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여행길도 구름 가듯 떠났다
땅 위 봉암용곡엔 물이 흐르고, 하늘엔 희왕산을 넘어온 구름들이 흐른다. 사시사철 산문을 봉쇄하고 참선 정진하는 봉암사 납승의 발걸음 또한 날래다. 머무르지 않은 떠돌이 괴각승 혜수 스님의 그림자가 아닌가.
이 인근 문경 농암에서 1940년(추정)에 태어난 혜수 스님은 16살에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했다. 이곳 봉암사 희랑대 토굴 등에서 잠시 정진하기도 했지만 그는 정처없이 전국을 떠돌았다. 그러다 80년대초 불과 40여 살로 입적했기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그는 늘 선방에서 안거(여름과 겨울에 3개월씩 하는 집중 참선 수행)가 끝나면 바랑 하나 메고 곧장 길을 나섰다. 한 곳에 이틀도 머무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양말이 흘러내릴 정도로 황새처럼 가는 다리로 날 듯이 산을 탔다. 1년이면 그렇게 전국의 산과 절을 세바퀴씩 돌 정도였다.
그와 몇 차례 결제를 함께 했고, 이곳 희랑대 토굴에서 정진하던 그를 지켜본 실천불교승가회 의장 효림 스님(53)은 혜수 스님을 ‘이 시대 마지막 괴각승’으로 기억한다. ‘괴각’이란 ‘엉덩이에 뿔난 소처럼 괴팍한 승려를 일컫는 말이다.
상원사에선 주지가 절 돈을 착복한 채 대중에게 소홀히 하자 똥을 담아 불전에 올려놓았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그는 외곬수였다. 장부가 문을 두고 돌아갈 수 없다는 그였기에 하루는 함께 만행하던 도반들이 동화사에 앞질러가서 천왕문을 잠가버렸다. 그러나 천왕문 옆은 툭 터져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혜수 스님이 들어오지 않자 도반들은 화가 나서 돌아갔는다가보다며 그냥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길을 나서 천왕문에 나와 보니 혜수 스님은 그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도반들이 사죄했지만 그는 “밤새 서서 참선을 했다”며 태연했다. 다른 사람들은 흉내조차 내기 어려웠지만 혜수 스님은 평소 하던 대로였다. 매일 장좌불와(눕지 않음)한 그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내실 있게 절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강원도 동해 삼화사 주지 원명 스님과 경북 상주 남장사 관도 스님이 입을 맞춘 듯 “이 시대에 찾아보기 어려운 도인”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엉덩이 뿔난 소’ 괴각승
온나라 산·절 떠돌며 눕지도 않고 매일밤 참선
“앉은 채 떠날수 있나” 말에 그 자리서 찻잔 든 채 입적
원명 스님은 혜수 스님과 한겨울에 상원사에서 북대까지 오른 적이 있었다. 오대산은 눈이 많기로 유명하다. 원명 스님은 발목까지 덮는 농구화를 신었다. 그러나 눈에 빠져 눈밭을 걸을 수 없는 털신을 신고 있던 혜수 스님은 아예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걸었다. 원명 스님은 농구화를 신고도 발이 시려워 죽을 것 같았지만 혜수 스님은 맨발로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리곤 북대에 도착해선 얼음물에 발을 담가 얼음을 빼냈다. 원명 스님은 “육체의 고통 정도는 아예 초탈한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는 초인적인 수행력의 결과였다. 혜수 스님이 해인사 강원에 다닐 때였다. 동안거 중 음력 12월 8일 성도절(붓다가 깨달은 날)이 되면 대중들 가운데 희망자들이 모여 일주일간 용맹정진(전혀 눕지 않는 좌선)을 했다. 선원에선 괴팍한 혜수 스님의 참여를 거절했다. 그런데 용맹정진 시작 날부터 혜수 스님은 절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일주일 뒤 용맹정진을 마친 스님들이 처소로 돌아와 보니 방안에서 구린내가 진동했다. 스님들이 코를 틀어막고 탁자 밑을 보자 혜수가 그 밑에서 결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그의 다리는 굳어진 채로 펴지지도 않아 병원에 가서야 펼 수 있었다. 일주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고 똥오줌도 그대로 누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육체를 조복 받았다.
혜수 스님은 시력이 나빠 글씨를 읽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역대 조사들이 안경 쓴 일이 없다”며 안경을 쓰지 않은 채 살았다. 혜수는 대웅전에 있는 화엄 탱화 속 신중의 눈에 바늘을 꽂으며 “진정 이 신중에게 영험이 있다면 이렇게 해를 끼쳤으니 내 눈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 영험을 실험했다고 한다. 두려움 많은 세인에겐 기도 안 찰 실험이다. 선승인 관도 스님은 “틀에 박힌 격식을 거부하고, 몽둥이로도 과감히 실험을 하는 그런 선승을 남의 눈치나 살피는 세상 어디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했다.
혜수 스님은 80년대초 선방 결제 뒤 남장사를 바람처럼 지나갔다. 그 날 사자평을 넘으며 젊은 선승들에게 혜수 스님은 “선사라면 선사답게 좌탈입망(앉은 채로 입적)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밀양 표충사에 도착해 객실에서 차를 마시던 중 한 선승이 “그럼 스님은 좌탈입망 할 수 있습니까”하며 따지듯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혜수 스님은 찻잔을 든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구름이 가듯, 옷을 벗듯 혜수 스님은 그렇게 허물을 벗어버렸다.
사망을 확인하는 경찰도 ‘앉아 있는 주검’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간첩의 독침을 맞으면 즉사한다는 소문도 있는 때여서 병원으로 옮겨 해부까지 했으나 독침을 맞거나 독극물을 마신 흔적도 없었다. 그가 방장이나 조실이었다면 달마나 육조 같은 조사들이나 하는 것으로 전해진 좌탈입망이 현실로 나타났다며 세상이 요란할 일이었지만, 떠돌이의 법구는 조용히 불태워져 산에 뿌려졌다. 탑도 세워주는 이 없었고, 상좌(제자) 하나 없으니 그를 기리는 제사도 없다.
희왕산의 나무가 소리없이 물들고 있다. 옷을 벗으려나 보다. 혜수 스님이 간 것도 가을이었다.
/ 대한불교조계종 웹진 '언론에 비친 종교'
첫댓글 隨處作主 - 앉은 채 떠날 수 있냐는 質問에 그 자리서 찻잔을 든 체 入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