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를 기억한다. 거짓과 무지와 싸우고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적어도 다섯 가지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던 그의 역설을.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urica 감독의 1995년 영화 <언더그라운드>는 그것의 권화權化였다. 표현주의와 사실주의의 기괴한 혼합을 통해 영화작가의 시대정신이 보여줘야 할 것과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의 완벽한 결합을 실천해낸 것이다.
3시간의 영상으로 옛 유고의 50년 현대사를, 유구한 발칸 반도의 피어린 역사를 갈무리하기는 물론 어렵다. 그러나 작가론으로 만나보는 쿠스트리차의 역사의식과 생의 철학은 낯설되 진지하고 격동적이며 경이롭다. 디오니소스적인 그의 카메라의 눈은 처절한 역사와 현실을 광인의 몸짓으로 해부하면서 아폴론적 소망을 갈구한다. 언제나 에토스의 비극을 이겨내지 못했던 그의 영화혼은 이번에도 역시 작품의 끝에서 신비한 상상화면으로 한 맺힌 절규를 대신하고자 한다.
그는 항상 넘치는 은유와 우의로 역사와 현실을 본다. <아빠는 출장 중>(1988)에서 주인공 소녀의 몽유병은 대지와 섹스의 뒤틀린 모순 관계를 직시함으로써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의 상징이었고, <집시의 시간>(1989)의 집시도 대지의 운명과 유구성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언더그라운드>는 그 처절한 대지의 운명을 지하세계와 비유하면서 행복한 미래를 희구한다. 가혹한 역사와 현실이 꿈에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듯이. 그래서 그의 영화세계는 일견 나약하고 몽상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거듭될수록 치열하면서도 엄숙한 무게 또한 더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만큼 그는 기구한 민족적 비극을 숭엄한 대지의 숨결로 승화시키고자 애쓴다. 그 끝에서 운명과 형식의 빛나는 융합을 본다. 그것은 역사를 투시하는 동시에 그 역사가 소망하는 것까지 창조하고자 하는 진실한 영화혼의 분출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 관한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의 비난에 대해서는 동조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그들은 제국주의가 선사한 발칸 반도의 비극을, 강대국들의 군화에 짓밟힌 천년의 상처를 참회하지 않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극단적인 신파의 광기를 결합시킨 쿠스트리차의 비장한 심정을, 조국과 동포에 대한 사랑을 펠리니적 서커스의 세계로 표현하는 그 눈물겨운 시선을, 그리고 십자가와 대포와 땅굴 등이 얼마나 처절한 분노의 상징인지를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우정과 사랑과 배신을 민족분쟁의 알레고리로 사용한 까닭이 외세에 비참하게 기만당한 오욕의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였다는 분명한 사실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최소한 전편에 가득 찬 대지의 빛깔이 그저 로컬리즘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신제국주의적 비판은 자제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문제는 에필로그 시퀀스. 상상화면으로 처리한 이 시퀀스가 범유고적 화합을 지향하는 것으로 읽힌다면 영화사 100년을 부끄럽지 않게 해준 기념비적 작품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용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