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적 사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에서 성직을 맡거나 잔류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 칼빈은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하였다. 교황주의자들의 박해가 두려워서 종교적 가장과 은폐를 택한 자들을 니고데모파(Nicodemites)라고 하는데, 니고데모파의 주장은 ‘왜 쓸데없이 박해를 자초하는가? 우리의 행위는 지혜로운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칼빈은 25년에 걸쳐서 니고데모파를 공격했다. 칼빈이 이렇게까지 니고데모파에 대해서 물고 늘어진 데에는 칼빈 사상의 모티브가 반우상숭배론이라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칼빈은 가톨릭 교회가 피조물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그러한 우상숭배를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니고데모파의 핵심적 주장과 칼빈의 반박 내용은 강경림의 책 『칼빈과 니고데모주의』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일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가독성을 위하여 각주를 생략했음을 밝혀 둔다.
이 지점에서 니고데모파에 대한 칼빈의 핵심적인 논박 내용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칼빈의 반니고데모파 저작 가운데 『소논문』(Petit traicté)과 『변명』(Excuse)을 중심으로 니고데모파가 내세우는 여섯 가지 주장과 이에 대한 칼빈의 비판 내용을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겠다.
첫째,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의식들에 동참하고 성상 앞에 무릎을 꿇지만, 우리 마음은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고 있으며, 또한 외면적으로 우리가 교황파의 관습들을 깨뜨리지는 않지만,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받들고 있다고 니고데모파는 주장한다.
칼빈은 니고데모파가 매우 파렴치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고 비판한다. 말하자면 영혼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데도 육신이 마귀에게 속할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완전한 인간으로 구원하시지 않았는가?(고전 10:21). 또한 무엇보다도 다니엘서 3장을 숙고해 보도록 하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위의 니고데모파와 똑같은 구실을 내세움으로써 "극렬히 타는 풀무"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수 없었겠는가? 정말 성경의 기술에 따르면 죽음을 두려워하여 거짓된 타협을 정당화시키려는 온갖 술책을 계속 동원하면서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우리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모범을 명심하자.
둘째, 니고데모파는 스스로를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즉 구약과 신약의 이방인들을 오늘날의 교황파와 비교하는 것은 불가하다. 왜냐하면 그 이방인들은 거짓된 의식들을 장려할 뿐 아니라, 그들 나름의 몇 가지 환상대로 신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물론 교황 추종자들은 전도되고 적잖게 부패한 관습들을 행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숭배하고자 한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비판하기를, 하나님께서 단호히 정죄하고 배척하는 미신적인 관습들을 고안하는 자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마귀를 섬기는 자라고 한다(롬 1:23; 민 21:8; 왕하 18:4). 교황주의자들은 숭고한 것을 허무한 존재의 상이나 형상으로 바꾸기 때문에, 그들은 창조주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을 섬기고 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교황파의 우상숭배를 반드시 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셋째,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교황파의 우상숭배에 공개적으로 대항하는 태도를 취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러한 도전으로 인해 카톨릭 국가들에서 곧바로 복음의 쇠퇴가 야기되지 않겠는가?
칼빈은 다시금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응수한다. 즉 당신네들은 똑같이 박해를 감수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이 없을까 하고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네들은 그러한 구실로 여러분의 귀부인, 즉 “육적인 일에 신중함"(la prudence charnelle)을 섬기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 대한 공개적인 신앙고백은 여러분께 박해를 가져다 주거나, 아니면 우리에게 다른 고난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굴복하지 않으려 하는 자는 마땅히 다른 주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 전에 아브라함이 고백한 것처럼 그렇게 신앙을 고백하는 이에게는 축복이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적절한 것을 미리 선정해 놓으실 것이다(창 22:8).
넷째, 그래도 “육적인 일에 신중한 자”는 물음을 던진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이 우상숭배하는 지역에서 등을 돌리게 되면, 정말 카톨릭 국가들에서는 더 이상 신자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이 여전히 전파될 수 있겠는가?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순수하게 섬기는 나라들의 수가 너무 적어서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망명지를 전혀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당신네들의 하나님을 향한 신중함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고 반박한다. 그래도 우리는 추방된 모든 개신교도들이 피난처를 찾을 수 있게 하는 데로 영주들의 마음이 향하게끔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도록 하자. 우리가 오로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담대하게 그분께 의뢰하면 주께서 복음의 문을 열어주시고 신자들을 보살피실 방도를 이미 구해 놓으셨을 것이다. 게다가 마치 예수를 위하여 자의로 자신의 나라를 떠나는 모든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단지 그의 입술로만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보다 더 큰 권능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전파된다. 또한 카톨릭 영지 내에 있는 사람을 믿음으로 불러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자신의 나라를 돌보시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째, 지금 우선 보기에는 겸손하게 들리고 다수에 의해 제안된 하나의 논점이 등장한다. 즉 우리는 정말 기꺼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에 대한 모든 염려를 물리치고자 한다. 그러나 거기에 필요한 힘과 끈기는 우리에게 정말 아주 부족하다.
칼빈은 이 진술을 앞선 진술들보다 훨씬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따라서 연약한 믿음의 형제들에게 우선 그들의 죄를 눈물과 탄식으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어떤 경우도 스스로 의롭다 하거나 죄의 타성에 젖지 않도록 경고한다. 모든 신자는 각자 또한 간절히 교황파의 나락으로부터 해방되어 어떤 길로든지 우상숭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그래도 자신의 연약함에 빠지는 이는 니고데모파로서 자신의 주님을 부인하는 자이다. 물론 환경의 압박과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항상 다시금 교황파의 우상숭배에 참여하지만 여전히 신실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또한 실제적인 훈계를 받아들이는 모든 신실한 믿음의 형제들에 대해서는 칼빈은 연민을 느끼고 있다.
여섯째, 마지막으로 니고데모파들은 칼빈에게 최종적이고 적개심이 가득찬 비판만 비난을 퍼붓는다. 즉 당신은 안전한 항구에서 우리가 당하는 폭풍에 대해 홀륭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당신이 우리 입장에 있게 된다면 당신은 우리와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자신의 병사들은 전방에 던져놓고서는 자신은 대포로부터 멀리 안전하게 피해 있는 군사령관으로 거드럼을 피우고 있는 셈이다.
칼빈은 말머리를 열면서 자신은 니고데모파들의 고소자로 나선 것이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향한다고 응수한다. 즉 당신네들은 신약 성경의 교회들을 보시오! 예컨대 당신네들이 나의 경고의 말에 반응하지 않듯이, 교회들이 사도들의 사역에 감사한 마음 없이 반응했던가? 이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신앙을 위해 끊임없는 박해를 견디는 일에 익숙해짐과 동시에 오로지 한 분만을 위해 스스로 그 가운데서 연단되도록 권면을 받았다(히 12:4; 벧전 4:12). 그래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한다. 사람들이 나를 “수령"(capitaine)으로 비유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이 사단의 왕국에 대항한 나의 영적인 싸움을 고려해 넣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악의에 차고 비인간적인가? 하나님이 박해자들 앞에서 아직도 나를 지키시는 오늘 나는 혀와 펜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한다. 비록 내일 하나님께서 나를 가장 깊은 고통 속으로 인도하시게 될지라도 나는 나의 생명을 제물로 삼아 여전히 정직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비록 내가 나의 삶을 통해 나의 설교를 부인할지라도 당신네 니고데모파는 그것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각자는 자신의 주와 존망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주님께서 진심으로 믿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입술로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공적으로 고백하는 자들을 심판하신다.
한 교황파의 나라에 살고 있는 개신교도는 자신이 그런 종류의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기 위해 항상 새로운 탈출구를 찾지 못할 경우에는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만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에 해당하는 사람은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다. 즉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시 16:4). 이 같은 순결을 거부한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뿐 아니라 자신들을 바른 길에 이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강경림 저, 『칼빈과 니고데모주의』(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pp. 211-217.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반우상숭배론에서 어영부영 타협하고 잔머리 굴리는 신자들을 무안케 하는 논리가 많은 것 같습니다.
네, 공감합니다.
장 칼뱅, 박건택 역,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부흥과 개혁사). 이 책은 1차 자료로서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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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서신>은 프랑스의 니고데모파에 대해 쓴 글로 교황 제도의 미신과 우상숭배를 애굽, 바벨론, 유대교 회당의 미신과 같은 수준으로 여기고 이를 피하라고 가르치며, 교황 제도에서 고위 성직자의 비리를 지적하면서 순교와 전적 포기로 사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할 것이면 이를 포기하라고 한다. <니고데모파에게 주는 해명>, <네 편의 설교> 외에 <신도의 처신>도 “복음 진리를 아는 신도가 교황파 가운데서 해야 할 처신”이라는 원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글이다.
칼뱅은 니고데모파와 같은 사람들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약간의 흔적을 가지고 있고 그의 말씀에 어느 정도 경의를 보이나, 그래도 아직도 하나님의 영광에 봉사하는 것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고, 세상과 자신의 삶을 잊는 것임을 알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충분히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자기들에게 충분히 알려져 있는 것에 대해 묻는 자들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당치않은 변명으로 둘러대려고 생각하는 자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이미 설교한바 있는 내용들을 다시 보고 정리하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서신> 중에서]
오늘날 교회가 처해 있는 상태를 자세히 주시해 본다면, 그것을 먼저 늑대의 아가리에서 빼앗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에게로 회복할 수 없으며, 사람들의 함정에서 구출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목장으로 이끌 수 없으며, 오류의 미로에서 빼내지 않고서는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사탄의 일꾼들이 종교를 전복시키고 멸망시키는 일을 진행했으므로, 종교는 그들의 불경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인간의 마음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말소하고 매장하는 일을 진행했으므로, 진리는 그들의 거짓에서 보호되지 않는 한 빛 가운데 드러날 수 없습니다. 저 탁월한 파수꾼과 목자들은 무엇 때문에 있습니까? 그들은 칼이 먼 곳이 아니라 매우 가까운 목에 있음을 봅니다. 그들은 양 떼가 늑대의 함정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잡혀 이빨로 찢기는 것을 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 걱정 없이 만사가 평안한 것처럼 게으른 안식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목숨에 대해 두려움이 있는 자들이 공공의 안정에 대한 염려는 제쳐 놓고 도리어 자기 자신에 대해 염려하고 있음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장코뱅 카톨릭 미사 참여를 우상숭배로 규정하니 뜻이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칼빈은 미사에는 외적 의식 이상의 문제점이 있다고 본다. 로마 교회가 미사를 신성시하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미사를 단순히 하찮은 것으로 간주할 수 없었고 우상숭배라고 공격하였다. ... 미사의 신성모독을 앞에 두고 침묵을 지킴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배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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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두 서신」과 니코데미즘>, pp.48~49
칼빈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오늘의 할례 의식인 교회의 미사 의식의 오류를 증언하기 위해 마땅히 미사 참여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문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바울이 볼 때 할례는 아무것도 아닌 의식 행위였으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구원에 필수적인 의식으로 보았다. 그런데
미사가 신성 모독적 의식이라면 믿는 자는 여기에 대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 경우에는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자유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칼빈이 여기서 지시하는 복음의 진리는 바로 「Psychopannychia」에서 그가 논쟁을 통해서 수호해야 했던 진리와 다른 것이 아니다. 미사의 신성모독을 앞에 두고 침묵을 지킴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배신이다.
그런데 프랑스에는 자신의 복음 신앙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여 미사에 여전히 참여하는 자들이 있다: "결코 자유를 사랑에 봉사케 함이 없이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바울의 신중함을 위장하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자신들의 안식을 돌보기 위해서 자유에 대한 모든 언급이 매장되기를 바란다. 자유를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적절한 곳에서 절제하는 것만큼이나 이웃 사람들의 안녕과 교화를 위하여 상호 간에 자유를 사용하는 것이 이웃을 위하여 중요하다.
@장코뱅 칼빈총서 번역서가 계속 출간되고 있어서 좋네요. 양질의 학술서들을 많이 읽고 출판도 많이 하고 그러면 좋겠어요.
이 책의 소개글도 좋지만 본문은 더 깊이 있는 글이 많을 것 같네요.
우상숭배 이야기를 보면서 조금은 신사참배 문제가 떠올랐습니다. 신사참배를 자행한 분들도 속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을 것 같기는 합니다.
네,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좋은 포스팅을 잘 읽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신실하고 정직하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