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정無盡亭은 조삼趙參(1473~1544) 선생이 고향인 경남 함안에 내려와 후진을 양성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기거하던 곳이다. 1547년(명종 2)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하여 정자를 세워 그의 호를 따서 무진정이라고 했다. 선생은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킨 생육신 어계漁溪 조려趙旅(1420~1489) 선생의 손자다.
선생은 17세인 성종 20년(1489)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해 함양·창원·대구·성주·상주에서 지방관을 지냈고, 중앙에서는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을 지냈다. 독서를 좋아한 올곧은 성격으로 성균관의 생원일 때 연산군 폭정의 주도적 역할을 한 유자광을 처벌하자는 상소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정자는 출입문인 동정문動靜門과 정면 3칸, 옆면 2칸으로 이뤄졌다. 정자 중앙에는 마루방을 두고 양쪽에는 툇마루를 뒀다. 마루방과 툇마루에는 개방이 가능한 들문을 설치해 공간 활용을 더했다. 앞뒤의 퇴를 길게 빼고 중앙 한 칸을 온돌방으로 꾸며 놓은 현재의 건물은 1929년에 중건한 것이다. 아무런 장식 없이 단순하고 소박하게 꾸며져 조선 초기의 정자 형식을 잘 보여준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의 창시자 주세붕周世鵬이 무진정 기문記文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진정 정자 앞에는 함안 낙화놀이가 열리는 연못이 있다.
조삼 선생에 대한 기록
공이 과거에 응하기 위해 일찍 뜻을 세우고 독서에 전념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종이 밥상을 들여놓았으나 공은 밥상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글만 읽고 있었다. 종이 할 수 없이 밥상을 치워갔다. 점심 밥상도 깨닫지 못하니 종이 또 밥상을 치워갔다. 해가 지니 허기가 나므로 종에게 아침 밥상을 재촉하니 종이 사실대로 말하자 크게 웃으며 글에만 전념하다 몰랐다고 했다 한다. 이와 같이 서책 이외의 것에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 <함주지>
조삼 선생은 1489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곧이어 즉위한 연산군이 폭정을 하자 문과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힘썼다. 나중에 중종이 즉위하자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연산군 폭정의 주범인 유자광이 계속 벼슬을 하니 이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했다. 성균관 생원 조삼 등이 또 상소하여 유자광을 주벌하라 청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 <조선왕조실록> 중종 2년(1507) 4월 21일
주세붕 선생의 무진정 기문
지리산이 동녘으로 삼백 리를 치달아 하늘을 가로질러 지나가면서 말갈기가 떨치듯 물결이 용솟음치듯 함안의 진산을 이룬 것이 여항산이다. 그 한 가닥이 가볍게 날아오다가 십 리가 채 못 되어 엎드렸다가 다시 일어나 자줏빛 봉새가 새끼를 품은 듯한데 성이 그 위에 자리 잡은 곳이 함안 고을이다. 성산의 왼쪽 갈래가 꿈틀꿈틀 뻗다가, 서북쪽으로 굽어서 성난 말 같은 기세로 고을의 성을 에워싸고는 동쪽으로 청천에 이르러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고 고개를 치켜드는 것 같은 곳의 산마루에 정자를 지은 것이 무진정이다.
이 정자는 읍에서 소의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의 가까운 거리인데, 곧 우리 조목사 선생이 거처하시는 곳의 동쪽 언덕으로 선생이 이 언덕에 처음 집을 지으신 것이다. 큰길가에 버려진 하나의 언덕이었고, 읍에서 사람의 왕래가 아주 잦은 곳이었다. 아라가야의 개국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늘이 숨기지 않았고 땅이 감추지 않았지만은 이곳을 지나가는 이들이 하루에 천 사람, 만 사람이나 되는데도 이곳에 정자를 지을 만한 좋은 자리가 있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음을 듣지 못했다. 오직 선생은 한번 보고 이곳을 가려 잡목을 베어내고 집을 지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옛길을 옮기고 아름다운 나무를 심어 중국 한나라의 숨은 선비 장후의 정원과 같은 길을 내어 꽃나무 대나무가 엉켜 하늘을 가리고, 나는 듯한 지붕이 기와가 높이 치솟았으며, 노비의 집들이 언덕 바깥에 늘어섰으니, 길 가는 사람들이 신선의 집인 양 바라보았다. 선생이 내게 이르기를 자신이 무진정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그대는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 달라”고 했다. 내가 선생을 매양 뵈올 때마다 문득 나를 인도해 올랐기 때문에 그 좋은 경치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이 정자의 규모는 2칸인데 서쪽은 온돌방이요, 동북은 모두 창으로 되어 있고 창밖에는 단이 있어 구슬 문빗장과 같으며 그 아래는 푸른 암벽이다. 큰 냇물이 남쪽에서 굽이쳐 흘러오는데 맑은 거울과 같고, 돌아 흐르는 것이 구슬 띠와 같아 부딪칠 때는 패옥소리 같으며, 암벽을 돌아 풍탄으로 흘러간다. 시내 밖에는 천여 그루 되는 벽오동이 있고 동으로 바라보이는 모든 산봉우리는 노송들이 십 리까지 뻗어 울창하다. 선생은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죽어 돌아갈 곳”이라 하셨다. 남쪽을 바라보면 산이 우뚝 솟아 하늘을 떠받치듯 하는데 정자와 마주하는 산이 파산이다. 북쪽으로 바라보면 눈에 천 리나 보이는 들에는 보리가 자라며 푸른 물결같이 하늘을 흔들고 곡식이 익으면 황금빛 구름처럼 땅을 덮는다. 겨울에는 문을 닫고 햇볕을 쪼일 수 있고 여름에 창문을 열면 더위가 가까이하지 못하니 신선이 사는 곳의 자줏빛 비취색 같은 좋은 경치와 통하고 십주의 노을빛보다 낫다고 했다.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고 밝은 달이 먼저 이르니 반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온갖 경치가 모두 모였으니 진실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라 하겠다.
선생은 다섯 고을의 원님을 역임하시다 일찍이 귀거래사를 읊으시고는 이 정자의 높은 곳에 누워 푸른 산, 흰 구름으로 풍류의 병풍을 삼고, 맑은 바람, 밝은 달로 안내자를 삼아 증점曾點의 영이귀詠而 같은 풍류를 누리고 도연명의 글과 같은 시흥을 펴시면서 고요한 가운데 그윽하고, 쓸쓸한 가운데 편안하고, 유유한 가운데 스스로 즐기시면서 화락하게 지내셨다. 그 즐거움이야말로 많은 녹봉을 받는 높은 벼슬자리와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대체로 벼슬이 비록 영화롭기는 하지마는 욕됨이 따르는 것이므로 군자는 용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잠시 이 고을 일로서 말한다면 이방실 장군은 세상을 뒤엎을 만한 충성으로 서울을 회복하여 우리나라를 참혹한 변란으로부터 구제하여 그 공적이 막대하였지만 살아서 횡액을 면치 못하였고 어세겸魚世謙 정승 같은 분은 온 나라를 빛내는 문장으로 임금의 정사를 도와 많은 선비들의 기둥이 되어 그 명망이 더없이 높았지만 죽은 후에 또한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선생의 낙과 비교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는가?
선생은 이런 일들에서 보는 바가 있었음인가. 그리고 선생은 눈앞에 있는 산을 가리켜 죽은 후에 갈 곳으로 삼았으니 이 또한 천명을 아신 것이다. 천명을 알았기 때문에 능히 용퇴할 수 있었고, 용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능히 이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으니 정자의 경치도 무진하고 선생의 즐거움 또한 무진한 것이다. 무진한 선생의 즐거움과 무진한 정자의 경치가 모였으니 정자의 이름은 선생의 이름과 더불어 무진할 것이 분명하다. 선생의 휘는 삼參이요 자는 노숙魯叔으로 함안이 본관이며 같은 고을 사람으로서 진실로 덕이 높은 훌륭한 어른으로 벼슬길에서는 청렴하고 근신한 것으로 명성이 드러났고, 형제가 일곱 분인데 세 분은 문과에 급제하고 한 분은 진사시에 뽑혔으며 동기간에 우애로 서로 빛났으니 고을과 나라에서 이를 영화로운 명예로 여겼다.
내가 이 정자에 이름을 남기게 됨은 얼마나 다행이랴!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오늘날 큰 문장가들이 위아래로 어깨를 견주고 있으니 반드시 이 무진정의 의의를 남김없이 기록할 사람이 있을 것인데 나의 우매함을 무릅쓰고 기문을 짓는 것이 또한 외람되지 않겠는가? 사양하여도 허락하시지 아니하시니 우선 그 시말을 적어 드리는 바이다.
- 가정 21년(1542) 6월 지음
- 경신년(1800) 5월 현 기문 작성
함안 낙화놀이
조선 중엽부터 시작돼 매년 4월 초파일 무진정에서 열리는 함안 낙화놀이는 우리나라 무형문화재 가운데 불놀이 문화로는 최초로 문화재로 지정된 행사다. 참나무 숯가루를 한지에 싸서 댕기 머리처럼 엮은 것을 ‘낙화봉’이라 하는데, 이를 줄에 매달아 저녁 무렵 불을 붙이면 숯가루가 꽃가루처럼 무진정 연못 위로 흩날리는 불꽃놀이다. 불꽃이 바람에 흐드러진 풍경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경남도 무형문화재 제33호.
괴산재
괴산재槐山齋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정절공 조려 선생의 손자인 무진정 조삼을 기리는 집의공파 종중의 재실이다. 괴항마을 서편 산기슭에 1670년 창건돼 300여 년간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쳤으며, 조삼 선생의 후손과 인근 청소년들의 교육 전당으로 사용돼 왔다. 오랜 세월 초가로 된 서당이 노후화돼 불편을 겪다가 구한말 동헌의 목재가 매각되자 이 자재를 구입한 후 원래 자리보다 조금 높은 곳에 터를 잡아 1899년 8월 27일(음력) 상량식을 했다.
이곳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많았고, 걸출한 인재들이 이곳을 거쳐 갔으며, 학동들이 중심이 돼 격년제로 무진정에서 낙화놀이를 한 것이 함안 낙화놀이의 시초다. 차츰 신교육 제도에 밀려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문중의 모임 장소와 시제를 모시는 공간으로 위축됐다. 건물이 산 중턱에 있어 이용하는 데 여러 가지로 불편해 옛것은 그 자리에 보존하기로 하고, 현재의 위치에 새 보금자리를 지은 후 1992년 5월 31일 괴산재라는 이름은 그대로 가져와 낙성식을 했다.
(2020년 12월 함안 조씨 집의공파 종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