 제일 빠른 차원의 빠르기는 바로 우리 생각으로서, 우리가 빠른 진동수로 생각을 하여 특정 파장의 파동대에 공명을 하면 '깨달음'의 세계에 접속될 수 있다는 것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비슷한 가설로서, 일부 물리학자들은 타키온 즉 소립자보다 작은 입자들의 활동이 시간을 주관한다고 말한다. 이 타키온입자가 인간의 외부로 흘러나와서 공간의 시간흐름을 방해하여 늙지 않는다면, 인간의 뇌파가 이 타키온을 생성해서 장수한다면 도가에서 말하는 신선같이 수련을 통해 몸을 장생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동양에서 예로부터 몸의 중심인 단전이란 곳에 이런 입자에너지가 정신파동에 의해 형성되어서 상상할 수 없는 생체전류을 발생시킨다는 것이 입증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에테르설과 타키온 입자의 초(超)속도는 우주에 대한 단일신론적 모델에 좀 더 부합하며, 동양의 영적 전통과 양립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논의가 옳다면 우리는 우주 만물을 주관하는 신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신은 무한한 점에서 포개져 진동하는 명령으로, 끊임없이 공간의 변형을 일으키며 자동적으로 에너지와 물질을 창조한다. 마치 에테르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빛이 존재하지 않듯,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사물도 자동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4. 일반상대성원리를 넘어
아인슈타인의 논제: 우주에서 중력이란 행성들의 질량차에 따른 휘어짐(곡률의 변화)이다. 우주는 기본적으로 균일하고 정적이다.
나의 가설: 우리가 알던 중력이란 단일한 법칙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밸런스를 유지하기 복합적 에너지의 작용이다.
일반 상대성원리에 따르면, 우주에는 중력에 의한 끌어당김의 힘이 있고(그림에서의 2번), 각 행성들 간의 원심력의 힘(그림에서의 1번)이 있어 중력의 영향보다 작은 직선운동에너지를 가진 행성은 그대로 태양에 끌려 들어가며 녹아버렸을 것이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태양계가 안정되면서 태양의 중력과 정확히 상쇄할만큼의 직선운동 에너지를 가진 행성만이 존재하게 되었고, 이들이 현재의 공전궤도를 이루면서 태양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력법칙은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거대한 착각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만유인력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만유인력이 중력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중력 자체는 사실 복합적인 힘의 총체일 가능성이 더 높다.
지구역사를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원심력은 태양계를 파괴시키고도 남을 수준인데, 그와 비슷하게 상쇄되어야할 지구의 중력은 지난 6,000년간 비슷한 세기를 가졌다고 생각해볼 때, 많은 아이러니가 남는다. 태양계를 파괴시킬 정도의 원심력을 상쇄시키려면 지구중력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야되나, 현실은 지구중력은 증가하지 않고 비슷한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유인력의 힘의 세기는 정해져 있으며, 지구에 축적되는 원심력은 만유인력을 한참 초월한다. 당연히 만유인력을 초월한 원심력이 축적된 지구는 폭발해야 정상이다. 지구가 폭발하지 않으려면 만유인력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야한다. 그러나 만유인력은 증가하지 않고 현상유지를 하는 것이 미스테리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원심력, 그리고 중력에 대한 개념 자체가 근본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과학자 에릭 페를린더 교수도 물리학자들이 중력에 대한 접근방식이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중력은 전자기력, 핵력, 약력과 함께 우주를 지배하는 4가지 힘의 하나이지만 다른 힘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생겼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물리학에서는 만물을 구성하는 소립자들이 모든 힘의 성질을 규명하며 중력 역시 '중력자'라는 입자의 역할 때문에 생긴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중력은 다른 힘에 적용되는 수식들이 대부분 들어맞지 않는다. 또 다른 힘을 결정하는 소립자들이 가속기에서 검출되고 있는 데 비해 중력자는 여전히 가설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중력을 다른 힘들과 연결짓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력에 대한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는 뉴턴법칙이나 이를 보완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중력의 변화와 작용에 대해서만 설명할 뿐 중력이 어떻게 발생하느냐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에 에릭 페를린더 교수는 300년 넘게 물리학을 지배해 온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조차 설명하지 못한 중력의 근원에 도전하는 학설을 내놓았다. 그의 논문 '중력의 기원과 뉴턴법칙'는 많은 논란을 촉발시켰다. 무엇보다 페를린더 교수는 그냥 그저 그런 과학자도 아니고, 1980년대 '우주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는 소립자나 쿼크 같은 구형이 아닌 끊임없이 진동하는 끈’이라는 초끈이론의 주요 난제를 풀어낸 세계적 물리학자다.
페를린더 교수는 다른 힘들이 물질 자체에 들어 있는 입자로 인해 발생하는 것과 달리 중력은 질량, 시간, 공간 등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부수적인 힘으로 봤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열역학의 '엔트로피(물질계의 열적 상태)' 개념을 도입했다. 어떤 물질 사이에 중력이 생기는 이유는 무질서한 흐름 속에서 자연이 평형을 유지하려고 움직이기 때문이며, 우주가 평형을 유지할 확률보다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무질서해질 가능성이 월등히 높기 때문에 중력이 계속 발생한다는 것이다. 리 스몰린 미 이론물리연구소 박사는 '전혀 새로운 시각의 접근이며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고 평가했다.
반면 상대성이론 전문가인 스탠리 데서 브렌데이스대 교수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며 우리의 모든 믿음에 도전하는 폭탄 같은 이론"이라고 말했다. 이필진 한국고등과학원 교수는 "이 논문은 미세한 물질 간의 관계에서 뉴턴법칙을 보완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페를린더 교수의 새 중력이론의 문제점은 그것이 용감하게 뉴턴-아인슈타인 패러다임을 부정하는 데에 이르르긴 했어도, 여전히 중력 자체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지칭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아직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가 말한 '밸런스의 작용'이라는 점은 중력에 있어서 분명 훌륭한 접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동양철학이 중요시하는 음양의 조화와도 관련이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의 UFO와의 접촉>이라는 책에서도 아주 흥미로운 중력 이론을 소개한다. 그것은 페를린더 교수의 새 중력 이론과 상응하는 바가 크다. 다음의 내용을 믿든지 말든지는 자유이다. 그러나 새과학의 사조로서, 분명히 일독할만한 가치가 크고 대단히 논리적이다. 지금 현재의 과학계의 사조는 수학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것들은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다보니니 많은 훌륭한 아이디어들이 단지 수학적 증거제시에 능통하지 못한 사람이 창안했다는 이유만으로 묵살돼 왔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세상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이 많은데도 이러한 형태가 연구와 발견을 하려는 시도를 죽이고 있다. 그럼 계속해서, 이 책의 논거를 요약해본다.
지구가 자전을 하는 이유는 중력 때문이 아니라, 지구에 한쪽 면은 햇빛을 받고 다른 면은 어둠 속에 있으므로 힘의 차이에 의해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게 된다. 대기권 밖은 진공에 가까울 정도로 기압이 낮다.
빅뱅은 세가지 이유로 행성들의 압축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다.
1) 이 운동은 거대한 하나의 자기장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서, 내부의 압력이 사라지도록 만든다.
2) 성운이 서로 멀어져 가면서, 자기장 안에서의 질량순환법칙에 따라 물질로 변화했던 공간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는 물질의 응축에 사용됐던 에너지를 빛으로 변환시키는데, 빛의 파동 에너지는 엔트로피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감소를 거듭한다.
3) 빛은 자기장에 반발한다. 다양한 은하계의 무수한 태양들로부터 쏟아지는 빛은 성운에 엄청난 양의 반발력을 일으킨다. 이러한 압력으로 인해 그들은 서로에게서 멀어져가는 것이지, '중력'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에 신이 공간의 변형을 유발하는 힘을 제공하고, 태양은 반대되는 과정에 의해 그것을 에너지로 돌려놓는다. 다시 균형이 이뤄지는 것이다. 만물은 신으로부터 나와서 다시 신으로 돌아간다. 왜 물질과 에너지가 존재하지 않는지, 오로지 변형된 공간만이 있을 뿐이며 물질과 에너지라 불리는 기술은 원래의 공간과 변형된 공간 사이의 전이 현상일 뿐이란 점이 이로써 설명되는 것이다.
지구의 궤도운동은 그것의 회전의 결과이다. 그러나 부분적인 것은, 그것이 태양과 관련해 검토돼야할 사항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지구의 과학은 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은하계는 광대한 자기장이지만, 자기장은 그 안에 2차적인 장들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구는 태양계 내부의 자기장이지만, 태양계도 은하계 안의 한 자기장인 것이다. 양극을 갖춘 지구도 그 안에 종속적인 장들을 갖고 있는 것이다. 허셜과 뉴턴이 700대 1이라는 행성들과 태양 질량의 상대적 비율로 인해 태양으로부터 그 직경의 세배 되는 곳에 태양계의 평형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태양과 그밖의 행성들이 돌아가는 자기장의 존재를 수학적으로 입증했던 것이다.
태양은 이 평형점 주변을 돌고 있다. 물질이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며 또다른 물질을 끌어당긴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원자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물질은 떨어져있는 또 다른 물질에 아무 영향도 못 미친다. 그러나 자기장들은 서로 당기거나 밀어낸다. 그리고 물질은 자기장에 끌려갈 수 있다. 끌어당기는 힘이 태양계 평형점으로부터 지구에 가해지고 있는데 우리는 그 평형점을 '포인트 제로'로 부를 수 있다. 이 점에 의해 끌리는 동안 지구는 태양빛에 의해 밀리기도 한다. 태양 주변의 지구 궤도는 이러한 끌어당김과 밀어냄의 두 작용 간의 균형을 나타낸다. 성운들을 팽창시키는 것과 똑같은 종류의 힘이 지구와 그밖의 다른 행성들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빛의 무게가 아직 측정되지 않았다. 그게 물질에 끝없이 가해지는 압력이 아니고 뭐겠는가. 만일 태양이 인력을 일으킨다면 태양의 빛은 무게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이다. 척력이 오직 원심력에 의해서만 생겨난다면 행성은 인력의 근원을 향해 서서히 나선형을 그리며 접근하게 된다.
그러므로 행성의 회전은 태양으로부터 행성의 거리와, 태양에 드러내는 전체 지름, 질량과, 표면에 그들의 빛을 뿜어대는 위성들의 결과이다. 이는 또한 북극광을 포함하는데 북극광의 강도는 자기장의 극과 지정학적 극의 근접에 기인한다.
빛이 물질을 밀어낸다는 다른 확실한 근거들이 몇 가지가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 혜성은 태양에 근접하면서 납작해진다.
(2) 빛은 자기장과 접촉하면 굴절된다(질량에 의해 굴절되는 게 아니다). 전자 또한 자기장을 지나치면서 굴절된다.
(3) 목성은 태양에 가장 근접할 때 압력이 가해져 원래 위치에서 벗어난다.
(4) 빛은 무게를 지니고 있고 마찰을 일으키다.
(5) 태양빛은 기압계 상의 압력을 일으킨다.
(6) 행성들은 태양과 가장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속도가 느려진다.
(7) 태양광의 압력은 수성을 태양으로부터 2천 3백만 킬로 떨어진 곳으로 밀어낸다.
달은 에테르 외피의 가장자리 안에 놓여 있게 되고, 그것과 연결된 다양한 현상들이 이 외피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 에테르 외피는 받침점 역할을 하는데, 인력과 척력의 두 상반된 힘이 그로 인해 지구에 작용할 수 있게 된다. 자전을 일으키는 것과 똑같은 힘이 공전을 일으킨다. 지구의 경우 자전력이 축으로부터 6,378 km.의 거리에 있는 지표면에 전달되는데, 공간상의 실질적인 회전 효과는 축으로부터 407,200 km. 에 이르며, 그 지점에서 에테르 외피의 표면은 시속 106,000 km.에 이른다.
따라서 우리는 왜 부피가 큰 행성들이 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태양으로부터의 거리와 그 행성들의 부피를 주목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진정한 밀도와 행성 극점의 자기력을 알아낼 수 있다. 목성은 농도가 낮고 큰 지름을 갖고 있으며, 인력보다 척력의 지배를 더 받는다. 만일 정말 물체가 질량에 비례해 물체를 당긴다면, 지구보다 부피가 1,330배 크고 질량이 331배인 목성은 지구보다 태양에 훨씬 가깝게 있어야 한다.
과학에서 말하는 중력은 우선 물체의 밀도와 온도에 관련된 문제이다. 예를 들어, 담배 연기는 주변 공기보다 무겁다. 하지만 따뜻하기 때문에 위로 올라간다. 말하자면 밀도의 차이가 연기의 온도에 의해 보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밀도와 온도, 두 요인들이 이 현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수소 가스로 가득 찬 풍선은 가스의 부피로 인해 위로 뜬다. 헬륨으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말하자면, 낮은 밀도의 물체들은 언제나 상승하는 경향이 있고, 같은 원리로 물과 기름도 밀도에 의해 분리가 된다. 중력은 낮은 밀도의 물체가 상승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밀도가 낮은 공기 속에서 무거운 물체는 빠르게 낙하하는 반면, 공기보다 밀도가 높은 물 속에선 천천히 가라앉는다.
중력에 영향을 미치는 세번째 요인은 행성을 둘러싼 대기와 에테르의 양이다. 그러나 이것은 밀도라는 요인에 포함될 수 있다. 가스층의 범위와 대기의 밀도에 대한 지식 없이 행성에 크고 낮은 중력을 부여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를 들면 토성엔 대기가 없기 때문에 중력이 제로에 해당된다. 매우 희박한 대기를 갖고 있는 목성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물체는 높은 가속도로 낙하를 해 행성의 낮은 밀도와 충돌한다. 그러나 수성은 에테르 외피가 60만 킬로에 이르기 때문에 대기압이 높고 중력도 엄청난다.
중력에 영향을 미치는 네번째 요인은 자기의 수직적 성분이다. 그러나 그것이 물체에 가하는 인력은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물체마다 똑같다. 그렇기 때문에 진공 속 물체의 낙하 속도가 일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력은 질량 때문이 아니라 모든 물체에 똑같이 부여되는 자기작용으로 인해 생긴다.
마지막으로 우주에 압력을 가하고 우리의 은하계들을 관통하는 에너지가 있다. 지구가 항상 한쪽 면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물체는 모든 방향으로부터 압력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물체는 그것에 작용하는 힘의 차이를 느끼며 지구의 표면으로 낙하하게 된다.
뉴튼이 사과가 떨어지는 걸 봤을 때, 그 순간 그는 신적인 존재가 우주에 미치는 영향을 목격했던 것이다. 중력은 다양한 현상들의 결합이지 단일한 힘이 아니다. 열이 중력에 영향을 끼치는 이유는 물체의 자력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자석에 열을 가하면 자력이 사라진다. 물질이 정상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열이 물질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이다. 물질은 정상파들의 주파수를 증가시킴으로써 빛을 방출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열이 물체의 밀도를 감소시킨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상승하게 된다. 이는 끓는 물의 경우 가장 잘 관찰된다. 더운 물은 찬 물보다 위에 있으려고 하면서 대류현상이 생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열은 그 자체로 중력 현상을 일으키는 힘이 아니라, 자기작용과 밀도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중력을 좌우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상대성이론은 분명히 그릇된 요인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 요인들은 나름대로 합리적이라 불릴 수도 있지만, 자연은 그것들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두 개의 광선이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면 한쪽에 대한 다른 쪽의 상대 속도는 제로이지만, 두 광선이 반대되는 방향으로 날아간다면, 상대속도는 2V가 된다는 게 기존의 역학 이론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의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두 개의 빛이 어떤 방향으로 날아가건 상대속도는 늘 V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원리가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많은 상상력이 필요치 않는다. 이 오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좀더 큰 오류를 고안해냈다. 고유한 공간과 시간을 각각의 움직이는 물체에 -그 속도에 따라- 기인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오류가 인류를 좀더 큰 오류로 인도했듯이, 그는 두번째 오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세번째 아이디어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는 우주를 우리에게 특정한 공간으로 간주하며 한계를 그었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이 상상해낸 울타리를 무시한다. 우리가 만든 독특한 이론과 관점에 자연이 부응해주길 바라는 우리의 욕망 또한 자연은 무시를 한다. 시종일관 자연은 해밀턴의 원리나 인류가 수학공식에 부여하는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간단히 말해,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영역은 너무 좁아 자연의 무한함을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간은 분할할 수 없으며 시간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단지 별들의 운동에 기반을 둔 협정일 뿐이다. 일종의 결과일 뿐인 것이다.
물체의 운동 또는 질량의 가속이 힘에 의한 것이라면, 시간은 힘의 결과이며 힘이 그 원인이 된다. 그러나 만일 힘이 변화하고 소진된다면, 시간도 그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공간이 상수라면, 시간-공간을 하나의 차원으로 간주하는 것은 둘째 치고, 시간-공간이란 상수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 건지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는 자연이 이러한 것들을 무시하는 하나의 사례이다. 만일 두 차원을 합쳐 면을 얻을 수 있고, 면을 높게 포개 부피를 얻을 수 있다면, 이 부피들을 4차원으로 포개놓을 때 우리는 오직 넌센스를 얻을 뿐이다. 우주에서 물체는 4차원이나 3,2, 혹은 1차원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무한한 공간은 차원이란 걸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물체가 A에서 B로 움직일 때 압력의 방향을 따른다는 정도로만 말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움직이는 물체가 그 자신만의 시간을 가진다고 말한 점에 있어선 옳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구를 떠날 때 관례적으로 지구의 시간이라 알려진 것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는 틀렸다. 시간은 움직이는 천체가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데 걸리는 기간에 바탕을 두고 있고, 따라서 순환적인 운동의 결과이다. 그는 운동하는 모든 물체가 그 자신만의 고유한 공간을 생성한다고 가정함으로써 한층 더한 실수를 저질렀다.
에딩턴 등에 의해 1919년 5월 29일 일식 도중 관찰된 빛의 휘어짐 또한 그러하다. 빛의 휘어짐은 태양 질량의 작용 때문이 아니라, 태양 근처에 위치한 태양계의 자기 중심 때문이다. 솔레노이드 안에서조차 당신은 전자의 흐름이 자기장에 의해 휘어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여기엔 새로운 사실이 아무 것도 없다. 빛이 질량 가까이 지날 때 휘어진다면, 이 현상은 행성 근처에서, 말하자면 화성이 지구에 가까이 있을 때 명백하게 관찰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월식은 그러한 관찰을 하는 데 가장 좋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휘어짐은 오직 태양계의 자기 중심이 있는 곳에서만 발견되었을 뿐이다. 에너지와 자력 사이의 반발이 없었다면 모터가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빛은 자기 중심에 의해 휘어지고 태양 주변으로 커브를 그린다. 만일 당신이 적절한 장비만 갖춘다면 빛이 자기 중심의 반대 편으로도 휘어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빛이 태양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공간의 구부러짐은 반과학적이란 것을 말하고 싶다. 원초적인 공간은 어떤 것에도 상관되어 있지 않으며 어떠한 형태도 갖고 있지 않는다. 곡선도 직선도 아니고 차원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모든 방향으로 무한한 공간일 뿐이다. 관찰자가 어디에 위치하더라도, 그 앞에는 무한한 우주가 놓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중력이 행성을 둘러싼 에테르의 양에도 영향을 받는다고도 말을 했었다. 공기의 무게가 해수면에서 수은주 76 cm 에 해당한다면 고도 10 m 마다 수은주가 약 1 mm 씩 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체가 받는 압력을 밀도의 작용으로 간주해야 한다. 대기압이 낮아질수록 무게가 덜 나간다. 만일 중력이 그 자체로 고유한 힘이고 우주의 천체를 지탱하는 힘이라면, 어째서 유성이 궤도 속에서 유지되는지를 설명하기 곤란하다. 매년 지구는 항상 같은 시기에 수백만개의 유성들과 충돌한다. 이는 유성이 하나의 장소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중력의 법칙이 존재한다면 유성들은 모두 지구를 향해 날아오거나 아니면 그 전에 이미 태양에 끌려갔어야 한다.
그러나 에테르를 뚫는데 성공한 유성들은 지구로 떨어지고 나머지는 같은 자리에 남는다. 그 유성들은 태양계 중심의 자기인력과 태양의 척력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중력이 존재한다면 태양의 인력도 있어야 하는데 둘다 존재하지 않는다.
논의를 위해 중력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만일 진공 속의 모든 물체가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면, 그들의 질량과 비례해서 물체가 물체를 당긴다는 얘기는, 최소한 물체가 진공 속에 있지 않다면, 사실일 수 없다. 만일 그러한 전제(질량에 비례해 서로 당긴다고 하는)가 무너진다면, 천체 사이에 진공이 존재한다고 봤을 때, 태양의 중력이-만일 존재한다면- 질량에 상관 없이 모든 천체들을 동등하게 끌어당겨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모든 지구의 천문학은 천체의 질량과 서로간의 거리에 기반해 있다. 지구의 과학은 용어를 뒤섞어 왔다. 그들에게는 지구의 궤도를 유지하고 회전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힘이 태양의 인력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계산을 이것에 기초해 수행했다.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태양은 지구에 척력을 가한다. 더욱이 천체가 한가지 힘으로는 궤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게 명백했으므로, 그들은 원심력에 기적적인 능력을 부여했다. 원심력이 행성들을 궤도 상에 묶어두는 두번째 힘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이보다 진실과 거리가 먼 얘기는 없을 것이다.
원심력은 그런 역할을 하지도 않지만 설사 그렇다쳐도, 이러한 이론이 명백히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행성을 특정 방향으로 추진하는 힘이 바로 그것인데, 과학자들은 행성이 당겨지고 있고 원심력이 그러한 끌림을 상쇄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제3의 힘이 행성을 움직인다는 사실은 지나치고 있다. 줄 끝에 돌을 달아 돌릴 때, 줄은 인력, 원심력은 척력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줄을 붙잡고 돌에 회전방향을 부여하는 사람이 제3의 힘 역할을 하는 것이다.
If r= F / M or F= r x M
만일 힘 = 질량 x 가속도 라면
우리는 또한 지구가 공전과 자전이라는 두가지 종류의 원심력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러한 에너지 손실 또한 두배가 되리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일은 힘의 근원 없이 물체에 의해 수행될 수 없다. 만일 지구가 그 자체로 힘의 근원이라면, 열역학을 포함한 물리학 전체가 그릇된 것이 된다. 목성은 지구보다 317배 큰 질량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구보다 훨씬 큰 중력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공전 속도는 (원심력으로) 중력을 상쇄하고 궤도를 유지할만큼 높지 않는다. 목성은 질량이 크고 속도가 낮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의 공전속도가 질량에 비해 지나치게 커서 궤도로부터 튀어나오거나, 목성의 속도가 지나치게 낮아 태양으로 끌려가든가 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 당신은 거대한 질량의 천체일수록 원심력의 작용에 더 영향을 받는다는 이론에 따라 목성은 지구보다 바깥 궤도를 도는 것이라고 반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화성의 경우는 어떤가. 화성은 지구보다 작지만 궤도는 더 바깥 쪽이다. 목성 너머의 좀더 작은 행성들은 또 어떤가. 태양으로부터 엄청나게 먼 궤도를 돌고 있다. 게다가 그들의 공전 속도는 매우 낮다. 따라서 말이 되지 않는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이론에서 이 힘은 태양빛이 행성의 한쪽 면을 비추고 다른 면은 어둠 속에 남겨놓음으로써 생기는 에너지 잠재력의 차이로부터 생긴다. 두 상반된 힘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 천체는 중량을 갖지 않고, 줄 끝에 달려 돌아가는 돌맹이처럼 움직이며, 그 궤도의 반지름은 줄에 해당할 것이다. 우주의 모든 역학적 현상들이 설명 가능하다. 위성들도 마찬가지의 원리에 따른다. 화성의 첫번째 위성은 당신들의 이론을 완벽히 부정하는 흥미로운 현상을 보여준다. 화성이 24 시간 37분만에 한 바퀴 자전하는 동안, 그 위성은 화성 주변을 세 바퀴 돈다. 한 바퀴당 7시간 39분이 걸리는 것이다.
위성이 중력을 거부하고 한바퀴 대신 세바퀴를 돌도록 만드는 힘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애초에 얘기가 시작됐던 곳으로 돌아가보자. 훨씬 흥미로운 것이 목성의 9, 10, 11번째 위성의 움직임이다. 이것들은 중력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목성과 그 위성들이 반시계 방향으로 움직이는 반면, 위의 세 위성들은 그와 반대 방향으로 돌고 있다.
태양빛은 지구로부터 달을 향해 반사되기도 하고 달로부터 지구를 향해 반사되기도 한다. 그러한 상호 반사는 두 천체가 자기적인 인력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척력을 제공한다. 두 천체 간의 태양빛의 반사가 가장 클 때 압력이 증가하고 달은 지구로부터 멀어진다. 반사가 작아지면 척력도 그에 비례해 줄어들면서 자기적인 인력이 증가해 위성이 지구로 당겨진다.
조수간만이 달의 인력 때문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실은 정확히 그 반대이다. 이는 관찰로 입증될 수 있다. 달로부터 반사된 햇빛이 바닷물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한쪽이 눌리면서, 다른 쪽으로 물이 올라온다. 이는 달에 의해 일어나는 조수간만의 지연현상이 왜 일어나는지를 설명한다.
달은 멀리 있는 지구의 운동에 종속되어 있을 뿐이다. 지구의 회전 속도는 대략 1/28 정도 되는 달의 각 속도를 만들어낸다. 마치 지구의 축만이 인력을 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질량 사이의 인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적인 인력이 있을 뿐이다.
태양빛이 우주의 물체를 밀어내고 조수가 달에서 반사된 그 빛의 힘에 의해 일어난다는 이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왜 지구의 공전 속도는 달이 궤도를 앞에서 가로지를 때는 증가하고 뒤에서 가로지를 때는 줄어드는 것일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달이 지구의 앞에 있을 때 빛의 압력이 달의 표면에 충격을 주는 건 분명하다. 달이 지구의 자기장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충격은 자기적으로 지구에 다시 되돌아 전해진다. 마치 지구를 뒤에서 몰아대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힘의 전달 시스템과 같다. 그 반대가 달이 지구의 뒷부분을 가로지를 때 일어난다. 빛이 그것을 누를 때 마치 지구를 저지하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중력은 단일한 힘이 아닌, 복합적인 힘의 총화로서 우주의 밸런스를 유지해주는 불가사의한 균형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유기적인 우주론은 동양철학의 세계관과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아인슈타인이 평생에 걸쳐 고민했다가 풀지 못한 (마치 그의 선배 과학자 뉴턴이 죽을 때까지 풀지 못했던 중력의 동시작용 문제처럼) 우주에 퍼져있는 네가지 힘을 묶는다는 '통일장 이론'은 어쩌면 앞서 언급한 복합적인 힘들의 균형작용일지도 모르며(우리가 '중력'으로 그간 잘못 이해해왔던 복합적인 힘들 말이다), 앞으로 페를린더 교수를 비롯한 일선 과학자들에 의해 완전히 규명될 날이 올 것이다. 어쩌면 서양의 과학자들, 또는 동양의 과학자들이 동양철학을 공부하여 인문학적으로 계몽되면, 물질과 정신의 이치가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5. 동양과학과 서양과학이 만날 때 - 새로운 방향점의 모색
프리초프 카프라가 1978년도에 쓴 <물리학의 도>는 정통 과학과 동양 철학을 혼합하여 새로운 유기적 세계관의 우주를 보여주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었다. 내가 쓴 이 글도 아인슈타인의 패러다임을 넘어선 '유기적인 우주론'의 개막이다.
이렇게 유기적인 우주론, 또는 동양철학적 세계관은 많은 연구가들에 의해 그 신빙성이 상당 부분 입증이 되었으나, 주류 과학자들의 완고함 때문에 빛을 못봐 왔다. 가령 다음과 같은 집단무의식 실험이 그 예이다.
어떠한 표본 집단을 만들고 그 집단에게 퀴즈를 낸다고 치자.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 중 퀴즈의 답을 아는 이가 전혀 없을 경우
집단에서 차출된 10명의 정답율은 30%, 집단에서 10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 모두에게 정답을 알려준 뒤, 정답을 모르는 10명에게 퀴즈를 내면, 정답율이 50% 이상이 된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최근 양자역학에서 시행된 일련의 실험과 같이 우리의 정신을 구성하는 입자가 광속 이상의 속도로 다른 입자와 소통할 수 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휴스턴 스미스(Huston Smith)에 따르면, 개인의 뇌는 이미 우주의 원자 수보다도 많은 연결을 형성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 아울러 홀로그래픽(holographic) 우주는 하나로 연결된 정신으로 작용하며, 개인은 여기에 직접 접근할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나와 있다. 하나로 연결된 인류의 '사고장(Thought Field)' 이론은 이미 정신생리학자들에 의해 엄밀하게 입증된 개념으로, '얽힘 현상(Entanglement)'이라는 양자물리원리에 기초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렇게 보면 인류는 이미 투시력과 텔레파시, 천리안을 갖춘 것이다.
이밖에도 동양 철학의 유기적인 우주 모델은 프랙탈 법칙, 자기조직화 이론 등 적용이 안되는 분야가 없을 정도인데, 이 점이 절대자와 자연세계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기독교 신학과 뚜렷히 대비되는 점이다.
무신론자 스티븐 호킹조차 감탄한 동양철학의 힘!
노자가 집필했다고 알려진 <도덕경>에서 하나는 기氣이며 둘은 음과 양을 뜻하고, 셋은 이 음양이 모여서 만드는 화합체들을 의미한다. 이 구절을 과학자들에게 어울리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바꾸어 보면 어떨까?
우주는 쿼크(quark)와 렙톤(lepton)을 낳고, 쿼크와 렙톤은 양성자와 전자를 낳고, 양성자와 전자는 원자를 낳고, 원자는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전자를 오비탈(orbital)에 지고 양성자를 원자핵에 품고 있다. 양성자와 전자의 두 전하가 서로 작용하여 안정화된 에너지 준위를 형성한다.
어떤가? 중간의 중성자를 바탕으로, 전자와 양성자가 삼위일체되어 돌아가는 그 모습은 완벽하게 동양철학의 삼태극 사상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따라서 앞으로의 시대는 동양의 전체적인 방식을 서양의 분석적인 학문에 적용해야 더 큰 빛을 보게될 것임이 분명하다. 아직 동양철학의 유기적 세계관이 서양철학의 눈높이에서 이해되려면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동양의 지혜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농기계를 이용하다 다치면 논두렁 물로 씻어주면 낳는다.
2. 옛날 우리 할머니 세대들께선 지금처럼 꽉 끼는 속옷을 입지 않고 헐렁 헐렁한 고쟁이에 아궁이 때면서 나오는 매캐한 연기가 속곳으로 숨어들면서 부인병 이란게 없었다.
3. 관치농업으로 벼를 더 촘촘하게 심으라는 지시에 그렇게 따라한 농가들은 망했다. 자연의 원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4. 동양철학에 의하면, 흙은 양성도 있지만 대체로 음성을 띠고 있어서 여성성에 가깝다. 그래서 양성인 영양분이 흙에 찰싹 달라붙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찰흙은 여성의 성질이 모래흙보다 20배나 강해서 남성의 성질이 강한 비료와는 찰떡궁합이다.
5. 사람들은 똥파리를 싫어한다. 그러나 동양철학에서는 세상 만물이 모두 유기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이 하나 없다고 주장한다. 가령 똥파리는 우리에게 아주 고마운 존재다. 우리나라 삼림에 막대한 피해를 주는 솔잎혹파리의 천적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다 나름대로 생존이유와 조건을 지니고 세상에 나온 것을 인정하면, 농업에 대한 태도도 달라진다.
미래의 학교에서는 모든 학생들이 동양의 음양오행과 자연주의 사상을 배우고, 그것을 서양의 과학에 융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전체적인 통찰력과 부분적인 분석력이 모두 갖출 수 있게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만물이 어떤 통일된 에너지의 작용으로 조화를 유지하고 있다는 유기적인 우주론이 과학계의 주류 모델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 예로서, 한동석 선생이 지은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에는 어떻게 음양오행의 원리를 통해 핵융합이라는 미개발 기술을 개발하는 거이 가능한지 잘 설명되어 있다. 그 안목이 감탄스러워서 학문의 융합에 대한 한 단적인 예로서 올려둔다.
우주에 핵의 분열과 통일이 있는 것과 같이 원자에도 분열과 통일이 있다. 그러나 원자학계에서는 아직까지 수소핵의 융합(融合)이 다만 융합반응을 일으킨다는 것뿐이고 그 융합이 통일(統一)을 완성하는 것을 실험해 내지 못했기 때문에 원자 세계에서는 통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으나 앞으로 중성자의 충돌에 의한 분열작용이라고 생각하던 것을 분화작용에 의한 분열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때는 곧 이어서 중성자는 탄소원자의 융합성을 이루는 기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따라서 수소원자가 헬륨 원자와 힘을 합함으로써 원자 세계에서 통일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각설하고 이 같은 견지에 우리는 土化作用의 원리가 과학적으로 충분히 반증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원자론적 고찰(原子論的 考察)
그 다음은 土化作用을 원자론적 입장에서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1905년에 아인슈타인(Einstein)은 다음과 같은 방정식을 발표한 바 있다.
E=mc²
이 식에서 E는 에너지를 말하는 것이고, m은 질량이고, c는 속도(진공중의)이고, c²은 평방 혹은 자승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광속인 바의 1 분간의 186,000哩의 자승인 3,459,600哩는 바로 에너지의 속도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물질 속에 포함되어 있는 극소량의 에너지라 할지라도 이와 같은 막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한 이 공식을 발표하고 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물질과 에너지는 본래 동일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다만 형상을 바꾼 것뿐이다. 그러므로 물질이 소멸할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이 갈파한 것은 그의 독특한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두뇌에 의한 것이거니와 여기서 에너지에 대해서 좀더 고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에너지를 운동 에너지와 열 에너지로 구분하기도 하나 모든 에너지는 사실상 운동 에너지인 것이다. 왜냐하면 열 에너지라는 것은 물체를 조직하는 분자의 운동 에너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질에는 고체, 액체, 기체의 세 가지가 있는데 가령 금속고체 같은 것은 분자의 진동이 용이하게 전달되지만 목석과 같은 것은 조금밖에 전도하지 못한다. 그런즉 이것은 전혀 분자 가운데 있는 에너지의 차이에서 오는 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액체는 금속고체보다도 진동이 더 빠르다. 그러므로 액체를 조직한 원자의 입자는 액체의 분자와 충돌하면서 온도가 상승하게 되고 온도가 상승하게 되면 그때에 기체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찰하여 보면 물질의 운동이란 것은 입자와 분자간에 충돌하는 운동인데 그 운동은 금속이 열을 전도하게 되면 그 전도의 반응이 진동으로 나타나고 그 진동에 의하여 액체로 변화하고 액체는 다시 기체로 변화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고체가 기체로까지 무한분열하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즉 이것을 좀 더 부연하면 원자 에너지의 운동이란 것은 물질과 충돌함으로써 일어나는 우주[원자]운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열 에너지라는 것은 바로 운동 에너지에 불과한 것이거니와 이와 같은 입자와 분자간의 충돌에서 일어나는 분화작용이란 것은 오행원리로써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土를 생화(生化)하는 방법이며, 또한 수단인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입자와 분자의 충돌이 나중에 기체로까지 화(化)하게 된다는 말은 바로 우리들이 말하는 바의 土化作用의 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주의 모든 변화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것은 물[水]의 변화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과학적 입장에서 보면 이상하게도 물의 원자의 하나인 수소원자는 한 개의 양자와 한 개의 전자로써 조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주 가운데 있는 92원소의 기본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되거니와 이러한 수소에 중성자가 한 개 가해지면 중수소가 되고 두 개 가해지면 이중수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성자가 가해진 수소는 다만 그만큼의 중량이 증가될 뿐이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과학적 반응은 전혀 동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성자라는 물질이 첨가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수소와 중수소와 삼중수소간에는 아무런 과학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을 동위원소라고 하거니와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말하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중성자(中性子)란 것은 바로 土인데 그것도 양토(陽土), 즉 丑土나 辰土와 같은 작용을 하는 것으로 사료되는 것이다. 그것이 土라는 중화성(中和性)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수소원자에 들어가게 되면 다른 입자와 동화하면서 충돌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에너지의 운동을 일으키는 작용이 生기게 되나 거기에서 중성자의 과학적 반응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중성자에는 전자나 양자와 같은 편파적인 성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변화의 현상이란 것은 진실로 이질적인[양자(陽子)나 전자(電子)와 같이] 형기간(形氣間)에 일어나는 충돌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음양의 충돌, 즉 五行의 승부인 것이다. 그러나 五行 가운데는 이러한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중성의 소유자가 있는 바 그것이 바로 土다. 네 개의 土 가운데서 성(性)을 가진 土는 두 개인데, 그것이 바로 丑土와 辰土인 것이다. 성을 가졌다는 말은 질량은 있으면서도 그 성이 中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丑辰土의 작용을 五土라고 하는 바 그것이 음양(陰陽)의 충돌을 조화(造化)시키면서 만물로 하여금 無化작용을 하게 하는 未土에까지 분열유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자의 중성자가 모든 원자를 분열시킨다는 것과 五行의 양토(陽土)가 만물을 분화한다는 것과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이다. 더욱이 丑辰土는 五土이며, 또한 질량이 있다는 사실과 아울러서 고찰한다면 중성자의 작용이란 바로 陽土의 작용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水[물]가 우주변화의 기본이라고 한다면 수소는 원자의 기본이 될 것이고, 중성자가 원자분열의 기본이라고 한다면 丑辰土는 사물분화의 기본일 것이므로 丑辰土의 土化作用은 바로 중성자의 분화작용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土化作用으로써 중성자를 생각해 볼 때 아인슈타인이 말한 바 [에너지와 물질의 차는 다만 형상을 바꾼 동일체]라고 한 것은 바로 과학적으로 말하면 중성자의 작용현상을 예견한 것이고 상수학적으로 말하면 土化作用을 포함한 변화를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해 보면 통일의 기본을 이루는 未土의 작용은 상수학적으로 보아서 丑土와 辰土가 분화작용을 한 결과이고, 원자과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중성자의 분화작용에 있다고 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원자운동에서 未土와 꼭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은 탄소인 바 수소원자의 융합반응이 탄소의 융합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곧 未土의 융합작용이 陽인 핵을 합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세한 것은 제7장 1절 2. [정신과 에너지]에서)
이와 같이 우주에 핵의 분열과 통일이 있는 것과 같이 원자에도 분열과 통일이 있다. 그러나 원자학계에서는 아직까지 수소핵의 융합(融合)이 다만 융합반응을 일으킨다는 것뿐이고 그 융합이 통일(統一)을 완성하는 것을 실험해 내지 못했기 때문에 원자 세계에서는 통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으나 앞으로 중성자의 충돌에 의한 분열작용이라고 생각하던 것을 분화작용에 의한 분열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때는 곧 이어서 중성자는 탄소원자의 융합성을 이루는 기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따라서 수소원자가 헬륨 원자와 힘을 합함으로써 원자 세계에서 통일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각설하고 이 같은 견지에 우리는 土化作用의 원리가 과학적으로 충분히 반증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