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문재를 넘어 100 여 미터를 지나 왼쪽으로 동문산 방향으로 들어가면 해맞이길이다. 해맞이길은 90년대 중반 건설되었는데, 동문산 아래 능선 따라 묵호등대까지 이어지고 중간에 어달리 해변으로 이어지는 길이 하나 더 있다. 해맞이길은 1키로 미터도 되지 않는 작은 길이지만, 묵호항을 내려다 보는 산동네 사람들의 삶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묵호항에서 산동네로 올라오는 길은 논골길 산제골길 그리고 도저히 자동차로서도 오르기 힘든 가파른 게구석길 뿐이었는데, 그 마저도 힘 좋은 용달차가 기를 쓰고 올라서서 오징어 덕장까지 가기위해서는 다시 누군가의 지게짐을 빌려야 했다. 용달차 마저 없을 때는 묵호항 밑 바닥에서 정상의 건조장까지는 온전히 지게꾼들의 힘을 빌려 오징어와 명태를 말려야 했다. 해맞이길이 생긴 이후로 지게꾼들이 전부 사라졌다. 해맞이길은 오징어와 명태를 쉽게 말리기 위해 생겨난 길이나 마찬가지다. 덕분에 덤으로 90 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자동차의 행렬도 묵호등대로 향하게 되었고, 명절에는 멀리 외지로 떠난 자식들이 손쉽게 찾아올 수 있고, 실제로 명절에는 해맞이길에는 그들이 타고 온 자가용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원주서 기차타고 묵호역에 내려 묵호항으로 찾아왔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 없어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방이라도 하나 구해보려 했는데........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였는지 허름한 단칸방 하나 구하기 힘들었지. 일자리를 구하려면 텃세 부리는 훌렁꾼들에게 소주값이라도 줘야 하고....... 그래서 원주로 다시 가려고 돌아서는데, 누군가가 자기 집 창고를 빌려줄테니 살라고 해서.......어찌 어찌 며칠을 악다구니를 쓰고 훌렁꾼들과 멱살잡이를 하고 겨우 지게라도 질 수 있었지.
근데, 그게 말이야, 제대로 돈 벌이가 된 거지.“
나는, 오늘도 해맞이길에서 제일 전망 좋은 해맞이 마을에 앉아 동네 노인들과 술 자리를 갖는다. 그리고 그들의 지난 이야기를 듣는다.
"오징어 네 짝 지고 올라가면 3000원 주었는데, 그 당시 공무원 한 달 봉급이 6000원 할 때니....대단한 돈이 었지. 어떤 날은 스무번도 했으니 하루에 공무원 일년치 봉급을 벌은 셈이지.“
노인의 이야기는 절정으로 향한다. 빈 몸뚱이로 묵호항에 와서 지게 하나로 자식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보내고, 그런 자신이 대견한 듯 노인은 우수에 잠긴다. 나는 노인을 애틋하게 바라본다. 노인의 다음 이야기를 벌써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해맞이길로 가끔 차들이 지나간다. 아래 묵호항을 내려다 보니 울릉도에서 돌아오는 파란 여객선이 있다. 그 배를 보니 대충 시간이 짐작이 간다. 건너편 묵호등대에는 관광객들이 까물거린다. 등대 너무 동해바다 수평선이 아스라하다. 올려다 보니 커다란 안테나를 머리에 꽂은 동문산 정상이다.
잠시 동문산에 대해 이야기 해 보면, 동문산 서쪽 아래로는 7번 국도가 돌아갈 것이고 사문재는, 바로 백두대간 백봉령에서 옥녀봉을 지나 묵호시내를 감싸고 있는 초록봉으로 이어지고 서서히 내려앉아 동해바다 끝자락에 동문산으로 끝을 내는데, 동문산 자락의 나트막한 고개가 7번 국도와 만나 생겨난 이름이다.
동문산에서 정점을 찍고 다시 동해바다를 향해 세 갈래로 나누어 지는데, 동남쪽으로 뻗어 묵호등대가 서있고, 다음 남쪽으로 묵호등대와 논골을 사이에 두고 한 갈래가 빠져 나오고, 마지막 서남쪽으로 산제골과 게구석을 끼고 있는 가장 멀리 튀어나온 곳이 해맞이 마을이다. 해맞이 마을에서는 묵호항과 묵호 등대와 등대 너머 동해바다와 묵호 시내 중앙시장과 구 시가지를 완벽하게 내려다 볼 수 있다.
해방이 되고 6.25 전쟁을 거치면서 전국의 농촌에는 수 많은 빈농과 소작농이 생겨나고 그들을 굶주림에서 해방 시켜야 할 정치인과 관료들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들 스스로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부패한 정치인과 관료들을 몰아낸 군인들 또한 그들의 편이 될 수 없었다.
박정희 정부 1차 경제 계획에서는 식량과 공산품의 자급자족이 목표였다. 공업 또한 내포적 경공업이 전부였는데, 2차 경제 계획으로 들어서면서 수출 주도의 경공업과 중화학 공업이 주도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농촌에서는 새마을 운동으로 농지 정리와 마을 길 넓히기 지붕개량 등 외부적으로 환경미화 운동과 내부적으로는 경지를 정리하면서 하천 부지, 화전민이 만든 산지 심지어 마을 공유지까지 전부 국유지로 만들어, 그나마 거기서 농사를 지어 겨우 연명하던 빈농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들은 마치 잡초처럼 속아져서 도시로 가서 산동네에 무허가 집을 짓고 공돌이 공순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들 중 일부는 탄광촌으로 그리고, 오징어를 따라 이곳까지 몰려 온 것이다.
이 현상은 영국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형성 과정의 첫 시발점인 엔클로져 운동과 많이 닮아 있다. 영국의 시골 영주들이,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양모 산업에 원료를 제공하기 위해 그들의 장원의 공유지에 말뚝을 박고 양을 키우게 되었는데, 바로 그 공유지가 장원에서 일하던 농노들의 최소한의 식량공급처였다. 그것이 사라지면서 시골 장원의 농노들은 거지떼가 되어 전국을 떠돌게 되었다. 그 현상은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19세기 초까지 300 년간 계속되었다.
프랑스에 양모 산업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옆의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금을 약탈해서 화폐량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키고 그에 따라 사치가 늘어나고 그 사치품을 공급하는 공급처가 바로 프랑스였던 셈이다. 프랑스는 스페인의 금 때문에 산업화가 유럽에서 제일 빠르게 일어나고, 결국에는 금의 약탈과 사치에만 몰두하던 스페인은, 영국과의 대서양의 마지막 해전에서 패해 식민지 쟁탈전에서 밀려나게 된다.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를 거의 완성한 영국은 식민지 쟁탈전에서도 선두 주자로 나서면서 전 세계에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엔클로져 운동으로 농노들이 거지떼가 되어 돌아다니면서 그것이 사회문제가 되자 영국왕은 그것을 해결할 구민법, 빈민법등을 만들었다. 그것이 유럽 복지법의 효시가 되었다고 하니 아이러니하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드디어 마치 죄수 같이 포로수용소에서 연명할 식량을 나누어 주던 거지떼들을 이용할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바로 산업혁명으로 생겨난 공장들이었다. 그들은 최소한의 임금을 받는 공장의 노동자가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인류최초로 생겨난 새로운 인간형이 프롤레타리아의 탄생이었다.
영국 시골 장원의 빈농들이 거지떼가 되고 프롤레타리아로 탄생되듯이, 우리나라는 해방과 6.25 전쟁과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 운동을 거치면서 한국형 프롤레타리아가 태어난 것이다.
그 중 일부가 이곳 묵호항 산동네까지 오게 된 것이다.
“아들 놈이 죽어가면서......아버지 저 좀 살려주세요....하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 돌아.......”
노인의 이야기는 기어코 내 짐작을 벗어나지 않았다. 노인은 맨 몸뚱이로 원주 개운동에서 기차를 타고 이곳 묵호항에 와서 어쩌다 운 좋게 장가를 가고, 지게꾼과 건조장을 하면서 삼 남매를 시집 장가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십여년 전, 아내를 먼저 떠나 보냈다. 십년 넘은 아내의 병수바리에 필요한 돈도 그가 지게를 지어 벌은 돈이었고, 얼마 전, 간암으로 먼저 보낸 맏아들의 병원비 또한 그랬다.
노인은 그렇게 마무리 하면서 울먹였다. 나 역시 노인을 따라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문득, 2 년전, 무균실에 빡빡 머리로 헤어지는 나에게 손을 흔들던 딸 아이 생각 때문이었다.
산업혁명과 식민지 건설로 경제적으로 세계최고의 호황을 누리는 영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에게는 그 경제적 풍요가 전혀 전달되지 못했다. 그들의 노동은 상품생산의 한 단위로 전락해 경쟁력 있는 상품이 되기 위한 최소비용의 노동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노동은 전혀 그들의 생활을 나아지게 할 수 없었다. 자본가는 상품 생산을 위한 노동의 한 단위로 그들을 대할 뿐이었고, 드디어 영국왕과 의회는 거지떼들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민법과 빈민법을 만들었듯이, 역시 비슷한 방법으로 스피넘랜드법을 만들어 겨우 자본가를 달랠 수 있었으며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을 억지로라도 제압 할 수 있었다.
엉터리 복지법인 스피넘랜드법은 오래가지 못했다. 급기야는 노동자는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과 그들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챠티스트 운동을 일으켰지만, 그 역시 해결책이 아니었다.
묵호항 산동네는 위로 올라 갈수록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산다. 그 이유는, 편리한 어판장 바로 앞은 토박이 들이 살고, 빈털터리 온 외지 사람들이 불편한 산 위로 올라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게꾼들과 건조작업을 했던 사람들은 거의 다 외지 인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아픈 사연을 안고 힘들게 살아 온 사람들이다.
영국 프롤레타리아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도 해결을 못했듯이, 해맞이 마을 노인들의 아픔 또한 어느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했다.
프롤레타리아가 상품 생산의 한 단위임을 간파한 맑스도, 점잖은 박해주의자 아담 스미스도 공리주의자 밴담도, 그 이후 레닌의 러시아 혁명도, 모택동의 인민해방군도, 위대한 사회주의자 호치민과 체게바라 역시도 그들을 도와주지 못했다.
묵호항 산동네 사람들의 아픔 역시 그렇다. 누가 그들을 도와 준 적이 있는가. 국민들을 잘 살게 해 주겠다는 군사 정부, 문민 정부던 국회의원 시의원이던........
그들을 도와 준 것은 오로지 동해바다 뿐이었다. 묵호항이었다. 그리고 오징어를 지고 올랐던 이곳 산 동네 비탈길이었다.
이제 늙은 그들의 마지만 아픔 까지도 산 아래 동해바다가 품어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