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강성삼 신부를 배출한 성지 - 부여 내대 교우촌
<내대마을 입구>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혹심한 고문에 못 이겨 한 때 배교한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는 홍산(鴻山)으로 이사한다. 그는 배교를 뉘우쳐 전교에 온 힘을 쏟았으며 이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배출되었고, 이 지역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로는 큰 박해를 받지 않았으므로 전국의 신자들이 피신하여 1850년대에는 여러 지역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프랑스 선교사들은 이곳을 하부 내포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여기, 부여군 외산면(外山面) 내대(內垈)에서 우리나라 땅에서는 처음 사제로 서품된 강성삼(姜聖參)이 태어났다.
1866년생인 강성삼 라우렌시오가 1881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말레이시아의 페낭으로 유학가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1850년(철종 1년) 조선교구 신학교를 세웠고, 그해 9월 교장 다블뤼 신부(후에 제5대 교구장)는 배티교우촌(梨峙-충북 진천)에 신학교를 정착시켰다. 다블뤼 신부의 뒤를 이어 최양업 신부가 신학교를 맡았고 1854년 3월까지 임 빈첸시오, 김 사도요한, 이 바울리노의 세 신학생을 페낭으로 유학 보냈다. 1858년 다시 세 명을 파송하였으나 학교는 1866년 병인박해로 폐쇄되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고 점차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는 1882, 1883, 1884년 3차례에 걸쳐 21명의 신학생을 유학 보냈다. 서울을 떠나 인천 부산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 홍콩, 싱가포르를 지나 50여일 만에 페낭에 도착하는 힘든 여정을 거쳤다. 유학생들은 언어와 풍습 기후와 음식이 다른 땅에서 풍토병에 시달리는 등 갖은 고생을 다 했고 병사자도 일곱 명이나 나왔다. 그러나 조선의 명예를 위해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분투해 2~3개월 만에 라틴어로 대화하는 수준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10여 개국의 다른 나라 유학생들과 함께 4∼9년 동안 교양과정, 철학과정, 신학과정을 공부했다.
1885년 10월 블랑 주교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설립, 7명의 신학생으로 개교했다. 이듬해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자 1887년 3월 현재의 성심여고 자리로 부엉골 신학교를 이전하고 유학생들을 본국으로 송환했다.
<강성삼 신부>
드디어 1896년 4월 26일 약현성당(현 중림동성당)에서 한국 내에서 수품 받는 첫 신부들이 탄생했다. 뮈텔 주교가 세 명의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나이순에 따라서,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강도영 신부(1863~1928)가 세 번째, 정규하 신부(1863~1943)가 네 번째, 강성삼(1866~1903) 신부가 다섯 번째 사제로 되었다.
강성삼 신부는 밀양 본당에서 진양 양산 언양 등 14개 공소와 500여명의 교우를 대상으로 사목하던 중 6년 만에 37세로 요절했다. 페낭 신학생 시절 얻은 풍토병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가톨릭대사전> <평화신문> <평화방송 2015. 1. 15. 18:4
<프티니콜라 신부>
내대는 순교자 프티니콜라 신부(별명 朴신부. Michel Alexander Petitnicolas)가 거주하며 언어를 익히고 첫 사목활동을 편 곳이기도 하다. 1828년 프랑스 생 디에(Saint Die) 교구 코앵시(Coinches)에서 출생한 프티니콜라는 1852년 사제 서품을 받고 라블린본당에서 1년간 사목한 뒤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인도, 홍콩 등지에서 포교하다가 1856년 3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푸르티에(Pourtie, 申) 신부와 더불어 한국에 입국, 내대에서 사목하였고 1862년부터는 배론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배론에서 체포되어 이 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명동성당으로 옮겨졌다. <가톨릭사전>
높은 산기슭 아래 자그마한 평지, 내대에 도착한 프티니콜라 신부는 마을에 두 가구만이 있는 신자 집들 가운데 한 곳에 자리 잡았다. 열심히 공부한 결과 조선말을 잘 하게 되어 사목 방문을 시작하였다.
1856년 12월 이래로 107명에게 세례를 주는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1856∼7년 베르뇌 주교가 집계한 조선 전체의 성인 영세자수가 총 518명인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열심히 포교했는지 알 수 있다. <내대성지 홈페이지>
그는 의술에도 능통하여 많은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었으며 3만 이상의 라틴어와 10만에 가까운 조선어를 담은 나한사전(羅漢辭典)을 편찬, 한 부는 파리의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고 나머지는 병인박해 때 소실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황석두 루카 성인도 한동안 내대에 머물렀다. 강성삼 신부의 누나 강 이사벨라는 “황 루카도 홍산 같은 동네에 살았다. 그는 열심한 교우였다.”(<병인박해 순교자 시복재판기록>)라고 증언한 바 있다. <내대성지 홈페이지>
<오늘의 내대마을>
부여 지역의 옛 지명이 홍산(鴻山)이다. 백제의 대산현(大山縣)이 757년(신라 경덕왕 16) 한산(翰山)으로 이름을 바꿨고 940년(고려 태조 23) 홍산으로 개명했다.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생긴 비홍산(飛鴻山 270m. 부여 서쪽)에서 유래했다.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내대 마을은 조선 시대 홍산군 하서면 지역으로 차씨가 살았다 하여 차대리, 안에 있는 동네인 내동, 그리고 소안 등을 병합하여, 내동과 차대리의 이름을 따서 내대리가 되었다.
내대성지는 아직 전혀 개발되지 않았다. 바라보면 짙은 색 산 아래의 옅은 색 구릉, 그리고 텅 빈 자그만 밭뙈기들만 보일 뿐이다. 그러나, 눈을 감고 150년 전으로 돌아가면 속죄의 마음으로 이웃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이존창 루도비코, 파란 눈에 조선말 하는 경이로운 모습의 프티니콜라 신부, 신앙의 씨앗을 뿌리는 황석두 루카, 두 눈을 반짝이며 그들을 따르는 어린이 강성삼 들이 조용히 웃으며 걸어 나온다.
< 옛 내대마을 터>
위치는 충남 부여군 외산면 성충로 81번길 45-23 (갈산리 237) 내대 45-23. 외산면 4거리에서 부여 방면으로 약 5분 거리 좌측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