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합천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전쟁 전 피해>
합천에서는 1949년 9월 4일 지리산 공비토벌대에 연행되어 묘산면 장터 앞 창고에 갇혔던 60여 명의 합천읍 인곡리 주민 중 정기수 등 5명이 공개 총살당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합천에서는 7월 7일 국민보도연맹원 등 100여 명의 주민들이 예비검속되었으나 합천 국회의원 노기영의 만류로 다음날 몇 명만을 수감하고 나머지는 모두 풀어주었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합천경찰서장은 강당에서 “이중 골로 가면 가장 억울타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봐라”라고 하면서 풀어주었다고 한다.
용주면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전쟁 전 용주면에는 국민보도연맹원이 100여 명이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이 중 50여 명이 용주지서 경찰에 의해 용주국민학교에 갇혔으나 지서장이 모두 풀어주어 희생자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합천경찰서는 이들을 다시 검속하여 두 차례에 걸쳐 학살했다.
합천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은 7월 18일경부터 회의에 참가하라는 등의 이유로 다시 검속되기 시작했으며, 7월 21일 합천경찰서는 당시 군내 주민 32명과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16명을 산청군 생비량면 화현리 방아재로 끌고 가 삼가지서장 이남원의 지휘 하에 집단 살해했다.
이후 삼가지서는 합천경찰서로부터 ‘7월 31일 저녁 9시까지 후퇴하라’는 지시를 받고, 후퇴하기 직전에 합천면의 이이영 등 12명과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40여 명의 주민들을 용주면 용주지서 뒷산, 합천면 계림리 야산 등지로 끌고 가 집단 살해하였다. 당시 합천경찰서 사찰주임은 지서장에게 ‘합숙을 시키고 있다가 후퇴하게 되면 보도연맹원등을 사살하고 가라’는 상부의 지시를 전달했다고 한다.
대병면에서도 지서에 혀 있던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모두 살해당다.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할 당시 합천지역(봉산면 권빈리)에서는 미 24사단과 국군 17연대가 1950년 7월 30일부터 8월 3일까지 주둔했다.
<미군폭격 피해>
합천은 낙동강 전선이 형성된 후 한 달 이상 폭격피해를 입었고 합천읍은 B-29등에 의해 거의 매일 폭격을 당하다시피 했다. 1950년 8월 25일 미 공군의 폭격으로 합천읍 합천리 폭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9월 1일에는 용주면 평산리가 폭격을 당해 주민들이 사상당했다. 9월 7일에는 율곡면 문림리 주민들이 미 공군의 네이팜탄과 기총사격으로 주민들이 희생당하고 가옥이 불에 탔다. 9월 24일에는 10시부터 1시간 동안 자행된 미 공군의 네이팜 폭격과 기총사격과 지상군의 포격으로 합천읍 서산리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부역혐의 피해>
수복 후 합천지역에서도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이 집단희생된 사건이 확인되었다.
1950년 9월 24일 미 2사단이 합천에 진입했는데, 율곡면 와리 주민들이 1950년 9월 25일 수복한 군인들에 의해 부역자로 끌려간 뒤 희생되었다. 이 사건으로 행방불명된 주민은 율곡국민학교 교사였던 심기환 등 3명이었다.
인민군이 합천을 점령하자 심기환 등 5명의 국민학교 교사들이 15일 가량 자위대에서 활동했으며, 마을 주민 중 청장년들은 대부분 포탄 운반 등의 부역행위에 동원되었다. 얼마 후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합천을 수복한 유엔군과 국군은 인민군에게 동조하거나 부역한 주민들을 색출하여 심기환 등 3명을 부역활동혐의로 연행한 후 총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났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용주면에서도 있었다. 인민군이 합천지역을 점령하자 용주면 마을 청년 대부분이 실탄이나 포탄을 나르는 일에 강제동원되었다. 국군 수복 후에도 마을 주민들이 소롱산에 후퇴하지 못하고 숨어 있던 패잔 인민군의 강요에 의해 음식을 제공하게 되었다. 당시 마을 대표자였던 우곡리 김정호, 김정복, 강해석은 용주지서에 이 사실을 자수하기도 했으나, 결국 부역했다는 혐의로 합천경찰서로 끌려갔다. 김정호는 10월 3일 ‘옥가장터’에서 총살되었다.
가야면 매안리 주민들은 1951년 1월 초 가야지서 경찰에게 잡혀 야로면 만대산 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희생자는 신삼석, 이건택, 하갑출 외 1명이다. 인민군 점령기 마을 주민들은 인민군들에 의해 낙동강까지 무기나 식량을 날라야 했는데, 이 때문에 신삼석 등 마을 주민들이 경찰의 체포를 피해 숨어 다녀야 했다.
신삼석은 1951년 1월 초순 오재병과 함께 지내고 있었는데, 가야면 시장에 장보러 나왔다가 가야지서 경찰에게 잡혀 야로면 만대산 골짜기(또는 분기모리골짜기)에서 김건택, 하갑출, 영전마을 주민 1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이들 시신은 1951년 7월 18일에 발견되었는데, 당시 야로면 동촌에 살던 김건택 처가 “분기모리 골짜기에 시체가 있는데 아무도 안 찾아가니 가보자”고 해발견하게 되었다. 당시 시체가 오래되어 얼굴로는 구별할 수 없었으나 입고 있던 삼베옷과 조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상 합천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다음 <표>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