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랑과 공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경은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어서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시편89,14)라고 말한다. 따라서 ‘공의’는 하느님의 보좌의 기초이며 그분의 ‘사랑’의 열매이다. 공의와 인자함은 상반되는 두 개념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자비’는 ‘율법의 의’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생각해 보라. 어떤 사람이 뜬금없이 갑자기 누군가에게 “내가 자비를 베풀어서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허황된 말이다. 그러나 명백한 잘못이 있는데, 조건 없이 그것을 용서해 준다면 그것이 자비요 은혜이다.
그러므로 자비나 은혜는, 우선 어떤 기준이나 법이 있어야 하고, 그 법을 범했는데 범법(죄)의 대가를 치루지 않은 상태에서 용서가 되어야 성립되는 것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공의와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로도 비유할 수 있다.
<법 – 범법 - 은혜는 연결된 고리와 같은 것>
하느님의 공의가 없다면 하나님의 자비가 존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기”(로마4,15) 때문이다. 범함이 없다면 죄도 없을 것이고, 죄가 없다면 형벌도 없을 것이다. 은혜는 형벌을 면죄하여 주는 것이고, 형벌은 하느님의 율법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사도 바오로는 “긍휼에 풍성하신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라고 말한 다음,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에페2,4-5)는 말씀을 삽입한다. 허물로 죽지 않았다면 구원도 필요 없었을 것이고, 구원이 필요 없다면 은혜가 존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설명한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하느님의 공의를 분리시키려는 것은 사탄의 사상이며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도전이다. 그는 범죄 할 때부터 하느님의 나라의 기초가 되는 공의와 율법에 대해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계속되어 온 선악간의 대투쟁의 쟁점은 하느님의 법이다.
사탄은 ‘하느님의 법’은 지킬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을 지키도록 요구하는 하느님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면서 하느님의 공의와 심판을 부인하는 것은 사탄의 그러한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그러한 가르침은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공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견책, 거룩한 하느님의 율법의 요구 등을 모두 무시하게 만든다. 그 열매는 하느님의 법을 알지 못하는 일반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생활로 나타난다.
마태5,16-20)절은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떤 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너무나도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율법, 하느님의 계명, 하느님의 공의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본뜻을 왜곡하는 것이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다”(시편85,10)는 말씀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하느님도 자기 의로우심을 나타내야 하는가?>
로마3,25-26절은 왜 십자가의 죽음이 필요했는지 그 이유를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예수를 하느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느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신 목적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그 중 하나가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다”. 이 개념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앞선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기도 의로우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십자가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죄가 있는 것도 아닐텐데 왜 그분에게도 십자가가 필요했을까? 십자가 이전에는 사람이 범죄하면 짐승을 죽여 속죄제를 드렸다. 그러나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했다”(히브10,4). 만일 짐승을 죽여 죄사함이 가능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느님은 죄를 단지 ‘간과’(파레시스)하신 것이다.
파레시스는 “사함”이 아니라 “넘어감” 또는 “지나감”을 의미한다. 만일 짐승의 피로 죄사함이 이루어졌다면 ‘아페시스’(죄사함)를 사용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피를 상징했던 짐승의 희생과 피만 가지고는 죄를 사할 수 없기 때문에 죄를 ‘간과’하셨다는 뜻이다. 그런데 죄를 ‘간과’(넘어감, 지나감)만 했다면 하느님은 죄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신 공의롭지 못한 불의한 분이 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하느님이 자신의 의를 드러내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공의로우신 하느님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의를 공개”하신 것이다.
곧 “때가 차매”(갈라4,4) 자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그분의 의가 나타난바 되었다. 사람들의 죄를 처벌하지 않고 넘어가신 하느님께서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주심으로써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의롭게 되신 것이다.
<하느님도 판단을 받으시는가?>
“자기도 의로우시며”라는 표현은 선악 간 대투쟁의 쟁점을 반영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우주 앞에 판단을 받으실 것을 선언하고 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느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로마3,4)
하느님이 누구에게 판단을 받으신다는 말인가? 누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고 있을까? 지금부터 이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우주에 다른 피조물도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지구상의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역은 하느님과 사탄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악간의 대투쟁의 역사이다.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는 육적인 세계에 속해 있고, 하느님의 구원 사역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서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 세계(사탄과 악한 천사들, 하느님의 천사들 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과 이해가 있어야 구원과 심판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이 “자기 의로우심을 나타내신다”는 말씀이나 누구에게 “판단을 받으신다”는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바로 이 영적인 세계의 존재들에게 하느님은 참으로 자비하시며 공의로우시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주심으로써 죄를 처리하시는 하느님의 공의로우심과 인류에 대한 사랑을 동시에 표현하신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1코린4,9)고 하였다. 이 말씀에서 “세계”는 ‘코스모스’ 즉 우주를 가리키는 것이다. 지금 지구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느님의 구속 사역과 그 과정 속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모든 성도들은 천사들과 심지어 사탄에게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그들에게 충분히 이해가 되어야 하며, 하느님께서 죄를 처리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절차는 모두 공개되는 것이므로 하느님께서 우주를 통치하시는 질서에 조화되도록 공정하고 의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다 충분한 이해를 위하여 계속 끝까지 계속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