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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5년 무자(1888) 6월 4일(갑신) 흐림
25-06-04[22] 문간공 김정 등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는 경상도 유생 심기택 등의 상소
○ 경상도 유생 심기택(沈麒澤)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백세(百世)의 스승은 후학(後學)들이 바꾸지 않고 존경하며,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논의는 명주(明主)가 어기지 않고 따르는 법입니다. 신 등은, 선비들이 스승을 존숭한 의리를 강구하고 전하께서 현인의 덕을 본받으시는 예(禮)를 흠모하여, 다섯 현자(賢者)를 문묘(文廟)에 배향하는 일을 가지고 참람된 짓인 줄을 알면서도 한결같은 소리로 아뢰어 호소하면서 윤허하는 전지를 받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내리신 비답을 보니, ‘여러 현자들의 깊은 학문과 큰 절조는 세상의 교화를 돕고 인륜을 세웠으니, 늘 사모하여 우러르는 바이다.’ 하셨으면서도 또 이르기를, ‘일을 중히 여기고 법을 신중히 행하는 뜻에서 대번에 의논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신 등은 손을 모아 받들어 읽고는 망연자실하여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삼가 보건대, 대성인(大聖人)이 현자를 기리는 충심(衷心)에 대해서는 더욱 흠앙함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신하로서의 분수나 의리에 있어서는 의당 성상의 하교를 삼가 따라야 했으므로 집으로 물러나와 있었으나, 한 가닥 덕을 좋아하는 떳떳한 마음은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감히 다시 짧은 글을 지어 거듭 지엄하신 성상을 번거롭게 하니, 밝으신 성상께서는 다시 더 살펴 주소서.
아, 선왕께서 예를 제정할 적에 백성에게 공덕이 있는 자는 등급에 따라 제사 지냈는데, 국학(國學)에 종사(從祀)하는 분은 오직 도학(道學)을 위주로 합니다. 공자 문하의 제자로부터 송(宋) 나라의 현자들에 이르기까지 어찌 일찍이 당대에 도가 행해진 적이 있었습니까. 어떤 분은 의심나는 것을 묻고 어려운 것을 분별하였고, 어떤 분은 몸소 행하고 힘껏 실천해서 천하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오도(吾道)가 있는 줄을 알게 하였으니, 그분들이 인륜을 돕고 세상의 교화에 모범이 된 공덕이 과연 어떻다 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숭상하고 받들어 양무(兩廡)에서 제사 지낸 것이니, 옛 전적(典籍)을 하나하나 살펴보아도 우리 조정처럼 이런 분이 많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다섯 선정(先正)의 도덕과 학문에 대하여 말하자면, 연원(淵源)은 공자와 맹자에 거슬러 올라가 접하고, 학문의 관건(關鍵)은 정자와 주자에게서 받았습니다. 자품(姿品)은 탁월하고 수양한 것은 순수하였으며, 견식은 고명하고 실천한 것은 독실하였습니다. 출처(出處)는 구차하지 않았고 성취한 것은 정대하였으며, 글로 쓴 것이나 행동한 것은 팔도에서 뛰어났습니다. 이분들이 후세에 끼친 유풍(遺風)은 모범이 되기에 충분한데도 아직까지 문묘에 배향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사림에게 답답한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 현자를 대우하는 예에 있어서도 실로 흠전(欠典)이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이르시기를, ‘현자들의 깊은 학문과 큰 절조는 늘 사모하여 우러르는 바이다.’ 하셨으면서도 허락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시니, 어리석은 신들은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일을 중히 여기고 법을 신중히 행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거행해야만 할 것을 거행하지 않으신다면, 장차 어느 때에 거행하시겠습니까. 이는 성인이 사리(事理)를 저울질하고 전례(典禮)를 헤아리는 도가 아닌 듯합니다.
신 등은 이로 인해 또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옛날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이 중국에 조회하러 갔을 적에, 공자를 모신 사당의 위차(位次)를 가지고 예부(禮部)에 질문하기를, ‘주자(周子), 정자(程子), 장자(張子), 주자(朱子) 같은 현자는 의당 정전에 배향되어야 할 텐데, 어째서 양무에 잘못 모셔졌는가? 그리고 나종언(羅從彦), 이동(李侗)은 정자(程子)의 지결(旨訣)을 얻었고, 황간(黃幹)은 주자(朱子)의 의발(衣鉢)을 받았는데, 어째서 양무의 제사에 끼지 못하는가?’ 하니, 당시 중국 조정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고 감탄하면서 확실한 의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께서는 현자를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선정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청을 윤허해 주지 않으시니, 신은 후세에 다시 유식한 자가 의문을 가지고 의논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신 등의 말이 아첨하는 데에서 나오지 않은 것과 현자를 숭상하는 도가 가르침을 세우는 데에 미진한 점이 있다는 것을 굽어살피셔서, 선정 문간공(文簡公) 김정(金淨),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를 공자 사당에 배향하는 은전을 특별히 하사하신다면, 열성조 때에 미처 거행하지 못했던 예가 전하 때에 와서 능히 거행되고 다섯 선정의 정대한 학문이 백세에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니, 이는 나라에도 매우 다행스럽고, 사도(斯道)에도 매우 다행스런 일입니다. 신 등은 매우 두려우면서도 간절한 마음을 금치 못하여 삼가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조정에서 현자를 숭상하는 도리를 어찌 그대들이 말하기를 기다리겠는가. 또 전에 내린 비답도 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고 물러가라.”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희자 (역) | 2000
승정원일기 2974책 (탈초본 136책) 고종 25년 6월 4일 〈갑신〉 22/22 기사 1888년 光緖(淸/德宗) 14년
○ 慶尙道儒生沈麒澤等疏曰, 伏以百世之師, 後學尊而勿替, 僉同之論, 明主循而不違。 臣等講多士尊師之義, 欽殿下象賢之禮, 擧以五賢腏享文廟, 不避僭越, 同聲陳籲, 謂蒙兪允之音。 逮夫聖批下者, 有曰, 諸賢之邃學大節, 扶世敎而立人紀, 恒所景仰。 又曰其在重其事愼其典之意, 有未可遽議, 臣等攢手奉讀, 惘然失圖, 而竊覸大聖人褒賢之衷, 則尤有所萬萬欽仰者也。 在臣分義, 固當恪循聖敎, 退伏墊次, 而一段秉彝好德之心, 有不能自已者, 玆敢更綴短章, 重瀆崇嚴, 伏乞聖明, 更加垂察焉。 嗚呼, 先王制禮, 有功德於民者, 秩而祀之, 而若夫國學之從祀, 專主乎道學。 蓋自孔門弟子, 以至宋朝群賢曷嘗有施於當世哉? 或以問疑辨難, 或以躬行力踐, 使天下後世, 知有吾道, 其所以扶人紀範世敎之功之德, 果何如也? 是故而崇而奉, 苾芬兩廡, 歷溯往牒, 未有若我朝之彬彬也。 至若五先正之道德學問淵源, 溯接乎洙·泗, 關鍵, 發透於洛·閩。 姿品卓越, 克養純粹, 見識高明, 踐履篤實, 出處不苟, 成就正大, 立言制行, 優八閫域, 遺芳餘風, 蔚爲矜式, 而尙未躋享, 非徒爲士林之齋鬱, 其在殿下賢賢之禮, 實爲欠典也。 殿下旣曰, 諸賢之邃學大節, 恒所景仰, 從以靳持, 臣愚未知其聖意所在也。 若以重事愼典, 當擧不擧, 其將何時而擧之乎? 此恐非聖人權衡事理, 斟酌典禮之道也。 臣等因是而又有感焉, 昔文烈公臣趙憲之朝京也。 以聖廟位次, 質問禮部曰, 周·程·張·朱之賢, 宜配享, 而何爲屈於廡也? 羅從彦·李侗, 得伊·洛之旨訣, 黃榦受紫陽之衣鉢, 而不與於廡祀何也? 當時中朝諸人, 相顧嗟嘆, 以爲確論, 以今聖上尊賢之心, 靳此先正從享之請, 臣恐後世, 復爲有識者疑議也。 伏願聖明, 俯察臣等之言, 非出阿好, 崇賢之道, 有闕立敎, 特賜先正臣文簡公金淨·文正公金尙憲·文純公權尙夏·文忠公閔鎭遠·文正公李縡陞廡之典, 則列聖朝未遑之禮待, 待殿下而克擧, 五先正正大之學, 俟百世而愈光, 邦家幸甚, 斯道幸甚。 臣等無任屛營祈懇之至, 謹冒眛以聞。 批曰, 省疏具悉。 朝家崇賢之道, 何待爾等之言? 且有前批, 勿煩退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