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노트 72
< 수행 노트는 1996년도부터 미얀마 마하시 명상원에서 수행을 지도하시는 스승과 한국인 수행자들의 수행면담을 해를 거듭하면서 기록한 내용입니다. 마하시 명상원의 지도 스승은 세 분으로 6개월마다 바뀌십니다. 그래서 사야도의 법명과 수시로 바뀌는 한국인 수행자의 이름은 생략했습니다. 첫해 수행면담은 '보니 거기 세상이 있다'라는 이름으로 출판했습니다.
< 참고 >는 수행자의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서 보충한 내용입니다. 보충한 내용은 저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수행은 개인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총론에서 벗어나면 안 되므로 반드시 스승의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또 명상원에 따라 다른 수행방법도 있음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1. 질문 : 좌선을 할 때 조금씩 허리가 앞으로 구부러집니다. 그 순간에 그냥 알아차려야 할지 허리를 펴고 해야 할지 망설였습니다.
사야도 답변 : 허리를 펼 때 허리를 펴려는 의도를 알아차린 뒤에 ‘허리 폄, 허리 폄’하면서 허리를 펴라. 자세를 바꿀 때는 자세를 바꾸려는 의도를 알아차린 뒤에 ‘자세 바꿈, 자세 바꿈’하면서 바꾸어라.
< 참고 >
몸을 움직일 때는 몸을 움직이려는 의도를 알아차린 뒤에 몸을 움직이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합니다. 의도는 오온의 행온에 속하는 것이지만 마음의 영역에 속합니다. 사실 몸을 움직일 때는 의도 없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의도는 마음의 영역이라 좀처럼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의도를 알아차리고 움직이라는 가르침을 들어야 비로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사념처 수행으로 몸, 느낌, 마음, 법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조건이 성숙되어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대상 하나를 집중하면 사념처 수행 중의 하나를 알아차리는 수행이 됩니다.
이때 의도를 알아차리면 심념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면 신념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일 때 가볍다거나 무겁다거나 단단하거나 부드럽다거나 하는 느낌을 알아차리면 수념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움직일 때 무상이나 괴로움과 무아를 알아차리면 법념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특정한 염처에 대한 선택을 의도하지 않을 때는 그냥 느껴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어떤 염처를 알아차리든 마지막에는 법념처를 알아차리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좌선 중에 허리가 약간 구부러진 것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집중이 되어서 자세가 무너지면 바르게 세우는 것이 좋습니다. 나쁜 자세로 오래 앉아있으면 나중에 통증이 생기므로 바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만약 허리가 구부러진 것을 바로 펼 때 알아차림 없이 할 때는 탐욕과 성냄으로 자세를 바꾸게 됩니다. 이때의 탐욕과 성냄은 미세한 번뇌라서 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자세를 바르게 펴는 것 하나에도 욕심과 화를 내면서 합니다. 신경질적으로 자세를 바꾸는 순간에는 반드시 탐욕과 성냄이 있습니다. 이런 탐욕과 성냄이 있는지 모르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좌선을 할 때 미세한 탐진치를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은 수행자가 그만큼 의식의 깊은 층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일어나는 거친 탐진치는 쉽게 알 수 있지만 의식의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탐진치는 미세해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세한 탐진치가 드러났다는 것은 잠재의식에 있는 번뇌까지도 소멸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신경질적으로 자세를 바꾸는 것과 의도를 알아차리고 바꾸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앞서 밝힌 것처럼 마하시 명상원에서 지도하시는 사야도께서는 6개월마다 바뀝니다. 모두 동일한 내용으로 수행을 지도하시지만 어느 사야도께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많이 강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야도께서는 ‘의도’를 알아차리라고 하거나 대상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앎’을 하라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수행자들이 이런 수행방법을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도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을 들었을 때와 듣지 않았을 때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들으면 언젠가는 스스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계속 같은 말을 듣고 또 들으면 언젠가 자신도 모르게 실천하게 되어 스승의 가르침에 감사할 때가 많습니다.
2. 질문 : 몸의 통증 때문에 좌선을 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다보니 좌선을 하는 자세가 나빠집니다.
사야도 답변 :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정확히 알아차려야 한다. 그래야 느낌의 성품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느낌이 변화는 상황을 끝까지 놓치지 말고 알아차려야 한다. 그래야 괴로운 느낌을 극복할 수 있다. 좌선 중에 허리가 굽거나 자세가 바뀌는 것은 괴로운 느낌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어서 생긴 것이다.
< 참고 >
느낌은 와서 보라고 나타난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이런 대상에 화를 내거나 없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좌선은 움직이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고요해져서 망상이 생기고 통증이 생기고 또 졸음이 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수행자는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과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날 때 이것에 반응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상에 개입해서 나타난 현상을 없애려고 하면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알 수 없습니다. 위빠나사 수행은 무엇을 얻거나 없애려고 하는 수행이 아니고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알기 위해서 하는 수행입니다. 괴로운 느낌이라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알아차리면 고통스러운 것도 하나의 대상에 불과합니다. 특히 느낌의 변화를 주목하면 매순간 똑같지 않아서 심각한 괴로움도 흥미를 갖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괴로운 느낌은 오히려 많은 법을 드러내고 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는 항상 더 두드러진 법이 있습니다.
느낌의 성품은 무상합니다. 느낌처럼 빠르게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느낌의 성품은 괴로움입니다. 아파서도 괴롭지만 너무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괴롭기도 합니다. 느낌의 성품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느낌은 나의 의도와는 무관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성품을 알면 차츰 무아의 지혜가 납니다.
느낌은 감각기관이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닌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입니다. 이처럼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대상의 성품을 알아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열립니다. 부처님께서는 몸과 마음의 느낌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12연기를 통해 몸과 마음의 중요성을 알아차리시고 몸과 마음을 알아차린 결과 몸과 마음에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느낌이 빠르게 변해서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가피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셔서 존재의 성품인 무상, 고, 무아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에게 나타난 느낌을 인내하면서 알아차리면 위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느낌에 반응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면 느낌이 가지고 있는 실재하는 성품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야도께서는 통증을 통증이라고 하지 않고 단지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나타난 느낌을 알아차리다 말면 인내하는 힘을 키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법의 성품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통증은 나를 일깨우는 매우 좋은 대상입니다. 수행은 내가 보는 일상적인 시각과 다른 시각으로 볼 때 진실을 발견합니다.
수행 중에 자세가 나빠지는 또 다른 이유는 한 쪽의 아픈 느낌을 피하기 위해 다른 한쪽으로 자세를 바꾸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러면 나중에 다른 곳이 아픕니다. 그러므로 아픈 느낌을 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하나를 피하면 또 다른 하나가 나타나기 마련이므로 무엇이나 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최상의 선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