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사랑의 도피
박목월 시인이 38살 때
(1952년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의 일이다.
그는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가정과 명예와 국문학과 교수의 자리)을 버리고,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채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세상에서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그러나 이는 목월의 절친한 친구 문인들의 얘기와는
좀 많이 다르다.
혹 친구를 위한 변명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내용은 이러하다.
목월의 강의를 받는 학생들 가운데
유독 가냘프고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한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은 늘 목월 주변을 맴돌았다.
가끔씩 문인들의 모임에도 배석하여
비서처럼 목월을 보필했는데
눈치가 좀 이상하다고 느낀 목월이
그 여학생을 타일러 공부에 열중하도록 충고를 하고는
앞으로 더는 자기 주변을 맴돌지 못하게 했다.
그러고 여러단이 흘렀는데
그 여학생이 목월을 그리워하다 상사병에 걸렸고,
그녀의 아버지 되는 이가 딸을 살리려고
중간에 사람을 넣어 목월에게 이를 알리면서
한 번만이라도 와서 병석에 누운 딸을 만나줄 것을 부탁했다.
서른 여덟 청년 목월도
그 여학생에게 마음이 안 끌린 것은 아니지만
스승이 된 입장에서 마음을 줄 수도 없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문인들 가운데 몇몇이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며 강권을 하다시피해서
이들 친구인 문인들과 함께 병문안을 갔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그 학생은 쾌차되었고
학교에도 다닐 만큼 건강이 회복되었지만
문제는 그 여학생의 목월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지고 또 노골화되어 가게 되니
목석이 아니었기에 목월도 차츰 사랑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불륜이라는 죄책감에 방황을 하게 되고
결코 있을 수도 없는 원만한 해결책을 찾으려 고민하다
벽에 부딪치게 되자
목월은 현실도피라는 길을 택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 제주도로
"사랑의 도피" 여행을 떠났다.
그런 일이 있은지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박목월의 부인은
'남편이 제주도에서 딴 여자와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 부인의 심정이 오죽했을까만
그때만 해도 행세께나 하는 남자라면
알게 모르게 첩을 들이는 풍습이 있었던 때라
부인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작정을 한다.
그 여인은 몸이 자주 아팠는데
그때마다 박목월은 여인을 업고 병원에 갔다고 하며
또 그때는 인근 교회에서
시낭송회(목월이 주관)가 자주 열렸는데
그 여인은 늘 박목월 옆에 앉아 있었을 만큼
진하게 사랑하며 살고 있었다.
목월의 부인은 그런 남편을
적어도 겉으로는 들어내어 원망하지 않았다고 하며
청천벽력 같은 상황에서도
그 부인은 야단법석을 떨기보다는
조용히 남편을 찾아가
남편과 시앗 등 셋이서 마주앉았다
부인은 두 사람에게
“힘들고 어렵지 않느냐”며 돈 봉투와 함께
"추운 겨울을 잘 지내라"며
손수 두툼하게 솜까지 넣어서 지은 두 사람의 옷을
내밀어 주고는
달리 남긴 말도 없이 서울로 올라갔다.
이때부터 그 여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가정을 깼으며, 앞길을 막았음을 깨닫고
깊은 고민에 빠지지만
그렇다고 사랑을 포기할 만큼은 아니었기에 ...
그런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난 뒤
딸에 관한 소문을 들은 아버지(당시 목사)라는 이가 와서
자기 딸을 설득했고,
부산에서 직접오신 여인 아버지의 진정성어린 설득에
그딸은 사흘을 버티다가
마침내 목월 시인과의 이별을 결정하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제주를 떠났다.
이리하여 두 사람의 "사랑의 도피"행각은 끝이 났는데
사랑했던 여인이 부산으로 떠나기로 결심을 하게 되자
목월이 쓰라린 가슴을 어루만지며 지은 시가
바로 "이별의 노래"다.
이 시는 제주도에서 이별의 순간을 앞두고 있을 때
목월이 지은 시인데
김성태의 곡을 붙여 가곡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있지만
작자인 목월은 정작 이 시를 자기 시집에 넣지 않는다.
그 이유야 본인만 알고 있겠지만
이제는 목월도 이제 더는 이승 사람이 아니니
물어 볼 래야 물을 곳도 없는 영원 속에 묻혀버렸다.
<이별의 노래>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이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호온자 울리라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사랑하는 이와 이별,
그 이별의 아픔과 절절함이 담긴 슬픈 시다.
‘떠나가는 배’의 주인공은 박목월 시인
양중해 시인의 '떠나가는 배'는 당시 여대생과의 6개월간에 걸친 사랑의 도피끝에 제주 부두에서 의 이별하는 시인의 모습이라는 요지이다.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가는 배 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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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떠나가는 배’의 주인공은 박목월 시인
양중해 시인의 '떠나가는 배'는 당시 여대생과의 6개월간에 걸친 사랑의 도피끝에 제주 부두에서
의 이별하는 시인의 모습이라는 요지이다.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가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을 저배야
야속해라
날 바닷가에 홀로 버리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떠나가는 배-원시)
가곡 ‘떠나가는 배’(작사 양중해 작곡 변훈)의 주인공은 1978년 타계한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라는 것과, 50년대 중반의 그와 한 여대생의 ‘제주 잠행’ 생활에 대해 처음으로 구체적인 증언이 나왔다.
노랫말을 쓴 양중해(1927~2007) 시인은 목월이 50년대 중반 잠시 제주에 머물 때 시와 술을 나눈 절친한 친구 사이.양 시인은 “1953년 휴전 무렵 유부남이던 목월이 젊은 여자와 피란 겸 사랑의 도피를 위해 제주에 왔으나 끝내 이별하게 됐으며,제주부두에서 두 사람의 이별 장면을 시로 옮긴 게 바로 ‘떠나가는 배’”라고 말했다.양 시인은 지난해 7월 제주문화원에서 열린 한 문학강좌에서도 ‘떠나가는 배’에 대해 “목월의 아픈 이별을 담은 시”라고 거론한 적은 있으나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목월이 당시 머물렀던,지금은 사라진 제주시 관덕정 인근 동화여관 가족들에 따르면 목월은 한국전쟁 막바지에 제주에 왔으며,여대생(당시 홍익대 재학)과 함께 6∼7개월간 동화여관에 머물렀다.
목월과 함께 온 여인의 성은 한씨이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주일마다 근처 서부교회에 나가 예배를 봤고,몸이 아플 때는 목월이 직접 부축하거나 업고 갔다.이 여인은 아주 깔끔해서 빨래가 잦은 편이었고,식사도 여관에서 내주는 음식 대신 직접 지어 목월에게 내왔다.또 아이들을 좋아해 과자와 과일을 자주 나눠줬고 튀김 등을 직접 만들어 줬다고 한다.
여관에서도 시낭송회가 자주 열렸는데 여인은 늘 목월 곁에 앉아 경청하곤 했다.
여관집 아들 이창주(64·당시 중학교 2학년)씨는 “그 여자는 목월에게 꼭 ‘선생님’이라고 불러 선생님과 제자 사이 같았으며,지금의 여느 탤런트보다도 예뻤고 몸도 호리호리했으나 자주 아파 병원 출입이 잦았다.”고 기억했다.또 “목월에게 ‘이름이 왜 목월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어느날 밤 나무에 걸린달이 너무 고와 ‘영종’이라는 이름 대신 ‘목월(木月)’이라는 이름을 쓰게 됐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목월과 여자가 이별할 무렵 여관에 있던 짐을 도둑맞아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는데 이 여인은 ‘다른 것은 필요 없고 사진첩만 찾아 달라.’고 애원했으나 범인이 이미 아궁이에 넣어 불태워 버린 후여서 몹시 상심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짐 소동이 있고 얼마 후 목사인 이 여인의 아버지가 서울에서 내려왔고,가지 않겠다는 딸을 이틀 밤낮에 걸쳐 설득한 끝에 사흘째 되는 날 서울로 가기 위해 부두로 갔다.이씨도 양중해·박목월 선생과 함께 부두까지 배웅 나갔으며 여인과 목월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어깨가 들썩이는 것으로 미뤄 우는 것 같기는 했는데,우리 쪽으로 전혀 고개를 돌리지 않더군요.아마도 정인(情人)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것이겠지요….”
이씨는 “여관에 있는 동안 이런 정 저런 정 많이 들어 그때 무척 울었다.”며 당시 처연히 고개를 떨구며 돌아서던 목월 선생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당시 제주제일중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양중해 시인은 집으로 돌아온 즉시 ‘두 정인의 부두에서의 이별’을 시로 옮겼고,같은 학교 음악교사이던 변훈에게 음을 붙이도록 해 가곡 ‘떠나가는 배’는 탄생했다.
그동안 기록(잡지 ‘시인세계’ 등)에 따르면 목월과 이 여대생은 시인과 문학소녀로 만나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고,결국 제주도로 잠행했다.그때 두 사람은 겨울 한복을 지어 제주로 찾아간 부인의 인품에 목월이 반성하고 그가 서울로 돌아오면서 두 사람의 사랑도 끝이 나며, 이로써 목월에게 ‘이별의 노래’를 남겼다는 내용만 나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