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평화 2013 제주 4.3 평화 기행
- 너븐숭이에서 낙선동 4.3성터까지
197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제주 4.3사건을 주제로 다룬 소설 한편이 게재되었다. 소설의 내용은 처음으로 제주 4.3 사건의 비극적 사연을 일반 대중들에게 알리는 첫 계기가 되었다. 물론 작가 현기영은 그 전에도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 작품을 쓰기는 했지만 이 작품 "순이삼촌"은 이전 작품과는 접근방식, 내용과 성격, 그리고 그 파장이 완전히 다른 효과를 내었다. 4.3사건이 발발한지 삼심년이 넘은 후에야 4.3사건의 본질과 제주도민의 아픔을 처음으로 느껴볼 수 있는 문학작품이었고 작품이 인구에 회자되면서 결국 작가 현기영은 서슬퍼런 박정희 정권 유신체제 아래서 또 모진 고문의 대상이 되었다.
제주 4.3 사건은 한라산지역을 제외한 제주도 전역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사건을 일컫지만 그 대표적인 사건을 뽑으라고 한다면 대략 북쪽의 북촌리 마을 사건과 남쪽의 동광리 마을 큰넓궤 사건을 첫손가락에 꼽고는 한다. 과연 4.3 당시 북촌리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번 글은 소설 순이삼촌의 내용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꾸며 북촌리에서 일어난 일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작가 현기영
제주도의 역사적 사건을 작품소재로 삼아 문학을 통해 민중의 역사를 재조명함으로써 민족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평가되는 제주 출신의 소설가이다. 제주도 제주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1960년 제주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7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졸업 후 서울 광신중학교, 서울사대부중 등에서 교직생활을 하면서 소설습작을 병행했다.
1978년 제주도 4·3사건을 작품화한 중편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함으로써, 제주도의 민중사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문제작가로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작품으로 필화사건을 겪는 등 개인적 고통이 따랐으나 1970년대 최고의 문제작으로 평가받음으로써 향후 작품세계를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4·3사건을 문학적 화두로 삼아 《도령마루의 까마귀》(1979) 《해룡 이야기》(1979) 《길》(1981) 《어떤 생애》(1983) 《아스팔트》(1984) 등의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역사적 수난기에 처한 제주민중의 삶을 치밀하게 탐색해 '4·3 작가'로 불리게 된다. 이러한 문학적 활동과 함께 제주 4·3연구소 소장과 제주사회문제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꾸준히 4·3 관련 활동을 펼치고 있다.
소설 줄거리
제주도를 떠나 서울에서 지내던 나는 음력 섣달 열여드레인 할아버지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8년 만에 고향인 제주 서촌마을을 방문한다. 거기서 나는 순이삼촌(제주에서는 촌수 따지기 어려운 먼 친척어른을 남녀 구분 없이 삼촌이라 부른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30여 년 전의 참혹한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순이삼촌은 작년 한해 서울의 우리집에 와서 식모노릇을 하던 분이다. 그녀는 아내와 쌀문제로 말다툼을 하게 되어 제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녀를 데리러 온 사위 장씨로부터 순이삼촌에게 환청증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순이삼촌은 몇 년 전에 이웃집에서 메주콩을 잃어버린 일로 시비가 벌어진 적이 있는데, 그때 이웃사람이 경찰서로 가자고 말하자 아무말도 못하고 주저앉아버리는 바람에 범인으로 오해받으면서 환청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순이삼촌의 파출소 기피증은 30여 년 전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0여 년 전 그해 음력 12월 19일 국군에 의해 학교운동장에 소집된 마을사람들은 자세한 영문도 모른 채 무참하게 참살당했다. 군경측의 무리한 작전과 이념에 대한 맹신이 빚어낸 비극적 사건이었다. 그 학살현장에서 두 아이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순이삼촌은 그후 경찰에 대한 심한 기피증이 생겼고, 메주콩사건으로 결벽증까지 생겼으며, 나중에는 환청증세도 겹치게 된 것이다. 평생 그날의 사건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순이삼촌은 자식이 둘이나 묻힌 그 옴팡밭에서 사람의 뼈와 탄피 등을 골라내며 30년을 과부로 살아오다가 그날의 일을 환청으로 듣게 되고, 마침내 그 살육의 현장에서 꿩약을 먹고 자살을 하게 된다. 나는 마을사람들이 30년이 지나고도 그 일을 고발하지 못하는 것은 심한 레드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한달 전에 자살한 순이삼촌의 삶은 이미 30여 년 전의 시간 속에서 정지해버린 유예된 죽음이었다고 생각한다.
*북촌리의 집단 학살(홍순식 증언)
비극의 날은 1948년 음력 12월 19일이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일의 발단은 구좌읍 세화리 주둔 제2연대 3대대 7중대가 대대 작전에 합류하기 위해 대대 본부가 주둔하고 있는 함덕이로 오다가 바로 동쪽 마을인 북촌리의 본동과 해동 사이 길가에서 게릴라의 기습을 받고 2명의 군인이 사망한데서부터 발단했다. 군부대는 급했던지 2명의 전사자를 내버린 채 본부로 가버렸다. 그들이 가버리자 마을에서는 8명의 연로자들이 두 군인의 시신을 담가에 들고 함덕리 대대 본부로 찾아갔다. 그들이 갔을 때 대대장은 부재중이었다. 하급 장교들은 담가를 들고 간 노인들을 함덕 해변 서우봉 기슭으로 끌고 가서는 모두 사살해 버렸다. 이 소식이 마을에 전달되기 전, 중위가 인솔하는 2개 소대쯤의 병력이 북촌리 동쪽으로부터 진격해오며 마을 사람들을 학교 마당으로 집결시켰다. 진입하자마자 군인들은 무차별 사살을 했다. 홍순식 씨는 이틀 사이에 죽은 마을 사람이 600명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방림씨네는 며느리까지 6명이 당한 경우라고 했다. 한봉수나 태림이네도 비슷한 경우이고, 홍한식씨의 이모 오문홍씨의 경우 일곱 살짜리 딸, 열다섯 살짜리 딸을 포함, 40대 부부가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처가도 할머니 두 분을 포함하여 처조부모와 처부의 동생들까지 9명이 다쳤다. '제삿날은 메그릇만 올려도 상이 꽉 찬다'고 했다.
북촌 마을을 동쪽으로 벗어나면 언덕 하나가 나선다. 그 북쪽 소나무밭 언덕에 얼마 전까지 충혼비 하나가 서 있었다. 이 충혼비에는 육군 중위 박재규 등 23명의 이름이 기록돼 있었다. 홍씨에 따르면 북촌 사건에 대한 공비들의 보복 기습으로 희생된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세운 비석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마을 하나를 건너 서쪽에는 그 무차별 살육의 현장인 북촌국민학교가 있다. 그러나 아직 여기서 죽은 수백 명의 영혼들을 위해서는 아무런 표지도 없다.
*제주시 동부 8리에서 일어난 학살을 당시 여덟 살로 겪은 부원경 씨는 당시 마을의 암울했던 상황을 [제주의 마을·봉개리]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총소리만 들리면 밥상 머리에 앉았다가도, 밭을 갈다가도, 타작을 하다가도, 동쪽에서 들리면 서쪽으로, 서쪽에서 들리면 동쪽으로 밥그릇을 팽개쳐 두고, 재기를 팽개쳐 두고, 도깨를 팽개쳐두고 슛겨다니던 아버지와 형님들을 기억한다. 낮에는 아래쪽에서 총을 겨누면 아버지와 형님들은 조가 없노라고, 살려달라고 손을 부비고, 밤에는 위쪽에서 총을 겨누면 똑같이 아버지와 형님은 손을 부볐다. 젊은 어머님과 누나 또한 가련한 눈빛으로 손을 부볐다. 밤에는 반동 분자로 몰리고 낮에는 빨갱이로 몰리고....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던가"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푸른 제복에 푸른 철모를 쓴 사람들이 긴대빗자루에 불을 붙이고는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그러자 온 마을 이 불길에 휩싸였다. 우리집 사랑채와 별채, 외양간도 모두 불길에 휩싸였다. ....그날 밤은 왜 그리고 춥던지. 아버지와 어머님은 우리들을 꼭 품에 껴안고 울타리 밑에서 밤을 새웠다. 그때 땀냄새인지 다른 무슨 냄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모님의 그 품 냄새를 떠올릴 때 내 지금의 불효가 가슴 쓰리다."
애기무덤
한라 영산이 푸르게
푸르게 지켜보는 조천읍 북촌마을
4.3 사태의 군인 한 두 명 다쳤다고
마을사람 모두 불러 모아 무차별 난사했던
총부리 서슬이 아직도 남아 있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너븐숭이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아직 눈도 떠 보지 못한 아기들일까
제대로 묻어주지도 못한
어머니의 한도 함께 묻힌 애기 돌무덤
사람이 죽으면
흙속에 묻히는 줄로만 알았던 우리 눈에는
너무 낯선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목이 메인다
누가 이 주검을 위해
한 줌 흙조차 허락하지 않았을까
누가 이 아기의 무덤에
흙 한 줌 뿌릴 시간조차 뺏아 갔을까
돌무덤 속에 곱게 삭아 내렸을
그 어린 영혼
구천을 떠도는 어린영혼 앞에
두 손을 모은다
용서를 빈다
제발 이 살아있는 우리들을 용서하소서
용서를 빌고
또 빈다
-양영길님의 애기 돌무덤 앞에서-
출처 오마이뉴스, 너븐숭이 애기돌 무덤앞에 가면 목이 멘다.
옴팡밭은 움푹 패인 듯 오목하게 들어간 밭이란 뜻을 가진 제주도 방언이라 볼 수 있다.
주검의 토양분이 되어 지슬도 그외 여러 밭작물도 그후로 몇년간 다른 밭보다 더 실하게 내놓았다는 밭, 그 밭에서 난 것들은 되려 꺼릴 수밖에 없었던 제주도의 아픔, 밭을 일굴 때마다 총알이나 유골을 발견하던 순이삼촌, 그이가 그 옴팡밭에서 어떤 마음과 심정이었을지 그리고 왜 그 밭에 가서 생을 마감해야 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