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서정진
텔레비전에 비치는 양반집 종가를 보면 부럽다. 지금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구조라 좀 불편한 점이 있겠지만 나는 마냥 좋아 보인다. 우선 넓고 시원하게 터진 마당에 우람한 고목이 떡 버티고 자리를 차지한 거라든가, 은근한 내실이라든가, 누마루에서 대청으로 이어지는 공간에 큼지막한 현판들이 큰 뜻을 품고 위풍당당하게 걸려 있는 모습은 위엄까지 있어 보인다. 또 내가 매혹되는 것은 연륜을 헤아릴 수 없는 뒤뜰의 질서정연한 항아리들이다. 크고 작은 항아리의 집합체 장독대에는 대대로 내려온 그 집 조상의 손때가 묻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집안 전체를 푹 감싸고 둘러쳐진 울타리는 마음의 평정을 가져온다. 무엇이든 가려주고 덮어주고 무한한 사랑으로 어떤 근심 걱정도 해결해 줄 듯한 신뢰의 묵직함이 어버이의 깊은 아량 같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보기 위해서는 일부러 찾아가거나 텔레비전에서만 가능하다. 생각해보니 나는 근사한 울타리가 있는 집에서 산 적이 없다. 어릴 적 자주 갔던 외가도 규모는 크나 미음자로 된 집으로 대문이 두 개였으며, 울타리라고는 뒤꼍 약간 비스듬한 언덕에 장독대를 에워싼 반달 같은 모양이 고작이었다. 현 시국이 매우 시끄러워 불안하다고 국민들이 걱정한다. 문득 국가를 생각해 본다. 국가는 국민들을 책임지고 안심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어린이들이 어떤 환경에서도 희망을 품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튼튼한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한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식의 울타리로, 사회 지도자들은 사회인의 울타리로, 나아가 국가는 국민들의 울타리가 되어 상호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부모가 늙으면 역으로 자식이 부모의 울타리가 되기 마련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식이 많으면 사람들은 울타리가 튼튼하다고 말했다. 지금은 자식을 하나나 둘만 낳아 튼튼한 울타리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숫자가 무슨 대수이겠는가. 자식 하나라도 열 자식 부럽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열 자식이 있어도 없는 이만 못 할 경우도 있으리라. 세상이 변하여 유교적인 사상이 많이 감퇴되어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든가, 장유유서(長幼有序) 같은 예법이 많이 약화된 듯하다. 부모의 재산 분배도 아들 딸 구별 없이 법으로 정해져 특이한 사항이 아니면 그대로 시행된다고 한다. 자식을 든든한 울타리라고 여기는 시대는 지난 듯싶다. 청년실업이니 뭐니 하며 젊은 세대들의 어려움이 TV나 신문 지상에 자주 오르내린다. 의무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지경일진대 무어라 탓 할 수 있겠는가. 훈훈하던 친족 간의 친목이 핵가족화 되어 이제는 자연스레 소원해져 가고 있는 것이 이즈음의 추세이다. 집을 둘러싼 울타리처럼 혈족들로 이어진 친밀한 관계 유지는 전통적인 우리네 문화다. 집안이란 울타리 안에서 서로 어깨를 기대며 삶을 지탱해왔던 안식처였다. 살아가는 데는 울타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관계라든가 삶의 터전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의 선조들은 매우 지혜로웠다. 가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쉼터로 설계한 흔적이 여기저기 나타나 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햇빛과 바람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골조만 세우고 벽을 다 튼 것이며, 가족 간에 예의와 품격을 지킬 수 있도록 안채·바깥채·사랑채 등으로 구분한 것이며, 곳곳에 풍류를 즐길 수 있게 한 공간 구성은 참으로 멋지고 훌륭한 꾸밈이다. 나는 생뚱맞게 이런 고가에서 한 번 살아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야트막한 울타리안의 집에서 옛날 양반집 규수와 같이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누각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한시(漢詩)라도 한 수 읊조리며 바람을 벗 삼아보고 싶은 생각을 해본다. 좀 더 젊었더라면 한 번쯤 시도 해 볼만도 한데, 이제는 나이를 가늠하며 접어두고 고택을 찾아가는 여행으로나마 아쉬움을 달래는 수밖에. 울타리 있는 집에서 사는 꿈은 이룰 수 없게 되었지만, 누구에게나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는 넉넉한 품을 지니도록 마음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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