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교육소식지에서
재미로 읽는 한국사 이야기 11
김영한 / 학산중학교 교사
1636년 2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게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 청이 조선에게 신하의 예를 요구한다? 당시 조선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치욕적인 요구였다. 본래 청은 만주에 살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였다. 여진(족)은 만
주지역에 거주하며 조선에 조공을 받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던 부족이었다. 이러한 여진(족)이 만주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나라를 세워 국호를 후금(1616)이라 칭하고 급기야 청으로 국호를 다시 고쳐 조선에 군신(君臣)관계를 요구했던 것
이다. 이로 인해 조선과 청의 관계가 불편해진 것은 물론 더 나아가 두 나라간 전쟁의 기운까지 감돌았다. 짧은 시간에 여진(족)이 이처럼 강대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임진왜란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은 한ㆍ중ㆍ일간에 일어난 국제 전쟁이다. 7년간의 전쟁으로 조선과 명은 승리 했지만, 전쟁의
장소였던 조선은 국토가 황폐되었는가 하면 명나라 역시 대규모군대를 동원했기 때문에 국력이 쇠약해졌다. 이 틈을 이용해 여진(족)
은 만주지역을 통합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과 명을 위협하는 존재로 성장했던 것이다.
여진(족)이 강성해져 나라를 세웠다고 할지라도 단번에 조선에게 신하의 예를 요구한 극단적인 태도 변화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후금을 건국한 후 여진(족)은 조선의 친명배금(親明排金, 명나라를 가까이 하고 후금을 멀리하는 외교)정책을 빌미
로 1627년 조선을 침략했다. 이 당시 후금의 침략에 대응해 조선의 관군과 의병이 맞서 싸웠지만 후금의 군대를 물리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를 정묘호란이라고 하는데, 이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관계를 체결하게 된다. 이렇듯 청에겐 후금시절 조선과 형제의 관계를 체결한 전례가 있었고, 국력이 그때보다 더 강성해진 청은 더 나아가 조선에게 신하의 예를 요구한 것이었다. 당시 이에 대한 조선의 선택은 두 가지였는데,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훗날을 기약하자는 주화론(主和論)과 오랑캐에게 신하의 예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끝까지 항전하자는 척화론(斥和論)이 있었다. 임금이었던 인조의선택은 어떠했을까?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청과의 항전을 선택했다.
인조 14년(1636) 12월 2일 청의 10만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진격했다. 청의 군대는 조선이 예측한 것 이상으로 규모가 컸고, 막강했다. 여진(족)은 본시만주 일대의 유목민족이었으니 말 다루기에 능숙하여 기마병이 중심이 된 군대를 꾸렸고,
빠른 속도로 남하했다. 더불어 그 당시 조선의 전략과 전술은 이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조선의전략은 보통 전쟁이 발생하면 백성들과 함께 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며 장기전으로 이어가는것이었는데, 청의 군대는 곳곳의 위치한 산성에서 전투하기보다 빠른 속도로 계속 남하해 왕이 있던 서울을 공격하고자 했다. 이러한 까닭에 청의 군대가 압록강을 건넌지 10일도 되지 않아 서울 부근까지 이르러 조선을 당혹케 했다. 다급한 상황에서 인조는 우선 왕세자빈과 왕자들을 강화도로 피난케 하고 자신도 강화도로 피난하여 항전하고자 했으나, 이미 청의 선봉부대가 강화도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인조는 길을 돌려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남한산성은 방향에 따라 동ㆍ서ㆍ남ㆍ북 4개의 성문이 있는데, 인조는 서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서문에 이르는 길은 물자수송이 어려울 만큼 경사가 매우 급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가 서문을 택한 것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가장 짧은 거리였기 때문이다. 인조는 가장 빨리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였던 서문을 택했고, 한 겨울에 서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급하게 들어갔던 것이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명에 원군을 요청하고 각 지방에 근왕병(勤王兵, 왕과 왕실에 충성하는 군인)을 모집하는 격문을 보냈지만 소
용이 없었다. 1636년 12월 16일 청의 대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장기전에 대비했다. 다음해1월 초에는 청 태종이 직접 이 곳을 찾아 전쟁을 지휘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 당시 남한산성에는 1만 2,000여 명의 군사가 있었지만 산성 안에서 항전하는 방법 이외는 별다른 전술이 없었다. 이 당시 청과 조선의 전쟁을 우리는 병자호란이라 부른다. 병자호란에서 조선은 청을 이
길 수 없었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싸워야 했고, 산성에 있는 식량은 한정되어 있었으며, 성곽 밖에는 청의 10만 대군이 포위하고 있었으니 이 전쟁의 결과는 자명했다. 결국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청군이 머무르고 있던 한강 남쪽의 삼전도(서울 송파구 석촌동)에서 청 태종에게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숙이는 것)의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하고청과 군신(君臣)관계를 맺게 된다.
병자호란이 끝난 3년 뒤 청 태종은 자신의 공적을 새긴 공적비 건립을 조선에 요구했다. 조선은 청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고, 결국 1639년 12월 8일 이른바‘삼전도비(정식명칭은 대청황제공적비)’를 세웠다. 현재 이 비의 옆에는 귀부(龜趺, 거북모양을 한 비석의 받침돌)가 하나더 있는데, 이는 조선이 처음 만든 귀부를 청이 작다고 트집 잡아 다시 기존의 귀부보다 더 큰귀부를 제작하게 되어 남게 된 것이다. 삼전도비는 높이가 3.95m, 폭 1.4m, 두께 0.4m가 되는 거대한 비석으로 이례적인 규모다(문화재청).
삼전도비는 1895년 이 비를 수치스럽다고 생각한 사람들에 의해 강물 속에 빠뜨려졌던 것을 1913년 일제가 찾아 다시 세웠다. 이는 일제가 예부터 조선민족은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으니 지금도 다르지 않다는 조선 통치의 근거 중 하나로 활용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광복 이후 삼전도비는 민중들에 의해 다시 강변 땅 속에 묻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63년
큰 비로 불어난 강물에 의해 모래가 씻겨나가 비석이 들어나자 정부에서 다시 정비하여 세웠고,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 서울 석촌 호수 서쪽 입구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 삼전도비’가 정말 부끄러운 역사의 산물인가? 삼전도비가 세워진 역사적 과정을 보면 분명 치욕적인 역사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역사를 지울 수 있는가? 아울러 치욕적인 역사는우리의 역사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우리들도 살아가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부끄러운 일도있는 법이다. 하물며 오랜 시간을 두고 지내온 우리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자랑스러운 역사와함께 안타깝고 부끄러운 역사도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오히려, 삼전도비를 통해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는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부끄러운 역사도 엄연한 우리의 역사이다.
2015년 오늘 날 우리에게 삼전도비가 주는 교훈은 대단히 크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특정한 역사를 미화시키거나 가감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삼전도비를보고 우리가 교훈을 얻을 수 있듯, 지난 역사도 전문가인 역사학자들에 의해 있는 그대로기록되고 재생산되어 자랑스러운 역사에서는 자부심을, 부끄러운 역사에서는 교훈을 얻으면 될 일이다. 2015년 11월 삼전도비가 주는 교훈을 우리는뼈저리게 다시금 새겨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