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평수의 집들이 도시락처럼 포개져 차곡차곡 서른 층 쌓여있다. 우리 집 소파 위에 그들의 소파가 포개어져 있고 내가건 텔레비전 모니터가 걸린 벽에서 그 집 벽걸이 티브이도 웅웅 소리를 낸다. 식탁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리는 저녁 시간이면 콩콩거리는 발소리들이 층층으로 이어진다. 자정이 다 되어 씻는 걸 보니 늦은 장사를 하고 돌아온 모양이다. 침대 위에 몸을 누일 때쯤이면 위층에서 삐거덕 소리가 들린다. 2703호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 2603호는 그들과 사는 모습이 비슷하다는 게 적이 안심된다.
‘소길댁.’ 가수 이효리의 택호다. 음악가 이상순과의 결혼 후 제주도 애월읍 소길리에 내려가 자연의 품에 안겨 사는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한 지인은 ‘소길댁’ 하나만을 듣고 이효리의 집을 찾아 나섰으나 실패했다는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소길’이라고 발음해 보면 왠지 온갖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풍경 고운 좁은 숲길이 있는 마을 같기도 하고 희고 깨끗한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피안처 느낌도 든다. 연못이나 늪이 있고 빽빽한 나무가 있어 축축한 숲의 향이 가득한 마을을 그려보기도 한다. 나만의 생각이지만 동네 이름에 번져가는 그리움이 함께한다.
구포시장에 가면 ‘울진상회’라는 간판을 건 잡곡 가게가 있다. 울진이 고향인 나는 굳이 구포장터 그 집, 울진 댁을 찾는다. “왔니껴” 하는 목소리가 외숙모님 같아 “가시더.”하는 인사말에 울컥해지는 심사를 은근 즐긴다. 한 홉의 차조보다 찰진 무엇이 당기는 힘을 어쩌지 못한다. 무거운 보따리도 마다않고 먼 곳까지 가서 잡곡을 사 오면 만족감에 흐뭇하다. 그러나 동질감을 잃고 이질적 삶을 사는 사람이 배척까지 당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언젠가 영화(향수)를 본 적이 있다.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1985년에 쓴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절대적인 후각의 소유자 그루누이가 시궁창 같은 생선가게 한구석에서 태어나 썩은 생선과 함께 버려졌을 때 스크린에서 뿜어나던 역겨운 비린내가 잊히지 않는다. 물론 냄새가 어떻게 화면 밖의 내게 닿을 수 있을까마는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람의 몸 내와 여자의 분향, 꽃과 나무와 숲의 향기가 진하게 와 닿았다.
천재적인 후각으로 향수를 만들지만, 남들과 달리 자신에게는 냄새가 없음을 알고 외로워하는 그루누이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반영한다. 무언가 비슷한 향과 문화 소유물을 갖지 못하면 배척당하거나 그 집단으로부터 버림받는 기분이 드는 것은, 집단문화에 익숙해진 결과다. 그루누이가 그토록 원했던 냄새는 다른 사람들과 닮으려는, 그 집단에 속하려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 그루누이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향을 만들기 위해 조향사의 길에 접어들지만 탐향의 욕망으로 살인조차 서슴치 않는다. 멈출 줄 모르는 욕망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 된다.
십오 년 전쯤 부산에서 처음으로 해운대 매립지에 고급 아파트가 입주를 시작했다. 동백섬 입구에 지어진 아파트는 분양 당시 IMF로 힘들었지만, 입주 시에는 부산의 재력가들과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후 부산의 재력가들이 하나둘 이곳에 모이기 시작했다. 새집을 뜯어내고 억 단위의 인테리어를 하는 것도, 그렇지만, 어느 회장을 따라서, 어느 사모님과 덩달아 이동하는 그들을 곁에서 지켜보는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가에는 수입상품과 인테리어 소품들이 즐비했고 비슷한 스타일이나 같은 브랜드의 침구와 가구를 구입하려는 부인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장사치들은 그 마음을 꿰뚫어 어느 회장님, 어느 사모님도 구입해 갔다며 은근히 말을 흘렸다. 부추기면 동하는 심리를 장사꾼들은 잘 알고 있었다.
서울 강남 대치동 유명한 아파트 근처에 낡은 주택이 섬처럼 갇혀있는 동네를 본 적이 있다. 가난하지만 이웃끼리 오순도순 꽃을 심고 가꾸며 인정의 웃음이 끊이지 않던 마을이었다. 가난한 사람들끼리 국수를 삶고 전을 부쳐 나누어 먹었다. 스티로폼 화단에 심은 꽃과 깨진 고무대야에 핀 한 그루 나무처럼 척박한 환경에서도 환한 웃음꽃을 잃지 않았다. 삶의 진정한 가치를 잊고 개발을 못 해 안달하는 가진 사람들은 가난한 모습이 못마땅해 개발을 서둘렀다. 주민 중 일부는 고충건물을 꿈꾸며 동조했다. 모든 건물이 비슷한 높이로 서 있다고 하여 마음의 향기마저 닮아 있을까.
신혼부부나 사회초년생, 대학생을 위한 행복주택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얼마 전 행복 주택지로 지정된 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사회초년생이나 대학생 신혼부부를 위한 임대아파트 단지다. ‘다섯 평 빈민 아파트’를 동네에 들일 수 없다는 게 반대이유였다. ‘빈민 아파트’라는 말이 여론의 뭇매를 맞자 말을 바꾸어 환경문제나 교통문제, 급기야 범죄율이 높아질 것이라고 했지만 속내는 집값이 떨어질까, 월세가 내려 수입이 줄어들까 하는 이기심이었다. 5평에서 11평 사이의 빈민임대아파트라도 구해 신혼살림을 꾸리고 지친 몸이라도 뉘여야 하는 젊은 사람들의 고단함을 기성세대가 조금만 이해한다면 어땠을까. 어른이라면 취직도 어렵고 결혼도 힘든 젊은 사람에게 함부로 던질 말은 아니다. 젊은이들이 모여 동네에 활기가 돌고 노인들만 벅적대는 동네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넘치고 건강한 소비가 늘어난다고 생각을 바꿀 수는 없을까.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살아가려는 욕심이 제집을 잃고 떠도는 사람을 만든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숲에는 재목도 잡목도 함께산다. 늙은 나무와 어린나무가 더불어 자란다. 곧은 나무도 굽은 나무도 어울려 지낸다. 지는 꽃도 피는 꽃도 한 계절에 함께한다. 꽃은 꽃이라서 어여쁘고 잎은 푸르러서 희망차다. 꽃꽂이를 보더라도 큰 꽃 작은 꽃이 함께해야 조화롭다. 푸른 잎도 화려한 꽃도 활짝 핀 꽃도 봉오리도 어울려 있어야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된다. 사람 사는 세상도 다르지 않다.
아파트 속에 티브이와 소파의 위치가 같아도 삶의 방식과 형편은 서로 다르다. 우리 사는 동네에 나와 닮은 듯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어려운 사람도 풍족한 사람도 살고 있다. 상대적으로 작은 평수에 사는 사람도, 큰 평수에 사는 사람도 있다. 걱정 있는 사람도 별걱정 없이 사는 사람도 있다. 욕망의 크기에 비례해 평수가 커지고 충수가 높아져도 사람의 키야 기껏 그게 그거다. 눈높이도 거기서 거기다. 사람의 지위고하, 재산 유무에 따라 눈길과 말투의 높낮이가 달라진다면 얼마나 허접한 우리인가.
예전에 우리들의 물음은 얼마나 다정했던가. “어디 살아요?” “어느 동네 살아요?”는 사심 없는 관심이었다. 소길댁, 울진댁, 매화댁… 동향이거나 가까운 동네 이름만 듣고도 반가운 마음에 반색했다. 지금은 상대의 형편이나 사는 정도를 살피는 척도로 사용되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이제라도 “어디 살아요?” “어디 살았어요?”가 친구가 되고 싶고 필요하면 무엇이든 도와주고 싶다는 두드림이 되기를 바란다.
첫댓글
옳으신말씀입니다.
좋은글잘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