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사랑공파는 관산파에서 갈려나갔다. 즉 자량(自良)의 둘째아들 종로(宗魯)를 파조로 하는 종사랑파(從仕郞派)인 것이다. 종사랑파가 여천파로 불리게 된 것은 종로의 아들 18세 용(庸) 때문이다. 그는 진사에 합격했으나 집안의 전통에 따라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수로 가던 길에 산수의 경관에 매료되어 정착하면서 불려진 것이다.
여천파는 3파로 갈라진다. 즉 용의 세 아들 중 큰아들 희징(希徵)·숙주(淑珠)·덕수(德秀)로 이어지는 덕수파(德秀派), 둘째 희록(希祿)·덕광(德光)·․정행(廷行)으로 이어지는 정행파(廷行派), 셋째 희무(希武)·철명(哲明)·흥인(興仁)으로 이어지는 흥인파(興仁派) 등이다. 3개 파는 주로 산수와 평려 신대에서 사나 광양·장흥, 전북·충남 등지에서도 살고 있다.
(1) 덕수파(德秀派)
□세거지 : 여천군 율촌면 산수(山水) (대동보 5권p.537)
덕수파는 파조에서 현손까지 내려오다 손이 끊겼다. 22세 홍룡(弘龍)․23세 국화(國和)․24세 성하(城河)․25세 명악(命岳)대는 독자로 이어오다 26세대는 사한(師漢)과 사충(師忠) 형제를 낳았지만 절손됐다.
(2) 정행파(廷行派)
□세거지 : 여천군 율촌면 산수(山水) (대동보 5권p.537~577)
정행파도 번성하지는 못했다. 그는 슬하에 처중(處中)·시중(時中)·필중(弼中)·수중(守中) 등 4형제를 둬서 처음에는 크게 번성했다. 큰집의 적손은 28세에 손이 끊기고, 차손으로 대를 이어가고 있다. 둘째 집안은 26세 4형제 중 백홍(伯洪)을 제외하고는 3형제가 무후다. 그리고 셋째도 손이 없는 후손이 많고, 넷째 집안은 그나마 미단(未單)이다. 후손들의 활동무대는 주로 율촌면 산수이다.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종손은 형진(炯鎭․1949년 己丑生)이다.
(3) 흥인파(興仁派)
□세거지 ① 여수시 율촌면 신대(新大) (대동보 5권p.541~925)
종사랑공파 또는 여천파의 대종은 흥인(興仁․1600~1663)파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의 호는 덕암(德菴)이다. 슬하(22세)에 천극(天極)·천정(天檉)·천주(天柱)·천추(天樞)·천기(天機) 등 5형제를 낳았는데 넷째 천추만 후손이 끊기고 나머지는 비교적 번창한 편이다. 다만 여러 형제 중 26세로 접어들면서 종손 집안만 신대를 지키고 나머지 집안은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종손은 계관(啓官․1959년 壬辰生)이다.
□세거지 ② 충남 금산군 죽림(竹林) (대동보 5권p542~925)
천극(天極)의 후손 중 26세 몽린(夢麟)은 고향을 떠나 충남 금산에 자리를 잡았다. 자손은 그리 번성하지 못하다. 29세까지 독자로 이어오다 30세에 들어서 3형제를 낳아 이제야 숫자가 불어난 추세다.
□세거지 ③ 광양시 옥곡면 무산(茂山) (대동보 5권p586~925)
몽린(夢麟)의 동생 몽구(夢龜)의 후손들도 고향을 떠나 인근 광양에 정착했다. 이 집안은 27세까지 신대에서 살았으나 후손 중 28세 영두(榮斗)는 순천 쌍암으로, 30세 수식(守植)은 광양에 보금자리를 잡았다.
□세거지 ④ 장흥군 장동면 북교(北橋) (대동보 5권p.590~925)
천정(天檉)의 증손 25세 명훈(命勛)은 고향을 떠나 장흥군 장동면 북교리로 들어가 산다. 그가 무슨 이유로 삶의 보금자리를 장동으로 옮긴지 알 수 없다. 그의 두 아들 중 큰아들 사검(師儉) 후손들은 장동·유치에서 살다 29세 명조(命祚)는 순천시 해룡면 발흥리로 되돌아와서 산다. 그리고 둘째아들 사겸(師謙)의 후손들은 주로 장동면 양곡(暘谷)에서 살고 있다.
□세거지 ⑤ 여수시 율촌면 평려(平閭) (대동보 5권p.547~925)
천주(天柱)의 현손인 백운(伯運)·백원(伯元)·백의(伯義)·백현(伯賢), 천기(天機)의 후손들은 평려를 중심무대로 살고 있다.
□세거지 ⑥ 전북 김제시 금산면 구월(九月) (대동보 5권p.631~925)
천주(天柱)의 후손 일부가 전북 김제시 금산면 구월리에서 산다. 26세 백형(伯亨)의 증손 유권(有權)이 그 주인공이다. 종사랑공파는 중심지가 율촌면 산수·신대·평려이다. 용(庸)께서 1460년 단종 때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니 벌써 557년 전의 일이다. 6․25 때는 100가구가 넘은 일가들이 살았다. 지금도 65가구 살고 있으니 장흥 다음에는 규모의 집성촌이다. 덕수파와 정행파가 외소하게 위축됐으나 흥인파(興仁派)는 부(富)와 귀(貴)를 향유한 거족으로 발전하고 있으니 다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