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함께하는 조선시대의 주점들
우리나라 주점에 고나한 기록은 고려시대에 비로소 나타납니다.
고려 성종2년(985년)에 송도에 처음으로 주점의 설치를 허가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숙종7년(1102)부터는 서민의 주점이 처음으로 곳곳에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개경에 좌우 주점을 두고 각 주와 현에 주점을 내었는데
이러한 관설주점은 당시 행동통보, 동국통보 등과 화폐를 주조하여
유통시키기 위한 유인책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화폐통용의 이익을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관설주점을 개설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설주점이 나라로부터 허락받은 주점이라면
그외에도 민간에서 운영하는 주점도 있었습니다.
문헌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고려가요 쌍과점에
"술 파는 집에 술 사러 갔더니 그 집 주인이 내 손목을 쥐더라"는
것을 보아 민간에도 술을 소매하는 집이 이미 정착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고려시대에 국가적 종교로서
각종 특혜 누리던 불교사원들이 가장 규모가 큰 주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불교사원들은 세금과 역을 면제받고 술, 국수, 마늘, 소금 등을
판매하면서 숙박업소까지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술집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 효종 대에 이르러 화폐가 점차 유통됨에 따라
숙박을 해결할 수 있는 주막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주막은 조선후기에 장시(場市)가 번성하고 역참제도란
교통제도가 발달함에 따라 더불어 번창하였는데, 장시에 모여든 사람이
화폐를 지불하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잘 수도 있었으며,
곳에 따라서는 접대부를 두는 곳까지도 있었습니다.
주막(酒幕)의 막(幕)은 집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부분 주(酒)자를 적은
깃발을 내걸어 주막임을 표시했습니다.
주막은 19세기 후반부터 여행자가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전국의 교통요지 곳곳에 생겼습니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상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헌주가, 소주가, 병주가, 주막, 목로주점, 내외술집, 모주가,
색주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점이 등장하였습니다.
헌주가
한말의 헌주가는 비교적 규모가 큰 양조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로 약주를 만들어 도매를 하며 소매도 하였습니다.
또 부업으로 탁주와 백주를 약간 만들기도 하는데
6~7칸의 공간에 2석들이 큰독 50~60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헌주가의 술값은 선금이나 현금으로 지불하고 일정기간에 한번씩 계산하였습니다.
병주가
술집, 바침술집이라고 해서 술을 소매하는 집으로
문간에 술병을 그려 붙이고 중간에 손님이 술생각이 나면 중노비에게 돈을
주어 근처 병주가에서 사다가 마시는 것입니다.
병주가에서는 소주, 약주, 백주주등은 헌주가 소주가에서 사다 팔지만
탁주는 직접 빚어 팔았습니다.
소주가
소주가는 소주 제조, 판매 주로 하고, 서울이남에서 탁주가 겸하는 일이 많으나
서울이북이 그 규모가 커서 큰독 70~80개에서
100개까지 갖춘 곳이 적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서울 공덕리에 50∼60호와 합해서
줄잡아 100호 정도가 연간 2,500석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목로술집
19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서울에는 고급 요정 같은 것은 없었고,
일반 대중이 많이 이용하는 목로 주점이 술집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목로 술집은 '선술집'이라고도 했는데, 서울 장안에는 당주동, 청진동,
모전다리(무교동), 이문안(종로2가), 동관 대궐 앞(종로4가),
구리개(을지로2가) 등에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뒷골목이나 으슥한 곳에 좁은 목판을 벌여놓고 술한잔에 너비아니나
술국 등을 곁들여 파는데 술값만 받습니다.
술잔을 놓는 긴 나무를 '목로'라고 하고, 이것을 놓아 술자리 마련한
목로 술집은 사방이 터진 온돌에 큰솥을 걸어 놓고,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떠서 끓는 물에 중탕을 해서 손님 잔에 부어 주는 것입니다.
동대문 시장 동문 밖의 '흥코집', 동관 동문 안에 '동양루'라는 목로 술집,
신설동의 '형제집' 등이 꽤 유명한 편에 속했습니다.
목로주점은 조선시대 말기에 등장하여 6.25전쟁 전까지 성행하였습니다.
내외주점
한국 몰락양반의 위상을 가늠하는 사회현상으로 내외(內外)주점을 들 수 있습니다.
술집을 해서 호구할 생각은 엄두도 못 냈을 양반도
술집을 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부터였습니다.
물론 내외술집에는 술집표시가 없습니다.
알음알음으로 찾아가 문전에서
판자문을 약간 밀고 "이리 오너라" 하며 손님이 왔음을 알립니다.
그럼 안방에서 "들어오셔 청마루에 자리를 깔고 앉으시라
여쭈어라" 하는 마님소리가 들립니다.
내외술집은 일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경우에는 중문 안에서
개다리소반만을 내민다고 '팔뚝집' 이라고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외술집도 나중에 색주가로 전락하여 그 풍습은 없어졌다고 합니다.
이동술집
서울의 풍물로
광주리 소주방 또는 공덕리 소주방이라는 이동 술방이 있었습니다.
주종은 소주로, 오지병에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며 장터나 성안에
드는 길목에 펴놓고 술을 팝니다. 향학열이 남달랐던 황해도 신계, 곡산,
안악 등지서 자녀나 남편을 출세시키고자 어머니와 아내가 길거리로 나선 것입니다.
김홍도의 "주막"
소나무 아래에 문인들이 모여 운취 있는 연회를 열고 있다.
이런 자리에는 항상 술이 빠지지 않는다.
아래쪽으로 술병을 들고 오는 어린아이도 보인다.
〈행려풍속도병〉 부분, 김득신, 호암미술관 소장.
대쾌도
술에 만취한 남자를 두 사람이 밀고 끌면서 가고 있다.
곡물이 부족한 시기에는 금주령이 내려지기도 했지만 이미 인간 생활에 깊숙이 자리잡은
술은 어떤 권력으로도 막기 어려웠다. 김후신, 간송미술관 소장.
일제 강점기 시절의 주막
일제 강점기 시절의 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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