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표류
이지원
섬진강 휴게소에서 버스가 멈췄다. 15분간 쉬어 간다고 했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즐거웠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내심 불안감이 밀려왔다. 잘못하면 낯선 길에서 표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여수를 당일로 다녀오려고 나선 길, 울산에서는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부산 노포동에서 가기로 했다. 노포동 시외 터미널에서 매표를 하려는데 여수행 버스 운행이 코로나로 중단되었다고 했다. 귀를 의심했지만 여수로 바로 가는 버스는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매표소 직원이 순천을 경유해서 여수를 가라고 알려 주었다. 순천행 버스가 곧 출발한다는 것이다. 앞뒤 재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순천행 버스를 탔다.
노포동에서 출발한 버스는 지루하게 달렸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휴대전화기로 검색을 해보고서야 어쩌면 당일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천에서 여수가 그다지 가깝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마음이 불안해졌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혼자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은 내겐 큰 모험이었다. 그래도 시도를 한 것은 여수는 몇 번 간 적이 있고, 목적지 또한 찾아가기에 어려운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만 출발하면 당일로 충분히 돌아올 수 있는 거리였다.
휴게소에서 승객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중간 정도 앉아 있던 나도 버스에서 내리려는데 먼저 내린 승객 한 사람이 기사를 붙잡고 여수를 가야하는데 이 휴게소에서 버스를 바꿔 탈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여수’라는 말에 “어머, 저도 여수 가는데요.”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그가 잠깐 기다려 보라며 알아보고 오겠다고 했다. 여수행 버스는 섬진강 휴게소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탈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차라리 이 버스로 순천까지 가는 것이 낫겠다며 의견을 모았다. 어찌 됐건 나는 목적지가 같은 길동무를 만나서 내심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버스가 다시 출발하고 앞자리에 앉아 있던 그가 내 옆자리로 왔다. 여수에 왜 가는지 그때까지 서로 알지 못했으나 자연스레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여수구항 방파제 등대’, 일명 ‘하멜 등대’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등대를 찾아가는 내가 신기하다며 호기심을 보였다. 나는 그에게 지난해에 발간한 ‘등대 기행집’을 선물로 주었다. 등대에서 누구라도 만나면 주려고 한 권을 챙겨 갔던 것인데 길 위의 등대가 되어줄 것 같은 그에게 주고 싶었다.
그는 교사 출신으로 몇 년 전, 명예퇴직을 하고 그동안 못했던 취미생활을 하며 지낸다고 했다. 수석과 LP판 수집을 한다는데 여수에는 고인이 된 가수 김광석의 레코드판을 사기 위해 간다고 했다. 거액을 준비하여 LP판을 사러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등대 투어를 하는 나를 신기해했듯 나 역시 그가 무척 신기하고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비슷한 종류의 사람인지도 몰랐다.
순천에 내린 우리는 KTX역에서 한 구간만 가면 되는 여수로 향했다. 고속열차는 이십 여분 만에 여수엑스포역에 내려 주었다. 각자 볼 일을 보기 위해 우리는 역에서 헤어졌다. 그도 나도 미션 수행이 끝나는 대로 부산 사상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택시로 여수구항 방파제 등대로 갔다. 약간 흐린 날씨였지만 다니기에 딱 좋은 오월의 바람이 불었다. 긴 방파제를 따라 하멜 등대로 향했다. 방파제 벽에는 하멜의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빨간색 하멜 등대는 몇 백 년 전, 이곳에 머물렀던 이방인의 삶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멜 등대라는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바다를 향해 무심하게 서 있었다.
하멜 등대는 몸통에 이름이 새겨진 등대이기도 하다.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네덜란드 상선 ‘스페르웨르호’는 제주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 난파되었다. 여기에 타고 있던 하멜 일행은 왕명에 의해 13년간 조선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억류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중 1663년부터 일본으로 가기 전인 1666년까지 하멜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이 이곳 여수였다.
여수 소리도와 거문도를 갈 때 들렀던 곳이라, 오래 머물 이유는 없었지만 등대 아래 벤치에 앉아 바다 위를 오가는 케이블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배가 난파되어 표류하다 조선 땅으로 흘러들어와 13년을 살았던 하멜 일행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같은 언어를 쓰는 우리 땅에서 고작 몇 시간의 표류에도 하늘이 노랬는데 그 세월을 어떻게 견뎠을까? 곡절 끝에 하멜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하멜 표류기’는 네덜란드로 돌아간 하멜이 동인도회사로부터 밀린 급여와 배상금을 받기 위해 쓴 보고서 형식의 글이었다고 한다.
지나간 역사는 언제나 교훈을 남긴다. 하멜은 필사적으로 살아서 돌아가기로 작정을 했기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지난한 과정이야 말할 것도 없겠다. 인생의 바다에도 예기치 않은 폭풍우와 거센 파도로 삶이 난파되기도 하지 않던가. 그럴 때 단전에 힘을 주고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나아가 가능성이 희박할지라도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 있다면 쉽게 포기하지 말 일이다.
지금 내가 걷는 길은 모험이고 도전이다. 두렵지만, 해내고 났을 때의 성취감은 남다르기에 오늘도 이 길을 나섰다. 이렇게라도 갈 수 있을 때 떠나는 것이다. 시력 약화로 다음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벤치에서 일어나 등대를 다시 한 번 올려다보고 긴 방파제를 천천히 돌아 나왔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차표가 매진이었다. 두 시간 넘게 기다려 다음 버스를 타야 했다. 그것도 딱 두 자리가 남아 있었다. 섬진강 휴게소에서 만났던 길동무는 어찌 됐을까 궁금했는데 용케 다시 만났다. 김광석 LP판 다섯 장을 옆구리에 끼고 나타났다. 성취한 자의 행복한 미소를 가득 머금고서.
우리는 같은 버스에 나란히 앉아서 네 시간 가까이 달려 부산에 닿았다. 길눈 어두운 나를 위해 해운대에서 동해선으로 환승하는 곳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16시간 만에 돌아온 즐거운 표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