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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마지막 동역자들 / 롬 16:1-16
사도바울의 편지는 항상 마지막에 축도로써 끝이 납니다. 그래서 롬 15장 마지막 절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이렇게 축도로써 끝이 났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6장은 쉽게 표현하면 부록과 같은 책입니다. 본문을 읽으면 바울의 인간미가 진하게 배어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들을 향한 그의 그리움과 사랑과 넘치는 감사가 있습니다. 본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불타는 소명감을 가슴에 안고 한 생을 살았던 바울시대의 동역자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의 이름들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하고 교회를 세워갔던 아름다운 신앙의 선진들의 이름입니다. 언젠가 우리의 이름도 그들의 이름 뒤에 기록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이 말씀을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평신도들의 이름은 바울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서, 곧 해산의 수고를 다해서 키워 놓은 예수의 제자들이요, 바울 자신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이런 대가를 통하여 얻은 아름다운 형제, 자매들이기에 바울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이름을 부르면서 안부를 전합니다. 그런데 이름 앞에 또 다른 별명을 붙이고 있습니다. ‘나의 보호자, 나의 동역자, 처음 맺은 열매, 나와 함께 갇혔던 자, 내 사랑하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자, 주안에서 많이 수고한 자, 내 어머니, 나와 온 교회 식구’ 등등의 별명을 붙여가면서 그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다정다감한 장면입니까?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1-2절에 바울은 로마 교회의 뵈뵈를 소개하고 있고, 3-16절은 그와 함께 주의 일을 했던 동역자들에게 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1-2절은 이 편지, 성경 중에 최고인 로마서를 가지고 간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서신을 들고 로마 땅으로 간 사람이 누굽니까? 뵈뵈라는 여제자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어디서 집필했습니까? 바로 고린도에서입니다. 고린도에서 겐그리아는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항구도시로서, 일찍이 기독교가 전파되어 교회가 세워진 곳이 겐그리아 지방입니다.
1절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먼저 뵈뵈는 ‘순수하다’는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겐그리아 교회는 바울이 2차전도 여행 때, 서원을 이루기 위해 삭발까지 하며 전도해서 세운 교회입니다. 우리 자매 뵈뵈를 이렇게 세운 교회의 일꾼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문안 인사를 하면서, 첫 번째를 여자 이름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고 파격적인 일입니다. 당시 유대 남자들이 아침마다 드리는 기도 중의 하나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여자로 태어나지 아니하고, 내가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글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데, 많은 철학자들과 함께 ‘여자도 사람인가’라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자를 사람으로 여길 것인가, 아니면 짐승으로 취급할 것인가? 이 정도로 여성의 인권이 유린당한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도 바울은 여집사 뵈뵈를 로마교인들에게 당당히 추천하고 있습니다. 일꾼이란 말은 ‘디아코노스’라는 말로서 원래의 뜻은 ‘남을 섬기는 자,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일꾼으로’ 난외주를 보면 집사로 되어있습니다. 일꾼이라는 말은 집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집사는 일꾼입니다. 말꾼이 아닙니다. 교회는 일꾼이 필요하지 말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기 ‘겐그리아교회의 일꾼’이라는 말은, 그 교회에 일꾼 중의 일꾼이요, 집사 중의 집사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뵈뵈를 우리 자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매 뵈뵈를 추천하노니” 왜 자매라고 부릅니까? 우리 모두는 예수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자매요, 천국의 상속자이기에 그렇게 부릅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영원한 형제자매입니다. 또 자매라고 하는 말속에는 교제를 뜻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교회 안에서 잘 어울려 교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봉사도 잘해야 하지만 교제도 잘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 일은 혼자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추천하노니” 추천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추천한다는 말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추천합니까? 실력도 인격도 신앙도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무나 추천하지 않습니다.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2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2절은 로마 교회가 그를 마땅하게 영접해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주 안에서”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주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간혹 주 안이 아니고 주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슬퍼하십니다. 본문에 뵈뵈는 주 안에서 산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주 안에서 합당한 예절로 뵈뵈를 영접해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 안에서 산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자신을 죽이고, 그러니까 자신의 수단, 방법, 생각, 주장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주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누구입니까? 결코 자신 중심, 자기자랑, 자기고집, 자기 기분 따라, 교회 일을 하는 자가 아닙니다. 주안에서 자기를 감추고, 자기를 죽이고, 묵묵히 주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향하여 뭐라고 했습니까? 요 15: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우리 주 안에 있는 사람은 합당한 예절이 정말로 귀합니다. 지금 세상은 윤리, 도덕, 예절이 땅 바닥에 내려앉았습니다.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긴 다르다’는 말을 우리가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로마 교인들에게 자신의 서신을 가지고 가는 심부름꾼이라고 소홀히 대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심부름꾼, 하인취급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고 말합니다. 남을 높게 여기면 자기가 높아집니다. 또 바울이 무엇을 부탁하고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먹고 자고, 필요한 모든 것을 도와주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역시 세심한 목회자였습니다. 외국에 가면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다 도와주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왜 도와주라고 합니까?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뵈뵈는 여러 사람을 도와준 사람입니다. 겐그리아 지방은 동서 교통의 중심지여서 다른 지방의 성도들이 많이 내왕했습니다. 그때마다 뵈뵈는 예수의 사랑으로 그를 영접했습니다. 한두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성경은 주는 자가 복되다고 말합니다. 주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주고, 인정을 주고, 물질을 주고, 예수의 생명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바울은 뵈뵈를 ‘나의 보호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박해를 받을 때,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처럼 숨겨 보호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뵈뵈는 과부였습니다. 그리고 유식하고 유능하고 돈도 많은 여집사였습니다. 과거에 태양신을 숭배하는 우상 종교에서 떠나, 예수 믿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구원 얻은 감격을 발견한 그는, 하나님과 참 종교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병든 자를 돌봐주었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였고, 소외당한 자를 예수님의 복음으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들을 잘 대접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물질적인 모든 것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사도바울이 불치의 병에 걸려 있었는데 그 지병으로 고통 받고 있을 때, 친절한 간호도 잊지 않았습니다.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여기서 보호자란 ‘누구를 위해서 앞장선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본 절에서만 유일하게 여성형으로 사용된 이 단어는 어려울 때나 위급할 때 도와주는 ‘후원자, 구원자, 조력자’라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옛날 헬라 문화권에서 후원자, 또는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은 대개 물질이 부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보통 보호자는 남자들이었지만, 그러나 여자의 경우에 있어서도, 당시에 이러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킬 때 이 단어가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의 선교 사역에 경제적 도움을 준 뵈뵈의 따뜻한 배려에 관해서 그녀를 자기의 ‘보호자’ 곧 선교후원자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로 보아 뵈뵈는 부자였고, 사회적으로 유력한 여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그러나 부자라고 해서 그렇게 ‘보호자, 곧 앞장서서 돕는 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이 여인은 ‘도우시는 영, 보호자의 영, 곧 우리의 돕는 자이신 보혜사 성령님’의 영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뵈뵈는 바울의 보호자입니다. 그만큼 바울에게 신임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종 바울에게 신임을 받은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임을 받은 것과 똑같습니다. 교회의 일꾼들은 주 안에서 교역자에게 인정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그 당시 로마서 서신 두루마리를 뵈뵈에게 맡겨, 로마까지 운반하도록 한 것은 목숨 걸고 하는 일입니다. 만약 중간에 로마 군인에게 발각되면, 생명은 끝장이 나고, 로마서는 빛을 못 보았을 것입니다. 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사도 바울을 싣고 간 배가 구라파에 운명을 싣고 갔다’고 말했습니다.
3절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바울의 동역자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누구입니까? 브리스가와 아굴라입니다. 브리스가는 브리스길라라고도 합니다. 브리스길라는 ‘가치 있는 자, 존경할 만한 자’라는 이름을 가진 자입니다. 이 부부는 하나님이 맺어준 천생연분의 부부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여자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그 당시 성향으로 보면 여자 이름이 기록된 것도 쇼킹할 일인데, 여자 이름이 먼저 나온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반적인 통계로 남자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게 상식입니다. 사도바울이 브리스가의 이름을 먼저 쓴 것은, 그의 신앙이 위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굴라는 유대인이고 브리스가는 헬라인입니다. 카타콤 속의 기록을 보면 브리스가는 로마 상류 사회의 저명한 가문출신이었는데, 유대인 남자와 결혼한 관계로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브리스가는 남편을 따라 유대교로 개종을 했고, 처음에는 로마에 살고 있다가 주후 52년경에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들을 박해할 때, 로마에 살 수 없게 추방령을 내림으로 하는 수 없이, 고린도에 와서 장막을 만들어 팔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두 부부가 유대인의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피신하여 천막업을 하다가, 사도바울을 만나 바울에게 전도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바울과 함께 천막업을 동업하면서 고린도에 갔다가 다시 로마로 갔습니다. 그동안 이들 부부는 하나님의 종 바울을 도와, 복음 사역에 헌신했으며, 바울의 죽음의 위협까지도 대신하기까지 한 열심 있는 신앙의 부부였습니다. 이들 부부는 바울을 위해서, 자기들의 생명도 아낌없이 바칠 수 있는 귀한 성도였습니다. 본문에서 부부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고전 16:19절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딤후 4:19절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여기 동역자란 천막업을 동업한 동업자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바로 알고 전하는 동업자란 뜻입니다.
4절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이 부부는 주의 종을 위해서는 목이라도 내놓았습니다. 목을 내놓았다는 말은 주님을 위하는 것이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위하는 것임을 확실히 알았기에, 복음 사역자를 위해 목숨 걸고 충성한 것입니다. 동업자라면 최소한도 이런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오늘 두 부부가 교회 앞에 충성했다는 사실은, 복음의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도구인 교회와 지도자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들에게 충성했다는 말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마음은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사역자들을 철저히 섬겨야 한다는 의식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복음을 위한 열정과 충성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위대했지만, 바울이 바울될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을 주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같은 신실한 복음의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회자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십시오. 함께 복음의 동역자가 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생명력 있는 멋진 교회, 서로를 향한 자랑을 아끼지 않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5절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이 두 부부는 그들의 집을 언제나 교회로 사용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브리스가는 고린도에서도 자기 집을 교회로 개방을 했고, 에베소에서도, 로마에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 당시는 박해 때입니다. 자기 집을 교회로 선뜻 내 놓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건물이 없었습니다. 이 편지를 쓸 때만 해도 건물이 전혀 없었습니다. 박해받을 때인데, 어떻게 건물을 짓겠습니까? 그런데 교회의 건물이 따로 생긴 시기는 AD 313년 이후입니다. 이때 로마 정부에서 교회를 공인하고 난 다음에, 콘스탄틴 황제가 예수님을 믿다 보니까, 교회를 위하여 건물을 좀 지어야겠는데, 어디에 세울까 생각하다가, 그 당시 재판소를 교회로 주었답니다. 그래서 그 이후 교회 건물 양식이 재판소 양식과 똑같이 되었다고 교회사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에베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예수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에베네도에게는 ‘내가 사랑하는’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법이 마음에 있으면, 온정의 법이 그 혀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말을 해도, 사랑이 넘치는 말로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사랑이 철철 넘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소 아시아 지방 에베소에 선교하러 같을 때, 많은 박해와 원망과 사람들의 대적하는 것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에베네도가 처음으로 전도되었습니다. 얼마나 귀한 성도입니까? 전도해 본 사람은 오늘 본문을 쉽게 이해하지만, 전도해 보지 못한 사람은 그 체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봉사하면서 느끼는 기쁨이 있습니다. 헌신하면서 느끼는 감동이 있습니다. 전도하면서 느끼는 충만함이 있습니다. 에베네도는 에베소 교회의 등록 1호 성도입니다. 첫 열매가 왜 귀합니까? 바로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에베네도는 사도바울을 도와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부흥시켰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로마에 와 있습니다.
6절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마리아를 향해서 ‘많이 수고한 마리아’라고 했습니다. 참사랑은 수고하는 것을 주저하지 아니하고 즐거움으로 합니다. 사랑이 많은 곳에는 수고가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그러면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마리아처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뜻은 ‘높여진 자’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마리아는 한결같이 신앙심이 높은 훌륭한 여인들이었습니다. 본문의 마리아는 로마교회의 초창기의 개척자로서, 충성하고 헌신한 일꾼이었으며, 뵈뵈나 브리스가와 같이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도왔던 일꾼이었습니다.
7절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내 친척이요’ 이 친척이란 말은 골육이란 말로서, 넓게 이해하면 한 동족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의 친척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당시 친척 중에 예수 믿는 혈육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문안 드릴만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위해 감옥에도 함께 들어간 형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디에든지 동기들이 귀합니다. 바울과 감옥 동기들입니다. 여러분, 감옥에 들어간 것이 무엇이 귀해서 문안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들어가는 고난에 동참했다는 말은, 이 신앙이 변하지 않은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변하지 않은 신앙, 감옥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신앙, 귀한 신앙입니다. 이 사람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졌다고 합니다. 이는 ‘그 성도야말로 우리 교회의 보배다’라고 인정받는 것은 축복입니다. 사도바울보다 먼저 예수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신앙의 선배에게 문안하고 있습니다.
8절 “또 주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암블리아’는 노예로서 예수를 잘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노예들이 많이 믿었습니다. 빌레몬서 1:10절에 있는 오네시모도 노예였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무슨 단어입니까? ‘문안하라’입니다. 문안하라는 말 이외에도 비슷한 의미를 지닌 말들이 거듭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영접하고, 도와주고, 거룩하게 입맞추라’는 말들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문안하고, 문안하고, 문안하라’고 말씀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거듭하여 강조할 때 반복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성도간에 아름답게 교제하고 서로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이렇게 반복하며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항상 두 가지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 있어야 하고, 또 하나는 구원받은 성도들끼리 신령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교제 중에 어느 하나가 빠진다면 참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9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동역자인 우르바노, 사랑하는 스다구’ 이 사람들은 앞에 나오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같이 사도바울을 도왔습니다. 사도바울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은, 사도바울이 혼자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돕는 일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우르바노는 성경에 한번 밖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하늘나라 상급은 바울과 똑같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대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0-12절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주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아벨레에게는 ‘그리스도안에서 인정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신앙의 진실성과 강직함을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지식과 판단, 용기와 인내를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인정받는 생활이 축복입니다. 내가 아무리 굉장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리스도안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슬픈 입니다. ‘인정함을 받은’의 원어는 ‘도키모스’란 말로 ‘시험하여 인정받는 것’을 말합니다. 아벨레는 어떤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 믿음으로 잘 이긴 자입니다.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이라고 했는데 대 헤롯의 손자라는 설이 있습니다.
13절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루포는 막 15:21절에 나오는 구레네 시몬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간 사람입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지만, 그로 인하여 아들과 부인이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고, 그때부터 믿고 가족까지도 구원받았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유월절을 지키려고 시골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부지중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으로 참 유월절을 지키는 자가 되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에게서 무엇을 느낍니까? 우리도 억지로라도 예수님의 복음 사역에 참여해야 하고, 이웃을 억지로라도 은혜에 자리에 참여시켜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교회에 인도했다가 은혜 받고 전도한 사람보다 더 열심히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루포의 어머니를 바울이 영의 어머니, 믿음의 어머니라고 한 것입니다. 얼마나 주의 종을 위하여 헌신했으며, 얼마나 주의 종을 위해 기도했으면, 사도 바울이 어머니로 모셨겠습니까? 기도하는 어머니가 참 어머니입니다.
14-16절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입 맞추라.’ 그때 사람들의 인사법입니다. 서양 사람은 손에도, 볼에도, 키스를 합니다. 그런 인사를 말합니다. 거룩하게 입 맞추라는 것은, 신앙 안에서 거룩한 교제를 끊지 말라는 말입니다. ‘서로 문안하라.’ 내가 문안 받으려고만 하지말고, 먼저 가서 교제하고, 먼저 가서 문안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들, 그리고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가 평생 지치지 않고 사역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동역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우리교회에서 어떤 사람으로 있을까요? 사람들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요? 시간이 지나면 그냥 잊혀지는 사람일까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동역자일까요? 이왕이면 사람의 마음에도 평생 잊을 수 없는 동역자! 천국에서도 함께 기억하며 기뻐할 동역자들인 갈보리교회의 청년과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바울의 마음 속에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을 마음에 새겨보았습니다. 바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귀한 동역자들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집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은 잊혀집니다. 그러나 우리 갈보리교회 청년들, 그리고 성도들은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사람들이게 하옵소서. 교회 안에서 잊혀지지 않는 일꾼으로 기억되게 하옵소서. 잊을 수 없는 동역자로 기억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께 영광을 / 롬 16:17-27
러시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볼쇼이 극장이 있습니다. 5년 동안 리모델링 공사를 하였습니다. 왜 리모델링을 합니까? 19세기에 지은 원래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답니다.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해서, 대단한 공사를 한 것입니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그 극장이 그렇게 대단히 가치가 있는가 봅니다. 교회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나왔습니다. ‘기복으로 성공한 강단 교회침체 부메랑 되다. 단 시간의 축복 강조했던 설교, 성장 이끌었지만 십자가, 고난, 영광 전달하지 못해’ 설교가 기복적으로 변했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을 강조했습니다. 고난 없는 축복을 강조했습니다. 자기 부정없는 긍정을 강조했습니다. 복음의 가치를 많이 훼손시켰습니다. 한국교회가 리모델링 되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본래의 교회모습에서 많이 변형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성경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예수님의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로마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사도가 로마서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벌써 로마서 마지막 장을 우리가 펴놓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1-11장은 교리편입니다. 죄인인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할 때, 의롭게 됨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 길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대 주제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12-16장까지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윤리적인 면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도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복음의 핵심은, 15:13절에서 이미 끝을 맺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롬 15:13절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도바울은 그의 신학과 교리의 결론으로 서신을 대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소망을 듬뿍 주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바울이 소망을 주면서 끝을 맺는 것은 몇 가지 귀한 진리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신비로움을 깨달으면서 소망을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오묘한 세계, 무한한 능력, 상상할 수도 없는 은혜를 생각하며 감격한 바울은, 이런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 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세계만 보고 감동한 것이 아니라, 내가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크고 오묘하지만, 내가 지옥으로 떨어져버리면 소망은 끝나고 맙니다. 문제는 ‘나’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내가 받은 은혜, 내게 주신 은사,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되면 저절로 감사가 나오고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자는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무한한 소망으로 인도하기에 충분합니다. 바울은 이런 몇 가지 귀한 진리를 알았기에, 소망의 하나님 안에서 평강을 빌었습니다. 이제 15:13절 이후에 나오는 내용은, 그가 목회 시절에 그를 도왔던 잊지 못한 성도들을 소개하면서 안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바울이 편지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새삼스럽게 또 하나의 권면을 삽입해 놓은 것을 보게 됩니다.
17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로마교회 안에는 아직도 완전히 본색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계해야 할 이단들이 들어와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이단들이 많이 설친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겸손하고 온유한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이단에 대해서는 가장 강경한 자세로 대처했습니다. 일년 내내 땀 흘려 농사지은 밭에, 멧돼지가 들어와서 순식간에 곡식을 망쳐 놓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농부의 가슴이 얼마나 찢어질 듯이 아프겠습니까? 애써 개척해 놓은 교회에 이단들이 들어와 가끔 쑥대밭을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단을 막고, 한 생명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라는 말은, 사도바울이 성도들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달리하고 분열시키는 사람들을 주의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배운 교리와 배반되는 것을 가르치면서, 신앙을 혼란시키는 사람들을 주의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주의자로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사도바울의 기본교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에서 주는 두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살피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교훈을 거스르는 사람들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상반절에서는 이단들을 상기시킨 말이요, 하반절에서는 거침돌이 되게 하는 사람들을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여기 거침돌이 되는 사람은, 죄 짓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고, 또 분열을 일삼고, 당을 짓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단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 신앙으로 넘어지게 하는 자들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살펴보고 감을 잡았으면, 속히 떠나야 됩니다. ‘그들에게서 떠나라!’ 적극적이고 단호한 태도로 말하고 있습니다. 약 4:7-8절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비로소 마귀를 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벧전 5:8-9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8절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이단의 정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단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열심을 내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이단의 본색입니다. 우리는 이단을 겉으로 보아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모이는 날짜가 정해져 있습니다. 주일날에 모이고, 주일 오후에 모이고, 수요일, 금요일, 이것이 한국교회의 140여 년 동안 이어져 온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신앙의 전통은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단 색채가 있는 교회는, 집회 날짜가 다르고 시간이 다릅니다. 이웃 교회의 양들을 불러모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국교회의 전통을 무시해 버립니다. 이런 모임이나 교회는 주의 깊게 살펴보고 조심해야 합니다. 요즘에는 영악해져서 일반교회들과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모입니다. 이들은 무엇을 배우고 가르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 18절의 말씀과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에서 말한 이단들의 특징 10가지가 있습니다. ⑴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입니다. ⑵ 자기의 배만 채웁니다. ⑶ 그리스도인을 분열시킵니다. ⑷ 속이기 위해 아첨하는 말을 합니다. ⑸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⑹ 복음을 거슬러 행동합니다. ⑺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⑻ 땅의 이익만 바라보고 하늘의 일은 생각지 않습니다. ⑼ 이단을 끌어드립니다. ⑽ 진리를 해칩니다. 이 열 가지 사항을 두 가지 말로 요약하면 ‘교활한 말, 아첨하는 말’입니다. ‘교활하다’는 말은 헬라철학에서 나온 말인데, ‘말을 잘 하지만 악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첨하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행동에는 악합니다. 사람을 마구 죽입니다. 그리고 신실하고 종교적인 말을 하지만, 그러나 그 허위 뒤에는 악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이단들의 특징 중 하나가, 교주가 직접적으로 충동하는 일은 없습니다. 배후에서 조종을 합니다. 교활한 방법과 악랄한 수법으로 접근합니다. 그러므로 잘 살펴야 합니다.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인류의 조상 하와를 뱀이 꾀일 때 얼마나 정중하게, 그리고 하와를 위하는 것처럼 말했습니까? 얼마나 하와의 편을 들어주면서 말했습니까? 이것이 미혹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마귀가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이 여자의 마음을 한번 떠보기 위하여 넌지시 물었습니다. 이때 여자가 뱀에게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하자, 이때 마귀는 얼른 눈치를 챘습니다. ‘아, 이 여자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한 불만이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그러니까 ‘먹지 말라’고 했지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마귀가 시험하는 것은, 불만스런 마음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단 종파들이 기성 교인들을 유인하는 법 가운데 하나가, 교리에 대한 불만을 가진 사람들부터 찾아다닙니다. 교회에 불만이 있는 성도들을 찾아다닙니다.
이단종파 뿐이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마귀가 역사 할 때, 반드시 교회나 주의 종들에게 불평하고 불만이 많은 사람부터 찾아 미혹합니다. 유혹하는 자들의 계략이 어떻습니까? 그들이 섬기는 주인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습니다. 그들의 핑계는 어떻든지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실천하지도 않습니다. 말로만 주님만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 생활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과 너무 동떨어져 있습니다. 왜 그래요? 그들은 자기 배만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고 주 예수를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관심이 더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비위 맞추는 것이 천한 정욕뿐입니다. 교만과 시기, 허영과 방탕, 이런 것들만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배입니다. 빌 3:18-19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자신의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무슨 경건이 있습니까? 가서 유혹을 하고 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또 어떤 자들을 미혹하게 합니까? ‘믿음이 약한 자들을 골라 미혹’합니다. 여기 ‘순진한 자들’이란 아직 진리에 확신이 없는 자들입니다. 아직 신앙이 어린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하는 말에 속아 넘어지지 않을 수 없도록, 미리 짜 맞춘 교묘한 말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낚아챕니다. 한번 걸렸다 하면 낚시 바늘에 걸린 고기처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듭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제대로 돌아오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들은 잘못된 줄 알면서도 못 돌아옵니다. 시한부 종말론에 빠져서 그렇게 망신을 당한 사람들이 돌아왔습니까? 못 돌아오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19절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을 쉽게 표현하면 ‘로마 교인들아, 너희가 지금까지 순종을 잘 하고,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은 고맙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순종 잘하고, 교회생활 잘하는 것만으로 절대 안심할 수는 없다. 너희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한데 지혜가 있어야 하고, 악한데 미련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단들은 열심 있는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열심 없는 성도들은 건들지도 않습니다. 왜? 살아있으나 죽은 자 같은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단에 현혹되지 않으려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비 진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선은 하나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이런 것에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 악이란 이단을 비교하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미련하기를 원한다는 말은, 한마디로 빠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마 24:4-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지금 사탄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최악의 발악으로 주님의 교회를 분열시키고, 복음을 왜곡시키고, 박해하고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깨어 근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20절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평강의 하나님’ 여호와 살롬, 그렇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영적인 평강을 주실 뿐 아니라, 사탄을 심판하여 영원무궁한 평화의 나라,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요 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이 말씀은 창 3:15절의 응용구로써,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뱀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뱀의 후손이란 사탄에게 속한 세속적인 사람들이며, 여자의 후손이란 하나님께 속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메시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창 3:15절의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는 예언의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의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뱀, 곧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로 이기고 승리하게 하셨으며, 재림할 때에는 사탄을 무저갱에 던지고, 안전한 평화를 주실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21절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16절까지의 사도바울이 문안한 사람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은 로마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21-23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고린도교회들로부터 지금 바울과 함께 있는 측근들입니다. 고린도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특별히 몇 명을 추천해서 문안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좋기로 소문난 사람들로서, 이름만 대어도 로마교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소문난 성도들을 로마교인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로마교인들에게 신앙의 도움을 주기 위함입니다.
먼저 21절에서 디모데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는 바울의 오른팔과 같은 사람입니다. 곧 바울의 조수이며 후계자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개척하고, 자기가 다른 곳으로 가면서, 디모데에게 그 교회를 감독하고 목회를 돌아보도록 부탁할 정도로 신임하는 동역자였습니다. 디모데는 가정에서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슬하에서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런 디모데를 바울은 나의 동역자(함께 일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사실 디모데는 바울의 영적인 아들과 같습니다. 빌 2:19-20절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곳에 교회를 개척하고, 디모데에게 그 교회를 맡겨, 감독하고 목회를 하도록 한 것은, 그를 신임하는 동역자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디모데를 동역자로 부르고 높이 추천하는 이유는, 그의 권위를 세워주려는 의도에서입니다. 그래야만 후에 바울이 죽은 뒤에도, 디모데가 로마에 가서 하나님의 종이라고 권위 있게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기오는 행 1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기오’는 안디옥교회의 젊은 일꾼중의 한 사람으로서, 바나바와 같은 동기생입니다. 누기오는 비록 선교사는 아니지만, 복음을 전하려 여러 곳에 다닌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고린도로 와서 바울을 도운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야손은 행 17:5-9절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야손’은 데살로니가 사람으로 바울이 그곳에서 전도할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박해하여 내 쫓으려고 했는데, 야손이 그를 영접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야손은 유대인들에게 끌려 죽도록 매를 맞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을 따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소시바더’는 행 20:4절에 한번 나오고 말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추적할 수가 없습니다.
22절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더디오’는 중요한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바로 로마서를 밖에서 대필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눈이 몹시 나빠서, 마음대로 글을 쓰거나 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늘 대필자가 곁에서 바울의 말을 대신 기록하고, 바울은 싸인만 직접 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하나만 친필로 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마지막에 보면 ‘내가 친히 큰 글자로 너희에게 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디오는 바울 뒤에 숨어서 열심히 도운 성도입니다.
23절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가이오는 사도바울이 고린도에서 세례를 준 사람입니다. 가이오는 상당한 재력가로 보입니다.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라고 기록했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많은 주석가들은 요한3서 1절에 나오는 가이오로 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물질로, 하나님의 성업을 크게 이루어 나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그를 축복하면서 ‘사랑하는 가이오야,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하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24절 성경에 (없음)이라고 나옵니다. 가끔 성경에 보면 (없음)이란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빼 먹은 것이 아니라, 성경 편집할 때 착오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제 25-27절까지는 결론 부분으로써, 비록 짧은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기독교 사상의 중대한 축소판입니다.
그럼 기독교란 무엇입니까?
25절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복음은 곧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나의 복음’이라 합니다. 롬 1:1-2절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롬 1:1-2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선포(전파)하는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종교입니다. 예수의 생애, 그의 가르침, 행하신 이적, 그의 십자가의 속죄, 삼일만에 부활, 승천, 재림, 최후 심판 등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종교입니다. 왜 그리스도만 선포합니까? 예수만이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건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류를 찾아 오셔서 멸망에서 건져주신 종교입니다. 행 4: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요 11:25-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사실을 믿습니까? 대다수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동일하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꽃에도 생화와 조화가 있듯이, 종교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습니다. 하늘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요 14: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복음전파는 예수님의 명령이고, 유언이고, 부탁의 말씀입니다. 복음전파는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사람 살리는 일만큼 보람된 것이 없고, 더 급한 것은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왜 의사를 소중히 여깁니까? 사람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위대한 일, 곧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복음전파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사람은 영혼이 살아나면, 모든 부분이 뒤따라 살아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했습니다. 복음전파는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롬 10:15절하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복음전파의 상급이 가장 큽니다. 단 12:3절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복음전파는 우리가 선택할 과제가 아니라, 필수적인 과제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꼭 순종해야 될 필수 과목입니다. 고전 9: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복음전파가 마감되는 날, 지구의 종말이 옵니다. 마 24:14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렇다면 예수 복음화 운동은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입니다. 주님은 이 운동이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1하)
26-27절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기독교는 하나님이 계시한 종교입니다. ‘영세 전부터 감취였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무슨 말입니까? 복음은 계시입니다. 나타났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으로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신 계시의 종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성경을 읽을 때에 영안을 열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성경대로 되는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떠난 기독교는 없습니다. 그럼 성경은 무엇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 66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스토리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당신을 자세히 증언하셨습니다. 요 5: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기독교는 전 인류를 상대로 하는 종교입니다.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예수님은 막 16:15절에서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고, 행 1: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종교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종교란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곧 인간은 창조주이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이 종교의 교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완성의 종교입니다.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완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의 완성, 사랑의 완성, 구원의 완성입니다. 또한 성도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완고히 서기 때문에 견고합니다. 마 16:18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종교입니다. 27절 마지막에,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찬송해야 합니다. 아무리 큰 축복을 받고 큰 업적을 이룬 대성공자라고 해도,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된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지혜를 주시고, 건강, 능력과 조건과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또 실패하고 무너졌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롬 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바울은 성경 중에 보석이라고 하는 로마서를 썼지만, 조금도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됨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끝으로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와 존귀와 영광이 그분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 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궁극적인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로서, 순종의 삶을 살아가며, 감사와 평안과 기쁨과 사랑으로 충만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믿음을 갖기 이전에는 내 고집대로, 내 감정대로, 내 욕망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내 고집을 꺾고, 내 인생의 새 주인이 되신 예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이제 주님의 큰 은혜를 받은 자로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며 살게 하옵소서. 또한 그 말씀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순종하면서, 감사와 평안과 기쁨과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저희에게 주신 물질과 시간과 은사를,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귀하게 사용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