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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이와 같은 “전후상”이 37조도품의 칠각지에서는 더욱 섬세한 차원으로 진입하여 “이완/들려짐”으로 언급된다는 점도 유의하셔야 합니다.
yasmiñca kho, bhikkhave, samaye līnaṃ cittaṃ hoti, kālo tasmiṃ samaye dhammavicaya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kālo vīriya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kālo pīti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taṃ kissa hetu? līnaṃ, bhikkhave, cittaṃ taṃ etehi dhammehi susamuṭṭhāpayaṃ hoti. (SN v.113; SN 46.53)
yasmiñca kho, bhikkhave, samaye uddhataṃ cittaṃ hoti, kālo tasmiṃ samaye passaddhi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kālo samādhi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kālo upekkhā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taṃ kissa hetu? uddhataṃ, bhikkhave, cittaṃ taṃ etehi dhammehi suvūpasamayaṃ hoti. (SN v.114)
satiñca khvāhaṃ, bhikkhave, sabbatthikaṃ vadāmi. (SN v.115)
그리고, 비구들이여, 이완된(līna) 心이 있을 때, 그때는 擇法覺支를 계발하기에 적절하며, 精進覺支를 계발하기에 적절하며, 喜覺支를 계발하기에 적절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이완된 心은 그와 같은 법들과 함께 잘 일어서기 때문이다. (…)
그리고, 비구들이여, 들려진(uddhatta) 心이 있을 때, 그때는 經安覺支를 계발하기에 적절하며, 定覺支를 계발하기에 적절하며, 捨覺支를 계발하기에 적절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들려진 心은 그와 같은 법들과 함께 잘 가라앉기 때문이다. (…)
그리고 念은, 비구들이여, 어느 경우에나 유익한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결국 “이완된 心은 잘 일어서도록”, “들려진 心은 잘 가라앉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전후상”의 종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점점 더 깊어지고 점점 더 넓어지는 것이 “心 계발”의 묘미입니다. 이 인용문과 앞서 언급된 인용문의 내용을 함께 도시하여 “전후상”의 조도(助道)를 파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A (오개) 혼침ㆍ수면(thinamiddha)
B (오개) 도거ㆍ악작(uddhaccakukkuc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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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정진) 지나치게 느슨하다 → “해이”
B (정진) 지나치게 굳다 → “도거”(uddhac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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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신족) 지나치게 이완되다(ati-līna)
B (사신족) 지나치게 다잡히다(ati-paggahī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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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칠각지 心) 이완되다(līna)
B (칠각지 心) 들려지다(uddha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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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칠각지) 경안각지ㆍ정각지ㆍ사각지
B (칠각지) 택법각지ㆍ정진각지ㆍ희각지
칠각지에서는 心의 “이완(līna)”과 “들려짐(uddhatta)”이 언급되는데, 이는 오개의 “혼침ㆍ수면”과 “도거ㆍ악작”, 정진의 “지나친 느슨함”과 “지나침 굳음”보다 깊은 진입이며, 나아가 사신족의 “지나친 이완”과 “지나친 다잡힘”보다 더욱 깊은 진입입니다. 그런데도 이 칠각지에서조차 心의 미묘한 출렁거림, 흔들림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心의 출렁거림이 “이완”으로 향하는 때에는 “擇法ㆍ精進ㆍ喜”를 계발하고, 心의 출렁거림이 “들려짐”으로 향하는 때에는 “輕安ㆍ定ㆍ舍”를 계발하라는 것이 경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칠각지는 “不動의 心”을 계발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빠알리 니까야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경전의 모든 낱말이 수습차제에 맞춰 극미한 의미변화를 겪으면서 정밀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존번역은 이런 의미변화를 전혀 추적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으므로, 빠알리 원문을 직접 검토할 수 없는 후학들은 “니까야를 니까야로” 읽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슬퍼하셔야 합니다. 현장스님께서는 붓다가야에 당도하셔서는 자신은 박복하여 말세에 태어나는 바람에 부처님 재세시 부처님을 뵙지 못한 것을 두고 한탄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리는 그 현장스님보다 훨씬 복된 시절에 태어났습니다. 부처님의 금구성언, 빠알리 니까야가 온전히 우리 손 안에 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곡경아세(曲經阿世)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마땅히 비통해 하며 뼈아픈 눈물을 뿌리셔야 합니다. 이런 신심조차도 없다면 어찌 불법의 문이 열리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경의 말씀처럼, 心만큼 다루기 어려운 法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心과 관련한 경문들이 경시되어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心이 누진통에까지 이르는 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心 계발”이야말로 “身 계발” 이후 밟게 되는 수습차제의 처음과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心을 너무 모른 채 수행을 길을 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pubbenivāsānussatiñāṇāya(~sattānaṃ cutūpapātañāṇāya~āsavānaṃ khayañāṇāya) cittaṃ abhininnāmesiṃ. (MN i.22-23; MN 4)
[보살이었을 때의] 그 나는 이와 같이 心이 이미 入定하고 청정하고 흠이 없고 오염이 사라지고 유순하고 유연하고 안립되고 不動에 이르고 漏가 없게 되었을 때 숙명통(~천안통~누진통)으로 心을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경에 따르면, 사선(四禪)을 지나야 비로소 위와 같이 “心이 이미 入定하고 청정하고 흠이 없고 오염이 사라지고 유순하고 유연하고 안립되고 不動에 이르고 漏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 心이 숙명통ㆍ천안통ㆍ누진통을 향하게 됩니다. 우리는 늘 호흡관, 사념처, 삼매, 사선, 사마타, 위빠사나 등등만 운운했지, 이토록 중요한 心을 心에 값하게 주목하지 못했던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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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요리상 경의 “그 相”, “자신의 心의 相”에서 시작하여 두서없이 여러 주제를 종횡으로 다루었습니다. 아위자님 말씀처럼 니까야 경전은 하나가 들리면 전체가 들리는 구조라서, 예상과 달리 저의 독경범위를 훨씬 벗어난 주제까지 함부로 다룬 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니까야 경문에 의거하여 수행을 하시는 분들께 대단히 중요하고 시급한 주제인지라 무리해서 다루어 보았습니다.
이상의 언급들이 자신의 이해와 정면으로 충돌되거나 혼란스럽다면, 한번쯤은 자신이 가진 교학적 개념정의를 재고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혹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다면, 이것은 “身” 차원보다 깊이 진입한 “心” 차원의 얘기라는 것을 우선 염두해 두셔야 합니다. “心”은 참으로 미묘한 것입니다. 범부들은 결코 경험해 보지 못한 깊은 차원의 얘기입니다.
저는 현대과학이 말하는 “무의식”보다 훨씬 깊은 차원이 “환히 빛나는 心”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 心이 沒하는 곳은 또 어디일까요? 그곳을 탐험해 보신 바가 있으신가요? 그곳이 탐험이 되는 곳이기나 할까요? 아니, 그곳이 과연 어떤 “곳”이기나 할까요? 그것이 과연 어떤 “것”이기나 할까요? “환히 빛나는 心”이 과연 어떤 “상태”이기나 할까요?
저는 니까야 원문을 한땀한땀 짚어가며 읽기 시작하면서, 그간에 익혀둔 모든 불교적 개념들과 번역어들을 전면적으로 재고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기존 개념으로 독해하면 니까야 경전이 너무 평이하다못해 유치하게 읽히거나 아니면 앞뒤가 안맞는 모순 투성이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각 수행단체의 술어와 가르침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감고 귀를 닫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경문독해가 많은 분들의 기존이해와 상충되어 강한 저항감을 불러일으킬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탐색이 다툼이나 쟁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니까야를 니까야로 풀이하기 위한 한 시론으로 읽혀지기를 기대합니다. 니까야 경전을 이제 갓 읽기 시작한 불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라도 드러내어 함께 논의하지 않으면 정법이 무너진 이 시대를 헤쳐나갈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心의 相”을 파악하라고 권하는 경을 삼가 읽어봅니다. 이것은 모든 수행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eko paviveke anabhiramanto cittassa nimittaṃ gahessatī’ti netaṃ ṭhānaṃ vijjati. ‘cittassa nimittaṃ agaṇhanto sammādiṭṭhiṃ paripūressatī’ti netaṃ ṭhānaṃ vijjati. (…) ‘eko paviveke abhiramanto cittassa nimittaṃ gahessatī’ti ṭhānametaṃ vijjati. ‘cittassa nimittaṃ gaṇhanto sammādiṭṭhiṃ paripūressatī’ti ṭhānametaṃ vijjati. (AN iii.422-3; AN 6.68)
‘홀로 한거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心의 相을 파악할 것이다’라는 그 자리는 발견되지 않는다. ‘心의 相을 파악하지 못하는 자는 正見이 성취될 것이다’라는 그 자리는 발견되지 않는다. (…)
‘홀로 한거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心의 相을 파악할 것이다’라는 그 자리는 발견된다. ‘心의 相을 파악하는 자는 正見이 성취될 것이다’라는 그 자리는 발견된다.
Idha bhikkhave bhikkhuno yaṃ nimittaṃ āgamma yaṃ nimittaṃ manasikaroto uppajjanti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 pi dosūpasaṃhitā pi mohūpasaṃhitā pi, tena bhikkhave bhikkhunā tamhā nimittā aññaṃ nimittaṃ manasikātabbaṃ kusalūpasaṃhitaṃ; tassa tamhā nimittā aññaṃ nimittaṃ manasikaroto kusalūpasaṃhitaṃ ye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 pi dosūpasaṃhitā pi mohūpasaṃhitā pi te pahīyanti te abbhatthaṃ gacchanti, tesaṃ pahānā ajjhattam-eva cittaṃ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
Tassa ce bhikkhave bhikkhuno tamhā nimittā aññaṃ nimittaṃ manasikaroto kusalūpasaṃhitaṃ uppajjant’ eva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 pi dosūpasaṃhitā pi mohūpasaṃhitā pi, tena bhikkhave bhikkhunā tesaṃ vitakkānaṃ ādīnavo upaparikkhitabbo: iti p’ ime vitakkā akusalā, iti p’ ime vitakkā sāvajjā, iti p’ ime vitakkā dukkhavipākā ti; tassa tesaṃ vitakkānaṃ ādīnavaṃ upaparikkhato ye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 pi dosūpasaṃhitā pi mohūpasaṃhitā pi te pahīyanti te abbhatthaṃ gacchanti, tesaṃ pahānā ajjhattam-eva cittaṃ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hoti samādhiyati. (MN i.119; MN 20)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相이 [客으로] 도래하여 그 어떤 相을 작의하는 비구에게, 악하고 不善한 동시에 欲이 동반하고 瞋이 동반하고 痴가 동반하는 尋들이 일어나면,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그런 相으로부터 떠나 다른 相, 즉 善이 동반하는 相을 작의해야 한다.
그 비구가 그런 相으로부터 떠나 다른 相, 즉 善이 동반하는 相을 작의할 때, 악하고 불선한 동시에 欲이 동반하고 瞋이 동반하고 痴가 동반하는 尋들이 버려지고 꺼져간다. 그것이 버려짐으로써 그렇게 안으로 心이 안정되며, 가라앉으며, 一境이 되며, 入定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그런 相으로부터 떠나 다른 相, 즉 善이 동반하는 相을 작의하는 그에게도, 악하고 不善한 동시에 欲이 동반하고 瞋이 동반하고 痴가 동반하는 尋들이 일어나면,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그 尋들의 위험을 살펴야 한다, ‘이 尋들은 불선하며, 이 尋들은 비난받을 만하며, 이 尋들은 苦의 결실을 맺는다’라고.
그가 그 尋들의 위험을 살필 때, 악하고 不善한 동시에 欲이 동반하고 瞋이 동반하고 痴가 동반하는 尋들이 버려지고 꺼져간다. 그것이 버려짐으로써 그렇게 안으로 心이 안정되며, 가라앉으며, 一境이 되며, 入定한다.

첫댓글 1. 心을 개발하면 '탐'이 제거 된다.
그러나 이후 이 맥락을 이어 계속,
2. 반야(慧)를 개발 하면 '무명'이 제거된다.
'무명'의 제거가 실제로 수행의 정점이며, 쉽지 않다. 그래서 아빈냐(행을 파악한 앎) 이후 위빠사나의 길(心路를 걸어)로 무명을 제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