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십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2024년 7월 7일 맥추감사절 강단에 예쁜 꽃이 장식되었고 그날 전교인 점심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풍성한 식탁이 차려져 더 따뜻한 성도의 교제 시간이 되었다. 어느덧 팔순(八旬) 생일을 맞이한 조옥현(曺玉鉉) 권사가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준비한 만찬이었다. 보통 팔순 생일쯤 되면 벅적지근하게 잔치를 배설하여 동네방네 소문내고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지만 조 권사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사도 바울의 간증처럼 진정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였기에 그때마다 감사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기 일쑤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해 준 성도들에게도 그 마음을 표하고 싶어서 조용하게 나눔의 시간을 마련한 것이다.
조옥현 권사는 1945년 6월 27일 평창군 봉평면 원길리 669번지에서 부친 조규동과 모친 유혜령의 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봉평교회 주일학교를 다니며 믿음 안에서 자랐다. 1967년 그의 꽃다운 나이 23세 때 아래위 집으로 사는 중등학교 교사 곽부근(郭富根) 청년과 결혼했다. 주변에서는 믿음의 가정이 아니라서 만류도 있었지만 문득 자신의 한 몸 바쳐 한 가문을 구원하겠다는 전도자의 심정이 온몸을 채워 믿음의 희망을 가지고 새 출발을 했다. 결혼 후 결국 완고했던 시부모가 구원받았다. 더욱이 1980년 2월 제8회 평창지방회에서 남편이 장로가 되었을 때는 너무 기뻤다. 그러나 이듬해 춘천으로 전근하는 바람에 불가불 춘천중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조 권사는 거기서도 담임목사에게 인정받고 성도들이 칭찬하는 일꾼이 되었다. 평생 새벽기도의 사람이 되어 매일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며 하나님께 나아갔다. 하나님은 그에게 건강으로 응답하셔서 더욱 열심히 주의 일에 충성할 수 있었다.
남편의 은퇴 이후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2006년 봉평교회 제3 성전을 건축할 당시 여선교회 총무에 결원이 생겨 갑자기 그 직분을 맡게 되었는데 마침 교회 일을 하고 싶었던 터라 너무 기쁘게 감당했다. 그때 성전건축에 여선교회가 할 일을 궁리한 끝에 자신의 집에다 함바집(hanba집, 현장식당)을 운영하여 불철주야 수고했다. 장로로서 거액의 건축헌금을 드리면서 물질적 어려움이 발생했지만 수년 후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해결해 주셨고 자녀와 손주에게 복을 주셨다. 목회하는 아들과 딸, 믿음으로 잘 자란 손자들 모두가 진정 부족한 자신이 맺은 자랑스러운 열매였다. 그의 기도대로 믿음의 가문을 이루었으니 그의 지난 삶의 처처에 묻어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놀라웠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의 크신 은혜라” 찬송가락이 심령에 맴돌며 가슴 벅찬 감사가 하늘을 찌른다.
이렇게 인생 팔십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감사의 봇물에 흠뻑 젖어 있던 조 권사는 문득 마음을 가다듬고 걸어온 발자국을 되짚어보았다. 그때는 나름대로 똑바로 걸었고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올라온 것 같았는데 웬걸 삐뚤빼뚤 트위스트 춤을 추듯 요동치는 걸음걸이가 보여서 누가 볼 새라 얼굴이 빨개졌다. 무식이 용감하다는 말처럼 저렇게도 선명하게 발자국을 남긴 자신이 부끄러웠다. 인생산 8부 능선에서 내려다보니 4, 5부 능선에서의 어설펐던 발걸음이 무척 아쉽게 느껴졌다. 웬걸 얼추 인생 성숙기라 여겼던 6, 7부 능선에서도 부족함이 여전한 것을 보고는 인생이란 그저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이 심령에 새겨졌다. 그리고 앞에 놓여 있는 9부 능선을 올려다보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똑바로 걸어가야 한다는 강박감이 심령을 짓누른다.
초로(初老)해진 앞모습보다 이제 뒷모습이 더 자연스럽게 보이는 앞선 자의 자리에 와 있는 지금 내 힘으로 치장 불가한 뒷모습 때문에 초조해졌다. 앞모습은 손으로 치장하고 뒷모습은 발로 가꾼다는데 점점 노약해지는 다리로 잘 걸을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 같다. 허투루 살 수 없는 인생의 대 과제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비뚤게 걸어가려면 차라리 그 자리에 멈춤(죽음)이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처럼 더욱 행동거지에 깨끗함을 다짐했다. 세월의 흐름으로 다가온 늙음은 낡음이 아니라 숙성의 과정이 되도록 더 신경을 곤두세운다. 언젠가 이 땅에 육신의 흔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라도 뒷사람에게 믿음의 증거를 남길 수 있도록 하려니 세월의 물살에 흐릿해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과연 뒷사람은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할까? 팔십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깨달은 하늘의 진리를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땅의 일에 너무 목숨 걸며 마구잡이로 살지 말자고 심령에 아로새겨질 메아리가 되기를 바라며 더욱 목청을 높인다.
팔질(八耋)의 나이가 되고 보니 그동안 꿰차고 있던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강박증이 밀려왔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자리에 서있는 자신에게 따가운 눈총이 쏟아지지 않을까 괜한 염려에 사로잡힌다. 이때 평생 자상한 언어를 감추고 살던 남편이 어렵게 입을 뗀다.
“90세까지는 찬양대 해야 돼.”
어째 듣기 싫지 않았다. 모세는 120세까지 주의 일했다는데 내친김에 그의 삶을 꿈꾸며 만용을 부려본다. 거룩한 욕심, 세상 때는 조금도 끼지 않은 순수한 열정, 오직 주님만 높이는 찬송의 제사장으로 팔십 고갯마루에서 다시 인생 설계도를 그린다. 시행착오의 순간을 거울삼으면 더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자손에게 좋은 엄마로, 뒷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원로로, 목자에게 착한 양으로, 하늘 아버지에게 사랑받은 딸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화선지를 집어 들고 이 고갯마루에서 진심을 다한다. 이런 삶이 어찌 비단 그뿐이랴? 모든 그리스도인은 팔십이 되기 전에라도 이 그림은 하나쯤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연수는 칠십이고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 90:10).
전교인에게 팔순 잔치를 배설하고 은혜를 나눈 점심만찬의 조옥현 권사
생일 축하 하며 케이크 촛불을 밝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80년 인생길 간증하는 조옥현 권사(2024년 6월 28일 금요심야예배)
첫댓글 뒤 돌아보니 모든것 하나님의 은혜였소 마루에서 뒤 돌아볼 나의 믿음의 쉼터가 남은 생애 이 땅의 삶
하나님의 지팡이를 의지하며 더욱 힘찬 발걸음 옮기소서
그 날 까지
Forev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