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얼굴
최원현
오랫동안 마음 졸이며 애를 태우던 일이 있다.
가족들 보기조차 왠지 겸연쩍고, 발가벗은 몸으로 무대에 올려진 것처럼 온통 부끄러움의 덩이가 된 듯 싶었다.
벌써 몇 년째인가.
아내는 보자마자 금방 알아보았고, 두 아이들도 제 엄마의 간단한 설명으로 이내 알아차리던데 나만이 감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나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던 무렵, 중국의 오지(奧地) 눈 덮인 촌길을 한 사진사가 말을 타고 가고 있었다.
그는 말을 탄 채로 "주님! 주님의 얼굴을 한 번만 보게 해주신다면 당신을 믿겠습니다." 하며 애 타는 심정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사진을 찍어라!"
그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눈이 녹기 시작하여 여기저기 검은 땅이 드러나 보기에도 흉한 들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음 속 음성을 따라 말에서 내려와 벌판에 카메라를 향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급히 집으로 달려가 필름을 현상했다.
아, 그런데 거기에는 온유와 사랑이 넘치는 참으로 인자한 모습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는가.
그로부터 그는 이 사진과 이야기(간증)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했고, 오늘에 이르는 동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진을 통해 예수의 사람들이 된다고 한다.
우리 집 식탁 벽에 걸려 있는 흑백의 사진에서 내가 예수님 얼굴을 보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큰 아이는 걱정이 있는 듯한 얼굴이라 했고, 작은 녀석은 슬퍼 보이는 얼굴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혼자서 불을 껐다 켜보기도 하고, 어쩔 땐 아내와 아이들에게 대략 윤곽을 그려 달라고 해서 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예수님의 얼굴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특정 관념 속에 시각을 고정시키다 보면 다른 방향의 모든 상상력까지도 차단되는가 보다.
내가 보는 사진은 그저 까만 부분과 흰 부분이 대비되어 있는, 어찌 보면 바위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먹물을 엎질러 번진 자국 같기도 한, 흑백의 의미 없는 사진 한 장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진이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라 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걸 알아보았건만 나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거의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다.
그저 딱 한 장 남아있는 흑백 가족 사진 중 웃고있는 여인이 어머니의 모습에 대한 내 기억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선지 꿈속에서라도 뵙게 되는 어머니는 항시 얼굴이 분명치 않았고, 대개는 멀리 떨어져 있는 희미한 형체로 확인이 어려운데도 그냥 어머니라고 인정해 버리는 그런 모습이었다.
서너 살이 되었으면 어렴풋이나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음직도 하련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되어 나에 대해서도 어머니 노릇을 거의 포기하신 상태였고, 대신 외조모님과 이모님께서 어린 나를 거두셨다고 한다.
벌써 사십 년이나 된 오래 전 일이요, 이젠 애 아이들이 훤칠하게 커버린 요즘인데 기억조차 희미한 어머니가 못내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느 순간, 무엇을 잃어버렸을 때 아무리 생각해 보려 해도 그것이 생각나지 않아 애를 태우던 때의 안타까운 기억을 누구든 한번쯤은 갖고 있으리라.
나는 그런 애태움의 순간 같은 안타까움으로 어머니를 그려보지만 역시 내게선 오직 한 장 사진 속의 모습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나마 단 하나의 아련한 기억은 그리움만을 더욱 짙게 할뿐이다.
나 혼자 집에 있게 된 어느 날, 살짝 눈을 감았다가 살며시 실눈을 뜨며 식탁 위의 사진을 쳐다봤다.
얇은 베일을 드리운 듯 어슴푸레 비쳐 보이는 흑백의 사진.
지는 해가 창문을 통해 드리운 빛이 실내를 알맞게 밝혀 주어서인지 내 눈에는 흑백의 대비가 아닌 예수님의 자애로운 얼굴 모습이 선명히 들어오는 게 아니가.
어떤 땐 까만 부분만으로 지팡이 든 모세의 모습 같기도 했고, 또 어떤 땐 하얀 부분만이 돋보여 이름 붙일 수 없는 이상한 모양도 되곤 했었는데, 지금 흑백의 조화 속에서 드러난 모습은 보기만 해도 마음 가득 지극한 평화와 감격을 채워 주는 참으로 보고 싶던 얼굴이 아닌가.
사실 그까짓 사진 한 장 속에 무슨 큰 의미가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매우 심각한 고민이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늘 함께 하면서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할 때가 많고, 또 가르쳐 주어도 자기만의 아집과 관점에서 미시적인 안목만으로 바라보다 보니 보아야 할 것, 알아야 할 것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 아닐까.
나의 경우도 그랬다. 참으로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것은 내 신앙 연륜에 대한 자존심이기도 했고, 지금까지의 나의 삶이 내 딴에는 최선을 다한다고 했건만 실상은 인정도 받지 못하는 지극히 형식적이고 내실 없는 삶이 아니었는가 하는 불안과 좌절의 두려움이기도 했다.
믿음이란 눈으로 보고야만 인정하는 것이 아닌데도 나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는 신앙 아닌 신앙으로 살아온 것 아닌가 하는 반성과 그렇다면 어떻게 이후 내 삶의 방향과 궤도를 수정해야 할 것인지 실로 난감하기조차 했다.
그런 내게 보여진 그 얼굴은 눈물나는 감격이었다.
뜨거운 감사였다.
지극히 작은 것에 그리고 아주 하찮은 것에도 쉽게 화를 내고, 쉽게 감동하고, 그래서 청승스레 눈물을 질질 흘려 아이들에게까지 마음 여린 사람으로 치부 받는 나에게 이것은 분명 커다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가만히 다시 식탁 위의 사진을 바라본다.
이제는 선명한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다. 참으로 보고 싶던 얼굴, 그려진 예수님의 여느 초상화와는 분명 의미가 다른 모습 아닌가.
참으로 보고 싶던 얼굴을 보게 된다는 것은 기쁨이기에 앞서 축복일 것 같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잊혀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생각이 나고 보고 싶은 얼굴들이 있다.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어릴 적 우리 집에 머물며 일을 봐주고 있다 병명도 모르는 병으로 갑자기 죽어간 연실이까지.
분명, 시간이 지나면 점점 잊혀져야 할 얼굴들이 더욱 보고 싶음으로 새록새록 피어나는 것은 순전히 나이 탓일까.
하지만 보고 싶은 얼굴들이 많이 있다는 것도 축복이 아닐까 싶다.
사람이 살아가는 중 가장 힘이 솟는 때는 남을 위해 또는 어떤 선한 목적을 달성키 위해 자신을 내어줄 때라고 하지 않던가.
내가 그 사진 한 장에서 찾던 얼굴 때문에 오히려 나를 돌아보게 되었던 것 같이 순간순간 이어지는 삶의 텃밭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은 얼마나 귀한 것들인가.
나는 그래서 다시 볼 수는 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보고 싶은 얼굴들이 많은 것에 가사하고 싶고, 더욱 더 보고 싶은 얼굴들을 많이 만들어 가고 싶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내가 보고 싶어하던 얼굴들이 대개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지만 이제부턴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늘 부고 싶은 얼굴들을 많이 만들어야겠다.
하지만 그런 얼굴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식탁 위의 예수님 얼굴처럼 나의 입장에서만 보려 했기에 발견치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식탁 위를 쳐다보니 예수님이 자애로운 눈길로 나를 보고 계신다.
'모두 사랑하라!'
눈으로 들려주시는 그 음성 따라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참으로 선명한 모습으로 사진 속에서 웃고 계시던 어머니가 그 뒤에서 더 환하게 웃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