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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27휴전일 문산文山 정기산행 천변을 걸어 수변으로 가다
산 대신 강과 바다, 마침내 하늘
김 광 수
칩거 그리고 염량세태炎凉世態 오랜 세월 교단작가로 교단과 연단과 강단을 맴돌며 문인협회에는 이름이나 얹어놓고 지내다가, 명퇴 전후하여 부산문협 일을 거든답시고 누累를 끼친 지 10년차다. 예전에는 강산이 바뀐다는 시간이었으나 첨단공학시대 아니던가, 강산이 얼마나 어떻게 변했는지 측량할 길조차 없다.
문득 필독서 찾아 읽기, 문학이론과 작법 되새기기, 작품쓰기에 집중하기 등은 까맣게 잊은 채 창작외적, 문학외적인 부분에 집착하는 듯싶어서 불안했다. 초조하기도 했다. 초심을 잃은 것이다. 마음 독하게 먹고 문단활동과의 일정거리를 두기로 했다. 문인협회 일자리와 각종 문학회 일자리를 사임하고, 피치 못할 모임이 아니고는 참석을 자제하기로 했다. 오해가 두렵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른바 칩거다.
만만찮은 나이다. 칩거 이후 다시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른다. 진짜 무서운 것은 이것이다.
집으로 오는 개인 작품집과 동인지, 회지, 문학잡지 등이 현저하게 줄었다. 당연하면서도 재미나는 현상이다. 알량한 자리에 있을 적 십자포화로 배달되던 책들이었다. 어쩌겠나, 염량세태인 것을. 필자도 마찬가진 것을. 오죽했으면 솔직한 사회학자 마키아벨리가 인간은 이용가치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며, 탄식했을까? 그러나
전화위복이었다. 보내주신 귀한 책 읽지 않을 수는 없다. 쓰기보다는 읽기가 승한 필자, 속독법이 제법 되는 필자도 그 책들 다 읽기가 얼마나 힘들던지 간혹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고육책으로 일요일 하루는 무조건 보내온 책들 독파하기였다.
한 가지 걱정이 덜어졌다. 오는 책들을 읽는 일이 어렵지 않다. 다행이다. 책 보내기와 받아서 읽기는 품앗이 아니던가. 독자보다 작자가 많은 우리문단 특유의 놉일 아닌가.
문인행세가 몸에 배면, 고전과 명작 읽기는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시인작가 지망생에게 젊은 날의 독서, 고전과 명작 읽기가 습작보다 월등 중요한 이유다.
요즈음 책읽기의 순서다. 필자작품 실린 책이 1순위다. 2순위는 저자친필로 보내주신 책, 정기 구독하는 문학지가 3순위고 나머지는 순위가 없다. 거의 읽지 않거나 못하니까. 이러다가 축귀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정기산행 정근하기, 작은 행복 주고받기 금년 들어 문산 정기산행은 거의 빠지지 않는다. 아니다, 빠져지지도 않는다. 정신적 육체적 부담 없이 참여하게 된다. 편안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문학외적이라서 심신이 피곤할 수밖에 없는 짓거리에 매달려,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한 달에 한 번인 정기산행마저 버거웠다. 약속도 계속 겹치기만 했다. 칩거 이후 가급적 약속을 잡지 않으니 토요일은 거의가 빈다. 그러니 평생 다닌 산길 따라잡는 것이 일순위에 상책이 된다. 자연스럽고 때로는 즐겁다.
정기산행 정근하기. 개근은 회장님, 산행대장님, 총무이사님, 재무이사님 몫으로 돌리고, 회원인 나는 정근이 제 격이다.
새나가지 않는 공덕 무루공덕無漏功德에 속하는 긍정적인 몸가짐 마음가짐으로 출발하여, 언행을 정화시키려는 노력만으로도 최하 민폐는 끼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작은 배려에 감사하는 미소로 작은 행복 찾기다. 무수히 반복 학습한 작은 행복 찾기, 모르는 사이 우리들은 실천궁행이 불가능한 거대담론과 손에 쥐어지지도 않는 거창한 행복, 복권당첨 같은 행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닌지?
쥐불 달불놀이, 연등燃燈 연등놀이, 풍등豊燈 風燈 풍등놀이 우리나라 좋은 나라뿐 아니라 지구촌 백성들이 즐기는 놀이 중 하나가 하늘로 띄워 올리기일 것이다. 두 가지 이유일 듯싶다.
하나는 날지 못하는 인간의 꿈이 형상화로, 사람 대신 날아 올라가는 기구를 만들어 새처럼 날게 하는 것이다. 대리만족일 수도 있으나 아름답지 아니한가?
첨단과학과 공학의 산물이라는 비행기 역시 꿈의 형상화인 점만은 같다.
둘은 천신사상天神思想으로, 하늘 혹은 하늘에 계신 절대자를 신으로 본 신앙이 결과다. 이는 동서 구별이 없다. 하느님, 천주天主, 유일신唯一神 여호와, 서방정토西方淨土, 태양이신 비로자나불 등등, 숱하다. 하늘과 관련 없는 주신 아마도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그런 놀이가 많았고, 신앙과 놀이가 거의 구별되지도 않았다. 구별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세시풍속歲時風俗이기도 한 이 놀이들을 추리고 다시 간추리니 쥐불 달불놀이, 연등燃燈 연등놀이, 풍등豊燈 風燈 풍등놀이 셋이다.
쥐불놀이라 불리는 쥐불 놓기는 엄격하게는 놀이가 아니다. 정월대보름 다음날부터 농사일에 들어가는 어진 백성들이 객토를 하기 전 해묵은 풀과 해충을 태워 죽이는 작업이었다. 마음과 몸 자체가 종합예술가인 우리 조상님 아니던가. 이 작업과정에서 놀이를 가미한 것이 달불놀이다. 아마도 50대 이상세대는 깡통에 숯불을 넣어 돌려 달무리를 만들며 놀다가 그것으로 풀을 태우는 놀이를 경험했을 것이다.
지신밟기처럼 지신地神과 고씨高氏와 신농씨神農氏에게 비는 놀이 겸 의식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연등燃燈 만들기와 연등놀이는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의 사대재일四大齋日인 석탄재일釋誕齋日, 출가재일出家齋日, 성도재일成道齋日, 열반재일涅槃齋日 중 석탄재일인 사월 초파일 연등놀이다. 종교적 의식이 주이므로 연등절燃燈節이라 부르기도 하나 우리식 한자사용은 아니다. 불가에서의 명칭은 연등재燃燈齋다.
드디어 풍등豊燈 風燈 풍등놀이다. 豊燈, 風燈 두 개의 한자가 쓰이나, 한해농사가 완전히 끝난 시점에 날 잡아서 하는 풍년기원 놀이, 개인적 소망 빌기 놀이라는 점에서 豊燈이 설득력 있다.
풍등에 자신과 가족 기타의 꿈을 기도와 발원 형식으로 적어서, 띄어 올리는데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일상적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다. 그 면에서 풍등놀이는 인간적이고 유희본능에 충실한 놀이다. 연등놀이가 주로 강에서 이루어지는데 비해 풍등놀이는 강이든 못이든 바다이든 다 좋다. 등을 띄우며 줄길 수 있고 기원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으나, 물에 비치는 등의 아름다움을 누리기 위해서 물은 필수이었던 듯하다. 사족이다.
호모루덴스, 인간은 유희적 존재라는 의미인데예에외조차 없다. 식물인간도 흥겨운 음악을 들려주면 움쭐거리는데, 춤추는 것이란다, 암만.
온천천 온천천변 수영천 수영천변 수변공원 그리고 바다 온천천은 강이다. 천변은 강변이다. 산책로는 천변의 길이다. 예나 지금이나 천변은 소시민의 삶터다. 그게 아니라도 그를 상징하거나 은유하는 말이다. 박태원의 장편소설「천변풍경」이 대표적인 예다.
온천천 수영천 개발로 천변은 서민들의 작은낙원이 된다. 그 말에 걸맞게 산책로, 체육시설, 자연친화 공간이 전부다. 돈푼깨나 있는 사람은 잘 나오지 않는다. 옥체를 나타내는 경우에도 얼굴을 잔뜩 가리고 나온다. 아이들 문자로 쪽 팔린다는 것 아니겠나.
범어사 청룡동 남산동 두실 구서동 장전동 부산대학 상류다. 물길이 좁고 가파르다. 온천동 명륜동 동래 부산교대역 중류다, 물길이 비교적 넓고 흐름이 완만하다. 수영천으로 접어들면 물길이 완전 넓다. 흐름은 용틀임이 된다.
사람과는 달리 자연은, 그리고 강물은 갈수록 커지다가 마침내 스스로를 버리고 바다에 합류한다. 버려서 무한대로 커지는 강물, 그래서 강은 위대하다.
부산교대역이다. 모인 문산文山 26명, 대식구다. 목적지는 민락동 수변공원이란다. 수변공원 역동적이고 부티 나는 곳이다. 어디든 그렇다. 왜일까? 바다가 타고난 부자라서 그런가?
내 어린 날 연 날리기 내 어린 날의 연 날리기인 양 풍등은 기세 좋게 날아올랐다.
몇 개인지는 모르나 잠시잠깐 빨강 화려한 빛으로 밤하늘을 지배하던 풍등들은 높이 더 높이 올라 자취를 감추어버린다. 수변공원의 남녀노소들도 환호성을 멈추고 애석 애틋해 한다.
사라지기에 아름다운 것이 풍등 아닌가. 어디 풍등뿐이랴.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름다운 것 아니던가. 그것이 슬픔을 몰고 오는 것, 인생도 마찬가지, 단 한 번이기에 슬프고 아름다운 것 아니겠는가.
사라지기에 생 노 병 사, 통과의례를 거쳐 이승에서 사라지기에, 하루하루가 아쉽고 귀한 나날이고 순간순간 아니겠는가.
영원히 늙어가고 영원히 아프면서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도 생각해 보자.
조숙해서 슬픈 감성수필「소멸된다는 것에 대하여」다. 1971년 每日新聞文化面 '매일 에세이' 필진으로구사일생 뽑혀 놓고도, 지방지라고, 온천천변 부자인 양 쪽 팔린다고, 스크랩을 하면서 신문사 이름을 잘 안 보이게 하던 기억이 부끄럽고도 새롭다. 차아식 지가 무슨... , 주제 파악도 못하고.
소멸된다는 것에 대하여
Ⅰ
아침, 세수를 한다. 차갑다. 저릿하고도 후련한 감각. 그 맑은 물을 오므려지고 나는 흐뭇해. 유리알보다 투명한 그 속에 잠긴 두 손바닥이 유난히 곱다.
약간의 나르시시즘. 한참 그것을 보다 다시 한 번 손바닥 가득히 물은 담는다. 어린 시절 손가락 크게 벌리고 고양이처럼 허부적거리던 때보담이사 훨씬 크고 넓은 손의 연못. 그 연못에 어린 날의 기억이 보인다. 훨씬 크고 넓은 손의 연못. 그 속에 새로 어린 날의 기억이 모인다. 밥상에는 조개가 있고 고등어가 있고, 피라미가 놀던 걱정 없던 날의 강변에서 세상모르고 세상모르게 뛰어다니던.
그날 밤 아직도 낮의 흥분 속에 누워서 쳐다본 천정에는, 뒤섞인 조개와 모레가 한 말이나 움직거린다. 어린 날 천진한 추억도 거기 있다.
고였던 물이 손가락 사이로 빠지고, 다시 손금 선명해진 비인 손바닥. 물같이 그렇게 세월은 우리들을 떠나가고, 흘러간 물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도 물에 젖은 빈 손바닥 닮은 추억은 남는 것. 맑고 투명하고 천진스러운 온갖 종류의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바 다만 아름답고 순수하던 기억.
그렇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가장 깨끗한 손이 되게끔 한 차가운 물기의 소실처럼 서서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끝없는 아쉬움과 서운한 기분만 두고 흘러가버리는 것.
소멸되는 모든 것은 아름다운 것 아닐까. 지는 태양의 마지막 색조, 그를 배경으로 한 검은 곡선의 산, 퇴근길이 가난한 이웃, 곱게 늙은 촌로의 주름, 잠든 아이의 작고 짧은 죽음, 도살장 입구의 얼룩소 그의 마지막 절류, 아아 그 처절함이란. 지는 잎이 노래, 임종하는 자의 소리.
이런 모든 것은 우리들의 심사를 정갈하게 하는, 그래서 티 없는 하늘만큼이나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영원히 사는 것은 사람의 가장 바라는 바고 그를 위한 온갖 노력이 있었지만, 우주이 모든 것이 시간을 초월해서 변화 없이 그대로 지속된다면 무척 역겹고 권태로울 것 같다.
굽고 흉악해진 몸과 노망한 정신으로 보내는 나날, 계속되는 땡볕, 같은 색깔의 산등선, 늘 하는 일의 되풀이, 변화 없는 육신과 발전 없는 정신, 우는 아이, 크지 않는 나무와 지지 않는 꽃, 그 모든 것의 따분함.
이런 어이없는 까닭만으로 변화하는 우주의 조화 속에서 자신이 사라지고 없어져도, 이웃과 사회 그리고 세계는 아무 생각 없이 기왕의 운행을 계속하리라는 사실이 서럽기는 해도, 나는 그 변화와 소멸되는 모든 것, 서서히 사라져갈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Ⅱ
퇴근길의 무력감, 날이 저문다. 메커니즘과 일상에 단 한 번의 도저도 할 수 없었던 하루를 생각하며, 그런 나날 속에서 자신을 반성할 힘도 없이 귀가할 때 오는 두통. 몸도 마음도 아프다. 출세하고 싶다는 생각도,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도, 지위에 대한 동경도, 심지어 다른 사람은 모르는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는, 가난하지만 신나는 꿈도 지금은 없다. 젊은 시절 누구나 가지는 자의식과 자신감의 완전소실, 이렇게 내 젊은 날들은 사라져가는 것일까?
장래에 대한 설계를 할 수 있던, 어두운 창고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들여다보던, 앞만 보고 가던 시기는 어설픈 빌딩과 경적소리 술꾼의 주정과 경관이 몽둥이 한잔술 등속의 결코 없어질 것 같지 않은 그래서 아름답지 못한 사실들에 묻혀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철없이 고운 꿈과 자신만만한 포부와 저돌적 용기가 차고 넘치던 그날들 말이다.1971년 2월 자 원문 그대로
첫댓글 소설가님의 장문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풍,등지등. 문산의 힘은 하나되는 아름다운 마음 아닐까요? 항상 문산에 개근하시는 선생님의 성의에 감사 할 따름입니다. 후기 감사합니다.
김광수 올림. 하이고야 예년의 두 배 길이 말복더위에 댓글씩이나. 개근은 아니고, 정 시인이 챙겨주는 덕분이지 뭐겠어요. 정정희 시인의 명품 시와 수필 기다립니다.
선생님의 유려한 글로 후기를 대하니 황송하기만 합니다. 이 지독한 더위의 굴을 가면서 그날의 시원한 바닷바람과 우리들의 정담이 그나마 이 여름을 가비얍게 할 것 같습니다. 늘 문인이란 이름값을 진중하게 하시는 선생님을 본받아야 하는데 하면서 ... 그날, 우리는 별을 찾아 반디불이 처럼 까만 밤하늘로 떠가던 종이등을 배웅하면서 높고 아름다운 글 쓸 수 있기를 모두 소망했겠지요. 고맙습니다.
김광수 올림, 그저 송구스럽고, 반갑고 고마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