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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강 수단인가 열매인가
행함에 대한 오해
빛을 따라 행한다고 주장하는 교회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사람들은 은혜를 찾으려고 다른 곳으로 떠날 것입니다. 환멸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완전히 포기해 버릴 것입니다.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안에 빛대로 행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모순적인 일부 사람들의 행동이나 가르침에 이끌려 죄의식의 순례를 떠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형태의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재림교회와 재림교인들을 통하여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해 왔습니다.
한 백성으로서 재림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에 재림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결과로 탄생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재림교회의 초기 구성원은 루터교인들과 침례교인들과 감리교인들이었습니다. 가톨릭과 다른 교파의 교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에 감격한 나머지 자신이 이전에 속했던 영적 고향에서 빠져나와 이 교회에 몸담았습니다. 그러므로 재림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진정한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재림교인들이 너무 순진하거나 너무 무지해서 아니면 너무 부주의함으로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데 이는 나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인들은 이것을 행하지 않거나 이러이러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계시며 그들을 기뻐하거나 만족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프게도 일부 재림교인들은 이러한 생각의 그늘 아래 머무르는 동안 거룩한 삶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거룩한 생애는 오직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반응하는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거룩한 삶이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단'인지 '열매'인지를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합니다. 이 두 단어 사이에는 하늘과 땅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이 두 단어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일종의 '수단'으로 선한 일 혹은 순종을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까?
회개를 예로 들어봅시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호감을 갖도록 만들기 위해서 하는 어떤 행동이 아닙니다. 나를 끝없이 사랑하시는 그분과의 사이에 어떠한 비밀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비밀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로마서 2장 4절).
'수단'과 '열매'는 극과 극으로 다릅니다. 열매란 '자유'라는 또 다른 단어의 산물입니다. 자유 하게 하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연구함에 있어서 이 사안을 바울이 이해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수단과 열매의 차이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은 신약 시대의 다른 어떤 인물과도 분명하게 구별되고 있습니다. 그는 확실하게 초점을 맞추고 살았습니다. 그러면 그 초점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획득하고자 행했던 일들에 초점을 맞추었을까요? 아닙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린도전서 2장 2절). 바울은 그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원론적 해석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무엇인가 훌륭한 일을 하시지만, 한편 구원은 여전히 이런 일 저런 일을 행할 수 있는 인간들의 능력에 어느 정도 달려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 결과는 참으로 비극적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에 대하여 노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수단을 열매로 혼동할 때에 어떤 결과가 오는지 이해를 돕기 위하여 로마서 한 장 전체를 할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의 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고 싶은 상태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불가능하며, 우리 힘으로 이를 쟁취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아마도 하나님께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죄의 감옥에 갇힌 죄수라는 사실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오를지도 모릅니다. 또한 구원을 받기 위해서 충족시킬 수 없는 조건들을 우리 앞에 제시하신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오를지도 모릅니다.
화만 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늪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자, 이제 현실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솔직해져 봅시다. 얼마나 심각한 좌절을 경험하게 될 것 같습니까? 결국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완전히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나 보증을 전혀 갖지 못하다가 그 지경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영적인 '요요'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은혜 안에 있다가 은혜 바깥에 있다가 혹은 구원받은 상태에 있다가 벗어났다가 들락날락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수하면 은혜로부터 떨어졌다고 믿는 것입니다.
실수할 수 있는 자유
상상해 보십시오. 내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나에게 좋은 감정을 갖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호의를 되찾아 올 수 있을까요? 내가 저지른 실수를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교정해야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가 실수를 고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내 마음이 거듭나 새로워지지 않는 이상 나는 실수를 고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는 고칠 능력이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악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편 51편 5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죄악 중에 잉태되었고 죄악 중에 태어났습니다. 악으로 기우는 타고난 성향 때문에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할 때에도 내 속에 존재하는 악이 나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이에 동감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로마서 7장 19, 21절).
하나님의 은혜를 내게 머물도록 하는 것이 오직, 늘, 언제나 옳은 일을 하는 나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정말로 실수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감동에 압도되었습니다. 실제로 실수를 저질러도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마치 하나님께서 커다란 야구 방망이를 꺼내어 그 놀라운 진리로 나를 한 방 치시는 듯하였습니다. "네 눈을 뜨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은혜는 옳은 일을 해야 하는 너의 능력에 달려있지 않다. 나의 은혜는 네가 여전히 죄인이었을 때에 주어졌단다." 바울도 로마서 5장 8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와'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때가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여러분 중 적지 않은 분들이 여러 해 동안 은혜의 안과 밖 구원의 안과 밖을 드나들었을 것입니다.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 자신도 여러 해 동안 이러한 '요요' 현상을 겪었습니다. 매번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선하지 않았고, 한결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너무 절망적이고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이 문제 때문에 거의 신앙을 떠날 뻔 했습니다. 정말 심각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 실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밖으로 뛰어나가 하나님께 소리쳤습니다. "해봐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말씀하셨습니다. “네 눈을 뜨라. 나는 너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예수에게 그것을 요구했단다!”
하나님의 뜻이 마침내 내게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예수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때 나는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나는 네가 단지 예수를 믿기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인간적인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면 여러분에게는 절대로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이 있는데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요' 현상을 경험할 것입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할 것이며, 은혜 안에 있다가 은혜 밖에 있고, 구원을 받았다고 느꼈다가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절망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는 한, 기쁨이 없습니다. 평화도 확신도 없습니다. 올바른 관계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옳은 일을 할 때에만 구원해 주시는 그런 하나님과 어떻게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여러분을 죄로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는 하나님께 잘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참으로 귀중한 많은 영혼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확신을 빼앗긴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재림교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 사제였던 루터가 지금도 로마에 있는 라테란Lateran 성당의 거룩한 계단 Scala Sancta 을 전통을 따라 무릎을 꿇고 올라가다가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성령께서 루터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루터는 돌아와 거듭 연구한 끝에 펜을 들어 자신의 성경 로마서 1장 16. 17절 옆에 라틴어로 쏠라 sola, 곧 오직이라는 말을 써넣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
원어 성경이나 영어 성경은 '오직'이라는 말이 없음.
믿음으로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였다가 인간의 노력과 행함에서 오는 절망의 궁지에 몰려 끝을 맺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언젠가 사람들이 분명히 깨닫는 때가 올 것입니다. '내게는 순결한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다. 너그러운 행동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기심이 없는 욕구란 단 한 가지도 없다. 내게는 일말의 거룩함을 생산해 낼 능력이 전혀 없다.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하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었습니다. 어쩌다가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대하여 더 좋게 느끼도록 납득시킬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있다고 믿게 된 것일까요?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찌할 힘이 전혀 없을 때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성경 로마서 5장 6~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여러분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덕망 있는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결코 자신의 공로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고상한 충동도, 덕스러운 행동도, 순수한 생각도 이 모두는 여러분이 아니라 여러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내용 복습
1. 거룩한 삶을 경험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엇인가를 행해야 한다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2장 2절 참조
3. '수단'과 '열매'를 혼동 할 때 어떤 비극적인 결과가 따르게 됩니까? 더 나아가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까?
4.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저지르는 실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떤 해결책을 가지고 계십니까?
5. 루터가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된 데는 어떤 사연이 있었습니까?
*묵상을 위한 질문
이번 장에 제시된 좋은 소식이 여러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