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하면 우리는 동화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나도 소인국, 대인국, 하늘을 나는 나라라는 동화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걸리버 여행기를 다시 보며 이것은 동화가 아니라 위정자들이 뼈아프게 느껴야 되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1.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압도적인 모험 요소 (1, 2부의 매력)
이 책의 제1부(소인국)와 제2부(거인국)는 풍자의 대상을 싹 걷어내고 이야기의 뼈대만 남겨두어도 그 자체로 엄청나게 재미있는 모험담입니다.
* 내 몸의 몇 십 분의 일 크기밖에 안 되는 소인들에게 묶이는 장면, 밧줄로 적국의 군함을 통째로 끌고 오는 장면은 아이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줍니다.
* 반대로 내가 장난감 상자 크기의 집에 갇혀 독수리에게 납치당하고, 거대한 쥐나 원숭이와 싸우는 거인국의 설정은 기발한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였습니다.
* 즉, 풍자라는 ‘속알맹이’를 빼고 ‘껍데기’인 모험 플롯만 취해도 훌륭한 아동 문학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어른들의 철저한 ‘검열’과 ‘각색’ (동화화 과정)
소설이 발표된 18세기 당시에도 책이 너무 큰 인기를 끌자, 출판업자들은 이 책을 어린이들에게도 팔면 큰돈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원작 그대로 아이들에게 읽히기에는 너무 자극적이고 부적절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 불편한 내용 삭제: 1부에서 걸리버가 오줌을 누어 궁전의 불을 끄는 장면, 2부에서 거인들의 거친 피부나 젖가슴을 현미경 보듯 묘사한 관음증적 서술, 4부에서 야후들이 오물을 던지며 싸우는 더러운 묘사들은 아이들이 보기에 부적절하다며 모두 가위질당했습니다.
* 복잡한 정치 풍자 생략: 영국의 사법 제도, 종교 전쟁, 과학자들에 대한 조롱 등 아이들이 이해하기 힘든 복잡하고 지루한 사회 비판 내용은 과감히 삭제되었습니다.
* 3부와 4부의 실종: 특히 과학 만능주의를 비판한 3부와, 인간을 짐승으로 규정하고 인간 혐오증에 걸려 끝나는 비극적인 4부는 동화 버전에서는 아예 통째로 편집되어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동화가 '소인국과 거인국'에서만 끝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3. 스위프트의 통렬한 풍자가 역설적으로 증명된 결과
조나단 스위프트는 이 책을 쓰면서 "세상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나게 만들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오만함과 위선을 고발해 인류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인류는 그의 매서운 독설과 비판에 직면하자, 그 메시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반성하기보다 "이거 참 기발하고 재밌는 판타지 동화네!"라며 아이들의 손에 쥐여주며 피해버린 셈입니다. 작가의 가시 돋친 비판을 '아이들의 놀잇감'으로 격하시켜 버림으로써 그 날카로움을 무뎌지게 만든, 인류의 얄미운 방어기제가 작동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 줄 요약 《걸리버 여행기》가 동화가 된 것은,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매력적인 판타지 모험담이었고, 어른들에게는 끝까지 읽기엔 너무나 뼈아프고 부끄러운 거울이었기 때문에, 알맹이(풍자)는 빼고 껍데기(모험)만 남겨 동화로 재포장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