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는 헨리, 포르투갈 왕 주앙 1세(재위 1394-1460년)와 영국의 랭커스타 공주 필립사이에서 태어난 3명의 아들 두아르테, 페드로, 엔리케 중에서 막내이다. 포르투갈의 왕자로서 왕위를 계승하지 않고 주앙 1세(아비스왕조 창시자)와 형 두아르테(재위 1433-1438), 그리고 조카 아폰수 5세(재위 1438 - 1481) 등 세 명의 왕을 섬기면서 통상·대신의 직책을 맡았다. 또 ‘그리스도 기사단장(騎士團長)’으로 북서 아프리카의 세우타를 확보하고 카나리아 ·아조레스 ·마데이라 제도(諸島)에 대한 식민사업을 하였다. 따라서 엔리케를 ‘항해 왕’이라 부르는 것은 정식으로는 틀린 말이다. 그러나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실질적으로 그는 왕 이상의 훌륭한 일을 충분히 해 냈다.
포르투갈은 은밀하게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도시 세우타를 공략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우선 시칠리아로 보낼 외교 사절을 태운 두 척의 배를 준비하고, 도중에 기항하는 척하며 세우타 부근에서 닻을 내리고 그 방어 시설 등을 조사하여 지도를 만들었다. 삼형제의 장남인 두아르테는 전쟁의 재정을, 차남 페드로는 나라의 남쪽 절반에서, 셋째 엔리케는 북쪽 절반에서 선원 동원을 분담하였다. 더욱이 엔리케는 배을 건조하는 일도 분담하였다. 준비는 끝났고, 1415년 8월 16일 이른 아침 약 200척의 포르투갈 선박이 순식간에 세우타를 공격하여 단 하루만에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에 편승한 에스파냐는 나중에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를 병합하였으며, 포르투갈 역시 아프리카 특히 서아프리카에서 패권을 장악하였다.
1418년에 세우타에서 두 번째로 귀국한 엔리케는 포르투갈 서남단의 산비센테 곶에 있는 라고스에 정착하여 수학·천문학·지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아라비아 인들이 번역한 그리스의 기하학자 에우클레이데스(Eucleides : 기원전 300년경), 천문학자 에라스토테네스(Eratosthenes : 기원전 284경-기원전 192년?),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 : 2세기경 그리스의 천문학자, 지리학자) 등의 저서가 많은 참고가 되었다.
이후 공포의 바다로 알려진 아프리카 서해안의 보쟈도르곶에 1422년 이후 탐험대를 파견하여 1434년 그 돌파에 성공하였으며, 계속 남하시켜 1441년 흑인 노예를 얻었다. 이로 인하여 서아프리카 항로가 개척되고, 1446년 북위 8도의 기니에 이르러 자비도항자(自費渡航者)를 인가하였다. 이로부터 남쪽은 바람과 해류의 역조(逆潮) 등 악조건 때문에 탐험은 진전되지 못하였고, 그가 죽은 뒤에는 더욱 저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포르투갈 남단, 서글레스에 천문 ·지리 ·항해의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앞으로의 희망봉 우회(迂回)의 기초 조건을 만들었다.
그리고 라고스 부근에 사글레스라는 이름의 거리를 만들고 요새, 관측소, 조선소 그리고 항해 학교를 세웠다. 또한 그는 그 곳에서 유망한 뱃길 안내인이나 선장을 선발하여 훈련시키고 항해 및 관측용 기계ㆍ도구를 연구하여 제작하고, 또 여러 가지 항해 계획을 세우거나 원정 결과를 분석하고 해석하여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포르투갈 범선이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도착한 해에 엔리케 항해왕은 세상을 떠났다
아프리카 북서부의 대서양에 접한 곳에 구에스파냐령 서사하라가 있고, 그 북서쪽에는 에스파냐령 카나리아 제도가 있다. 카나리아 제도와 거의 같은 위도의 아프리카 본토에서 약간 튀어나온 곳이 난 곶, 서사하라에서 카나리아 제도를 향해 약간 튀어나온 곳이 바하도르 곶이다. 카나리아 제도 북쪽에는 마데이라 제도, 마데이라 제도 북서쪽에는 아조레스 제도가 있다. 이들 3개 제도는 예전부터 유럽인에게 알려져 있었다. 특히 카나리아 제도에는 카스티야가 진출해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에스파냐령인 것이 그 흔적이다. 포르투갈이 마데이라 제도·카나리아 제도·아조레스 제도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각각 1418년-1420년, 1425년, 1427-1432년경, 난 곶을 통과한 것은 1426년경 이다. 지금도 마데이라주를 생산하는 마데이라와 아조레스 제도는 여전히 포르투갈령이다.
앞에서 말한 바하도르 곶은 지도에서 보아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약간 돌출된 곳으로서, 일찍이 유럽 인들이 ‘땅의 끝’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었다. ‘바하도르 곶 저쪽의 바다는 뜨거운 수증기가 치솟고 있다. 사람 하나 없고 물이나 나무도 풀조차도 없다. 바다는 얕아 육지에서 5~6km 떨어진 곳에서도 깊이가 30cm밖에 되지 않는다. 물살이 세서 그 곳을 지나는 배는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라고 여기고 있었다. 포르투갈 함대가 이 바하도르 곶, 그 남서쪽에는 있는 블랑 곶과 블랑 곶 남쪽에 있는 베르데 곶(아프리카 대륙의 가장 서쪽)을 통과한 것은 각각 1434년, 1441년 그리고 1443년경이다.
어떤 곶을 통과해도 끓어오르는 바다는 없고, 나무와 녹색의 풀 그리고 사람도 살고 있었다. 바하도르 곶을 통과한 함대의 우두머리는 그 후 ‘세인트 메리의 장미’ 또는 ‘부활초’라고 불리게 된 풀을 가지고 돌아와 엔리케에게 보여 주었다. 역시 앞에서 이야기한 베르데 곶은 ‘녹색의 곶’이라는 의미이다. ‘땅의 끝’ 앞쪽에서 식물을 본 사람들의 놀라움이 잘 표현하고 있다.
포르투갈의 함대가 베르데 곶 난바다에 있는 베르데 곶 제도(현재의 카보베르데 공화국)를 발견하고 또 시에라리온(공화국)에 도달한 1460년에 항해 왕 엔리케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뜻은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여전히 시에라리온의 남동쪽에 있는 리베리아(공화국)에서, 아프리카 서해안은 동쪽으로 향해 달리게 된다.
*해외의 항해술 도입과 대형 범선의 개량 추진
여기서 당시 사용된 항해·관측용 기계와 도구를 한데 모아 정리해 보자. 자석이 북극이나 남극을 가리키는 지극성(指極性)을 최초로 발견한 것은 중국인이고, 마침내 자침이 만들어져 적어도 11세기 말에는 그것이 중국의 무역선에 장착되었다. 그러나 자침이 정확하게 극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과, 자침이 가리키는 방향과 극 방향의 차이인 편각이 장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 밝혀져, 그것에 주의하여 자석이 쓰이게 되었다.
북반구 위의 한 점 P에서 남쪽에서 북쪽을 향하여 지구에 대하여 접선을 긋는다. 그것은 P점에서의 수평선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그 접선 위의 북쪽 방향에서의 고도각이 그 점의 위도 θ와 같게 직선을 그으면 그것은 진북(북극성의 방향)을 가리키고, 그 직선은 적도면으로의 수직선이 된다.
이 사실을 이용하여 관측점의 위도를 결정할 수 있다. 별의 수평면에서의 높이를 나타내는 각도를 고도각이라 하고, 그 고도각을 재는 기계를 고도계(아스트롤라베)라고 부른다. 초기에 사용된 항해용 아스트롤라베(astrolabe)는 금속제의 둥근 고리를 조환(弔環)으로 매단 것인데, 그 둥근 고리를 따라 각도가 기록되고 있었다. 조환에 수직인방향이 수평 방향이고, 그 고도각은 0°이다. 둥근 고리의 중심 둘레에는 회전하는 정규(선을 긋는 제도 도구)가 달려 있다. 매달린 고도계의 정규의 아랫단에 눈금을 표시하고, 정규의 연장선상에 별이 오게 한다. 그 때 정규와 수평선이 이루는 각도가 그 별의 고도각이 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북극성의 고도각은 관측점의 위도를 나타낸다. 따라서 아스트롤라베는 관측점의 위도 측정에도 사용된 것이다.
이 원리를 이용하여 해시계를 만들 수도 있다. 관측점이 북반구에 있는 경우를 생각하자. 원반에 그것과 수직인 축을 만들고, 우선 그 축을 수평면상의 북쪽으로 향하게 하고 그 앞쪽 끝을 위도에 해당하는 각도 θ만큼 수평면에서 위로 기울인다. 그 축이 지구의 자전축에 평행한 선, 원판이 적도면에 평행한 면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양은 적도면에 평행한 면 위를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여 등속도로 돌기 때문에 판 위의 시각 눈금은 등간격이 된다. 또한 북반구에서 태양은 남쪽에 있기 때문에, 태양에 의한 축의 그림자를 이용하는 시각 눈금은 판위의 아래 절반 부분 즉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용된다. 북반구의 태양은 정오에 남중한다. 즉 일반적으로 진남 방향에 온다. 또한 정오에는 수평면에서의 태양의 고도가 가장 높아진다. 따라서 예를 들어 배의 갑판(수평면)에 수직으로 세운 막대의 그림자는 정오에는 가장 짧고 일출이나 일몰 때에 가장 길어진다. 이것을 사용하여 시각을 결정할 수 있다. 북반구에서 정오의 태양 고도는 하짓날에 가장 높고 동짓날에 가장 짧으며, 봄과 가을에는 그 중간이 된다. 그것을 이용해 계절의 순환을 결정할 수도 있다.
지구상의 점의 위치는 위도와 경도에 따라 정해진다. 엔리케 당시에도 위도의 측정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밀한 시계가 없고 전파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경도는 측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어떤 기준점에서 어떤 방향으로 어느 만큼의 거리(=거리×속도)에 있는가를 재서 지구상의 점의 위치가 정해졌다. 그래서 초기의 선원들이 사용한 시계는 모래 시계와 해시계였다. 또 바닷속에 던진 나무조각(로그)이 배의 가로 쪽을 따라 흐르는 속도를 모래 시계로 재고, 그것에 의해 배의 속도를 정하였다. 현재도 배의 속도계를 로그라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의 배는 바람을 이용하는 범선이었다. 범선의 돛에는 횡범과 종범이 있다. 배의 앞뒤(선수에서 선미) 방향으로 직각으로 펴지는 돛이 횡범(橫帆)이고, 평행으로 펴지는 돛이 종범(從帆)이다. 횡범은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하고, 종범은 횡풍 또는 역풍을 이용한다. 횡범 쪽이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예전부터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고 있을 때 바람이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맞바람으로 바뀌면 번거로워진다. 서둘러 돛을 내리고 노(oar)를 사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엔리케는 어떤 바람에서도 노를 사용할 필요가 없고 돛으로만 나아갈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생각하였다. 그 결과 종범이 채택되어 그것이 대형선에도 사용되게 되었다. 중국의 범선인 정크 선등에서는 옛날부터 사용되고 있던 돛이다. 하나의 배에 1개가 아닌 여러 개의 돛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