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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의 계보와 범맥
1)구산선문(九山禪門)과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관계
한국 선의 최초 기반은 라말려초에 진행된 구산선문을 통해서 형성된다. 신라말 무렵 중국의 선종계에서는 마조 도일의 홍주종(洪州宗)을 중심으로 남종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으며 이 시기 남종의 중심세력은 마조 도일(馬祖 道一; 709~788)의 제자들이었다. 구산선문의 최초기에 남종선을 전한 최초의 인물은 마조계(馬祖系)의 서당 지장(西堂 智藏; 758~814)을 사법하고 돌아온(821년) 원적 도의(圓寂 道義, 생몰미상)였다. 그의 법은 억성사(憶聖寺)의 염거(廉居; ?~844)에게 전해져서 장흥 가지산 보림사를 중심으로 하는 가지산문으로 이어졌다. 홍척(생몰미상)은 도의에 이어서 두 번째로 귀국(826년)한 선승으로서 남원 실상사에서 최초의 산문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설(828년)하였다. 홍척에 이어 진감 혜소(眞鑑 慧昭; 774~850)가 귀국(830년)하여 지리산 삼법화상(三法和尙) 김대비(金大悲)의 옛 터에 육조영당을 짓고 남종선을 선양하였다. 쌍계산문은 구산에 들지 않지만 구산선문과 밀접한 내력이 있어 구산선문 관련 연구에서는 빠질 수 없는 역사적인 산문이다.
구산선문과 그 개산조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진 시기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1940년에 간행된 고려판 『선문조사예참의문(禪門祖師禮懺儀文)』이라는 문헌은 구산선문의 정통성을 근거하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본 자료에는 한국 선종에서 행해진 참회 및 의식문을 수록하였다. 서지의 체제는 향화게(香花偈)를 시작으로 석가모니불에 대한 예경 절차, 선문제1조인 가섭에서부터 제33조인 혜능에 이르기까지 각 조사들에 대한 예참문과 우리나라에 처음 선을 전한 도의를 비롯한 범일(梵一)⋅무염(無染)⋅현욱(玄昱)⋅도헌(道憲)으로부터 보조국사에 이르는 10국사에 대한 예참문이 실려있다.
[사진 2] 『선문조사예참의문』 영인본 내지
迦智山祖師 海外傳燈 道義國師(중략)
闍崛山祖師 螺髮頂珠 梵日國師(〃)
獅子山祖師 霜氣滿天 哲鑑祖師(〃)
聖住山祖師 無舌愈場 無染國師(〃)
鳳林山祖師 造塔供魚 玄昱國師(〃)
曦陽山祖師 山神現請 道憲國師(〃)
桐裏山祖師 南嶽分煇 慧徹國師(〃)
須彌山祖師 太祖王師 利儼尊者(〃)
實相山祖師 九夏持身 洪陟國師(〃)
願力受生 重興祖道 海東佛日 普照國師(〃)
인용한 『선문조사례참의문』의 내용에는 구산문 조사외 보조국사의 위목(位目)이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태고(太古)나 나옹(懶翁)과는 다른 계통에 속한 본서의 집필자가 인식한 한국선의 법맥이었을 것이다. 한편, 편저자에 '긍선(亘璇, 朝鮮)'이라는 기술은 오기(誤記)이거나 조선시대를 살았던 백파 긍선과는 동명이인일 것으로 추정되는 바, 이는 백파 긍선 생몰년(1767~1852) 이전에 간행된 이 책의 다른 판본이 있기 때문이다. 위의 구산문 중에서 희양산문을 제외한 8개 산문은 오직 남종선을 전한 곳이었다. 그러나 희양산문은 산문형성기 이전부터 북종계 법맥의 내력이 있으며 산문형성과 실질적인 법맥인식에 대한 입장차가 있어서 학자들이 다수의 상이한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희양산문의 개산조인 지증 도헌(智證 道憲; 824~882)은 구산선문 중에서 유일하게 중국에 유학하지 않고 산문을 개창하였는데, 그에게 이르기까지의 법맥은 희양산문의 사상경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도헌이 누구로부터 법인을 전수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시대에 따라 달리 파악되었으며 도헌과 긍양의 탑비에 새겨진 희양산문 법계는 이러한 내용들의 근거가 된다. 희양산문의 법맥과 관련된 문제점들을 요약하면 첫째, 희양산문의 법맥은 구산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그 조종(祖宗)은 중국 선종 4조 도신(道信; 580~651)의 법을 이은 법랑(法郞; 632∼?)이라는 점, 둘째 법랑의 제자 신행(信行; 704~779)이 스승의 입적 후에 입당하여 신수~보적의 문인인 지공을 사법하고 왔으므로 희양산은 북종계 산문으로 인식되었다는 점, 셋째 이후 희양산문 중창조인 정진 긍양(靜眞 兢讓; 878~956)이 산문의 법맥을 남종계로 표방했으며 그 조맥(祖脈)을 진 국사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희양산문의 종계(宗系)적 특성은 중국선종 4조 도신(四祖 道信; 580~651)을 계승한 법랑, 북종계의 지공(志空; 생몰미상)을 계승한 신행과 이들을 계승한 것으로 기록된 도헌, 자신을 포함한 희양산 법맥을 남종계로 표방한 긍양 등 전반적인 역사적 추이를 통해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범패 전승의 자료를 보면 조선 숙종의 시기와 경종의 시기에 『신간산보범음집(新刊刪補梵音集)』(1713), 『범음집(梵音集)』(1723)이 간행되었으며, 영조의 시기에 대휘화상이 집필한 『범음종보(梵音宗譜)』(1748), 순조의 시기에 백파스님이 정비한 『작법구감(作法龜鑑)』(1826)이 간행되었으며, 20세기 초에 불교사 편 『불자필람(佛子必覽)』(1931)에 이어 안진호 강백이 편찬한 『석문의범(釋門儀範)』(1935)도 간행된 것으로 보아 범패와 작법은 조선시대에 단절된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1748년(영조4)에 대휘화상이 집필한 『범음종보』에 조선의 범패 계보가 12대까지 밝혀져 있고 다시 각 어장의 대를 이은 문하 수십인들을 기록하고 있어서 억불의 시절에도 범맥이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저 우리 동방은 소리로써 교화하며 서로 전한 자가 진감의 계통이 아닌 자가 없으며, 신라와 고려시대에 그 자취를 계승하였다. 옛것이라 고찰하기 어렵지만, 국초(國初)에 조사 모범(模梵) 국융(國融) 어산이 조사를 이어서 소리의 교화를 크게 진작시켰다. 7대를 지나 설호(雪湖) 어산에서 이름이 두드러졌다. 운계당 법민 선사에게 나아가 단지 성교(聲敎)의 세를 크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내외의 경서와 사서를 통하였다....중략...제1세 사조(嗣祖) 모범(模範) 국융(國融), 제2세 출세(出世) 어산 응준(應俊), 제3세 어산 혜운(惠雲), 제4세 출세 어산 대휘(大輝), 제5세 어산 연청(演淸), 제6세 어산 상환(尙還), 제7세 어산 설호(雪湖) 제8세 운계당 출세 법민(法敏), 제9세 어산 혜감(慧鑑), 운계당 법민선사는 성교(聲敎)로 세(世)를 계승했는데, 모범의 제8세이다. 선과 교로 세를 계승했는데 서산(西山)의 제2세 우운당(友雲堂) 수현(守玄)대사의 첫 번째 제자이다.
한국 선문의 중흥조이자 호남 강백으로 일컬어지는 백파 긍성(白坡 亘璇; 1767~1852)은 의례와 범패의 저본인 『작법귀감』과 더불어 『정혜결사문』ㆍ『선문수경』ㆍ『육조대사법보단경요해』ㆍ『태고암가과석』ㆍ『식지설』ㆍ『오종강요사기』ㆍ『선문념송사기』ㆍ『금강경팔해경』ㆍ『선요기』를 저술한 선⋅교 양종의 대가이다. 백파는 서산 휴정(1520〜1604)의 4대파 중의 하나인 편양 언기(1581〜1644)의 문파이며, 휴정→언기→의심→설제→지안→체정→상언→회정으로 이어진 선맥의 법손이다. 그는 화엄교학과 선을 동시에 수용하여 중도와 돈오(頓悟)를 정리한 『선문수경(禪門手鏡)』을 펴냈는데 여기에 그의 선사상이 잘 드러난다면, 그의 『작법귀감』에는 재공의식에 관한 근본과 절차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책에서 주목되는 것은 의식문의 고ㆍ저ㆍ청ㆍ탁을 가릴 수 있도록 사성에 대해 설명하며 권(圈)과 점(點)으로 표시하고 있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이 당나라 승려 처충(處忠)이 한어 음운에 관하여 설명한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처충이 저술한 『원화운보(元和韻譜)』(806~827)에는 "平聲哀而安, 上聲厲而擧, 去聲淸而遠, 入聲直而促"이라는 대목이 있다. 중국 학자들에 의하면 처충의 이러한 설명은 성조의 성질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바로 이 내용이 백파스님이 작법귀감에서 설명하는 사성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일치하므로 한국 범패와 중국 성조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료인 것이다. 이러한 제반 사항에 비추어 볼 때 당나라로부터 범패를 배워온 진감선사부터 조선 말기 백파에 이르기까지 선맥과 범맥이 승단의 수행 전통 안에서 유기적으로 공존했음을 알 수 있다.
2)선맥과 범맥의 관계
한국의 범맥에 대한 기록은 『범음종보』에 기록된 조선의 범맥(梵脈)에 대한 내용만이 있고, 다른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범패의 계맥(系脈)에 대한 연구는 대개 신라의 진감국사를 조종(祖宗)으로 삼는다는 인식과 함께 한시적 계보를 밝혔을 뿐 한국사 전반에 걸친 범맥은 밝힐 수가 없었다. 범맥의 개념 및 선맥과 범맥의 상호관계를 고찰하고 있는 본 연구자의 관점은 한국 범맥과 중국 범맥의 계통이 연결된다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은 중국 선맥을 근간으로 전개된 한국 선맥의 특성에 근거하는 것이다. 특히 진감국사 혜소는 마조 도일의 법제자인 창주 신감(滄州 神鑑; ?~844)의 선맥을 이어온 선사로서 지리산 쌍계사를 중심으로 남종선맥과 함께 범패를 전했다. 따라서 진감국사 범패의 특성에 의하면 한국의 선맥과 범맥은 중국선종을 통해서 계승됐다는 동일선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지를 소급해서 그 연원인 중국선맥과 범맥의 상호관계를 본다면 선종체계의 근간이 된 『백장청규』를 참고할 수 있다. '총림(叢林)'이란 용어는 초기불교 시대에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현재 사용되고 있는 용어 '총림'의 의미는 선종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사례는 선종체계를 정한 『백장청규』일 것이다. 『백장청규증의기(百丈清規證義記)』에 기록된 백장청규의 체계를 보면 범패는 축리(祝釐), 보은(報恩), 보본(報本), 존조(尊祖), 주지(住持), 양서(兩序), 대중(大眾), 절랍(節臘), 법기(法器)의 각 장별(章別) 항목들로 구성되는 9개 분야의 청규이다. 그 중에 범패는 의례와 관계있는 축리, 보은, 보본, 존조, 주지장을 통해서 수행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유기적으로 조합된 총림체계에서 해당 총림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선맥 개념은 총림에서 중요한 요소였겠지만 범맥은 종합된 구성체계에 속하는 것으로 선맥처럼 중시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선맥을 기록하는 전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지만 범맥에 대한 인식은 선맥과 같이 중시되지 않았다는 상황은 『고승전』에서 언급하는 범패의 전승실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선맥이 총림의 강령(綱)을 이끄는 한편, 총림전반의 살림을 구성하는 내용은 그 강령을 따르는 구조였을 것이니 중국불교에서 범패를 선문불사(禪門佛事)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이유도 이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구산선문의 유풍을 중시하며 단일종단의 전통을 지키고 있던 조선조까지의 범맥 관련 기록들은 해당 분야의 선종적 가치를 중시하는 뿌리의식의 발로였을 가능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선종의 총림체계를 근간으로 보는 범맥론(梵脈論) 외에도 범패의 독립적인 가치관을 논하는 다른 계통의 범맥론도 있을 것임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이론들과 관련하여 병행되고 있다. 특히 한국불교 전통의 종론이 분산되기 시작한 근대기 이후부터는 선맥을 강령으로 하던 단일종단의 의식들에서 자유로워진 다양한 범맥론적 인식이 강해졌을 것도 유추할 수 있다.
3)선맥과 범맥을 전한 진감국사 혜소
한국범패의 시조로 알려진 진감국사 혜소(眞鑑國師 慧昭; 774~850)는 구산선문이 막 뿌리를 내리던 신라말의 유력한 선사로서 애장왕 5년(804)에 입당구법해서 흥덕왕 5년(830)에 귀국 후 지리산 하동 쌍계사를 중심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선종사와 관련한 그의 행장을 살펴보면 비단 한국범패의 범맥에 대한 의미만이 아니라 선종사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진감국사는 신라말, 당에서 구법했던 원적 도의(圓寂 道義; 생몰미상)의 귀국(821년) 및 증각 홍척(證覺 洪陟; 생몰미상)의 실상산문(實相山門) 개창(826년)으로 한국선의 기틀이 다져지기 시작한 라말려초 구산선문의 초기에 지리산 화개(花開)에 쌍계산문(雙溪山門)을 개창하고 육조영당(六祖靈堂)을 세워서 남종선(南宗禪)을 선양했다.
한국불교사에 남긴 진감국사의 업적을 논하자면 그는 쌍계산문을 중심으로 중국 남종선 가풍의 당풍범패를 전했고 구산선문 중에서 유일하게 북종선 산문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희양산문에 남종선맥(南宗禪脈)을 전한 인물로서 한국선종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선사이다. 따라서 진감국사 혜소는 한국불교의 선맥과 범맥을 동시에 전한 인물로서 한국불교음악의 정체성을 규명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단초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또한 그는 한국 선종사에서 유일한 북종선 전통의 산문이 남종선으로 전환하여 한국불교 선맥의 근간인 구산선문 전체가 남종선 단일의 사상체로 완성되는 선종사적 전환을 상징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인물이다.
진감 혜소선사가 당에서 사법한 창주 신감(滄州 神鑑; ?〜844)선사는 마조 도일의 후계로서 『신수과분육학승전(新修科分六學僧傳)』의 혜학(慧學) 선종과(禪宗科)와 『송고승전』 20권 「감통편」에 전하기를 출가 전부터 불교를 받들고 존상 앞에서 범패로 찬탄했으며 동림사의 정소율사에게서 출가한 이래 『열반경』에 능통했으며 마조 도일(諡號; 大寂)에게 법을 받았으며 법력에 감동한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허공에서 찬탄했음을 전한다. 진감 혜소가 그를 만난 시기는 804년(애장왕 5년)으로 전한다.
하동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대공령탑비(眞鑑國師大空靈塔碑)」를 보면 신감과 진감의 만남은 예정된 운명인 것처럼 즉시 삭발하고 심인법을 전수하게 한 것으로 전하고 있고 그곳 대중들의 흠모를 받았다고 하니 선사의 위의가 남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진감선사는 신감선사의 인도로 당시 남종선의 상징도량이었던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신감회상에 돌아가서는 그 곳에 머물면서 제경(諸經)을 섭렵했으며 이후 행각 중에 도의선사를 만나 마조 문하의 실질적 계승자인 백장선사 회상을 참예하는 등 두루 선지식을 참예했다고 전한다.
선사는 도의선사가 먼저 귀국한 후 행각을 멈추고 곧 종남산으로 들어가 3년 동안 산중의 송실을 따 먹으며 선정수행을 하고 다시 함곡관 밖의 네거리에서 짚신을 삼아서 베푸는 보시행으로 보임행(保任行)을 대신하고 입당 27년 만인 830년(흥덕왕 5년)에 신라로 돌아온다. 이 때 흥덕왕이 친서를 보내 '먼저 귀국해서 머물고 있는 도의선사와 더불어 두 보살로 삼나이다'하면서 환영의 뜻을 전하고 머물며 교화할 곳을 마련할 뜻을 전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진감 혜소의 귀국을 실상산문의 개창자인 증각대사 홍척보다 빨랐을 여지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828년 실상산문의 개창이 아직 신라 전역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혹은 지난날 먼저 귀국하여 교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칩거해버린 도의선사와의 친분을 고려한 왕의 배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불교의 범패계보는 이러한 진감선사를 초조(初祖)로 모시고 있다. 선사가 활약한 신라시대에는 한국불교의 특성을 결정하게 되는 중대한 불교사적 변혁이 있었으니 바로 신라 말 도의선사의 귀국(821)으로부터 고려초 희양산문의 중창(경순왕 9년; 935)기까지 진행된 구산선문의 발전이다. 구산선문의 번성은 한국 불교사만이 아니라 범패의 향방에도 중요한 의미로 작용한다. 현재 한국에서 진감선사 전래의 당풍범패가 그 이전 신라에 전하던 고풍, 향풍의 세를 중국 연원인 어산범패의 맥으로 바꿀수 있었던 원인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는데 그 첫째는 구산선문을 통한 선종세력의 흥기로 한국불교의 선종적 특성이 형성된 점, 둘째는 당풍범패로 선종 심법(心法)을 선양한 진감선사 범패의 선문화적(禪文化的) 동질성, 셋째는 중국 연원 어산범패의 우수성이라고 하겠다.
<범패의 수행원리와 활용방안 연구/ 덕림(이병진)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