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궤구고두례
뺑코가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길을 걷다가 쓰러져서 119에 의해 응급실로 호송된다. 중환자실로 옮겨지지만 절망적인 상태라는 의사의 소견이다. 11월 21일 한달만에 다시 찾은 516호 병동에서는 희망을 보았다. 아직은 뇌에 물이 고인 상태라고 한다. 걷는 것은 금물이라는 의사의 엄명이란다. 하지만 몇달 후에는 거의 정상으로 회복할 수 있을게다. 친구들 모두 알아보고 이름도 부른다. 말투도 그런대로 또렷하게 하고 있다. 그의 아내는 힘들겠지만 지금 상태로도 만족하는 눈치이다. 부부란 촌수도 없는 남남이 우연히 만나서 평생 삶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세계인구 70억 중에 한 사람을 선택했으니 우연이 아닌 필연(必然)이며 천생연분(天生緣分)이 아니겠는가. 남편이 없고 아내가 없는 세상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 아니련가. 아무리 못 나고 보잘 것 없는 남편이요 아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들은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평생 함께 해야 할 부부(夫婦)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황혼을 바라보는 노객들에게는 어쩌면 자식보다 더 필요불가결한 존재이리라. 아내는 남편 하나만 믿고 살아온 지나온 세월이었을 게다. 지난 날 독수공방으로 수 많은 밤을 지새게 하던 날이 몇몇 해이던가. 남자의 계속되는 헛발질로 여인네는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눈물로 삼켜야 했으리라. 어디 그 뿐이랴 쥐꼬리만한 생활비로 쌀독은 항상 비워 있기 마련이며 밤이면 밤마다 곤두레 만두레 술에 취해 악취만을 내뿌려 대는 게 아닌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아내의 가슴에는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지요. 울며 보채는 철없는 어린 자식들의 똘망똘망한 그 눈동자를 외면키는 어려웠기도 했다오. 엄마의 품속을 파고드는 자식들을 따뜻하게 안아 주어야만 하니까 말이다. 모성애의 사랑과 손길이 없으면 이 세상은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병상에서 시름하고 있는 남편을 간호하는 아내의 심정은 어떠할까. 지난 날의 버림받은 외로움과 처절함은 온데 간데 없어져 버리고, 하루 빨리 일어나기만을 이 밤도 기도할테니까. 옆다리 한번 걸쳐보지 않은 남자 어디 있으리요까마는, 뭇 남정네 남편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모두가 아내에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할 때의 삼궤(배)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三拜九叩頭禮)로 속죄를 해야만 할 때이다. 홍수로 무너져 내린 건물이나 다리는 다시 세울 수가 있겠지만 깊게 파헤쳐진 여인의 상처는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까. 너와 나 가릴 것도 없이 지난날 저지른 악행을 고교동기이자 백년지기인 친구가 대신 십자가의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편한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다. 지금 남편인 길요셉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 상철아 ! 조금만 더 힘을 내거라." 그저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는 것만이 아내에 대한 보답이면 더 없이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상처의 흔적은 남아도 부부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려니까.
2017년 11월 25일 무 무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