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야원의 다섯 수행자(26)
“저기 오는 이는 고따마 아닌가?”
멀리서 부처님의 모습을 본 다섯 수행자는 고개를 돌리며 서로 다짐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탐한 고따마는 타락자다. 신성한 고행을 버린 저 수행자에게 우리가 뭘 기대하겠는가? 저런 수행자는 일어나 맞이할 필요도 없고, 예배하고 공경할 필요도 없다. 여기로 오건 말건 자리를 펴건 말건 상관말자.”
그런데 맑고 환한 얼굴빛과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금빛 광채에 다섯 수행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님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들은 불붙은 조롱 속에 갇힌 새처럼 안절부절 못하였다.
다섯 수행자는 각각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발우를 받아 들고, 앉을 자리를 준비하고, 발 씻을 물을 가져오며 반갑게 맞이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고따마, 먼 길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벗이여 이 자리에 편히 앉으십시오.”
“그대들은 여래(如來)를 고따마라 불러서는 안 된다. 완전히 깨달은 부처님을 벗이 불러서는 안 된다. ”
다섯 수행자는 믿을 수 없었다.
“고따마, 당신은 지독한 고행을 했지만 선인의 법을 얻지 못했습니다. 마을로 나가 공양이나 받는 등 타락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타락하지도 않았고, 선정을 잃지도 않았다. 나는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었고, 불사(不死)를 성취했다.”
다선 수행자는 말이 없었다. 부처님이 다시 말씀 하셨다.
“그대들은 내가 거짓말을 하거나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그대들은 나의 얼굴이 지금처럼 빛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누구보다 진실한 삶을 살아온 분이라는 걸 잘 아는 그들이었다.
다섯 수행자는 부처님의 위엄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오랜 침묵이 흐른 뒤 저녁이 찾아왔다.
그들의 눈빛에 조금씩 믿음의 등불이 타 올랐다. 보름달이 하는 한가운데서 온 세상을 환히 비출 때였다.
부처님은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수행자들이여, 귀 기울여 들어라,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면 머지않아 그대들도 출가한 목적을 완수할 것이다. 수행자들이여, 세상에 두 가지 극단이 있다.
수행자는 그 어느 쪽에도 기울어서는 안 된다. 두 가지 극단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욕망이 이끄는 대로 관능의 쾌락에 빠지는 것이다. 그것은 천박하고 저속하며 어리석고 무익하다.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데 열중하는 것이다. 그것은 피로와 고통만 남길 뿐 아무런 이익이 없다. 수행자들이여,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난 중도 (中道)가 있다. 그것은 눈을 밝게 하고, 지혜를 증진시키며, 번뇌를 쉬고 고요하게 한다. 신통을 이루며, 평등한 깨달음을 얻어 미묘한 열반에 이르게 한다. 수행자들이여,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혜롭고 성스러운 팔정도(八正道)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바로 그 길이다."
부처님의 말씀이 끝없이 이어졌고, 다섯 수행자의 가슴은 환희로 넘쳐났다.
“수행자들이여, 네 가지 성서러운 진리(四聖諦)가 있다.
그것은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발생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태어남은 괴로움이고, 늙음도 괴로움이며, 질병도 괴로움이고, 죽음도 괴로움이다. 미운 사람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며,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은 괴로움이다. 괴로움의 발생이란 무엇인가? 온갖 괴로움을 받게 하는 원인은 바로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감각적인 욕망과 생존하려는 욕망과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괴로움의 소멸이란 무엇인가?
그릇된 욕망을 남김없이 없애고 단념하고 내던지고 해탈하여 집착이 없는 것을 말한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팔정도이다.
이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일찍이 누구도 가르친 적 없는 법이니 바르게 사유해야 한다.
그러면 눈, 지혜, 밝음, 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알라차렸다.
‘이것이 괴로움임을 완전히 알아야만 한다’ 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이것이 괴로움임을 완전히 알았다’ 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알아 차렸다.
‘괴로움의 발생은 끊어 없애야만 한다’ 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괴로움의 발생은 완전히 끊어 없앴다’ 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괴로움의 소멸을 똑똑히 보아야만 한다’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괴로움의 소멸을 이미 똑똑히 보았다’ 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 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아야만 한다’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완전히 닦았다’ 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수행자들이여, 이것은 일찍이 누구도 가르친 적 없는 법이니 바르게 사유해야 한다.
그러면 눈. 지혜. 밝음. 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끝없이 이어졌다.
“수행자들이여, 내가 만약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각각 세 차례씩 열두 가지 양상(三轉十二行相)으로 바르게 사실 그대로 완벽하게 알고 보지 못했다면 나는 모든 하늘의 신들과 인간들 가운데서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선언하지 못했을 것이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각각 세 차례씩 열두 가지 양상으로 바르게 사실 그대로 완벽하게 알고 보았기 때문에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고, 해탈하여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
그때였다. 꼰단냐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진리를 보는 눈이 맑고 깨끗하게 열린 것이었다.
“아! 알았습니다.”
꼰단냐의 탄성에 부처님이 조심스레 물으셨다.
“법을 알겠는가?”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정말 법을 알겠는가?”
“알았습니다. 선서시여.”
대지가 진동하고 끝없는 광명이 비쳤다. 천인들이 기쁨의 함성을 터트렸다. 부처님 역시 기쁨을 감추지 않으셨다.
“꼰단냐가 깨달았다. 안냐따꼰단냐(Annatakondanna)”
부처님의 발아래 꼰단냐가 머리를 조아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오라, 비구여. 나의 가르침 안에서 청정한 범행을 닦아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도록 하라”
진리에 먼저 는을 뜬 꼰단냐는 동료들을 위해 마을을 드나들며 여섯 사람이 먹을 음식을 얻어왔다. 네 수행자를 위한 부처님의 설법은 밤낮없이 계속 되었다.
“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성된 것이다. 생성된 모든 것은 소멸하는 법이다.”
“저도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도 알았습니다. 선서시여”
왑빠와 밧디야가 연이어 탄성을 터트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도 세존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오라, 비구여.”
이제는 꼰단냐와 왑빠와 밧디야가 음식을 얻어왔고, 나머지 두 수행자를 위해 설법하셨다.
같은 질문에도 부처님은 조금도 싫증내지 않으며 또 다시 설명하셨다.
“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성된 것이다. 생성된 모든 것은 소멸하는 법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묻고 또 묻던 마하나마와 앗사지 마저 소리 쳤다.
“저희도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도 세존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오라, 비구여.”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물질(色)은 ‘나(我)’가 아니다. 만약 물질이 영원불변한 ‘나’라면 물질은 병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 또한 물질이 자유자재한 ‘나’라면 ‘나의 몸은 이렇게 되라, 나의 몸은 이렇게 되지말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물질은 그렇지 못하다 물질은 영원불변한 ‘나’가 아닌 까닭에 별들고, 물질은 자유자재한 ‘나’가 아닌 까닭에 ‘나의 몸은 이렇게 되라, 나의 몸은 이렇게 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물질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파괴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그것을 두고 과연 ‘이것은 나다’ , ‘이것은 나의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비구들이여,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의식(識)은 ‘나’가 아니다.
만약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이 ‘나’라면 파괴되지 않아야 하고, ‘이렇게 되라, 이렇게 되지 말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질 않는가.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은 영원불변한 ‘나’가 아닌 까닭에 파괴되고, ‘이렇게 되라, 이렇게 되지 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파괴되는 본성을 가진 그것을 두고 과연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꼰단냐를 비롯한 다섯 비구의 얼굴에 깨달은 이의 평온함이 넘쳐 흘렀다.
부처님께서 선언하셨다.
“이제 세상에는 여래.응공.정변지와 더불어 여섯 사람의 아라한이 존재한다.”
부처님이 법륜을 굴리신 지 5 일째 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