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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강 임방(林放)이 예의 근본을 묻다
1. 한식의 유래 1
여러분들의 박수소리를 들으니깐, 내 가슴이 울렁거린다. 나도 여러분처럼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만, 결국 인간이란 늙게 마련이다. 여러분들 나이로 돌아갈 수 없으나, 무리하게 젊어지려는 생각도 안 한다. 늙으면 늙은이답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청춘이란 것은 정말 위대한 것이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청춘을 앞으로 귀하게 발휘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길 바란다.
어제가 한식이었다. 한식이라는 걸 아나? 이게 찰 한(寒)자에, 밥 식(食)자니깐 우리말로 하면 찬밥이다. 찬밥신세라는 말도 쓰는데, 문자 그대로 찬밥이다.
물론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왜 한식이라는 이런 말이 붙었는지 아는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라서 하는 이야기라서, 옛날 고사를 정확히 다 알 수는 없지만 이야기 해 보겠다.
여기 나이 드신 분들도 그렇게까지 옛날 분은 안 계시겠지만, 옛날에는 성냥이라는 게 없었다. 옛날에는 다 불씨를 가지고 살았다. 종가 집에서는 그 불씨를 살리는 것이 중요했다. 계속 불씨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그 불씨를 갈았다.
옛날에는 왕이 대부 집에 매년 새로운 불씨를 내리는 제식이 있었다. 그래서 불씨가 갈리는 기간 동안에는 그냥 찬밥을 먹었다. 거기서 한식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봄에 새불(新火)을 만들어 쓸 때 그에 앞서 어느 기간동안 묵은 불(舊火)을 금단하던 종교적 예속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에도 내병조(內兵曺)에서 버드나무를 뚫어 불을 만들어 임금에게 올리면 임금은 그 불씨를 모든 관청과 대신들 집에 나누어 주었다.
우리 동양고전의 세계에는 설(說)이 많다. 한 가지 설만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견해가 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견해가 있는 법이다. 내 강의에 대해서도 다양한 견해가 있을수록 좋다. 그게 무서울 것은 없다.
2. 한식의 유래 2
논어에는 이 한식에 관계되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 한식의 유래는 개자추(介子推)라는 사람과 관련이 있다.
개자추(介子推)
진(晋)나라 공자 중이(重耳)의 19년 방랑생활을 보좌하여, 그를 춘추 제2의 패자 진문공(晋文公)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계자추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공자는 춘추시대를 살았는데, 춘추 5패 중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패자가 제 환공이었다. 제나라는 노나라 위쪽의 치박, 임치, 제남 등이 있는 곳이다.
제남이라는 도시는 우리 마누라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에, 특별한 애착이 있다. 그렇다고 우리 마누라가 중국여자는 아니다. 한국여자인데, 거기서 태어났다. 그래서 평생 한문을 하게 된 것이다.
제환공(齊桓公 BC 685~643 재위)
성은 강(姜), 이름은 소백(小白), 폭군 양공(襄公)이 살해되자, 이복형 규(糾)와 싸워 제나라의 임금이 되었다.
하여튼 제나라의 환공은 제1의 패자였다. 환공은 유명한 고사성어인 관포지교에 나오는 관중이라는 사람을 등용해서 패자가 된 사람이다.
포숙아와 관중은 어려서부터 아주 친한 친구였다. 둘이 어렵게 살 때, 같이 장사를 했는데, 돈이 생기면 관중이 모두 가져갔다고 한다. 그래도 포숙아는 ‘돈이 필요하겠지.’라면서 다 주었다.
또한 무슨 잘못된 게 있으면, 자기가 누명을 다 뒤집어써도 친구한테는 피해를 안 주는 그런 사이였다. 아주 아름다운 친구 사이였는데, 나중에 관중과 포숙아는 임금의 자리를 놓고 각축하는 두 사람의 신하로 각각 들어갔다. 결국 환공을 모시던 포숙아가 이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포숙아는 관중을 죽이려는 환공한테 ‘제나라를 다스리려면 저 포숙아로 되지만, 당신이 천하의 패자가 되려면 당신을 죽이려 했던 관중을 재상으로 쓰셔야 합니다.’라고 한다.
君將治齊, 即高傒與叔牙足也.
君且欲霸王, 非管夷吾不可.
그래 가지고 포숙아는 친구인 관중을 올린다. 그 관중은 환공을 도와서 위대한 정치를 했다. 이 사람의 사상을 담은 책이 지금도 관자라는 책으로 남아 있다. 전체 내용을 모두 관중이 쓴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하여튼 관자라는 책은 남아있다.
환공은 관중이 죽고 난 다음에 상당히 비참하게 죽었다. 자손들이 각축전을 벌여서, 아버지 장례도 안 치르고 싸웠다. 그래서 67일간 관을 방치해서, 관에서 구더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위대한 제나라의 패자인 환공도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桓公尸在牀上六十七日, 尸蟲出于户.
-제태공세가-
그런데 이 환공의 뒤를 이어서 등장한 제2의 패자가 바로 진 문공이다.
한식(寒食)은 진 문공과 관련이 있다. 진 문공이라는 사람은 진나라의 ‘공자 중이’라는 유명한 만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람이다.
중이(重耳, BC 697 ~ 628) : 춘추 제2의 패자. 진문공(晋文公)의 이름. 성은 희(姬)씨. 진헌공(晋獻公)의 아들.
이 사람의 아버지가 진나라의 헌공이었다. 진헌공이 융(戎)이라는 곳을 침략했는데, 거기서 여희라는 여자를 데리고 와서 부인으로 삼았다. 북방여자들은 예쁘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기 나라를 망하고서 데리고 왔기 때문에 한(恨)을 품었다. 아주 독이 있는 여자였다. 그래서 집안에 분란을 일으킨다. 결국 진나라의 왕자였던 중이는 여희의 음모를 피해 유랑길을 떠나게 된다.
융(戎)족 출신 여희(驪姬)는 해제(奚齊)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태자 신생(申生)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태자 신생은 자살하였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신생의 동생 중이(重耳)는 방랑길을 택했다.
이 사람은 19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방랑을 한다. 중이는 아주 처절한 방랑생활을 한다.
중이는 어머니의 고국인 적(狄)으로 망명했다. 이때 중이의 나이는 43세였다. 이때부터 19년의 기나긴 그리고 고달픈 망명생활이 시작되었다.
중이가 망명한 적(狄)를 떠날 적에도 자기 부인한테 ‘25년을 기다리다가,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다른 남자한테 시집을 가도 좋다.’고 한다. 그러니깐 부인이 25년이면 자신도 그때는 무덤에 가 있을 테니, 걱정 말고 잘 다녀오라고 한다.
待我二十五年不來, 乃嫁.
犁二十五年, 吾冢上柏大矣. 雖然,妾待子.
그렇게 길을 떠나, 거지처럼 되어서 어느 동네에 갔는데, 그 동네에서 밥은 안 주고 흙을 한 그릇을 퍼주었다. 배가 고픈데, 흙을 퍼주니깐 얼마나 화가 났겠나?
野人盛土器中進之. 重耳怒.
그래서 중이가 그걸 그냥 엎어 내팽개치려 하니까, 신하가 옆에서 말리기를 ‘쌀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흙이란 것은 만들지 못합니다. 저 사람이 어떤 의미로 주었든지 간에, 임금이 될 자는 흙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걸 엎으면 당신은 왕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흙을 먹는 시늉을 하고, 흙을 준 사람들한테 엎드려 절을 하십시오!’
土者, 有土也, 君其拜受之.
그렇게 흙을 준 사람들한테 절을 시킨다. 신하가 중이를 그렇게 훈련을 잘 시킨다.
그런데 중이는 이상하게 방랑을 하면서도, 대접도 받고 천행(天幸)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그러다 중이는 제나라 환공한테도 찾아갔다. 관중이 죽은 다음이었는데, 관중이 죽었기 때문에 환공한테 푸대접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환공이 대접을 하고 자기 딸까지 주었다. 눌러 살라고 한다.
문공은 그렇게 여복이 많았다. 주변에 아주 진실한 여자들이 많았다. 옛날에는 부인들을 많이 얻었으니깐 그럴 수 있었다.
제나라에서 얻은 여자도 예뻤다. 그래서 공자 중이는 그 여자에게 반하여 다른 데 갈 생각을 안 하고, 그냥 그 여자와 평생 제나라에서 잘 살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여자한테 푹 빠져버린다. 4년인가를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그 여자는 중이가 진나라에 돌아가서 다시 나라를 일으켜야할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날 술을 먹여서 만취하게 만든 다음, 수레에 태워 보낸다.
醉重耳, 載以行.
그러면서 그 떠나가는 수레를 보며, 그 여자는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한편 중이는 술이 깨서 눈을 떠보니깐 길바닥에 나자빠져 있었다. 그래서 ‘이 놈들, 왜 나를 이런 데로 데려왔나!’며 자기 삼촌까지 죽이려고 한다.
行遠而覺, 重耳大怒.
그러자 그 삼촌은 ‘당신은 위대한 위업을 달성해야 하는 사람이니깐, 저를 죽여 뜻을 이룬다면 얼마든지 죽이시오.’라고 한다.
삼촌 : “저를 죽이시어 뜻을 이루신다면 그것은 저의 바램입니다.”
중이 : “뜻을 못 이루면 삼촌 살을 씹어 먹겠소.”
삼촌 : “뜻을 이루지 못해도 내 살은 비린데 먹을 만이나 하겠소?”
그래서 돌아다니다가 고사리를 캐먹고 그러는데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깃국이 들어왔다. ‘이게 웬일이냐?’ 그러니깐, 개자추(介子推)라는 신하가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서 그걸로 국을 끓여다가 바친 것이었다. 그래서 그걸 먹고 이 사람이 정신을 차린다.
그렇게 어렵게 방랑을 하다가, 나중에 주변 나라들을 규합해서 진나라를 평정하고, 춘추오패 중에서 제2의 패자가 된다.
중이는 정치를 아주 잘했고, 방랑길을 같이 다녔던 사람들도 모두 대우하였는데, 어떻게 하다가 개자추(介子推)를 잊어버렸다.
그렇지만 개자추는 ‘저 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 저 사람이 오늘의 패자가 된 것은 하늘의 공이지 인간의 공이 아니다. 함부로 나설 계제가 아니다.’고 하면서 물러난다.
그리고 개자추(介子推)는 어머니를 데리고 산으로 들어가서 숨어 버린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진문공(晋文公)은 ‘의리가 있지, 내가 이럴 수가 있냐? 개자추를 빼먹다니!’ 하면서 개자추를 부른다. 그러나 산에 가서 아무리 ‘나와라! 나와라!’ 소리쳐도 대답이 없고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산에서 나오게 하려고 불을 질렀다. 그런데 개자추는 자기 어머니하고 나무를 부둥켜안고 그냥 타죽었다.
진문공은 결국 개자추의 충심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제 며칠 동안은 절대 불을 지피지 말고 찬밥을 먹어라!’라고 전국에 명령을 내린다. 뜨거운데 불에 타 죽었으니깐 그렇게 영을 내린다. 그때부터 한식이 된 것이다.
옛날 고사라는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정말로 처절하고 진실한 이야기다. 요새는 우리 삶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있다. 이렇게 훌륭하게 산 사람들은 배워야 한다. 한식을 그냥 넘기지 말고, 부모님 성묘를 할 때도 개자추를 생각하는 심경으로 하기 바란다.
개자추는 불에 타 죽을지언정 충직한 마음으로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고,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다. 그렇게 한식이라는 절기 속에 개자추의 충절이 살아있는 것이다.
3. 예의 근본
八佾 4장
林放問禮之本. 子曰 : “大哉問! 禮, 與其奢也, 寧儉 ; 喪, 與其易也, 寧戚.”
임방이 예의 근본을 여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훌륭하도다, 그 질문이여! 예는 사치스럽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하고, 상은 질서정연하기 보다는 차라리 슬퍼야 한다.”
이것도 아주 유명한 말이다. 공자에게 임방(林放)이라는 사람이 예(禮)의 근본을 물었다.
林放問禮之本.
예지본(禮之本)이라고 했다. 지금은 우리가 쉽게 근본(根本)이라는 말을 쓰지만, 본(本)이라는 글자도 논어에서 처음으로 나온 것이다. 근본이니 하는 말의 유래가 논어다. 여기가 거의 최초의 용례이다.
본(本)이라는 글자는 나무(木)의 뿌리이고, 말(末)은 가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글자이다. 근본(根本), 뿌리에서 모든 것이 태어난다.
임방이라는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논어라는 게 간단한 책이 아니다. 공자라는 사람은 노나라에 실존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당시 역사를 조사해보면 논어에 나오는 인물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임방은 어떤 인물인지 모른다.
4. 大哉問!
아무튼 공자한테 불쑥 와서 예(禮)의 근본을 물었다. 그러자 공자가 답하길 ‘대재문!’이라고 한다.
大哉問!
‘대재문(大哉問)’이라는 것은 2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아 위대하도다. 그 질문이여!’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야! 너무 크도다! 너무 큰 질문이다! 참 대답하기가 어렵구나!’하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하여튼 좋은 말이다. 공자가 임방이라는 사람의 질문을 상찬(賞讚)하는 말이다.
그런데 임방이라는 인물이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예(禮)의 근본을 물었다면, 임방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무게가 없는 사람인 거 같지 않다. 노나라 당대, 예에 관해서 상당히 신망을 모으고 있던 동네 사람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누군지는 모른다. 도대체 알 길이 없다. 좌전과 같은 역사책에 나오지 않으니깐, 알 길이 없다.
이 임방이라는 사람이 예(禮)의 근본을 물은 배경에 복잡한 이야기들이 많겠지만, 논어는 그걸 다 표현하지 않고, 단지 임방이라는 사람이 예의 근본을 물었다고만 표현 되어 있다.
그러면 여기서 예의 근본을 물었다는 것은 당대 예에 대한 생각들이 너무 형식적이고 피상적이고 말엽적인 데로 흘러갔다는 이야기다.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서 14년 동안 유랑을 하고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떠나기 전, 예에 대해서 가르쳐 놓았다. 그런데 돌아와서 노나라의 형편을 보니깐, 가르쳐놓았던 예를 그 당시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장례 형식 등의 겉치레 예절만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임방이라는 사람이 예의 근본은 무엇이냐며, 근본정신을 캐 들어오니깐 공자가 반가웠던 것이다. 반가워서 ‘야! 임방 너 위대하다! 위대하도다! 참 좋은 질문이야!’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다.
내가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위대한 질문을 받으면 선생으로서 정말 기쁘다. 질문이라는 것을 아무렇게나 한다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질문이라는 것은 자기 인격의 표현이다. 그 사람이 얼마나 공부를 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자리에 맞는 질문을 멋있게 하는 것처럼 어려운 게 세상에 없다. 그런데 임방이라는 사람은 위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 이야기다.
5. 禮, 與其奢也, 寧儉
그럼 그랬을 적에 공자가 뭐라고 이야기했냐? 먼저 ‘위대하도다! 그 질문이여!’라고 하면서 예(禮)의 근본에 대해 이야기한다.
禮, 與其奢也, 寧儉
여기 문장의 한문 구문이 묘하다. 요새 백화문에서도 ‘與其A…寧(可)B…’라고 쓰는데 영어의 ‘rather than’과 마찬가지다. ‘A라기 보다는 차라리 B’라는 말이다. 이건 그냥 외워두어야 한다.
與其A … 寧可B…
A라기 보다는 차라리 B…
그럼 예라고 하는 것은 사(奢)라기 보다는 차라리 검(儉)이라는 것이다. 사(奢)라는 것은 사치(奢侈)라는 말과 거의 같은 것이다.
요새는 결혼식을 해도 사치스럽게 한다. 사진도 찍으러 다닌다. 결혼을 해도 소박하게 하면 좋겠다. 결혼식이 뭔지 언젠가 제대로 강의하겠다. 우리가 너무 예식이라는 것을 모른다. 내가 결혼식에 대해 할 말이 많다.
하여튼 사치스럽게 하기 보다는 그저 검소한 것이 예(禮)라고 한다.
동학에서도 최시형 선생은 항상 청수(淸水) 한 그릇을 떠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소박한 것이 좋다. 있는 그대로가 좋은 것이다. 부산대학에서 하고 있는 강의도 꾸밈없이 학생들과 부형들이 이렇게 어우러져서 그저 소박하게 하고 있다. 소박한 게 참 좋은 것이다.
6. 상례
공자시대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예(禮)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상(喪)이었다.
그러니깐 예(禮)와 상(喪)이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는 일반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 유자(儒者)들은 상례(喪禮)를 대행해 주는 집례자로서 출발한 무속집단이었다.
옛날에는 예 중에서 가장 큰 예가 상례였다. 사람이 살았을 때보다 죽었을 적에 중요한 것이다.
내가 언젠가 이야기했지만, 나는 결혼식에는 잘 안 가도, 상례에는 잘 간다고 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죽은 다음에 가냐? 그 사람이 알지도 못하는데 왜 가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다.
죽은 자를 잘 대접하면, 그것이 산 자들에게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례(喪禮)라는 것을 예로부터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게 끝나지만, 이 유한한 삶의 연속은 영원한 것이다. 사람은 죽어도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이 상례를 통해서 항상 귀신을 어루만져 주고, 귀신들이 또다시 다음 세대들한테 좋은 영향을 준다. 이렇게 하며 역사는 이어가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 상례라는 것을 중요시했다.
7. 喪, 與其易也, 寧戚.
그런데 예(禮) 중에 가장 근본인 상(喪)이라는 것은 뭐냐?
喪, 與其易也, 寧戚.
상은 이(易)라기 보다는 차라리 척(戚)이라고 한다. 易는 주역(周易)이라고 할 때는 역으로 읽고, 변화라는 뜻이다. 보통은 ‘이’로 읽고, 쉽다는 뜻이다.
易의 두 가지 뜻
1) 역 : 변화(change)
2) 이 : 쉽다(easy)
그런데 여기서 ‘쉽다’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어렵다. 여기서 ‘이(易)’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형식적으로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을 말한다. 주자가 그렇게 해석을 했다.
형식적으로 매끄럽게 그럴듯하게 착착착착 진행되는 것이 가장 좋은 상례라고 생각할지는 모르나, 그렇지 않다. 그래서 공자는 역시 위대하다.
그렇게 형식적으로 잘 치러지는 것보다는 중요한 상례의 근본은 뭐냐? 바로 슬픈 것이다.
喪, 與其易也, 寧戚.”
공자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 공자라고 하면 자꾸만 고지식하게만 보는 데 그렇지 않다.
전라도는 예술이 많이 발달된 고장이어서 그런지, 나이 많은 어른들을 찾아가도, 그냥 평소에 입는 옷을 입은 채, ‘어, 왔어?’라며 반갑게 그냥 나온다.
그런데 경상도 사람들은 보기에 굉장히 활달하고 거침이 없는 거 같지만 격식을 많이 차린다. 경상도는 도학의 기운이 너무 세다고 그랬지만, 밖에 나올 때도 ‘잠깐!’ 기다리게 한 후, 두루마기를 걸치고 나온다. 안동 하회 마을 같은 데를 가도 딱 정제(整齊)하고 나온다. 이게 경상도 사람들이다. 경상도는 이게 너무 강하면 곤란하다.
공자님 말씀이 뭐냐? 상례는 슬프면 되는 것이라고 한다. 더 이상 의 이야기는 없다. 이게 공자의 재즈다. 얼마나 위대한가?
공자의 째즈는 예(禮)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공자는 모든 형식주의(formalism)을 거부했다. 예의 핵심은 인간의 순수한 감정의 유로(流露)이다.
우리가 유교를 생각하면, 격식주의, 형식주의, 완벽한 법도 등을 연상한다. 상갓집에 가면 몇 번 절을 해야 하는지 걱정한다. 여학생들은 어떻게 절을 해야 하는지 걱정한다. 남자처럼 절을 해도 되는지 걱정한다.
하지만 걱정할 거 없다. 그냥 공자처럼 엎어져 슬프게 울면 된다. 그럼 끝이다.
8. 태산
다음에 계씨의 이야기가 나온다.
八佾 6장
季氏旅於泰山.
子謂冉有曰: “女弗能救與?”
對曰: “不能.”
子曰: “嗚呼! 曾謂泰山不如林放乎?”
계씨가 태산에서 여제를 지내었다.
공자께서 염유에게 일러 말씀하시었다 :
“너는 그것을 막을 길이 없었느냐?”
염유가 이에 대답하여 말하였다.: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아~ 슬프도다! 일찍이 태산의 신이 임방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이것도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다. 여러분들의 강의 듣는 자세가 훌륭해서 논어가 빨리빨리 진행되고 있다.
여기 나오는 계씨(季氏)라는 사람은 여러분들도 잘 안다. 삼환(三桓), 즉 노나라의 세 대부 가문 중에서 가장 힘이 센 가문이 계씨라고 했다. 그 계씨는 참월(僭越) 즉 신분에 맞지 않는 행동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季氏旅於泰山
여러분들도 태산(泰山)이라는 산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여러분들이 산동성에 가면 끊임없이 밀밭이 전개된다. 사실 태산은 1,545미터밖에 안 된다. 그러니깐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다. 백두산보다 작은 산이다. 한라산보다 낮다.
그런데 실제로 가보면 엄청난 영기(靈氣)를 느낄 수 있다. 산이 웅장하고 스케일이 크다. 태산의 특징은 허허벌판에 그 산만 우뚝 솟아있다. 그러니깐 산이 위대하게 보인다.
맑은 날에는 공자가 사는 노나라에서도 잘 보였다고 한다. 그러니깐 마치 큰바위 얼굴을 쳐다보는 것처럼, 공자는 태산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태산의 그 위엄 있는 모습이 공자의 마음 속에 박혔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영산(靈山)은 백두산이다. 꼭대기에 천지가 있다. 그 높은 곳에 어마어마한 연못이 있다. 그게 참 희한하다. 영기(靈氣)가 있는 산임에 틀림없다.
내가 언젠가 곤륜산을 가보고 싶었는데, 곤륜산을 등반하려고 우리나라 전문 알피니스트랑 계획을 짜놓았는데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서 중단되었다.
곤륜(崑崙) : 티벳고원·타림분지·몽고고원으로 이어지는 대산맥. 한대부터 서왕모(西王母)가 거주하는 산으로 신령시 되었다. 도올이 알피니스트 박인식과 함께 오르려 했던 산은 무스타그봉(해발 7,546m).
중국 사람들에게 곤륜이라는 게 가장 높은 산이다. 한(漢)대로부터 관념적으로 하늘에 제일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곤륜산에서부터 산맥이 계속 연결되어서, 우리나라 백두산까지 오는 것이다. 해남에 가면 두륜산이 있다. 곤륜에서부터 뻗힌 기운이 백두산을 거쳐서 두륜산까지 왔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윤(崙)자를 쓴 것이다. 곤륜산(崑崙山)과 두륜산(頭崙山)의 윤(崙)자가 같다. 옛날 선조들은 이렇게 스케일이 컸다. 해남의 산을 곤륜의 줄기라고 봐서 두륜(頭崙)이라고 한 것이다.
두륜산 중턱에 자리 잡은 대흥사(大興寺). 신라 진흥왕 때 아도 화상이 창건. 조선시대 서산대사가 선교양종의 대도량으로 중창.
중국인들은 태산(泰山) 주변을 자기 문명의 발상지로 생각하기 때문에 태산을 가장 영험한 산으로 본다. 그래서 예로부터 지상에서 천하를 통일한 사람은 반드시 태산에 올라가서 봉선제라는 것을 지낸다.
봉선(封禪) : 천하를 통일한 사람이 천하통일의 위업을 하늘의 상제에게 보고하는 특별한 제사로서, 이 제사를 지낸 사람은 불사등선(不死登仙)을 보장 받는다는 신앙이 있었다.
여러분들이 가보면 알지만 낙양에서 태산까지 가려면 엄청난 거리를 가야한다. 그 거리를 황제가 걸어서 가지 않았다. 게다가 태산도 발로 걸어 올라가지 않았다. 수레를 태워서 그 먼 거리를 가고, 꼭대기까지 올리는 게 보통 작업이 아니었다.
관중은 제환공의 봉선을 만류했다. 진시황도 제대로 봉선제(封禪祭)를 올리지 못했다. 중국역사상 최초로 격식을 갖춘 봉선제(封禪祭)를 올린 사람은 우리나라에 한사군을 설치한 한무제였다.
그렇게 몇 개월을 걸쳐 태산에 올라가서 제식을 올렸다. 천하를 통일하고 하늘과 가장 가까운 태산에 올라가서 봉선제를 지냈다.
이게 말의 문화다. 봉래, 방장, 영주라 불리는 삼신산(三神山)이 동해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했다.
삼신산(三神山) :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 동쪽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세 개의 산으로 불사의 신선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믿은 도교의 성산.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서복한테 지시해서 그 삼신산으로 선동선녀들을 배에 태워 보낸 전설이 있다. 도가적인 전설이다. 삼신산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가는 것은 수평적 구조다.
서복(徐復) : 진시황 때의 방사(方士). 수천 명의 선동선녀를 데리고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삼신산으로 떠났다.
그런데 태산으로 봉선제를 지내러 올라가는 것은 수직적 구조다. 태산이라는 것은 하늘의 통로다. 그래서 거기에 가서 ‘제가 이 세계를 평정했습니다.’하고 보고를 올린다.
우리나라 경주의 천마총에 천마(天馬) 그림이 나왔다. 천마라는 것을 환상의 동물이라고 여기지만, 봉선제를 지낼 적에 데리고 올라간 말을 천마라고 한다. 하얀 색의 명마를 데리고 올라갔다. 구체적인 제식은 잘 모르지만, 그 천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 제식은 결국 태산에 가서 하늘의 신에게 ‘제가 이제 천하를 평정했습니다.’라고 보고를 하면, 그 대가로 죽지 않는 불사의 신선이 되는 약속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옛날의 천자들은 천하를 통일하면, 누구든지 거기 올라가서 봉선제를 한 번 지내는 게 소원이었다. 양귀비에 미친 당나라 현종도 거기에 올라가서 봉선제를 지냈다. 당현종이 지낸 어마어마한 봉선제 제식을 기록한 석비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당현종(唐玄宗) 기태산명(紀泰山銘) AD 725년
9. 여제
그런데 노나라의 일개 대부인 계씨라는 놈이 감히 태산에 가서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 것이다.
季氏旅於泰山
여기 여(旅)라는 말이 나온다. 지금 여러분들은 여행(旅行)간다는 말로 이해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건 여행이 아니다. 옛날의 글씨를 보면, 앞에 깃발 같은 게 있고, 사람들이 그걸 따라가는 모습이다. 일본 사람들이 여행을 갈 때, 앞에서 깃발을 들고 뒤에서 잘 따라다니는 것 같은 모습을 상형한 것이다.
그런데 옛날에 여(旅)라는 것은 제사 이름이다. 여제(旅祭)이다. 산천(山川)에 깃발을 들고 가서, 거기서 제사 지내는 것을 여제(旅祭)라고 했다. 여기서 여행(旅行)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여(旅)라는 것은 옛날의 제사 이름 중에 하나였다.
여(旅)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내러 가는 행렬의 모습을 형용한 상형글자. 여제(旅祭)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제(旅祭)라는 것을 봉선과 다르다. 이건 낮은 산에 가서 지내고 오는 제례이다.
여러분들도 MT 가서 그냥 놀지만 말고, 모여서 경건하게 술을 한 번 붓고 제식을 올리는 것도 좋다.
MT 가서 놀다가 갑자기 심장마비가 걸려 죽을 수도 있고, 어디에 빠져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깐 ‘천지신명이시여. 놀고 가는 동안 우리들이 건강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잘 지켜주십시오. 흠양하시옵서.’ 하고 술 좀 따르고, 절을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거기에 있는 동안 산신령이 다 보호해 주실 거다. 호랑이도 안 나타나고, 뱀도 안 물 거다.
그러니깐 가서 간단한 제식을 하고, 돌아올 때 깨끗하게 치워서 산천에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이 여제(旅祭)다.
아무튼 계씨가 태산의 신(神)에게 여제를 지내는데, 이건 문제가 있다.
예기(禮記)에 보면, 당시 제후는 제후국의 자기 영내에 있는 산(山)에는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했다.
諸侯祭名山大川之在其地者.
-예기, 왕제-
그러니깐 만약에 노나라의 애공 같은 사람이 태산에 가서 여제를 지낸다면 그건 괜찮다. 봐줄 수 있다. 왜냐? 태산은 노나라 영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태산은 중국인들에게 어마어마한 산이지만, 당시에는 그 지역에 있었으니깐 노나라의 제후라면, 여제(旅祭)정도는 지낼 수 있다. 하지만 봉선은 못 지낸다. 봉선을 지내면 큰일 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태산에 올라가서 봉선제를 지내려고 했는데, 봉선의 내용을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올라가서 우리 민족이 세계로 뻗어나가는데 장애가 없는 위대한 민족이 되게 해달라고 소리 한 번 지르고 왔다.
10. 염유
아무튼 계씨가 태산에 가서 여제(旅祭)를 지내버렸다. 그러니깐 공자는 염유라는 제자에게 말한다. 염유는 공자가 아끼는 제자 중에 하나였다. 염유라는 제자한테 공자가 일러 말하기를, 여불능구여(女弗能救與)라고 한다.
子謂冉有曰: “女弗能救與?”
‘너는 그걸 막을 수가 없었냐? 구(救)할 수 없었냐? 네가 지금 계씨 밑에 재상으로 있는데, 그걸 막을 수가 없었냐?’고 한다. 이 사람은 공자의 제자였는데 노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네가 계씨(季氏)의 재상으로 있는데, 네가 이럴 수 있냐?’고 야단을 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염유라는 친구는 어떤 사람이었냐? 시간이 없어서 길게는 말씀을 못 드리겠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우직한 사람으로 자로가 있다. 그 다음에 아주 나약하고, 섬세하고, 내면적으로 여성 같은 안회가 있다. 그리고 정치 수완이 뛰어나고,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돈을 잘 버는 외교관인 자공이 있다. 그 다음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여기에 나오는 염유다.
염유(苒有) : 이름은 구(求). 29세 연하. 노나라 사람.
공자의 제자 네 사람을 꼽는다면, 여기에 염유가 들어간다. 그런데 이 염유라는 사람은 노나라 사람이다. 염씨 집안은 공자 밑에서 아주 탁월한 제자를 3명이나 배출했다. 마치 보스턴의 케네디 가문처럼 노나라의 아주 훌륭한 가문이다. 공문의 제자 중에 10명의 현인(賢人)을 꼽으면 3명이나 이 염씨 가문 사람이 들어간다. 염유는 그 중 한 사람이다.
염경(苒耕)·염옹(苒雍)·염구(苒求), 이 세 사람은 한 집안 사람으로 모두 사과십철(四科十哲)에 들었다.
이 염유의 성격을 보면, 공자는 이 사람은 예(藝)에 뛰어나다고 했다. 지금으로 하면 재주가 많다는 것이다.
求也藝, 於從政乎何有? -옹야 6
사리(事理)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이 사람은 주제 넘는 짓을 안했다. 그래서 공자님한테도 ‘제가 선생님의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저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하니깐,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야. 이 놈아. 너는 너 자신의 한계를 지어놓고 가니깐, 너는 학인(學人)의 자격이 없다.’고 야단치는 장면도 나온다.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畵. -옹야 10-
하여튼 염유라는 사람은 절대로 주제 넘는 짓을 안 한다. 그러니깐 공자의 제자 중에서는 가장 관료로서 적합한 인물이다.
예를 들면 자로를 데려다가 쓰면 얻어맞을 거 같고, 안회는 근본적으로 정치에 관심이 없고, 자공을 데려다 쓰면 하도 유명해서 자신이 먹힐 거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염유라는 친구는 재주도 많으면서, 주제를 알고, 자기 일만 딱 하고 월권을 안 했다. 자기 능력에 벗어나는 것은 ‘전 모릅니다.’하고 딱 끊어버렸다.
有材藝, 以政事著名. -공자가어-
11. 공자의 심정
어느 때 노나라의 계환자가 병이 들어서 죽게 되었다. 그때 탄식을 하며 말하길, ‘내가 공자한테 죄를 많이 지었다. 그 당시에 공자의 말을 잘 들었더라면, 우리나라가 크게 일어났을 텐데...’라고 한다.
喟然歎曰 : 昔此國幾興矣, 以吾獲罪於孔子, 故不興也.
그러면서 계환자는 아들 계강자에게 유언을 하길, ‘내가 곧 죽을 거 같은데, 내가 죽으면 넌 반드시 공자를 모셔 와라. 그래야 우리나라의 꼴이 다시 제대로 된다.’고 한다. 공자를 다시 데려오라고 한다.
我卽死, 若必相魯, 相魯, 必召仲尼.
계환자가 죽고 나서 계강자가 공자를 데려오려고 하니깐, 공지어(公之漁)라는 대부가 ‘지금 공자라는 인물을 데려오면 안 됩니다. 공자는 이미 예전에 등용을 해서 실패한 사람으로, 제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는데, 지금 또 공자를 데려다가 써서 또 웃음거리가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 반대를 한다.
公之魚曰: “昔吾先君用之不終, 終爲諸侯笑. 今又用之, 不能終, 是再爲諸侯笑.”
그러니깐 계강자는 아버지의 유언도 있고 하니깐, ‘그럼 누구를 데려오랴?’라고 묻는다.
則誰召而可
그러니깐 ‘공자는 데려오지 말고, 공자의 제자 중에서 탐나는 인물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이 염(冉)입니다.’라고 한다.
必召冉求.
그래서 계강자는 방랑길에 있던 염유를 부른다. 그렇게 염유가 계강자한테 가게 되니깐, 공자는 좀 섭섭했다. 자기가 못 가고, 자기 제자가 대신 가니깐 서운했다.
여기서 공자의 아주 인간적인 모습이 나온다.
‘노인(魯人)이 너를 부르는구나. 그런데 이것은 작게 쓸려는 게 아니라, 장차 크게 쓸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여기서 작게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쓰려고 한다는 말은, ‘장차 나까지 데려가려고 하는 것이다.’라는 식의 이야기다.
魯人召求, 非小用之, 將大用之也.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귀호(歸乎)! 귀호(歸乎)!’라고 한다. ‘돌아가자! 돌아가자!’고 한다. 그런데 공자는 돌아갈 수 있나? 못 간다. 염유만 가고 자신은 못 간다. 염유만 돌아가니깐 슬퍼서 ‘귀호, 귀호!’라고 하는 것이다.
이게 ‘돌아가자. 돌아가라’로 되어 있지만, 사실 이것은 ‘돌아가고 싶구나! 돌아가고 싶구나!’라는 이야기다. 공자는 자기 고향 노나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歸乎! 歸乎!
나도 대학을 떠나와서, ‘대학에 돌아가고 싶구나! 돌아가고 싶구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심정을 한 번 생각해보라.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吾不知所以裁之.
그러면서 공자는 자신이 예전에 노나라에서 키운 아이들이 광간(狂簡)하다고 한다. 여기서 광은 미칠 광(狂)자인데, 이게 요새말로 insanity(정신 이상)라는 뜻이 아니다. 옛날에 광인(狂人)이라는 것은 나쁜 말이 아니다. 젊은 사람은 미칠 줄 알아야 한다. 미칠 줄 모르면, 그건 젊음이 아니다. 그리고 간(簡)은 어설프고 간략하지만, 그 사람의 뜻이 크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깐 염유를 보내면서 ‘고향의 어설프지만 미친듯이 박력있는 그 아이들이 보고 싶구나. 그놈들이 찬란한 성장을 이루어 이제 문장을 이루었는데, 내가 돌아가서 지도를 더 해주어야 할 텐데, 지도해주지 못하는 내 심정이 안타깝구나!’하고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깐 자공이 떠나가는 염유를 부른다. 염유는 자기보다 약간 후배니깐 뒤로 불러서 훈계를 내린다.
卽用, 以孔子爲招.
‘너 등용되면, 우리 선생님을 반드시 모셔가라. 안 모셔 가면, 넌 죽는다.’라고 한다. 이렇게 자공은 염유를 불러다가 다짐을 하게 한다.
그래서 염유가 노나라에 돌아가서 계씨의 재상이 된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다. 공자를 함부로 모셔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결국 염유는 의리를 지킨다.
12. 계강자와 염유
그 다음에 보면, 랑(郞)이라는 곳에서 제나라와 싸움을 하는데, 결국 노나라가 이긴다. 제나라가 대국임에도 불구하고, 노나라는 싸움에서 이긴다. 이때 염유의 활약이 컸다.
冉有爲季氏將師, 與齋戰於郞, 克之.
그렇게 싸움을 잘하고, 전략 전술도 잘 짜서 전쟁에 이기고 나니깐, 계강자가 놀래서 염유한데 묻는다.
季康子曰: “子之於軍旅, 學之乎? 性之乎?”
“네가 이렇게 대단한 전략을 쓰는데, 그게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거냐? 아니면 배운 거냐?”
冉有曰: “學之於孔子.”
그러자 염유는 바로 ‘이것은 저의 위대한 스승 공자님으로부터 배운 겁니다.’하고 계강자한테 이야기한다.
季康子曰: “孔子何如人哉?”
그러니깐 계강자가 놀래서 ‘그럼 공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
對曰: “用之有名; 播之百姓, 質諸鬼神而無憾. 求之至於此道, 雖累千社, 夫子不利也.”
이에 대해 염유가 대답하길, ‘그 분을 쓰시면, 우리나라의 명예가 회복할 것이요, 그의 사상을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귀신들한테 물어보아도 아무런 유감스런 일이 없고, 그를 구해다가 우리나라에 앉혀놓으면 위대한 문명의 꽃이 필 것입니다.’라고 자기 선생에 대해 깍듯이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천 개의 사당이 있는 거대한 땅을 그에게 준다할 지라도, 그는 거기서 단 한 푼의 사리(私利)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를 모셔 오십시오.’라고 한다.
그래 가지고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康子曰: “我欲召之, 可乎?”
그래서 계강자는 ‘내가 공자를 부르고 싶은데, 그럼 어떻게 하면 좋으냐?’하고 묻는다.
그 다음에 아주 기막힌 염유의 말이 나온다.
對曰: “欲召之, 則毋以小人固之, 則可矣.”
“당신이 그를 부르려고 한다면, 당신이 그를 다시 노나라로 돌아오게 하려면, 우선 소인(小人)들이 까불지 못하게 딱 막아야 합니다. 그러면 공자님이 돌아오실 겁니다.”라고 한다.
공자의 제자로서 얼마나 위대한 말인가? 소인배들이 더 이상 우리 공자 선생님을 괴롭히지 않는 환경을 만들라고 한다. 그렇게 하고 공자를 모셔오라고 한다.
그렇게 훌륭한 제자들을 두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공자가 된 것이다.
13. 공자의 질타
그렇게 해서 공자는 돌아왔는데, 공자한테 염유는 그야말로 의리를 지킨 사람이다. 그만하면 아주 훌륭한 제자이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는 염유한테 야단을 치시는 것이다. 공자는 철이 없는 사람이다. 훌륭한 스승이지만 철이 없는 사람이다. 나도 좀 철이 없다.
하여튼 여기서 말하기를, ‘너는 막을 수 없었냐?’고 하니깐,
子謂冉有曰: “女弗能救與?”
주제 넘는 일은 하지 않는 염유는 딱 부러지게 ‘불능! 저는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다.
對曰 : “不能.”
여기서 공자는 섭섭했을 것이다. ‘그 계씨는 태산에 가서 여제(旅祭)를 지낼 수가 없는 놈인데, 목숨을 바쳐서라도, 내 사상대로 월권을 절대로 못하게 막았어야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염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선생이 그렇게 야단을 치는데도. ‘저는 더 이상 못합니다. 저는 할 만큼 한 겁니다. 불능(不能).’이라고 한다.
그러니 공자의 가슴이 얼마나 끓었겠는가? 자기를 노나라로 돌아오게 만들어준 장본인이니깐 어떻게 할 수도 없었지만, 좀 의리 있게, 정의를 위해서 싸울 것이지, 재상이 되었다고 해서 계씨 눈치만 보고 있고, 목숨을 내어놓고 그걸 저지를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으니 공자는 야단을 치고 있는 것이다.
14. 曾謂泰山不如林放乎
子曰 : “嗚呼! 曾謂泰山不如林放乎?”
그러니깐 공자가 ‘오호(嗚呼)라!’ 탄식을 한다. 탄식을 하면서 태산과 임방을 비교한다. 여기서 태산은 ‘태산의 신’을 말하는 것이다. ‘태산의 신이 예의 근본을 물은 임방만도 못하단 말이냐?’고 한다.
이 이야기는 여러분들에게 그 뜻이 금방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의 뜻이 뭐냐 하면, 태산의 신은 분명히 아까 앞서서 예(禮)의 근본을 물은 임방보다 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텐데, 태산의 신이 그 미친 계씨의 여제를 받아들였겠느냐? 받아들였을 리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오호라!’는 ‘참 슬프도다.’는 탄식이다. 이렇게 이 장이 끝난다.
그러니깐 논어를 한 번 읽더라도 그냥 읽는 게 아니다. 이런 휴먼 드라마가 숨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