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나 터너 (Lana Turner,1920~1995)
'헐리우드'를 빛낸 스타들 중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삶' 을 산 여자를 들라면
단연 '라나 터너'를 꼽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인생은 역경(逆境)과
함께 했다. 그녀의 할머니는 RH 유전자 복합증으로 그녀의 어머니를 낳다가
죽었다. '라나 터너' 역시 그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으로 판명되었고,
그녀가 낳은 딸 '셰릴' 은 태어난 직후 전체 수혈을 통해 겨우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대가족을 바랐던 그녀의 꿈은 날아갔다.
'라나 터너' 는 광부인 아버지와 16세였던 모친 사이에 태어나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다. 아버지는 상당한 노름꾼이었고, 그의 노름솜씨가 가족
부양에 가끔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결국 어린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비극의
꼬리표를 안겨주었다. 그녀가 10살 때 노름판에서 꽤 큰 돈을 따고 집으로
돌아가던 부친이 피살(被殺)된 채로 발견됐으나, 끝내 미제(未濟)사건으로
끝났다. 후에 알려진 바로는 그는 딴 돈으로 어린 딸이 졸라댔던 세발
자전거를 사줄 거라고 자랑했다는 것이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영화관람을 좋아했던 '라나 터너' 는 주말의 영화관람을
위해 돈을 모으느라 점심을 굶기 일쑤였다. 당시 은막을 빛내던 유명 여배우
들이 입고 나온 의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런 눈썰미로 인해 그녀는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잘 입기로 유명한 여배우'라는 평가를 받았다.
'라나 터너' 가 헐리우드 영화계에 발탁된 일은 가장 극적이고, 전설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녀와 어머니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이주했고, 15세의
'라나 터너' 는 어느 날 학교 '타이핑 수업'을 빼먹고 콜라를 사먹으러 카페에
들렀다가 연예뉴스 기자의 눈에 띄었다. 그녀의 미모와 몸매에 홀딱 반한 그는
'라나 터너' 를 에이전트사에 소개했고, 즉시 계약을 체결한 그녀는 대감독인
'마빈 르로이(애수, 쿼바디스 등 연출)'에게 보내졌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날개를 단 것이다. '마빈 르로이' 감독은 최고의 후원자가 되었다.
1937년 'They Won't Forget'에서 살해당하는 여학생 역(役)으로 첫 출연했다.
작은 배역이었지만, 그녀는 곧 평론가와 대중들의 눈에 띄었고
"활달한 아름다움과 개성, 매력을 지닌 배우"라는 평가를 받으며 영화 속에서
보여준 모습 그대로인 '스웨트 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마빈 르로이' 감독은 이후 MGM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녀의 주급(週給)은 계속 증가했고, 그렇게 번 돈으로 그녀가 처음 한 일은
어머니와 함께 살 집을 구한 일이다.
이후 '스타 탄생'에도 엑스트라로 출연하면서 대중의 눈에 확실하게 도장을 찍은
그녀는 이후 MGM 최고의 스타인 '클라크 게이블'과 네 편의 영화를 연이어
찍으며, 절정의 인기를 향해 달렸고 가장 인기 있는 '핀업 걸' 중 하나가 되었다.
1945년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에서 맡은 '코라' 역은 그녀에게 최고의 적역
이었다. 부정(不貞)과 살인으로 이어지는 그녀의 '팜므 파탈'은 역대 최고로 거론된다.
1950년대에 들어서자 그녀의 출연작이 흥행부진에 빠지기 시작했고, 고민하던
MGM은 그녀를 뮤지컬 영화쪽에 투입했는데 그것이 대박을 터뜨린다.
'The Merry Widow'가 성공을 거두었고, 1952년 '커크 더글러스'와 공연한
'The Bad and the Beautiful '은 다섯 개의 아카데미상을 받았고, 그녀도 커다란
갈채를 받았다. 그 와중에 '페이톤 플레이스'로 그녀는 아카데미 후보로 지명되었다.
1958년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그녀의 "복잡한 남자관계"에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범죄집단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진 '조니 스템파나토'와 사귀고
있었으나, '존 스틸'이라는 남자의 애정공세를 받으며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쉽게 놔주려고 하지 않았고, 끝내는 죽이겠다는 협박을 서슴치
않았다. 어느날 밤, 엄마와 큰 다툼을 벌이던 '스템파나토'를 딸 '셰릴' 이 부엌칼로
살해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은 결국 정당방위로 판결받지만, 최고를 달리던
그녀의 연기 경력이 단번에 끝나버릴 위기에 부딪힌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녀는 정면승부를 벌인다. 적은 급료를 받는 대신 수익의 절반을
받기로 하고 'Imitation of Life(슬픔은 그대 가슴에)'에 출연한 그녀는 사상 최고의
연기를 보인 것이다. 헐리우드의 평론가들은 입을 모아 "엔딩 신에서는 아무리 억센
남자도 눈물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라고 호평했다. 그녀는 추락의 위기에서 벗어나
다시 날아오른 것이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 대부분은 그녀의 '글래머러스'하고 관능적인 육체가 빚어내는
퇴폐미(頹廢美)가 돋보였는데 그녀의 실제 삶도 그러했다. 그녀는 폭풍과도 같은
삶을 살았다. 일곱 명의 남자들과 여덟 번에 걸쳐 결혼했고, 그 과정 역시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19세에 첫 남편인 '아트 쇼'와는 불과 넉 달 간 살았지만, 그녀는 후일 그 결혼은
'자신의 대학교육'이었다고 할 만큼 파란만장한 기간이었다. 두번째로 배우이며
레스토랑을 경영 했던 '조셉 스테판 크레인'과는 첫 결혼이 무효판정을 받아
재결합 후 딸 '셰릴'을 얻었다.
백만장자인 사회사업가 '헨리 토핑'은 그녀의 '마티니 잔'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떨어뜨리면서 구애(求愛)를 했다. 그는 투자실패와 도박으로 재정난에 빠졌고,
'라나 터너' 는 그들이 탐닉(耽溺)했던 화려한 생활을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다는
판단에 따라 이혼했다. 배우인 '렉스 바커'와는 그녀의 딸인 '셰릴'이 그로부터
지속적으로 괴롭힘과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끝났다.
그녀는 그 후에 만난 '스톰파나토'에게 무척 빠져들었지만, 나중에 그가 LA의 범죄
조직과 연관이 있음을 알고 관계를 끝내려고 했던 것이다. 1957년 가을
'라나 터너' 가 '숀 코넬리' 와 공연을 위해 영국으로 갔을 때, '스톰파나토'는 그녀가
'숀 코넬리' 와 무슨 일을 벌일까 두려워 그녀를 따라가서는 권총을 들고 촬영세트에
뛰어들어 난동을 피웠다. 화가 난 '숀 코넬리' 가 그에게 주먹을 날려 권총을 뺐었고,
그는 스코틀랜드 법정에 서게 되었다.
"엄마를 죽일까 두려워 그를 살해했다"는 동기를 밝힌 딸 '셰릴' 의 법정에서 그녀는
드라마틱한 진술을 펼쳤고, 일부에서는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연기를
펼쳤다고 평했다. 모두 7명의 남편을 거느렸고, 수많은 애인들과 사랑을 불태웠으며,
치명적인 살인 스캔들을 딛고 일어선 그녀도 죽음 앞에는 어쩔 수 없었다.
1992년 후두암 판정을 받은 그녀는 3년 뒤 합병증세로 사망했는데, 역시 죽을 때까지
헤비 스모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