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고마워해야 할 사람 / 신은주
친정은 2남 5녀 중 위로 셋이 내리 딸이다. 이 세 딸은 부모님께 든든한 살림 밑천이 되었다. 엄마가 쉰 하나에 고혈압으로 쓰러질 때 막내인 나는 열여섯이었다. 언니들은 엄마를 간호하고, 농사일을 돕고 동생들 학비와 용돈뿐만 아니라 친정집을 여러 번 고쳐 주었다. 동생들 결혼할 때마다 목돈을 모아서 큰 일을 치렀다. 내가 결혼할 때도 백만 원씩 모아서 신혼살림을 사주었고 (그때 난 십만 원도 없었다) 아이 셋을 낳을 때마다 각자 백만 원씩 걷어 산후 조리비를 내주었다. 아이들 모두의 백일, 돌, 입학, 졸업까지 챙겼다. 심지어 큰아들 군대 갈 때, 휴가 올 때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언니들의 애정은 과일, 생선, 고기가 되어 날아온다. 그 사랑을 가슴 깊이 고이 간직하고 있다. 언니들에게 받은 사랑을 조카들에게 갚고자 그들의 결혼, 출산, 돌 때마다 백만 원씩 보냈다. 다음 달이면 열두 번째 백만 원을 보낼 것이다. 형제간의 사랑은 주고받는 사랑이다. 나는 갚고 있는 중인데 언니들은 부채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언니들은 결코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다. 본인들 가정이 평안하지 못하여 마음고생이 심한 중에도 그 일을 계속했다는 것이 참 속상하다. 나라면 그렇게 못 했을 것이다. 내 언니들 같은 분들이 흔치 않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고맙고 미안하다.
혈육이 아닌 사람으로서 가장 고마워 해야 할 사람이 있다. 그는 내 인생에 첫 자동차를 사주었다. 2010년 '베르나'였는데, 자동차 등록비까지 해서 천만 원짜리 수표와 오 만원 지폐 여덟 장을 장판 위에 척 내려놓았다. 그때의 감격이란! 매일 버스로 출퇴근하던 내게는 참 시의적절한 선물이었다. 장롱 속 구 년짜리 면허증이 제 빛을 찾았다. 초보운전으로 출퇴근길을 조마조마하게 오가던 일은 추억이 되었다. 서른일곱에야 자가용 운전자가 되었으니 느지막한 시작이었다. 그러나 삼 년 만에 덤프트럭과 충돌하여 폐차할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다치지 않았지만 경과를 보려고 목베개처럼 생긴 목쿠션을 차고 병실에 누워 있었는데, 그는 이런 내 모습을 보자 많이 다쳤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흐느꼈다. 이는 나를 향한 가장 강력한 긍정의 감정표현으로서 이 후로는 볼 수 없는 귀한 장면이었다.
그는 매 년 설 때마다 내게 백만 원 수표를 준다. 복돈이란다. 나는 그에게 큰돈을 줘본 적이 없다. 밥해주고 살림하고 가끔 속옷과 양말, 붓 펜을 사 주었을 뿐이다. 그는 농작물 돌보고 수확하는 일을 항상 함께 하지만 한 번도 자기의 몫을 가져간 적이 없다. 모두 내가 팔아서 내가 가져간다. 수고했다고 용돈이라도 주면 좋았을 텐데 받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쭉 그래 왔으니까, 또 매 월 충분한 돈이 들어오니까) 줘 본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용돈을 내 자녀들에게 쓰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 수고나 심부름도 하지 않았는데 시도 때도 없이 돈을 준다. 아이들이 안 받으려 하면 "나는 밤마다 돈을 찍어낸다" 하면서 껄껄 웃으며 돈을 내민다. 그러면서 아껴 써야 한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는 남편의 일 톤 짜리 포터 트럭을 두 번 사줬다. 또 첫 트랙터 살 때 이 천사백만 원을 주셨다. 우리가 임실에 들어오기 전에 팔 년 동안 매주 광양에서 오가며 농사를 도왔는데 모든 농사 수입을 차곡차곡 모아서 매 년 겨울에 목돈으로 통장에 입금해 주신 그분은 바로 내 시아버지이다.
물질뿐만 아니라 좋은 농사 멘토로서 작물의 파종과 재배, 수확 등을 시시때때로 알려 주시고, 농사일을 많이 도맡아 주셨다.
이제는 구순이 되어 집 앞 텃밭만 신경 쓰시고 계시지만 여전히 우리의 뒷심이 되어 주신다. 작년에는 내게 집을 증여해 주셨다. 남편에게는 형제들과 나누고 남은 자투리 작은 토지들과 산들을 모조리 주었다. 심지어 이번 달에는 자신의 쌈짓돈을 내놓았다. 밭을 논으로 만들기 위해 관정을 신청했는데 자부담 비용을 주신 것이다. 이백만 원이었는데, 오 만원 짜리 만 원짜리 차곡차곡 서랍에 모았을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여 받기가 민망하였으나 여전히 강력하게 내미는 성미 앞에 은근슬쩍 받고 말았다. 지난달에 비탈 밭을 논으로 만들기 위해 장비를 불러 엿세 일한 값이 오백사십이나 나왔다. 가계부가 휘청거린 터라 못 이기듯 손을 내민 것이다.
아버님은 내게 참 고마운 사람이고 앞으로 그 마음으로 섬겨야 할 분이다. 돌아가신 시어머님과 함께 일궈온 농토는 고스란히 우리 부부에게 큰 자산으로 넘겨졌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아버님은 고마운 분이시다. 그런데도 아버님과 요 몇 년 간 얼마나 힘든 감정싸움을 하였었나. 노인성 우울증과 허무를 짜증으로, 익숙한 관계에서 생기는 느슨함이 무례함으로, 바빠진 며느리를 용납 못하는 미움으로, 손자들에게는 지나친 훈육으로 상처를 주는 일이 왕왕 발생했다. 그동안의 좋았던 감정들이 하나하나 죽어가고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아버지를 두고 볼 수 없다고 남편에게 하소연과 선전포고로 고통을 주었었다.
좋아졌다 나빠졌다 파도타기를 반복하며 지쳐가던 내게 일 년 동안의 상담은 큰 힘이 되었다. 공간적 거리두기와 자기 보호, 연민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다 결국 감정적인 독립을 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지고 나니 아버지가 보였다. 그의 작아진 체구와 구부러진 체형이 눈에 띄었다. 든든했던 아버지가 이제는 돌보고 지켜줘야 할 분이 된 것이다. 깔끔했던 옷매무시도 이제는 왠지 허술하고 추레해져서 안쓰럽다.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해주신 말이 있다. 자기는 노망 들어 배변을 가리지 못하는 시아버지 방을 한 번도 치운 적 없다셨다. 밥상만 채려 줬고 남편이 밥상을 들고 가 다 떠먹이고 방도 치우고, 옷도 갈아입히셨단다. 아버지는 효도받아야 마땅할 효자였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지 않고 끝까지 집에서 간호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아버님이 오래도록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자신의 집에서 평안하게 여생을 마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버님은 내가 가장 고마워해야 할 분이기 때문에 나 또한 그에게 가장 고마운 사람이 되고 싶다.
첫댓글 우리 아버지와 참 비슷하신 분 같아서 글을 읽는 내내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네요. 외롭지 않게 곁을 지켜 주는 선생님을 당연히 가장 고마운 사람으로 알고 계실 거예요.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아버지의 인생이 한 눈에 잡힙니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 분이시군요.
완고하지만 그분의 방식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한눈에 보입니다.
이제 구순이나 되었다니 잘 모시면 좋겠습니다.
나이 이기는 장사가 없더라고요.
오래도록 건강하게 사시기를 빕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 것 같아요. 받은 만큼 해드리지 못하니 죄송할 뿐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글 읽으면서 '가장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당연히 남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뜻밖에 시아버님이군요?
평생 과한 약주로 가족들의 걱정거리로 살다 가신 아버님만 보았던 저로서는 신은주 선생님이 정말 부럽습니다.
잘하다가도 때때로 고비가 찾아올 거예요. 제가 앞서 경험한 바로는 나이도 어쩌지 못하는 하나의 질병이더군요.
아무리 요양시설이 훌륭해도 자기 집만 할까요? 아버님께서 몸 관리를 잘하셔서 하늘 소풍 떠나는 날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시아버지의 사랑은 며느리라고 했는데 안 계셔서 전 그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어요. 부럽습니다. 받은 사랑만큼 시아버님께 돌려드리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