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삽니까
(막4:21~23)
미국에서 슈퍼마켓을 털었던 강도들을 대상으로 앙케트를 조사했습니다.
“주로 어떤 슈퍼마켓에서 강도질을 했습니까?”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은 “슈퍼마켓의 주인이나
종업원이 웃는 곳에서는 총을 들이대기가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웃지 않는 곳에서
강도질을 했다는 거예요. 웃는 얼굴을 가진 사람, 즉 밝은 얼굴을 가진 사람들에겐 강도조차
총을 들이대지 못했습니다.
몇 년 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한 교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괴한이 자동소총을 들고 예배실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신도들은 비명을 질렀고
괴한은 단상으로 뛰어올라 목사님의 얼굴에 총을 들이댔습니다.
교인들은 공포에 떨었지만 목사님은 침착하게 “Can I help you?(내가 도와드릴 일이 있나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괴한이 태도를 바꿔 “Can you pray for me?(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에게 기도를 해주었고, 기도를 마친 목사님은
그를 예배좌석으로 안내해준 다음 예배를 계속 진행시켰습니다.
잠시 후 교인들로부터 신고를 받은 경찰들이 들이닥쳤는데 목사님은 예배를 마칠 때까지 좀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목사님은 경찰들을 설득하여 괴한을 구속수사하지
않고 병원에서 3일간 정신진료를 받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3일 후에 그 괴한이 찾아와
자신에게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했다는 거예요. 만일 총구 앞에서 목사님의 얼굴이 흑색으로
변했더라면 어찌될 뻔 했습니까? 예배당이 피바다로 변할 뻔 하지 않았습니까? 목사님의 밝은
얼굴에 괴한도 총을 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해서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을까요? 우리가 빛을 비추어야 할 곳은 교회 안이 아니라
‘교회 밖’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 교인들은 어떻습니까? 이상하게도 교회 안에서는
다들 빛인데, 교회 문밖만 나서면 꺼진 빛으로 변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 21절은 단 한 구절로 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맞는 말이지요. 사람들이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는 것은 주변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즉 어두움을 물리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가치는 빛이 있음으로써 드러나지
않습니까? 빛이 사라지면? 가치도 사라지는 거예요. 사실 등불을 켜서 말(斗)로 덮어두거나
평상 아래 숨겨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너희는 빛을 비추어 너희 주변을 밝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나이가 많으신 충남 부여(扶餘)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부여의원’ 원장님이 계십니다.
그 원장님은 부여 수재(秀才) 출신으로 일제시대 때 평양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
촌이나 다름없는 고향 부여에 와서 의원을 개업했습니다. 당시 의사는 희귀한 직업이었기
때문에 한양에서 개업을 했더라면 명서도 얻고 돈도 많은 벌 수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고향에 내려와 의원을 개원했는데 당시 부여 일대에 의사라곤 그분 한 분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때문에 갑자기 산골에서라도 사람이 죽어가고 있으니 왕진을 와달라고 부탁하면 한밤중이라도
왕진가방을 들고 밤길을 달려갔다는 거예요.
장마철에 폭우가 쏟아져 시냇물이 범람할 때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급류에 빠져 죽을 뻔
한 적도 있었고, 겨울철에는 빙판 위를 걷다가 어름이 깨지는 바람에 얼어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는 거예요. 당시 농촌에 무슨 돈이 있습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치료비 대신에
옥수수나 감자나 쌀로 주는 경우가 많았다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배는 곯지 않았어도 넉넉한
생활은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일 년에 한 번씩 외상장부를 불태웠다는
거예요. 가난한 자들의 부채를 탕감해준 거예요. 그들의 심령에 자유를 주신 것이지요. 주변을
밝히는 등불처럼 사신 거예요.
21절의 비유는 요1:1절과 4절과도 연관됩니다. 요1:1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태초에 생명을 주는 빛이 있었다, 즉 태초는 ‘빛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거예요. 빛이 없으면
현재도 없는 겁니다. 빛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태초’는 헬라어로 아르케(ἀρκή)라고 하는 데
4가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이 아르케는 ‘태초(in the beginning)’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한글성경 요1:1은 번역을 참 잘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둘째는 ‘기초(foundation)’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1:1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만물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니라.”
‘사람이 무엇을 기초로 하여 살 것이냐’하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기초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운 것들도 다 무너집니다. 무너지면 그 동안 내가 수고하고 노력하고 투자한
것은 다 물거품이 됩니다.
제가 교육전도사로 있을 때에 한 권사님이 제게 “전도사님. 제 조카가 병원에 있는데 오늘
심방 좀 해줄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중간고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권사님. 내일부터 중간고사가 시작됩니다. 다음 주에 가면 안 될까요?” 그랬더니
그래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에 심방을 갈려고 했더니 “전도사님. 그 조카
장례를 그저께 치렀습니다” 그러시는 거예요.
그 권사님의 여동생은 일찍 청상과부가 되어 두 남매를 키웠다고 합니다.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면서 아들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딸은 이화여대로 보냈다고 합니다. 방학이
되어 유학을 갔던 아들이 잠시 귀국을 했는데 어머니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오랜만에
진수성찬을 차린 거예요. 그런데 오빠가 밥을 먹다가 동생이 귀여우니까 “야! 너 밥을 잘 먹는다”고
그랬다는 거예요.
그런데 오빠의 그 말을 들은 여동생이 그때부터 밥을 줄이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점심과 저녁을 학교에서 우유와 크래커로 때웠다는 거예요. 그러면 몸이 마르지요. 체중이
35kg까지 내려갔습니다.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딸을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의사는 진찰을
한 후 그 딸을 정신과로 보냈습니다. 정신과에서는 거식증에 걸렸다고 진단하고 입원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체중이 28kg까지 내려간 거예요. 뼈하고 가죽만 남았습니다.
그 딸은 숨을 거두기 직전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엄마. 나 살고 싶어”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는
거예요.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거예요.
소련은 공산주의로 ‘나라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초를 쌓기 위해서 수천만 명을
숙청했습니다. 이후 견고한 공산주의 집이 세워졌습니까? 아니지요. 그렇게 힘들여 세운
나라가 70년 만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70년 간 수고하고, 땀 흘리고, 고생했던
모든 수고가 다 헛수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돈이 인생의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이념도, 지식도, 외모도 인생의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인생의 기초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아르케는 ‘중심(core)’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생략)
넷째는 ‘최후의 가치(ultimate concern)’라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요1:1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최후의 가치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니라.”
겔3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한 골짜기로 데려가는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그 골짜기에는 수많은 마른 뼈들과 해골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여러분!
해골이 무엇입니까? 전혀 무가치 한 것, 어떤 희망도 없는 것, 절망적인 것... 그것이 해골이
아닙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에스겔아. 저 해골들이 살아 날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해골이 무슨
수로 살아납니까? 해골은 이미 끝장 난 거예요. 종지부 찍은 거예요. 이어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저 해골들을 향하여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외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하나님을 믿고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외쳤더니
그 무가치하게 보였던 해골들이,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던 해골들이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되더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깨우쳐주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유다 백성들의 정신상태가 저 골짜기의 해골들과 같다는 거예요. 희망이 없고,
꿈이 없고, 절망에 빠진 존재들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나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다면
그들의 정신은 다시 살아날 것이고! 희망을 품는 자들이 될 것이고! 어두움을 떠나 빛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거예요!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요즘 젊은이들이 “헬 조선! 헬 조선!”하고 부르짖습니다. 진짜 이 나라가 헬 조선이 되었습니까?
다들 배고파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까? 아니지요. 돈을 벌기 위해 이 나라에 들어와 일하는 외국
노동자들을 보면 이 나라가 결코 ‘헬 조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매주 주말이 되면
고속도로는 교외로 놀러가는 자가용들로 메어터집니다. 그런데 왜 ‘헬 조선’이라고 외칩니까?
그들의 영혼 속에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지요. ‘헬 조선’이란 “나는 희망이 없어요! 꿈이 없어요!”
라는 부르짖음뿐인 거예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유다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이런 사실은
시편137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독일 한 공원에 백발이 하얀 노인이 벤치에 앉아 깊은 묵상에 빠져있었습니다. 해가 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원지기가 다가가 “당신 누구요? 어디서 사시오?”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은
눈을 지그시 뜨면서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그걸 몰라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노인은 독일 근대철학의 아버지였던 ‘쇼펜하우어’였습니다. 여러분! 철학은
인간의 “최후의 가치”에 대해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걸 몰라
갈등하다가 죽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당신 누구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당신은 어디로 가오?”
“하나님께로 가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이렇게 인생의 방향을 확실하고 살아야 합니다.
빛 속에서 살면 방향을 잃지 않는 거예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