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엄마는 순례길 딸은 여행길’이란 책을 냈습니다. 2년 전, 큰딸과 함께 했던 17일간의 이태리 여행기입니다. 그런데 여행 처음부터 우리의 마음은 크게 엇갈렸습니다. 저는 순례길을 갈 생각에 설렜는데 딸은, ‘나는 여행을 가는 거다’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엄마가 성지에 가서 영적인 데만 집착하고, 자기에게 기도를 권유하게 될까봐 선을 그은 겁니다. 사실 우리 모녀의 의사소통 방식은 그리 건강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두 딸이 다섯 살, 두 살 때부터 일을 한 저는, 아이들에게 다정한 엄마도, 돌봄을 잘하는 엄마도 아니었습니다. 살가운 대화가 뭔지 몰랐고, 불안, 두려움, 외로움, 슬픔, 화, 억울함 등 부정적 감정을 건강하게 표현하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고민을 부모에게 솔직하게 전하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서로 교감하며 소통을 배우고 경험한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툭 하면 말다툼을 하고, ‘이거 봐, 말해 뭐해. 내가 이래서 말을 하기가 싫다니까!’라며 서로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면서도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매듭의 뿌리가 갈수록 깊어갔습니다.
그런 모녀가 여행을 떠난 겁니다. 무모하게도요. 로마에 도착한 날부터 냉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신 안볼 것처럼 심통을 부렸는데, 여행 내내 붙어 지내야 할 걸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날의 화를 풀지 않고 잠들면 안 된다’는 말씀을 상기하며 화해를 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매일 미사의 은총이었습니다. 엄마와 딸의 관점이 어쩜 그리 다르던지요. 각자가 기억하는 상처도 다르고, 같은 것을 보더라도 생각이 달랐습니다. 영적인 체험 역시 달랐습니다. 그 중 하나의 에피소드가 떠오릅니다. 둘만의 자유 여행이다 보니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기차에서 내릴 때나 계단을 통해 반대편 플랫 홈으로 이동할 때, 무거운 캐리어 가방이 버거웠습니다. 그래서 건장한 남자 외국인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데, 딸은 인상을 찡그리며 거슬려했습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요.
어려서부터 맞벌이 가정에서 자란 딸은 바쁜 부모를 배려하는 마음에,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고 모든 일을 내 선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믿어왔던 겁니다. 그런 딸에겐 아무렇지 않게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엄마의 모습이 불편했던 것이지요. 저는 모르면 물어보고, 짐이 무거우면 도와달라고 청하는 편입니다. 만일 제가 남에게 짐을 들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면, 딸이 제 짐을 들어줬을 거고, 그럼 저는 안쓰러워서 안절부절 못했을 겁니다. 그런 제 마음을 몰라주는 딸이 서운했습니다. 우리는 이렇듯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으로 인해 티격태격하는 과정을 겪으며 상대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이제서야 말이죠.
딸과 동행하며 저는 무엇을 얻었을까요? 친구를 얻었습니다. 저 역시 늘 혼자이고 외롭다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엄마가 과도한 책임감 때문에 악착같이 살아온 것에 대해 딸은 이렇게 표현했더군요. ‘그건 엄마도 원하는 모습이 아니었을 거다. 사실 엄마는 이렇게 자유롭고 천진난만한 사람이었던 거다.’ 가끔 퉁명스럽기도 하고,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아서 모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딸은 다 알고 있었던 겁니다. 딸의 말에 제 삶의 상처가 모두 치유 받는 느낌입니다. 그토록 멀고 딱딱한 벽처럼 느껴지던 엄마와 딸이 너 다르고 나 다름을 인정하며 건강한 거리두기와 경계를 세울 수 있었던 여행, 엄마는 순례길에서 덤으로 여행을 즐겼고, 딸은 여행길에서 덤으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더 행복했습니다.
첫댓글 대단하신 요셉피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