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것
박영기
파란시선 0134
2023년 11월 10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22쪽
ISBN 979-11-91897-66-1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두 번째 생을 펼친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때까지 펼친다
[흰 것]은 박영기 시인의 두 번째 신작 시집으로, 「삐딱하다」,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 「잎이 지는 속도」 등 53편의 시가 실려 있다.
박영기 시인은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났으며, 2007년 [시와 사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딴전을 피우는 일곱 마리 민달팽이에게] [흰 것]을 썼다.
박영기 시인이 구축하고 있는 시적 주체는 그 무엇도 될 수 있다고 자만하는 나르시시즘적 자아가 아니다. 오히려 “가볍고 얇아서 만만”하게 여겨져 “차일 때마다 악을 쓰며 찌그러지는 마음”에 가깝다(「우물이 있는 집」). 그저 걷어차이고 찌그러져도 이가 나가지 않길 바라며 단단한 의지로 스스로를 다독이는 주체, 그 고투의 끝에서 “화석처럼 단단한 토막”이자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한 번 웃는 토막”으로 폭력적 실재를 초극하려는 능동적 주체라 할 수 있다(「木 氏」). “뼈 없는 살을 세워//높이 들어 올린//죽음의//횃불”을 찬란하게 펼치려는 악착과(「자유의 여신상」) “땅에 닿으려는 발버둥”과 “닿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봄을 이끄는 존재가(「눈」) 시인이 이번 시집을 통해 우리에게 형상화한 시적 주체이다. 죽음의 순간에도 “눈 하나 깜박 않고 도마에 누워” “얼음처럼 차고 맑”은 시계(視界)를 잃지 않는 주체(「역할극」), 그럼으로써 세계로부터 지워지는 고통을 다시 삶의 의지로 전유하고자 하는 주체. 그리하여 주체는 이전과 다른 가능성 속에서 “두 번째 생을 얇고 가벼운 생을 조심조심 펼친다 마음껏 펼친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때까지 펼친다”(「다시 그린 그림」). 새로운 날개를 펼쳐 “다시 그린 그림”은 강렬한 붉음으로 충만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아직 쓰이지 않은 “흰 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이상 이병국 시인・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박영기의 시는 계속 미끄러지는 중이다. 말하는 대상이 ‘오리’면 ‘오리’에 대해서, ‘무환자나무’면 ‘무환자나무’에 대해서 계속 미끄러지며 말을 이어 간다. 심지어 실명인 ‘공효진’조차 ‘공효진’이라는 기표를 따라 끊임없이 확대재생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종내에는 ‘공효진’도 아니고 ‘무환자나무’도 아니고 ‘오리’도 아닌 무엇이 남아 여백을 채우는 시. 혹은 “그 무엇도 아닌 것”이 그 무엇도 아닌 채로 “그 무엇이 되어 가는”(「바람행성」) 시라고 해도 상관없는 이 이상한 기표의 흐름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뭐라고 부르든 기표가 승한 시에서 흔히 보이는 언어유희가 이상하게 박영기의 시에서는 유희로만 읽히지 않는다. 끝없이 미끄러지는 와중에도 날카롭게 찔러 오는 이미지가 되풀이되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마치 “삼 년 동안 같은 꿈을 왜 밤마다 다르게 꾸는지/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녹」) 사람처럼 어리둥절하고 괴로운 표정을 짓는 시의 화자는 그래서 꿈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현실에도 안착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춤의 주인공처럼 스텝을 밟는다. 어찌 보면 “땅에 닿으려는 발버둥” 같고 또 어찌 보면 “닿지 않으려는 안간힘”(「눈」) 같은 보법으로 밀고 나가는 시에서 “맨 끝에 붙어 가는” 존재는 다름 아닌 ‘나’다(「개미 행렬」). 앞장서는 걸음은 어정쩡하고 마지못해 뒤따르는 ‘나’는 맨 뒤에서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까? 돌이켜보면 삶의 어느 대목에선가 그런 표정을 한 번쯤 본 것도 같다. 거울처럼 본 것도 같다. 그게 내 얼굴이면서 당신 얼굴이기도 할 때의 표정을 찰나처럼 잠깐 보여 준 것도 같다. 그게 반가워서 손을 들면 곧장 떠나고 없는 곳에 시의 말이 남는다. 박영기 시의 언어가 없는 듯이 있고 있는 듯이 없는 기표에 그렇게도 매달렸던 이유 역시 “한 번의 춤 한 번의 노래//한 번의 무대”로(「잎이 지는 속도」) 사라져 가는 삶의 매 순간에 박혀 있을 것이다.
―김언(시인)
•― 시인의 말
너로부터 훔치고 빌려 온 단어들.
아닌 것처럼 의뭉 떠는 의미들.
흰 것에 대하여 쓸수록 생기는 질문
“내 모든 의심의, 두려움의, 희망의,
그리고 번민의 끝까지 이르렀던가?”
―에드몽 자베스
•― 저자 소개
박영기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7년 [시와 사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딴전을 피우는 일곱 마리 민달팽이에게] [흰 것]을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삐딱하다 – 11
서식지 – 13
두통의 원인 – 14
미끄러지는 오리 – 16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 – 18
두 개의 휠 – 20
개미 행렬 – 22
코끼리 똥 종이 – 24
잎이 지는 속도 – 26
분에 넘치는 나의 기린 – 28
미인과 콩 – 30
수국정원 – 32
귀신의 무게 – 34
백년골목 – 36
우리가 돼지를 심고 있을 때 – 38
털 – 40
제2부
히비스커스 – 43
흰 것 – 44
비너스 – 46
벌칙입니까 – 48
무환자나무 – 50
오래된 우물 – 52
자리공 – 54
석류처럼 – 56
접착테이프와 구운 감자 – 58
그가 다리 밑에서 보잔다 – 60
기억의 오류 – 62
배려 – 64
에셔의 정치망 – 66
코스모스 – 67
긴 팔로 널 안을 수 있다면 – 68
회랑 – 70
기준 – 72
원형 – 73
제3부
갈치 – 77
녹 – 78
빌려 입은 옷 – 80
발자국이 발자국을 껴입고 – 81
징후 – 82
자유의 여신상 – 84
우물이 있는 집 – 85
우계(雨季) – 86
눈 – 87
칸나 프로필 – 88
역할극 – 90
달로 간 아이 – 92
木 氏 – 94
대련 – 95
홈통 – 96
바람행성 – 98
내일의 내일 – 100
화장실에서 – 101
다시 그린 그림 – 102
해설 이병국 불온한 주체, 그 삐딱한 내일에의 상상 – 104
•― 시집 속의 시 세 편
삐딱하다
생두부에 꽂힌 젓가락이 삐딱하다
자꾸 삐딱하다
몸 둘 바 모르며 삐딱하다
삐딱한 젓가락을 똑바로 꽂는다
삐딱하다 다시, 다시,
생두부는
모든 것을 삐딱하게 받아들인다
젓가락이 생두부를 간신히 들어 올린다
생두부와 젓가락이 삐딱하다
귓속의 작은 지구가 삐딱하다
머리 위에서는 하늘이
발아래에서는 땅이
생두부를 사이에 두고
놀이공원 회전컵이 삐딱하게 돈다
나무가 건물이 시계탑
시계가 모든 시간이 삐딱하다
하루가 삐딱하다
밤이 삐딱하게 깊어 간다
가로등이 삐딱하게 서서 삐딱하게 내려다본다
생두부와 지팡이가 삐딱하게 서서
삐딱하게 내려다보는 가로등을 삐딱하게 올려다본다
생두부 입술이 삐딱하다 자꾸
삐딱하다 짝다리 짚고 선 대문같이
자세가 삐딱해서
하는 생각이 먹는 마음이 뱉는 말이
삐딱하다
삐딱한 오늘보다 더 삐딱한 내일이
삐딱하게 다가온다 ■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
흰 꽃을 겨드랑이마다 숨기고 있다
혼처럼 떠난 꽃 진 자리가 부풀어 오른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앞 강물 언다
얼음 위에 떨어진 꽃잎을 모아 놓고 바람이 휘리리릭 넘겨 읽을 때
얼음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흰 물새들 흰 날갯짓
때를 알아 열매는 청동방울 흔든다
소리 없는 방울 소리가 고요 너머 너머에까지 울려 퍼진다
차나무의 계절은 푸릇푸릇 걸음이 더디다
흰 꽃을 잎겨드랑이마다 숨기고 있다
떠난 혼처럼 꽃 진 자리마다 부풀어 오르는 열매
처음 만난 하얀 제 얼굴 앞에서 딸꾹질을 한다 ■
잎이 지는 속도
한 번의 색 한 번의 춤 한 번의 노래
한 번의 무대
한 번이라니 기회가 단 한 번뿐이라니
붙잡을 수 없다니 내리며 녹는 눈송이라니 찰나라니
아연이라니 피어나는 것이라니 각자 빛을 물고 빛을 뿌리며 나무가 느끼지 못하는 속도로 잎이 느낄 수 없는 속도로 남쪽에서 시작한 불이 북쪽으로 옮겨붙다니 한순간이라니
이렇게 간단명료하다니
우주가 만발한 꽃 한 송이라니 훨훨 단신이라니 지구가 목 떨어진 꽃이라니 끄덕일 목이 없다니 한 번의 부양 한 번의 착지
이런 지독한 코미디라니
단 한 번뿐인
개운함이라니, 이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