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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152회>
<줄거리>
최응은 백제의 볼모 진호의 암살을 주문하며 유금필에게 극약을 건넨다. 진호를 죽이면 백제에 볼모로 가있는 왕신 역시 죽음을 면치못할 것이므로 유금필은 우선 왕신의 친형인왕식렴을 설득하고자 길을 나서고... 한 편 조물성에서의 화친이후 고려의 간섭 없이 거침없이 신라로 진격하여 이십 여개의 성을 함락하며 승승장구하던 견훤은 고려에서 온 사신에게서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
씬 최응의 집 (밤)
지난 회와 장면이 연결된다. 유금필과 신숭겸, 박술희들이 충격적인 표정으로 담담하게 마주해있는 최응을 본다.
최응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요. 백제의 볼모가 죽게되면 저들도 왕신공을 죽일 것입니다. 그리고 조물성에서 맺은 화친은 깨어질 것이고 다시 우리가 바라는 전쟁이 시작되겠지요.
모두들 ................?
최응 헌데,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소생은 그 답이 생각나지 않아 조당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비로소 유금필과 의제들은 헛기침을 하며 서로를 본다.
유금필 그야말로 최공께서 어려운 질문을 내놓으셨소이다. 허나 왕신공이 무슨 죄가 있소이까?
최응 죄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목숨은 이미 돌아오기 어려운 저 강 건너로 가 있습니다. 값없이 죽어버릴 목숨을 나라를 위해 소중하게 쓰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자는 것이지요.
신숭겸 지금 백제에서 온 인질은 왕신공의 형님이신 바로 그 서경의 총관 왕식렴공께서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 자를 누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박술희 말도 아니 됩니다. 아무도 그 사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최응 그러니까 어렵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의외로 그 왕식렴공은 사리판단이 분명하고 결론이 명쾌한 분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이 과묵하고 누구보다도 나라를 생각하는 열정이 큰 분입니다.
유금필 그건 무슨 말씀이시오?
최응 기왕 나온 말이니 한번 시도해 볼 필요는 있다는 말입니다.
유금필 (놀라며) 왕식렴공에게 말입니까?
최응 그렇습니다.
유금필 친아우분의 목숨을 빼앗고자 하는 일입니다. 그 이야기를 그 당사자에게 의논을 하라 그런 말입니까?
최응 사사로이는 형제간의 일이겠으나 크게 보면 나랏일입니다. 충과 효와 의 중에서 제일 큰 것이 충이라 했습니다.
두 사람 ........?
유금필 (최응을 빤히 보다가 끄덕인다) 좋소이다.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비록 어렵더라도 해 보십시다.
최응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장군께서 가시겠습니까?
유금필 그리 하겠소이다, 최공. 듣고 보니 길은 그것뿐일 것 같소이다. 날이 밝으면 왕식렴공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두 사람 아니, 형님..?
최응 어렵고 곤혹스러운 길이 될 것입니다, 장군.
두 형제는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이고 유금필은 끄덕인다. 그러자 최응이 품속에서 작은 약주머니 하나를 꺼내어 놓는다.
최응 가져가시지요. 지난 번 이 몸이 굶어 죽기로 작정하였다가 부끄럽게도 폐하께서 오시어 꾸중하시는 바람에 다시 목숨을 이었습니다. 허나, 훗날 또 죄를 짖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망설임 없이 숨줄을 끊고자 이 약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세사람 .............?
유금필 알겠소이다. (그 약을 품속에 넣는다)
최응 공신분들과도 이 일을 의논할 필요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 분들도 지금 폐하께서 군사를 이르키시지 않는 것에 대해 몹시 섭섭해하고 실망하고들 계십니다.
유금필 알겠소이다. 그렇게 하겠소이다.
최응 다른 분이라면 믿지 못하겠지만 유금필 장군이십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장군.
유금필 ............. (끄덕인다)
씬 왕식렴의 집 외경
씬 동 집 마당
꽃과 정원수가 어우러진 연못가를 진호가 산책하고 있다. 밤하늘을 보며 가끔씩 한숨을 터뜨린다. 무료한 듯 나뭇잎을 따 연못에 던지고 있는데 대문 쪽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 문 열어라... 나리께서 돌아오셨다... 대문을 열어라...
그리고 대문 열리는 소리와 왕식렴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진호가 그쪽을 본다. 왕식렴이 집사들과 함께 들어서고 있다. 진호가 예를 표한다.
왕식렴 허허, 밤이 매우 깊었는데 아직도 잠자리에 아니 드셨구려.
진호 예, 나으리.
왕식렴 허허, 이런... 나는 황궁에서 오는 길이올시다. 달빛도 참 좋구려. 아마도 고향생각이 나시는가 보오?
진호 아, 아니옵니다, 나으리.
왕식렴 하하하... 그렇지 않아도 폐하께오서 그대의 안부를 매우 소상히 물으셨소이다. 그리고 이렇게 어주까지 내리셨소이다. 백제땅에도 내 아우가 가 있기 때문이올시다.
진호 아, 예..
왕식렴 자, 자.. 저리 가서 한잔하십시다. 얘들아, 저쪽 저기 정자로 주안상 좀 보아 오너라. 자, 가십시다.
시종들이 대답하며 가고 그들은 정자로 간다.
씬 그곳 정자
그들이 술을 마시고 있다. 이미 주안상이 와 있다.
왕식렴 이국 땅에서 그것도 적지에서 산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것일게요.
진호 어인 말씀이옵니까? 지낼만 하옵니다.
왕식렴 내 아우도 지금 백제땅에서 얼마나 이 고려가 그립겠소이까?
진호 그러시겠지요.
왕식렴 내게는 하나 밖에 없는 아우였소이다. 어릴 때부터 늘 함께 붙어서 살았지요.
진호 아, 예..
왕식렴 (마시고) 그런데 그만 형님폐하를 뫼시고 전장에 나갔다가 인질에 되어서 가버렸어요. 참으로 아니 되었어요.
진호 아, 예...
왕식렴 자 어서 드시구려. 괴롭더라도 잘 지내보시구려. 언젠가 기회가 오면 또 그대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을 겝니다.
진호 예, 나으리. 그나마 이렇게 보살펴 주시니 참으로 은혜가 크옵니다. 고맙사옵니다, 나으리.
왕식렴 허허허, 난 그대의 보호자올시다. 어려운 일은 무엇이든 말씀해 주시구려. 늘 도와드리리다.
그렇게 마시며 왕식렴의 그늘진 표정에서...
씬 유금필의 집 외경 (낮)
씬 동 집 사랑
유금필이 외출차림으로 의복을 매만지고 있다. 거기 박술희가 와 있다.
박술희 지금 왕식렴공의 집으로 가시는 것입니까?
유금필 그렇다네. 가부야 어찌되었든 서둘러야 할 일이 아닌가?
박술희 공연히 형님만 난처해지시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에 어떤 사람이 그 아우의 목숨을 빼앗자고 하는데 선뜻 응락하겠습니까?
유금필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박술희 백번 생각해도 백번 다 아니올시다. 기왕에 아니 되는 일을 찾아가서 욕보실 것이 아니라.... 그냥....
유금필 그냥, 뭐...?
박술희 적당한 기회를 봐서 해치워 버리는 것이 빠른 방법 같습니다마는... 아니 그렇습니까? 일이 되도록 하자면 그게 더 빠릅니다.
유금필 그것은 바둑으로 치면 사석이야. 사람 사는 일은 정석으로 하는 것이 좋아. 올바르게 일을 처리한다는 것일세.
박술희 그게 뭐.. 잘 안될 것 같으니까 하는 말이지요.
유금필 자, 그만 나가보아야겠네.
박술희 어쨌든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유금필 자칫 잘못하면 봉변을 볼 수도 있어.
박술희 알고 있습니다, 형님.
유금필 가세.
그들 그렇게 나가면...
씬 길
두 사람이 그렇게 가고 있다. 박술희가 혀를 찬다.
박술희 쯧쯧쯧... 그 최응이라는 사람 말입니다. 이제 스물 서넛되었는데 참 보통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볼모를 죽인다는 그 발상은 기가 막힌 것이 아닙니까, 형님?
유금필 그러게 말일세. 그러니까 신동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박술희 이 난처하고 어려운 일을 형님에게 맡기신 것하며 또 왕식렴 공의 성격을 거울 보듯이 꿰뚫고 있는 것하며.... 이건 마치 칠팔십되는 늙은이들처럼 노회하게 계산을 하고 있었어요.
유금필 이 나라의 병부령이면서 군권을 책임진 사람일세. 그만은 해야하지 않겠는가?
박술희 그래도 그렇지요. 그 어린 나이에... 허허, 이것 참... 이거 아주 우리같이 나이든 사람들을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지 않습니까?
유금필 허허, 사람하고는.. 어서 가기나 하세. 숭겸아우는 어디로 갔는가?
박술희 배장군 댁으로 갔습니다. 오늘의 일을 의논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유금필 그랬구먼... 어서 가세.
그들 그렇게 가고...
씬 배현경의 집
후원에서 신숭겸이 배현경과 홍유를 보며 의논하고 있다.
배현경 오호,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까? 왕신공의 목숨을 내어달라..?
홍유 과연 그 일이 되겠소이까?
신숭겸 그러나 이미 이야기는 결론이 났고 유금필 장군께서 왕식렴 공의 저택으로 가셨소이다.
배현경 지금의 이 침체된 정국을 푸는 끈으로서는 참으로 기가 막힌 발상입니다마는... 과연... 과연, 그 일이 성사가 되겠소이까?
홍유 이 사람은 어렵다고 봅니다. 될 일이 있고 아니 될 일이 있어요. 그 형에게 찾아가서 아우의 목숨을 달라는 일인데... (도리질하며) 도저히 무리한 생각 같소이다.
신숭겸 하지만, 병부령 최응공이 내어놓은 이야기올시다. 폐하께서 고민하시고 어려워하시는 일을 풀고 지금의 난국을 타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였소이다.
배현경 알겠소이다. 하긴 더 이상 폐하를 찾아 뵙고 조르는 일도 실은 신하로서 하기 어려운 일들입니다. 기왕에 유장군이 가셨으니 하회를 기다려 보십시다. 그래서도 아니 된다면....
홍유 아니 된다면요...?
배현경 그 다음 방법을 쓸 수 밖에요.
홍유 다음 방법이라니요? 우리가 죽이자는 것입니까?
신숭겸 ............?
배현경 생각하건데, 병부령이 신장군을 우리에게 보낸 것은 유장군의 일이 잘 안되면 다음의 방식으로 빨리 처리를 해야 할 것이다 하는 뜻 같소이다. 그렇지 않다면야 극비를 요하는 이 일을 굳이 우리에게 와서 함께 알게 하는 이유가 없소이다. 즉, 유장군이 가서 일이 잘 아니 되면 어떻게든 빨리 목숨을 뺏도록 하라 이런 말이올시다.
두 사람 오호... (비로소 알 것 같다)
배현경 기다려 보십시다. 해서 잘 아니 된다면 우리가 방책을 강구할 수 밖에요. 기다려 보십시다.
그 위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씬 왕식렴의 집 대문
유금필과 박술희가 서 있다. 함께 간 집사가 문을 두드린다. 드디어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 뉘시오....?
집사 유금필 장군께서 오셨소이다. 나으리께 알려 주시구려.
소리 잠시 기다리시오....
그렇게 그들이 잠시 기다린다. 이윽고 대문이 열리고... 그들이 안으로 들어선다.
씬 동 집 마당
왕식렴이 급히 그들을 맞으러 나온다.
왕식렴 아니, 장군들께서 이 누옥에 어인 일이십니까?
유금필 허허허.. 술한잔 생각이 나서 들렸소이다. 이 참 오랜만이외다.
왕식렴 그런 것 같습니다. 허허허... 자, 저쪽으로 드시지요? 사랑으로 가십시다.
유금필 사랑보다는 어디 조용한 후원이 있으면 좋겠습니다마는....
왕식렴 아, 그렇습니까? (잠시 눈치를 보다가) 그럼, 후원으로 가시지요. 가을꽃이 아주 잘 피었습니다. 허허허...
그들 집 중문을 돌아 뒤 후원으로 간다.
씬 그곳 후원
꽃이 만발한 후원이다. 그 한 켠에 후원별채 건물이 보인다.
왕식렴 (소리) 하하하... 유장군께서는 언제부터 이렇게 그윽하고 은밀한 곳을 좋아하셨습니까?
씬 동 별채 안
술을 따르며 왕식렴이 웃고 있다. 술병을 놓고 그들 모두 함께 한모금씩 마셨다. 식렴이 다시 묻는다.
왕식렴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표정이 그리 밝지 못하십니다, 장군?
유금필 허허허.. 그렇습니까? 이 사람은 본래 감정을 감추지를 못해서 말입니다.
박술희 .........
왕식렴 아마도 용건이 있어서 오신 것 같으신데... 말씀하시지요?
유금필 .... (사이) .......?
왕식렴 왜 그러십니까, 장군? 말씀하시지요?
유금필 아주 입으로 말하기 참으로 어려운 청을 가지고 왔습니다.
왕식렴 저는 폐하의 사촌아우이고, 장군들께서는 의로써 맺어진 의형제분들이시나 결국은 다 같은 형제들입니다. 서로가 말하지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하시지요?
유금필 허허, 이것 참...
왕식렴 말씀하세요.
유금필 (다시 한잔 마시고) 허면, 말씀드리지요. 공께서 지금 난국에 빠져 허덕거리는 이 나라의 어려움을 풀어주시고자 하여 청하러 왔습니다.
왕식렴 (정색하며) 이 사람이 말입니까, 장군? 어떻게요....? 저같은 사람이 무얼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박술희 ..........
유금필 조물성에서 참담하게 패한 이후로 우리 고려는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 손발이 묶인 채 주저앉았습니다. 백제는 지금 승승장구하며 신라로 들어가고 있는데, 결국은 그 칼끝을 우리 고려로 돌릴 것입니다.
왕식렴 (이미 안다, 표정이 굳는다) 말씀하시지요.
유금필 그래서... 그래서 왔소이다.
왕식렴 분명하게 말씀을 하시지요. 무엇을 원하십니까?
유금필 인질로 와 있는 진호의 목숨을 얻으려 하오이다.
왕식렴 .....(충격)........?
유금필 결국 그것은 공의 아우님이신 왕신공의 목숨과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 일로 하여 왔습니다.
박술희가 두 사람의 그런 눈치를 본다. 아주 오랫동안 그들은 마른침만 삼킨다.
유금필 병부령 최응공은 이렇게 말했소이다. 이미 왕신공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가 있다고 말입니다.
왕식렴 ............?
유금필 값없이 쓰러질 목숨이라면 기왕에 나라를 위해 쓰임이 어떤가 하고 말이올시다. 왕공..?
왕식렴 예...
유금필 대답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이) 아우님의 목숨을 이 나라에 내놓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왕식렴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저 벙어리처럼 그렇게 유금필을 본다. 박술희도 본다. 결국 그렇게 보기만 한다. 그 무서운 시선이 오가는 그들의 표정에서.. 디졸브...
씬 동 왕식렴의 집 어느 곳
진호가 책을 읽으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다. 하품을 하며 문뜩 후원 쪽을 본다. 다시 책을 읽는다.
씬 다시 동 후원 별채 안
여전히 침묵이 이어진다. 유금필이 다시 묻는다.
유금필 지금 이 일은 오직 공께서만 결정하실 수 있습니다. 강요는 하지 않겠소이다.
왕식렴 결국 이 형이 아우의 목숨을 죽이는데 동의하라는 말씀이십니다.
박술희 나라를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왕식렴 내 아우는 형님되시는 황제폐하의 아우이기도 합니다. 감히 그 폐하의 신하들인 그대들이 폐하 아우님의 목숨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감히 그대들이 말입니까?
유금필 이 사람은 이미 그런 꾸중을 달게 들을 각오가 되어있었소이다. 다시 말씀드리리다. 아우님의 목숨이 필요하오이다.
왕식렴은 다시 초조한 갈등에 잠겨진다. 입술이 바짝 마른다. 그리고 어쩔 줄 모른다. 끝내 왕식렴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아무 말이 없다. 그들의 그런 면면에서...
씬 배현경의 집 사랑
배현경, 신숭겸, 홍유들이 초조한 생각에 잠겨 있다. 그리고 서로들 눈치를 본다.
홍유 벌써, 해가 넘어가고 있소이다. 지금쯤 무슨 결론이 나오지 않았겠소이까?
배현경 그게 어찌 그리 쉽게 나올 결론이겠소이까?
신숭겸 허나, 어찌되었든 결론은 나오겠지요. 기다려보십시다.
배현경 아마도... 차선책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듭니다마는...
신숭겸 차선책이라면 볼모를 죽이는 것인데, 자칫 잘못하면 그것은 폐하를 속이고 뜻을 거역하는 대역죄에 속할 수도 있습니다.
배현경 그러게 말이올시다.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들의 뜻이 마치 폐하의 뜻을 거스르는 항명으로 보여질까 말이올시다.
신숭겸 그 때문에 유금필 장군께서 가신 것이올시다. 조금 더 기다려 보십시다. 지금쯤 병부령 최응공도 소식을 애타게 기다릴 것입니다.
씬 최응의 집 방안
최응이 초조하게 생각에 잠겨 있다. 그 초조한 표정에서..
왕식렴 (소리) 우리집에 와있는 손님을 허면 어떻게 하실 것이오이까?
씬 왕식렴의 집 별채 안
그들 그렇게 팽팽하게 서로를 보고 있다. 왕식렴은 식은땀을 줄줄 흘린다. 유금필도 박술희도 마찬가지다.
왕식렴 우리집의 손님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 물었소이다.
유금필 왕공, 허락을 해 주시는 것이오이까?
왕식렴 (끄덕인다) 형님되시는 황제폐하의 크신 어려움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소이다. 장군들만큼이나 이 사람도 알고 있었소이다. 하지만 하나뿐인 이 사람의 혈육이올시다. (눈물 글썽이며) 하나밖에 없는 내 아우입니다. 지금 아우를 죽이는 일에 동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값없이 죽을 목숨을 값있게 죽게 해 줄 수 있다기에 말입니다. 왜....? 나라와 폐하를 위하고 이 고려가 다시 힘차게 일어서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이올시다. 내어놓겠소이다.
유금필 고맙소이다. 왕공.... 참으로 고맙소이다. 훗날 하늘이 오늘의 역사를 기억할 것이외다. 고맙소이다. 많은 장수들과 백성들을 대신하여 이 몸이 감사를 드립니다. 절 받으시오, 왕공.
왕식렴 당치 않으십니다, 절이라니요?
유금필 아니올시다. 이 절은 유금필이의 절이 아니라 공의 결단을 고마워하는 이 나라 신료들의 절이올시다. 받으시오.
유금필이 절을 한다. 왕식렴이 다시 맞절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본다.
왕식렴 이제 결국 우리들의 뜻은 다 주고 받았소이다. 언제 우리집 손님의 목숨이 필요하오이까?
유금필 기왕에 뽑은 칼이올시다. (극약주머니를 내어놓는다) 이런 일은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 매듭을 짖는 것이 중요합니다.
왕식렴 (끄덕이며 극약을 보다가 잡는다) 알겠소이다. (사이, 결심하고) 알겠소이다. 여봐라, 게 누구 있느냐?
소리 예, 나으리....
왕식렴 가서 외관에 묵고 있는 백제의 손님을 뫼셔오너라.
소리 예, 나으리...
그들 ................?
그 표정들에서..... 극약주머니를 보는 왕식렴의 표정에서...
씬 황궁 외경
씬 동 대전
왕건이 황후들과 차를 마시고 있다.
오씨 요즘 신료들이 매우 시끄럽다고 들었사옵니다.
왕건 국사를 보다보면 더러 그런 일들이 있는 법입니다.
오씨 하지만 그 내용들이 한결같이 폐하를 탓하는 듯한 것들이라고 들었사옵니다마는...
유씨 세상에... 어느 신하들이 감히 폐하를 탓할 수가 있사옵니까?
오씨 그렇기는 하지만 사실이라네. 상소문이 산같이 쌓이고 조회를 쉬라 하시었는데도 신료들이 광평성으로 몰려가 그네들끼리 조회를 열고 난리를 치고 있다네. 폐하, 어찌된 일이옵니까?
왕건 어찌되기는... 다 저들의 말이 옳습니다. 나라 사정이 어렵고 침체되어있기 때문에 저들은 다시 일어나 싸우자고 하는 것입니다.
유씨 그런데 왜 아니 되옵니까? 어려울 것이 없지 않사옵니까?
왕건 이보시오, 부인? 내 아우 신이가 지금 백제땅에 붙들려 있습니다. 우리가 군사를 일으키면 그 아우는 죽어요. 신료들은 그걸 모릅니다. 부인처럼 말이오. 자신들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인질이니 볼모니 하는 이야기는 벌써 까맣게 잊었어요. 황제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이 사람은 그것이 섭섭합니다. 안타깝고 말이올시다.
유씨 참으로 송구하옵니다, 폐하.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사옵니다. 용서하시오소서.
왕건 어찌 부인만 탓할 일이겠소이까? 다 이 사람의 잘못이올시다. 오늘 이처럼 나라가 수렁에 빠진 것 자체가 다 내 잘못이에요. 신이 아우가 지금쯤 얼마나 이 형을 원망하고 있을꼬....? 오호..
씬 왕식렴의 집 후원
진호가 와서 앉아 있다. 모두들 그런 진호를 본다. 잠시 날카로운 긴장이 지나쳐 간다.
왕식렴 이보시오, 박공?
진호 예. 나으리
왕식렴 이분들은 폐하의 의형제분들이십니다. 그러니까 나와도 같은 형제의 반열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공을 특별히 보시고자 하여
오셨소이다.
유금필 유금필이라 하오이다.
박술희 박술희라 하오이다.
진호 소생은 진호라 하옵니다. 일찍이 조물성에서 두 분을 뵌 일이 있사옵니다. 소생을 위로하여 오셨다 하니 고맙사옵니다.
왕식렴 우리는 오후참부터 내내 술을 마셨소이다. 자, 공도 한 잔 하시구려. 아, 기왕이면 새로 가지고 온 술을 드시지요?
왕식렴은 천연덕스럽게 두 개의 병중에서 하나의 병을 들어 진호의 잔에 따른다.
진호 고맙사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무료하던 참이었습니다.
왕식렴 인질로 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참으로 마음이 무거울 것이외다.
진호 그러하옵니다. 늘 불안하고 떨리고 그렇사옵니다. 왜, 소생이 이런 인질이 되어야 하는지 원망도 많이 해 보았사옵니다. 하지만 다 서로의 조국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왕식렴 물론이오. 내 아우도 우리 고려를 위해 백제에 가 있는 것이지요.
진호 소생이 왜 모르겠사옵니까?
왕식렴 오늘 여기 모인 분들 모두 그 나라를 위해 평생을 바치고 또 죽을 분들이올시다. 자, 우리 모두 한잔씩 하십시다. 공도 그 잔을 드시지요?
진호 예.
모두들 잔을 들었다. 긴장이 더욱 감돈다.
왕식렴 오늘 마시는 이 잔들은 각자의 나라를 위해 마시는 것이올시다. 공도 그리 생각하고 드시구려. 자, 드십시다.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다 마시도록 하십시다.
그들 모두 그렇게 잔을 마신다. 진호도 천천히 다 마셨다.
진호 술맛이 참 그윽하옵니다.
모두들 .............. (그런 진호를 본다)
진호 왜들 그렇게 보시옵니까? 참으로 술맛이..... (약기가 온다) 술... 술맛이.... 아니, 나으리? 소생이 왜 이러하옵니까? 소생이... 왜...? 가슴이.. 가슴이... 터질 것... 같사옵니다. 나으리.....?
모두들 ............?
진호 (죽어가며 가슴을 부여잡는다) 나으리...? 나으리...?
왕식렴 용서하시오. 어차피 백제와 고려의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그대는 돌아갈 수 없는 목숨이었소이다. 잘 가시구려. (눈물 글썽이며) 그대의 목숨이 바로 내 아우의.... 목숨이오. 잘 가오.
진호는 몇 번 그렇게 왕식렴을 손짖해 부르다가는 끝내 버둥거리며 쓰러져 눈을 뜨고 죽는다. 참혹한 그 죽음... 그들은 그렇게 보고 있다.
왕식렴 황궁에 알려야 할 의무가 있소이다. 곧 사람을 보낼 것입니다. 그만 가서 병부령에게 전하시지요? 이미 목숨을 받았노라고 말입니다. 일이 다 잘되었다고 말입니다.
유금필 (목이 메이며) 왕공... 참으로 공의 결단을 이 나라의 모든 이들이 고마워 할 것이외다.
박술희 병부령의 안목이 높다는 것을 또 한번 느낍니다. 병부령은 공을 대인이라 하였소이다. 과연, 그러했습니다.
왕식렴 어서들 가시지요? 궁에 알리는 일이 급합니다. 신료들도 모두 알아야겠지요. 자, 그럼...
그들 그렇게 서로 끄덕인다. 일은 끝난 것이다.
씬 길 (석양)
파발이 달린다. 왕식렴의 집사들 1, 2, 3이다. 그들은 어느 갈림길에서 서로 나뉘어 달려간다. 그렇게 달려 사라지면...
씬 황궁 사이문
문이 열리고 왕식렴의 집사 하나가 들어서며 내군과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는다. 내군이 놀라며 입을 딱 벌리는데 신방이 부장 둘과 함께 다가온다.
신방 무슨 일이냐?
군사 서경총관 왕식렴 나으리댁에서 왔다 하옵니다. 그곳의 백제의 인질 진호가 급사했다 하옵니다.
신방 뭐라...? 급사...? 그게 사실이냐?
집사1 예, 장군. 사실이옵니다. 여기 나으리의 서찰을 가지고 왔사옵니다.
신방 대전으로 들여라.
군사 예, 장군.
신방 어허, 이럴 수가 있나...? 이게 무슨 괴변인가, 볼모가 죽다니..?
씬 다시 저자길 (밤)
집사2가 마필을 달려 사라진다. 그리고 그 위로 대문 두드리는 소리
소리 왕공나으리 댁에서 왔소이다. 문을 열어 주시오....
씬 배현경의 집 마당
대문이 소리내며 열린다. 가솔들과 함께 배현경, 홍유, 신숭겸이 나와 있다.
배현경 이 밤에 무슨 일인가?
집사2 백제의 인질 진호가 갑자기 급사를 했사옵니다.
세 사람 .............?
집사2 지금 이 일을 병부령 최응공 댁에도 전하러 갔사옵니다.
신숭겸 일이 제대로 잘된 모양이올시다.
배현경 (짐찟 큰 소리로) 어허, 그것 참 아니되었구나. 백제의 손님이 죽다니...? 그것 참 아니 되었어.. 어허..
그런 그들의 표정에서....
씬 인서트 (최응의 집)
최응 백제에서 온 인질이 죽었다고 하였는가? 갑자기 급사를 하였다고..?
집사3 예, 나으리..
최응 허허, 갑자기 죽다니...? 아마도 뭔가 지병이 있었던 게로구나?
집사3 그런 것 같사옵니다.
최응 이런 쯧쯧쯧.... 이 일은 중요한 일인데 황궁에는 알렸느냐?
집사3 예, 이미 그리로도 사람이 갔사옵니다.
최응 아니 되었구나. 참으로 아니 되었어.
그런 능청스런 표정에서...
씬 황궁 대전 복도
왕건 (소리)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겐가? 누가 죽어..?
씬 동 대전 안
복지겸이 신방과 함께 아뢰고 있다.
복지겸 서경총관 왕식렴 공의 집에 머물고 있던 백제의 볼모 진호가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급사를 하였다 하옵니다.
왕건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죽어.......? (의심) 갑자기....?
복지겸 예, 폐하. 서찰에 급히 적어 올린 내용으로 보아 본래부터 심장이 약하였던 것 같다고 되어 있사옵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지병이 있었던 것 같사옵니다.
왕건 그럴 리가 있는가? 내가 보았을 때는 참으로 건장하고 멀쩡한 사람이었소이다. 지병이라니요..? 그렇다면 얼굴에 병색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인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소이다.
복지겸 사람의 일이란 하룻밤 사이를 모르는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멀쩡하던 사람도 자고 나면 죽어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들었사옵니다.
왕건 그래요...? 헌데, 이렇게 중요한 일을 왜 식렴 아우가 직접 오지 않고 사람을 보냈다는 말인가?
신방 사람이 갑자기 죽어 그 뒷처리를 하느라 경황이 없는 것 같사옵니다.
왕건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내가 얼마나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였는가? 그 진호의 목숨이 바로 제 아우의 목숨이라고.. 내가 얼마나 말해 주었는가? 내가 얼마나....
모두들 ................
왕건 당장 식렴아우를 들라고 하라. 당장.....
신방 예, 폐하.
왕건 그리고 이보시오, 복장군?
복지겸 예, 폐하.
왕건 경이 전의를 데리고 직접 가 보시오. 가서 사인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오도록 하시오. 직접 말이오.
복지겸 예, 폐하.
왕건 대체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되어 가는고..? 오호, 이렇게 되면 우리 신이 아우는 어찌 되는 것인가? 우리 신이 아우는 어찌 되는 것이야...?
씬 황궁 마당
그 밤에 황궁문이 열려 있고 신료들이 속속 들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씬 광평성 관아 안
신료들이 모두 모여 있다. 김행선과 최응을 비롯하여 최지몽, 왕규, 추언규, 유금필, 신숭겸, 박술희, 배현경, 홍유, 염상, 김언, 박수문 형제들이다.
김행선 아니, 도대체... 이런 날벼락이 있나..? 어떻게 멀쩡하던 사람이 밥을 먹다 죽는다는 말입니까?
배현경 그런 일은 허다한 일이올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누가 장담할 수 있겠사옵니까?
김행선 하긴 그래요. 참으로 사람 목숨은 오늘 내일을 모르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도 정말 뜻밖이올시다.
최응 어찌되었든 서로 교환되어 와있는 볼모가 죽었다는 것은 국가간의 마찰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일을 의논해야 합니다.
왕규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백제가 그냥 있지 않을 것입니다.
홍유 볼모가 죽은 것은 아니 되었지만 기왕에 백제와는 서로간에 싸워야 할 운명이올시다. 차제에 군사를 정비하고 민감하게 다음 일을 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염상 백제에서 와 있던 볼모가 죽었으니 그곳에 있는 우리 고려의 인질도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소이까?
김언 저들이 그냥 놓아둘리 만무합니다. 결국 화를 당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수문 백제에 있는 왕신 공에게는 참으로 아니 된 일이지만 우리 고려로서는 이 기회에 막혀 있었던 나랏일을 풀어야 할 것입니다.
신숭겸 옳은 말씀이시오. 시중어른, 폐하께 주청을 드리어 어떻게 변할 지 모르는 백제를 대비케 하시오소서. 지금 상황이 매우 불안하고 급하게 되었사옵니다.
최응 그렇습니다. 백제에서 이 일을 알면 저들의 군사가 고려로 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시급히 대처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소생은 군을 총괄하는 사람으로서 전 군의 비상 동원령을 청하옵니다, 시중어른.
모두들 ...........?
김행선 그래야겠지요. 암요... 폐하께 급히 알현을 드려 주청을 올리겠습니다. 허이구, 이런....
씬 왕식렴의 집
전의가 시신을 검시하고 있다. 복지겸이 그 옆에서 보고 있다. 눈을 까보고 입을 벌려보고 술잔을 보고... 그러다가 의원이 고개를 젖는다.
의원 아무래도... 뭔가 약을 마신 것 같기도 하고....?
복지겸 오호, 그렇소이까?
의원 사람이 독을 마시고 죽게되면 그 반응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것 같은데....
복지겸 이보시오, 의원?
의원 예, 예...
복지겸 이 사람은 지병이 있어서 병사를 한 것이올시다. 급사를 한 거예요. 아시겠소이까?
의원 예....?
복지겸 이 사람은 병사를 한 것이라고 하였어요. 병사 말이오.
의원 (그제서야 끄덕인다) 아, 예, 예... 병사구 말굽쇼. 병사입니다. 아주 병이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 장군, 예 예...
씬 대전
왕건이 왕식렴을 노려보고 있다.
왕건 어떻게... 그렇게 일을 만들었는가? 왜 그렇게 죽도록 내버려 두었는가?
왕식렴 신도 어쩔 수가 없었사옵니다.
왕건 그 진호라는 자의 목숨이 신이 아우의 목숨과 같다는 것을 그만큼 말해주지 않았는가?
왕식렴 예, 폐하.
왕건 그런데도 결국 그렇게 만들었는가? 이제 어쩔 것인가? 신이 아우를 도대체 어쩔 것이야?
왕식렴 병부령 최응공이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하옵니다.
왕건 최응이가... 무슨 말을...?
왕식렴 이미 신이 아우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가 있다고 말이옵니다. 그리고 기왕에 값없이 죽을 바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음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하고 말이옵니다.
그제서야 왕건이 사태를 눈치채 버렸다. 충격이 온다.
왕건 최응이가... 최응이가 그런 말을 하였단 말인가?
왕식렴 병부령뿐 아니라 수많은 장수들이 폐하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사옵니다. (울며) 아마도 신이 아우도 알고 있었을 것이옵니다. 하여, 신은 백제의 볼모 진호가 병사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사옵니다. 용서하시오소서, 폐하.
왕건 (오랜 침묵, 괴로움) 이 일을 누구와 의논하였는가?
왕식렴 신이 혼자 알고 있을 뿐이옵니다.
왕건 최응이를 만났는가?
왕식렴 신이 혼자 알고 있었다 하였사옵니다. 폐하, 이미 아우의 목숨은 없사옵니다. 더 이상 추궁치 마시옵고 나라의 길을 여시오소서. 그것 만이 아우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옵니다.
왕건 그랬구나. 그랬어... 모두들 다 아는 일을 나만 몰랐어. 나는 내 괴로움을 아무도 몰라준다고 탓만하고 있었어. 그랬어.
왕건은 허공을 보며 눈물을 글썽인다. 그렇게 오랜 침묵이 흐른다. 대전내관의 소리가 들려온다.
대전내관 (소리) 폐하, 시중께서 납시셨사옵니다.
왕건 드시라 하라.
김행선이 들어와 부복하고 예를 올린다.
김행선 폐하, 지금 광평성 관아에 문무신료들이 와 있사옵니다. 저들은 백제에서 와 있던 볼모 진호라는 자의 죽음을 듣고 모두들 걱정하며 폐하께서 조회를 여시기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왕건 이미 내가 그 죽음의 내막을 알았소이다.
왕식렴 ..............?
왕건 이미 죽은 목숨은 어찌할 수 없는 것, 그렇다고 조회까지 열어서 더 나아질 일이 없소이다. 내가 듣기로 본래 몸이 약하여 병을 앓다가 죽었다 하니 장사나 후히 치루어 주도록 하시오.
왕식렴 ..........?
왕건 그러나 국가간의 일이니 마땅히 백제에 알리고 그 시신을 넘겨주어야 할 것이오. 그에 앞서서 정중하게 그 사정을 알리는 글을 사신을 통해 보내도록 하시오.
김행선 예, 폐하. 하옵고... 병부령은 만약을 염려하여 전군의 동원령을 청하여 왔사옵니다.
왕건 마땅히 걱정할 만한 일일 것이오. 허락하는 바이니 그렇게 하도록 하오. 조회는 열지 않을 것이오. 즉시 사신을 백제로 보내도록 하고 시신을 뒤따라 보내도록 하오. 그리고 군사들을 점고하여 만약의 사태를 대비토록 하시오.
김행선 예, 폐하. 삼가 영을 받들어 뫼시겠나이다.
왕식렴 (보다가 울며) 폐하, 그 용단이 참으로 장하시옵니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망극하옵니다. 이제 고려가 다시 일어서는 것이 보이옵니다, 폐하.
왕건 ........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아우. 참으로 고마우이.
씬 대야성 외경
씬 동 대야성 안
견훤이 돌아온 태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견훤 고생들 하였노라. 조물성 전투 이후, 그대들은 거창까지 무려 20여 읍성을 우리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만하면 되었다. 지금 우리는 더 큰 계획이 있어서 그만 그대들을 부른 것이다. 이제 해도 바뀌었고 군사들은 많이 지쳤다. 휴식이 필요해. 우리는 황도로 돌아갈 것이다. 할말들이 있는가?
신검 아바마마, 조금 더 시간을 주시오면 더 많은 성을 빼앗을 수가 있사옵니다.
금강 그러하옵니다. 이대로 회군할 것이 아니라 계속해 신라의 땅을 공략하도록 해 주시오소서.
견훤 허허허.. 우리 태자들이 아주 신이났구먼, 신이 났어. 허나, 과욕은 금물이다. 적당한 때에 물러설 줄 아는 것을 배워야해. 우리는 더 큰 계획이 있어서 돌아간다고 하였다.
신덕 그러하옵니다. 그동안 신과 더불어 파진찬 그리고 공직장군과 김총장군이 함께 이곳 대야성에 있었사옵니다. 신들은 신라에서 사람이 왔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능환 그 일은 신도 성으로 들어오면서 들었사옵니다. 신라에서 폐하께 의지하기를 원한다고 들었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애술 신라가 폐하께 무릎을 꿇었으니 이제 천하가 다 폐하의 것이 되었사옵니다. 고려도 조물성에서 무릎을 꿇었고 이제 신라마저 그리 되었다 하면 삼한은 백제의 나라이옵니다.
능애 참으로 놀랍고도 큰 소식이옵니다. 그에 관한 일을 위하여 회군을 하신다 함은 당연하시옵니다. 비로소 폐하께서는 삼한의 주인이 되시는 것 같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모두들 감축드리옵니다.
견훤 아무튼 그동안 고생들이 많았어. 우리는 황도로 돌아가서 군대를 재정비하고 다시 전략을 논의할 것이야. 그리고 본격적으로 서라벌로 향할 것이야. 더 자세한 것은 황도에 가서 다시 논의할 것이야. 알겠는가?
모두들 예, 폐하.
견훤 즉시, 회군을 서둘도록 하라. 돌아가서 더 큰 역사를 만들게 될 것이야. 백제의 역사를 새로 쓰게 할 것이야. 경들은 그 점을 각별히 명심하라.
모두들 예, 폐하...
씬 길
견훤의 대군이 황도로 돌아가고 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끝도 없이 가고 있는 그 대열 위로
해설 견훤의 회군, 왕건과 견훤의 조물성 전투는 지난해 10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타고 거창에 이르는 이십 여 성을 항복받은 일은 단기 3259년, 서기로는 926년 4월의 일이었다. 견훤은 이때에 이미 신라로 가기 위한 보다 구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황도인 전주로 돌아가 그 계획을 세우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고려로부터 이변이 발생한 것이다. 볼모로 갔던 진호가 죽었던 것이다.
그 행군 앞으로 멀리서 두 필의 전령마가 급히 달려온다. 그리고 가까이 이르러 말에서 내려 군례를 올리고 장계를 전한다.
공직 무슨 일인가..?
전령 고려로부터 사신이 전해온 국서이옵니다.
받아서 전하면 읽던 견훤이 크게 놀란다.
견훤 이게 무슨 소린가, 무슨 소리야?
모두들 ............?
견훤 우리 진호가 죽었다고...? 우리 진호가 죽었어...? 아니, 병사를 했다니...? 그토록 건강하던 우리 진호가 병사를 해? 고려왕이 이럴 수가 있는가? 우리 진호가 죽다니...? 우리 진호가 죽다니..?
그렇게 격노하는 견훤의 표정에서...
<152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