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글쎄 참말로 싫다니까요오오오~"
60~70년대는 금수강산 이 땅에 빨갱이 놈들이 마구 설치던 시기였다. 온 나라 벽에 "방공방첩 승공통일"이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이승복 군이 북한 무장공비 면전에서 결연히 외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는 남한에 있는 모든 국민학교에서 주기적으로 개최하는 반공 웅변대회의 단골 주제였다. 그 시절 이승복 군은 대한민국 반공 정신의 표상이었다. 당시 강원도 산골 집에 침입한 북한 무장간첩들에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항거하다가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무참히 희생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그때 이승복 군의 나이는 만 9세였다. 분단 시대가 낳은 슬픈 참사였다. 우리가 국민학교 때 도덕 교과서에서 배운 그대로였다. 남북 대립이 격화되던 1960년대 말의 냉전시대에 온 국민을 분노하게 만든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간첩, 공비, 빨갱이는 일반 사람들과 단번에 구별이 된다. 그 놈들은 모든 모양새가 온통 빨간색이기 때문이다. 겉도 속도 옷도 몸뚱이도 전부 빨간색이다. 그렇지만 도산국민학교 1, 2학년 때 그렇게 지천에 깔려 있을 듯했던 빨갱이 놈들을 실제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놈들은 다 어디에 숨어 살았던 것일까. 온 산천에 빨갱이 놈들이 널려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서 이리저리 삐라를 찾듯이 경계하며 샅샅이 찾아보았는데도 빨간 색깔의 공비 놈들을 한 마리도 찾지 못해서 속이 상했었다. 그 놈들을 한 마리라도 잡기만 한다면 도산지서에서 공책과 연필을 한 바소가리 탈 수 있었을 텐데...
반공 소년 이승복 군이 외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는 도산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교내 소년소녀 웅변대회의 단골 주제였다. 나는 소년 부문에 참가해서 종종 일등도 하고 부상으로 앨범을 받은 적도 있었다.
웅변대회의 하이라이트는 누구나 막판에 하는 똑같은 행동이었다. 마지막에 교탁을 억수로 쎄게 "탁" 치면서 이틀씩이나 여물을 못 먹어서 화가 디따 나 있는 황소처럼 눈을 아주 크게 부려 뜨고 얼굴에는 오만상 열 받아 있는 표정을 잔뜩 담아서 심사 선생님들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나는 공산당이 글쎄 싫다니까요오오오오오~!" 하고 고함을 질러서 거기 구경하는 선생님들과 아이들을 거의 장가지게 해 놓아야 상을 탈 수 있다. 안 그러면 어림도 없다. 상장 근방에도 못 간다. 그러다 보니 해마다 교탁을 내리치는 소리가 점점 더 세져 갔다. 어떤 놈은 하도 교탁을 세게 치고 고함을 냅다 질러서 지바람에 나자빠지거나 괴상한 기침이 나오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놈은 작고도 오락가락하는 갈지자 목소리를 극복하기 위해 애먼 교탁만 죽잡고 내리쳐서 그만 교탁이 부서지며 아까운 유리 코프(컵)만 박살내는 녀석도 있었다. 희한한 놈 가운데는 웅변 대본을 중간에 까먹어서 엉엉 울며 교실을 뛰쳐나가는 녀석도 있었다. 알고 보면 이런 놈들은 웅변조의 제스처와 억양과 성조와 리듬감을 제대로 가르쳐 주는 위대한 스승인 남시창 선생님과 이재호 선생님 같은 걸출한 지도자를 못 만나고 이 동네 저 동네에 반드시 살고 있는 우리 영팔이 행님의 말만 그저 듣고 그냥그냥 출전한 잠룡급에 훨씬 못 미치는 도롱뇽들이었다.
상을 못 타는 녀석들을 나름대로 분석해 보았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거나 뽕 맞은 놈처럼 생기가 없이 흐리멍덩하거나 멀겋게 보이면 이건 하나마나 꼴찌였다.
싹실에 사는 호윤이는 웅변을 제법 잘했다. 호윤이는 그 당시 크게 유행하던 구연동화에서 "나무꾼과 선녀"로 이미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나무꾼은 호윤이가 맡고 선녀 역할은 순희가 했다. 발군의 황금 꼼비였다. 나무꾼이 워낙 신수가 훤하게 생겨서 배구공보다도 작았던 나에 비하면 처음부터 점수를 왕창 따고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키와 용모와 낙랑한 목소리까지 뭐... 뭐... 모양새 측면에서는 나와 경쟁이 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선녀가 원촌 동네 기린아인 순희이다 보니 따르는 팬들도 많았다. 내 웅변 팬은 기껏해야 분강촌 용규와 재락이, 섬마 해수, 토계 종익이와 응구, 목실골 재수 유국이, 매내 용필이 그리고 기분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흥구 정도였다. 알고 보면 이놈들은 모두 도산학교 지각대장이었는데 반장인 내 편에 서서 흑판에 이름이 눌어붙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팬인 척하는 녀석들이었다.
호윤이와 나의 웅변 대결은 여러 측면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도산골 낙동강을 축으로 강남(내살미)과 강북(분강촌)의 대결, 천사(내살미 옛 지명) 마실과 부내(분강촌의 이칭) 동네의 대결, 나룻배로 통학하며 논두렁밭두렁을 거쳐 학교가는 아이들과 버스를 보며 신작로를 걷는 아이들의 대결, 보리농사 마을과 수박농사 마을의 대결, 공민왕이 왕모산성(내살미)과 밀양대(분강촌) 가운데 어느 곳에서 더 오래 머물렀는가 등등 대결하고 이겨야 할 이유와 근거가 차고 넘쳤다.
하지만 골자는 물밑에 따로 숨어 있었다. 이는 바로 웅변을 가르치는 두 덕장의 지략 대결이 핵심이었다. 다시말해 남시창 선생님(탁구 코치)의 섬세한 지략과 이재호 선생님(배구 코치)의 터프한 리더십의 대결이 모든 경쟁 구도의 근간이었다. 나는 유년시절 이재호 선생님과 동고동락을 같이 했지만 웅변과 배구 시합에서만큼은 넉다운 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선생님과 나만이 알고 있는 무던한 사랑은 하해처럼 넓고 깊었다. 은사님과 함께 한 추억을 수필로 다 쓴다면 아마 오거서에 실을 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선생님은 지난달 작고(7.18)하신 필자의 큰형님과 동창이었다. 아! 모도 다 그리운 분들, 그리운 옛사람...♧.
♤반공 웅변대회에서 입상하기 위해서는 오만상 열 받아 있는 표정을 잔뜩 담아서 심사 선생님들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나는 공산당이 글쎄 싫다니까요오오오오오~!" 하고 고함을 질러서 거기 구경하는 선생님들과 아이들을 거의 장가지게 해 놓아야 상을 탈 수 있다.(ai 생성 그림)
♤싹실에 사는 호윤이는 웅변을 제법 잘했다. 호윤이는 그 당시 크게 유행하던 구연동화에서 "나무꾼과 선녀"로 이미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나무꾼은 호윤이가 맡고 선녀 역할은 우리들의 짱인 순희가 했다. 발군의 황금 꼼비였다. 나무꾼이 워낙 신수가 훤하게 생겨서 배구공보다도 작았던 나에 비하면 처음부터 점수를 왕창 따고 들어가는 모양새였다.(ai 생성 그림)
♤간첩, 공비, 빨갱이는 일반 사람들과 단번에 구별이 된다. 그 놈들은 모든 모양새가 온통 빨간색이기 때문이다. 겉도 속도 옷도 몸뚱이도 전부 빨간색이다. 온 산천에 빨갱이 놈들이 널려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서 이리저리 삐라를 찾듯이 경계하며 샅샅이 찾아보았는데도 빨간 색깔의 공비 놈들을 한 마리도 찾지 못해서 속이 상했었다. 그 놈들을 한 마리라도 잡기만 한다면 도산지서에서 공책과 연필을 한 바소가리 탈 수 있었을 텐데...(ai 생성 그림)
♤사진1은 1974년 도산국민학교 4학년 때 남시창 선생님(탁구 코치 담당, 좌측)과 이재호 선생님(배구 코치 담당)의 모습. 사진2와 3은 몇 년 전 두 분의 모습이다(사진2의 가운데 분이 이재호 선생님이고 사진3은 필자와 남시창 선생님이 3년 전 선생님의 본가인 풍산에서 함께 했다). 사진4는 두 분이 도산국민학교 교실에서 팔씨름 대결을 하시는 모습을 가상(ai)으로 생성시켜 보았다. 수몰 전 도산국민학교가 토계에 있던 시절 두 분께서는 탁구 코치와 배구 코치로 오랫동안 활동하시며 우리들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을 한정없이 만들었다. 그리운 은사님들... 그리운 옛어른들...
첫댓글 AI가 그당시 모습을 고스란히 생생하게 전해주네
정말 똑 같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