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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01월26일(일요일) 합천 미숭산 산행일정
회비 46,000원 1월8일 송금 완료, 28번 좌석 예약
산 : 합천 미숭산
[경상도의 숨은 명산 고령·합천 미숭산] 세계유산 고분 따라 걷는 대가야의 산
김재준 <한국유산기> 작가
월간산 기사 입력 : 2023.11.08. 07:30 수정 2023.11.21. 11:12
쑥부쟁이, 벌개미취, 구절초꽃이 순장殉葬된 여인의 슬픔처럼 피었다. 구불구불 옛 무덤 사이로 지나가는 황톳길, 산길이라지만 밟기가 조심스럽다. 까마귀 까르륵거리며 울고 나뭇잎마다 빗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물들어 검은 소나무는 수문장이 되어 우뚝 서 있다. 영락없는 경주 괘릉의 무인상이다.
아침 9시 안개비에 묻혀 올라가는 길은 신비스럽다. 낙락장송과 왕릉의 고분군은 안개 속에서 장엄하기까지 하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지난 9월 17일 한반도 남부의 고대 문명 가야를 대표하는 남원·김해·함안·창녕·고성·합천 고분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곳은 목곽에서 석곽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형태,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순장 무덤이다. 면적은 대략 81ha, 7개 지역 전체의 38%를 차지한다. 고분古墳도 700기 이상으로 가장 큰 규모다. 김해 금관가야가 초기의 맹주였다면, 후기에는 대가야가 위세를 떨쳤다.
미숭산美崇山(755m)은 고령군 대가야읍과 합천군 야로면의 경계, 대가야의 산이다. 정상에 서면 우두산·독용산·황악산·비슬산과 낙동강까지 굽어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령 현縣 서쪽 20리, 야로 현 동쪽에 있다’고 했다. 산 이름은 고려 이미숭 장군에게서 비롯되고 산성 터가 남아 있다. 산행은 대가야 왕릉전시관 뒤편으로 올라 고분군 따라 정상까지 8km, 3~4시간 정도.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걷기 좋다. 원점회귀할 수 있으나 산 아래 반룡사를 거쳐 가기도 한다.
안개비에 젖으며 30분 올라 본격적인 산길이다. 걸음마다 빗물을 머금은 풀잎에 신발은 벌써 다 젖었다. 왼쪽으로 계곡물 소리 요란하고 잠시 후 향교 갈림길(대가야박물관 1·주산성 0.3·고령향교 1.2km)에서 곧장 바로 간다. 9시 30분. 청미래덩굴·때죽·생강·개암·떡갈·상수리·작살·싸리·진달래·소나무. 산길은 빗물에 파여 물길이 됐다. 재선충병 방제를 한 것인지 소나무 무덤이 띄엄띄엄 주변 경관을 해치고 있다. 벌써 등에 땀을 흘리며 오르는데 거미줄은 안개 방울을 매달고 축축 처졌지만 하얗게 드러나 선명하다.
15분쯤 지나 주산 갈림길(주산 0.2·대가야박물관 1.6·청금정 2.6·미숭산 5.8km). 벽오동·노간주·붉·밤나무. 산길에는 여기저기 밤톨이 떨어져 길을 가로막는다. 한참 동안 밤을 줍느라 주산은 내려오면서 둘러보기로 했다. 운동시설이 있는 지하수 쉼터(미숭산 4.9·주산 1.1km)에서 목만 축이며 지나간다. 능선 길은 마치 산성 따라 걷는 듯한데 안개에 싸여 더 호젓한 길이다. 10시 10분, 정리된 숲속 길 3코스 이정표(주산성 정상·지산동 고분군 상부 3.7·청금정 주차장 1.2·미숭산 4.3km).
길섶에는 벚나무가 많이 심겨 있는데 봄날이면 벚꽃을 보러 숲길마다 사람들이 넘쳐날 것이다. 10분 더 걸어 광장 같은 널따란 숲 체험 탐방로 주차장(미숭산 3.8·중화임도 2·반룡사 2.1·지산임도 3·주산 2.2km). 이곳까지 자동차로 와서 산행하기도 한다. 관리실을 비롯한 벤치·급수대·화장실·쉼터 등 공원처럼 꾸며 놓았다. 갈림길마다 이정표가 곳곳에 있어서 길 잃을 염려는 없겠다. 600m 정도 올라가면 청금정聽琴亭(미숭산 3.2·반룡사 2.5·주산 2.8km)에 닿는다. 글자대로 가야금 소리 듣는 정자다. 능선길은 나긋한 가야인들 닮아 유려하고 가을 산길에 나뭇잎 하나둘 가야금 소리에 놀란 듯 떨어진다.
우륵의 가야금과 대가야 능선길
가야금은 삼한시대부터 내려온 고유 현악기로 가야 시대에 새롭게 만들어져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본다. 가야금은 열두 줄, 거문고는 여섯 줄이다. 가야 가실왕 때 사람 우륵于勒이 신라로 망명했는데 재능을 알아본 진흥왕은 그의 음악을 국가 대악大樂으로 삼고 충주에 살게 했는데 지금도 우륵이 가야금을 탄 곳이라 탄금대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표지판에는 돌아올 수 없는 ‘불귀不歸의 길’이라 쓰여 있다. 잃어버린 대가야를 다시 찾을 수 없는 애절함이 서린 길이라는 것이다. 대가야大伽倻는 562년 신라에 멸망하기까지 520년간 존속한 것으로 추정한다. 금관가야 중심의 초기 가야연맹은 4세기 후반 고구려 침입으로 세력이 약해지면서 신라에 편입되었고 그나마 대가야는 강대한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활동까지 제한적이었다. 554년 백제와 연합, 신라를 공격했으나 562년 멸망한다. 정치적으로 삼국보다 발전하지 못했지만, 가야금을 만들고 음악을 집대성하는 등 문화 수준을 높인 것으로 평가한다. 결과적으로 대가야가 남긴 것은 소리와 왕릉이다.
10시 45분 안개에 휩싸인 소나무 숲에는 굴피·산딸기·산초나무도 같은 식구들이다. 거미줄 걷으며 서둘러 산길을 걷는다. 잔뜩 안개 머금은 숲은 특유의 냄새를 뿜는다. 아름드리나무, 바위와 돌, 켜켜이 쌓인 나뭇잎에 다시 떨어져 내려앉은 이파리. 빗물 머금은 흙에서 올라오는 방향, 안개비에 씻긴 풋내, 숲은 향기로 가득 찼다. 우리도 이 숲에 들어 좀처럼 헤어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
발밑으로 온갖 버섯들이 우후죽순을 아는지 여기저기 울뚝불뚝 솟아올라 발에 챈다. 가을바람은 오른쪽에서 불어오는데 안개가 없었더라면 산 아래 황금빛 들녘이 대단했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을 헤아린 듯 노랗게 물든 단풍잎 몇이 떨어진다. 11시경 갈림길(미숭산 1.7·반룡사 1·청금정 1.5km) 쉼터. 이곳이 산마루 움푹 들어간 안부鞍部로 짐작된다. 여기까지는 거의 평지 수준이라 1시간 만에 4km를 걸어왔는데 지금부터 험한 구간. 그래도 힘이 들면 정상까지 올랐다가 되돌아와 반룡사로 내려가는 길이 적당하다고 귀띔했지만 오던 길로 다시 가기로 했다. 능선길 아래 반룡사盤龍寺는 용의 기운이 서린 곳, 대가야 후예들이 애장왕 때 해인사와 같은 시기에 지었고 보조국사, 나옹선사, 사명대사가 여러 차례 새로 지었다고 전한다.
발아래 도토리와 밤이 떨어져서 잘못 디디면 미끄러진다고 일렀는데 오히려 내가 넘어졌다. 천제단 표석 지나 오른쪽은 북향의 낭떠러지 지대. 진달래·철쭉류 관목들이 바람에 시달린 듯 어렵게 자라지만, 왼쪽 발아래는 굵은 소나무가 무리를 지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식생 형성이 바람 따라 결정되니 이곳은 바람이 주인이다.
산 이름과 바꾼 절개, 안개 싸인 산성 터
11시 반 정상까지 마지막 500m를 두고 숨이 끝까지 차도록 헉헉거리며 오른다. 반룡사 갈림길에서 미숭산 정상까지 1.7km 오르는 길은 정말 힘든 구간임을 실감한다. 옷은 땀에, 안개와 빗방울에 젖고 나중에는 등산화까지 다 젖었다. 그나마 공원의 산책길 수준으로 등산로를 잘 정비해 놓아 다행이다.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병꽃나무는 바위에 늘어졌고 층층나무 숲이 어두워져 검은 숲이 됐다. 길에 떨어진 밤톨을 까던 다람쥐가 쏜살같이 달아난다. 11시 40분 정상인 것 같은데 아직도 더 올라가야 한다니, 거리 표시 잘못된 것 아닌지? 밀림 같은 산성길 10분 더 힘을 들여 높아지던 길에 드디어 나타나는 바위, 해발 755m 미숭산 정상(신리임도 1.5·주산 정상 6.5·반룡사 3.2·청금정 3.7·용리마을 2.4km). 대략 8㎞ 걸은 듯. 고령 대가야읍과 합천 야로면의 경계, 고령의 최고봉인 줄 알았는데 표석 뒤에 우뚝 솟은 산불감시초소가 더 높다. 맑은 날에는 우두산·독용산·황악산·비슬산, 황금빛 가을 산하와 낙동강도 가물가물 보일 것인데 안개에 싸여 산성의 돌들만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여기서 자연휴양림으로 가는 길이 있지만 반룡사 쪽으로 많이 내려간다.
미숭산은 가야산·북두산·미숭산·주산으로 이어지는 가야지맥, 원래 상원산上元山으로 불렸다. 고려 말 이미숭李美崇 장군이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1392년 스승 정몽주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항거하다 이곳에서 순절한다. 처음에는 주둔지 충청도 미산·강경에서, 경상도 김천·성산에서도 패퇴를 거듭하자 이곳에 최신 장군 등과 산성을 쌓고 후일을 도모하나 실패로 끝난다. 후세에 절개를 기려 미숭산이라 했다. 북쪽 1.5km 지점에 미숭산자연휴양림이 있다.
내려가면서 길을 잘못 들어 합천 방향(야로초교 4.6·합천종합야영수련원 1.6km)으로 가다 되돌아왔다. 산성이 있어선지 우물 터 같은 곳에 물봉선·여뀌꽃이 빨갛게 피었다. 정오 무렵 다시 정상에서 내려간다. 쑥부쟁이, 구절초, 취나물 꽃은 어두운 숲속에서 환하게 피었다. 12시 30분 반룡사 갈림길까지 내려오는 데 30분 걸렸다. 군데군데 오소리 굴, 버섯은 안개를 먹고 크는지 내려오면서 보니 오전보다 더 자란 것 같다.
오늘처럼 안개 속을 오래 걸은 것도 처음. 잠시 바람 불더니 왼쪽 산 아래 집과 노란 들녘이 언뜻 나타났다 금방 사라져 버렸다. 오후 1시경 숲 체험 탐방로 주차장(미숭산 3.8·중화임도 2·반룡사 2.1·지산임도 3·주산 2.2km)에 닿으니 다시 비가 쏟아진다. 그늘막에 비도 피할 겸 다람쥐처럼 앉아 밤을 까먹는 여유는 특별한 호사 아닌가?
오후 2시, 고령의 진산鎭山으로 불리는 해발 310m 주산主山 정상(미숭산 6·대가야박물관 1.7·청금정 2.8·충혼탑 1.1·지산동고분군 0.5km)에 올라서니 산성 터 석축이 남아 있다. 한때 왕국의 수도였던 대가야를 내려다볼 수 있지만 안개에 흐릿하다. 내려가면서 수많은 고분을 굽어보니 꼭대기는 크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작아졌다. 하늘과 가까이 있어야 권위가 생겼는지 모르되, 지배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권력 무상이라 생각하며 왕릉전시관에 들어선다. 역시 왕은 하늘과 동격이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로 순장이 확인된 지산동 44호 고분을 발굴 당시 모습으로 재현해 놓았다. 오늘은 세계유산 등재 기념으로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데 문화재 관련 입장료는 아예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차장에 다 내려오니 빗줄기 다시 떨어진다. 오늘 산행, 왕릉전시관에서 미숭산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데 16km·6시간 남짓 걸렸다. 신비한 안개나라 다녀온 듯 발걸음은 무겁지 않다. 숲을 떠나면 이내 숲의 향기가 그리워질 것이다.
산행길잡이
대가야 왕릉전시관 ·지산리 고분군 ~ 주산 갈림길·숲 체험 탐방로 주차장 ~ 청금정·반룡사 갈림길 ~ 산성 터·미숭산 정상·산성 터·반룡사 갈림길 ·청금정 우회·숲 체험 탐방로 주차장 ~ 주산·지산리 고분군 ~ 대가야 왕릉전시관(원점회귀)
※ 왕복 16km·6시간 정도, 대가야박물관 길 건너 주차장, 주차료 없음.
교통
광주대구고속도로 동고령IC(하차) → 대가야읍(고령) 방면 → 대가야박물관 길 건너 주차장 → 대가야 왕릉전시관(등산로 입구)
※ 내비게이션 →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대가야로 1203 대가야박물관(길 건너 주차장 넓음)
※ 대중교통 불편
숙식
대가야(고령) 읍내 다양한 식당과 모텔이 많음.
주변 볼거리
대가야박물관, 우륵박물관, 미숭산자연휴양림, 대가야수목원, 개경포 공원, 반룡사, 고천원 공원 등.]
산행코스: [합천종합야영수련원 주차장-미숭산 정상(명산100+ 인증)-미숭산성-천제단-반룡사갈림길-청금정(정자)-임도-반석-주산-고령지산동고분군-대가야박물관-왕릉전시관-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 대형자동차버스주차장] (약 10.5km/5시간30분)
산행일 : 2025년01월26일(일요일)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5시간25분 소요)
07:10~10:50 “좋은사람들” 버스로 서울 양재역 12번 출구 전방 국립외교원 앞에서 출발하여 경남 합천군 야로면 하빈리 100 번지에 있는 합천종합야영수련원 주차장으로 이동 [306km] [3시간40분 소요]
10:50~11:45 경남 합천군 야로면 하빈리 100 번지에 있는 합천종합야영수련원 주차장에서 산행출발하여 미숭산(755m) 정상으로 이동
[미숭산(美崇山)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과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에 걸쳐 있는 산.
위치 : 경남 합천군 야로면과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문화재 : 미숭산성(美崇山城:경남기념물 67)
높이는 757m이다. 대가야읍의 주산(主山:310m)과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어 두 산을 함께 등산할 수 있다.
고려 말 이성계에게 끝까지 저항하여 지조를 지킨 안동장군 이미숭이 근거지로 삼은 곳이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뒤 불러 청하였으나, 이에 불복하고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켜 대항하였다. 그러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장군은 순절하였다. 원래 산의 이름은 상원산이었다가 장군의 절개를 기리어 미숭산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정상 주변에는 미숭산성의 성문과 길이는 1.45㎞의 성터가 남아 있는데,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용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에 갑검릉(甲劍陵)이 발굴되어 갑옷·철궁·창·고려자기 등이 출토되었다.
산자락에는 신라 문무왕 때 승려 의상이 창건하였다는 반룡사(盤龍寺)가 있다. 수차례 소실되었다가 1764년(영조 40)에 고령현감 윤심협(尹心協)이 중건하였다. 반룡사다층석탑(경북유형문화유산 117)과 반룡사동종(경북유형문화유산 288)이 대가야유물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산행은 반룡사에서 시작하여 천제단을 거쳐 정상에 오른 뒤 청소년수련원으로 하산하는 코스가 있고, 대가야유물전시관에서 출발하여 주산에 오른 뒤 전망대, 가야생수, 청금정, 천제단을 거쳐 정상에 도착한 뒤 미숭산관광농원으로 하산하는 코스가 있다. 두 코스 모두 4∼5시간 정도 소요된다. 정상에는 까닥바위가 있는데, 사람이 밀면 흔들려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변에는 고령 양전동 암각화(보물 605), 해인사, 벽송정(경북문화유산자료 110) 등의 유적지가 많다. 합천읍에서 남서쪽으로 16㎞ 지점에 합천댐으로 생긴 합천호가 있다. 깨끗한 호수와 수려한 경관으로 유명한 곳이다.]
11:45~11:50 미숭산 정상 주위 풍경을 사진촬영
[고령 미숭산
부산일보 기사 입력 : 2010-12-02 16:10:00 수정 : 2010-12-07 07:07:15
고분군, 눈물고개, 우륵의 청금정 … 대가야 500년을 걷는다
대가야라는 나라가 있었다. 역사에서 잊혀진 나라였다. 미숭산(美崇山·755m)을 찾아갔다가 대가야를 만나고 왔다. 2천 년 전 대가야는 경북 고령과 경남 합천 일대에 기반을 둔 철의 나라이자, 가야금의 나라였다. 왕과 귀족들의 무덤이 밀집한 주산(主山·310m) 능선길을 걷는 동안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었다.
신라 왕릉만큼 거대하지는 않지만, 산줄기에 자리 잡아 위세가 등등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장묘로 실체가 확인된 44호 고분 앞을 지날 때는 앳된 얼굴의 '순장 소녀'가 떠올랐다. 주산을 지나 미숭산으로 가는 길은 '눈물 고개'. 나라를 잃은 대가야 백성들이 피란 가던 고갯길이던가. 대가야의 역사를 타박타박 걸어가는 초겨울 산행이었다.
미숭산 산행은 고령 읍내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대가야박물관에서 시작한다. 왕릉전시관~지산리 고분군~주산~눈물고개 길~반석 쉼터~가야 약수~청금정~반룡사 갈림길~천제단~미숭산성~합천학생야영장 갈림길~미숭산~나상현(나대치)~신리 임도~신리저수지~옥담 버스정류장까지 이어지는 13.9㎞를 5시간 30분 동안 걸었다.
미숭산으로 가는 길은 평탄하고, 정비가 잘 돼 산책로 같은 기분이었다. 꽤 먼 거리인 데도 시간은 그리 많이 걸리지 않았다. GPS에 찍힌 평균속도는 시속 3㎞. 거의 평지 속도이다.
대가야박물관에서 대가야를 배웠다. 대가야 중심의 가야건국 설화는 최치원 선생의 석이정전(釋利貞傳)을 인용한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다고 한다. 가야산 만물상의 여신 '정견모주'와 하늘의 신 '아비가'가 혼인을 하여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왕', 둘째는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되었단다. 이때가 서기 42년. 역사서에 삼국시대로 명명돼 가벼이 취급된 고대 왕국 대가야의 역사는 562년 신라에 합병되기까지 무려 520년이나 이어졌다.
잘 정비된 고분들 사이를 지나 주산으로 간다. 아직 햇살이 펴지지 않아 초겨울의 쌀쌀함이 묻어난다. 산책을 하는 주민이 더러 있다. 이정표도 잘 갖춰져 따로 리본을 달 필요도 없었다. 다만 길이 워낙 여러 갈래여서 잘 선택해야겠다.
고분군을 지나니 주산과 미숭산으로 갈라지는 이정표가 나온다. 왼쪽 길은 주산을 오르지 않고 바로 미숭산으로 가는 우회로인 셈이다. 갈림길을 지나 약간의 오르막이 시작되는가 싶더니 주산과 충혼탑 갈림길이다. 곧장 오르는 길은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어서 충혼탑으로 살짝 우회한다. 출발한 지 딱 30분이 지났다.
충혼탑 방면으로 잠시 걸었을까. 이내 주산으로 오르는 오름길이 시작된다. 20분 만에 주산에 도착했다. 이곳은 주산산성이 있던 곳이기도 해서 성벽을 복원하기 위해 벌목 작업이 한창이었다. 방어의 기능이 사라진 옛 성터는 관광 기능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주산에서 미숭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눈물고개 길. 신라 장군 이사부에 의해 무릎 꿇은 대가야. 백성들은 이 길로 피란을 갔던가 보다. 하기야 나상현 너머가 바로 합천이니 이 길 말고는 달리 도망칠 길이 없었겠다.
눈물고개를 걸어 18분 후에 반석 쉼터에 도착했다. 어쩐 일인지 이곳에는 음수대가 있었다. 등산객 편의를 위해 고령군에서 설치를 했단다. 쉼터에서 쉬고 있던 여성 등산객이 알려주었다.
고령에 산다는 이 분은 천연염색을 하려 귀농을 했다. '인연이야기'라는 공방을 열어 염색도 하고 한복도 손수 짓는단다. 올해 초부터 산행을 시작해, 처음엔 100m만 걸어도 숨이 찼단다. 그런데 요즘은 수 ㎞도 거뜬하단다. 건네는 원두커피 향이 짙다.
작은 만남을 뒤로 하고 18분을 더 걸어 거북머리에서 가야생수가 샘솟는 자리에 도착했다. 임도가 연결돼 있어 중간 하산로로 그만이다. 임도를 가로질러 청금정(聽琴亭)으로 간다. 악성 우륵이 대가야를 그리워하며 뜯는 가야금 소리를 듣는 길이란다.
청금정 팔각정자에 올라서니 미숭산까지 이어진 웅대한 능선이 한눈에 보인다. 가야가 멸망하기 꼭 11년 전 대가야를 떠나 신라에 귀순한 우륵이 뜯는 가야금의 소리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청금정을 지나 이어지는 능선길은 소나무가 울창하다. 솔숲이 주는 향이 그윽하다. 솔바람도 쐐쐐~ 정겹다. 반룡사 이정표가 있는 곳까지도 25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약간 오름길이 이어지더니 20분을 더 걷자 천제단이라는 작은 돌 표지가 보인다. 천제단은 옛날 기우제를 지내던 자리였다는데 비석은 그저 삐딱하게 기울어 있다.
천제단을 지나니 미숭산성이다. 고려 말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키자 정몽주의 문인이었던 이미숭 장군이 고려를 되찾기 위해 군사를 모으고 항거한 곳이 이곳이다. 고립된 장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고려 복원 운동은 끝났다. 하지만 후세가 그의 절개를 기려 원래 상원산이던 산을 미숭산으로 바꾸어 불렀다.
'이긴 자가 강하다'는 공격적 명제가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을 해 본다. 미숭산성 오름길은 이때까지의 길과 다르게 꽤나 가팔랐다. 천제단에서 미숭산성까지 꼭 30분이 걸렸다.
산성터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한다. 학생야영장 갈림길 근처에 빨간 찔레 열매가 제 몸을 한껏 뽐내고 있다. 이제 새들이 먹어줘야 자손이 퍼진다. 미숭산 정상까지는 17분이 더 걸렸다.
가야산 칠불봉과 우두봉이 북쪽에 보인다. 왼쪽 거창 쪽으로는 오도산이 어렴풋하다. 그 너머 덕유산 능선이 우람하게 펼쳐져 있건만 아쉽게도 연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미숭산 정상은 실은 합천군 영역이다. 고령 땅을 그리 걸어 왔건만 정상은 군계를 살짝 비켜나 있다. 합천군에서 지번까지 새긴 정상석을 멋들어지게 세웠다.
정상을 뒤로 하고 나대치로 간다. 나대치는 신라군과 대가야군의 대치로 긴장이 팽팽했던 곳이라고 하는데 지형도에는 나상현으로 되어 있다. 길가에 보리수나무가 많다. 내려오는 데 23분 걸렸다. 신리저수지로 하산하는 산길은 임도를 확장하고 정비하면서 사라져버렸다.
꼬불꼬불한 임도를 내려간다. 낙엽송이 샛노랗다. 중간쯤 내려오니 공사 중이다. 12월 초순까지 수해복구 공사를 한단다. 신리저수지는 상류의 공사 여파로 온통 황톳물이다. 옥담마을 버스정류장까지 내려오는데 꼬박 1시간이 걸렸다.
산행 문의:라이프레저부 051-461-4164. 홍성혁 산행대장 010-2242-6608. 글·사진=이재희 기자]
11:50~12:10 미숭산성(美崇山城)으로 이동
[미숭산성(美崇山城)
위치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용리 산 66-1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용리에 있는 가야시대 산성.
건립경위
미숭산의 원래 이름은 상원산이었는데 이성계의 조선 왕조 개창에 항거한 이미숭이 고려 왕조 부흥에 뜻을 두고 이곳에서 군사를 조련하며 힘썼으나 웅지를 이루지 못하고 휘하의 장군들과 함께 순절하여, 후인들이 이미숭을 추모하여 미숭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미숭산성의 전설로 보아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성안의 채집 유물 가운데 대가야 토기편이 많고, 조선시대 백자편과 옹기편도 있다. 기와편도 7세기 중엽의 것부터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것이 여럿 포함되어 있어 미숭산성이 오랜 세월 동안 유지,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채집되는 유물과 주변 지역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대가야시대에 축성된 산성이 계속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쌍림면 용리와 합천군 야로면 하빈리의 경계 부분에 위치하며, 대가야 도성의 배후성인 대가야읍 지산리에 있는 주산성으로부터 5㎞ 정도 떨어져 있지만 능선으로 이어져 있어 접근하기 쉽다.
형태
미숭산성은 미숭산 정상부와 북서쪽으로 450m 정도 떨어진 해발 755m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남북으로 길게 쌓은 산정식 석축성이다. 동서로 긴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경사졌으며, 내부는 계단식의 평지를 이루고 있다. 성벽의 둘레는 1,367m로, 북동쪽으로 자연 절벽을 따라 폭 1m 내외의 석축과 토축을 하였고, 그 아래로 폭 10m 내외의 주마대를 만들었다. 남서쪽과, 남동쪽에는 자연 절벽과 경사면을 따라 석축을 하였으며, 주요 출입부인 남쪽은 8부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조하였다.
현황
할석축의 성벽은 대부분 무너져 내렸으나 일부 남은 곳은 높이 2m, 너비 2m 정도이다. 성안에는 봉수대, 남문지, 동문지 등이 있으며, 서쪽 골짜기에는 샘이 한 곳 있다. 미숭산성의 주문인 남문지는 육측부와 외벽의 경우, 밑에서 2~3단을 일반 성돌보다 훨씬 크고 반듯한 무사석으로 쌓았다. 남문의 폭은 돌확의 너비로 보아 410㎝ 가량 된다. 비교적 유존 상태가 양호하며, 높이 10m 이상의 절벽 위에 석벽 높이 2m 정도가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의의와 평가
가야산을 배후로 대가야의 최후 거점 산성으로 기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전하는 바와 같이 조선시대까지 기능한 성안의 봉수대는 남쪽에 있는 합천군 초계면 초계리의 미타산봉수를 받아 동쪽의 고령군 망산봉수로 전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내륙 방어와 통신상의 요충지라 평가할 수 있다.]
[이미숭 장군
여주인 이미숭장군은 1346년(충목왕 2년) 예부상서 헌(憲의) 손자로 태어났다. 호는 반곡(盤谷)이다. 어려서부터 용력이 뛰어나고 특히 병법에 통달하였다. 일찍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선생 문하에서 배웠는데 용력이 뛰어나고 병법에 통달한 그를 가리켜 장차 큰 일을 할 인물이라고 하면서 경술(經術)에 힘쓰라고 하였다. 후에 그는 안동장군(安東將軍)의 직에 올라 충신의 문하생답게 국가에 충성을 다하였다.
원명교체기였던 당시에 이성계는 여진과 왜의 침구를 막아 명성을 얻었다. 실권자였던 최영은 명의 부당한 간섭을 물리치기 위해 요동정벌을 결정하였으나 이성계는 이를 반대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이성계 일파는 전제개혁을 단행으로 구세력의 기반을 빼앗았으며, 원명교체기의 정세를 이용하여 친명책을 내세워 신흥유신(新興儒臣)의 세력규합하였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고려왕조를 보호하려는 충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참살함을 위시하여 왕조를 지키려는 충신(忠臣), 절사(節士), 왕족을 살해한 후 왕위에 오르게 되자 이러한 불의를 보다못해 분연히 항거하여 진전(鎭田)장군 최신(崔信)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군사를 이끌고 충청도 니산(尼山)에서 이성계장군과 싸우다 후퇴하여 국수봉(현 금릉군 구성면 홍평리 소제 : 덕제산) 그리고 성산(지금의 성주) 등지에서 계속 항전했으나 패배하게 되자 부득이 다음기회를 노리기 위하여 고령 상원산(지금의 미숭산)에다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 시키는 한편 많은 군량미를 비축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으나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한채 스스로 절벽에 몸을 던져 순절하니 진전 군을 위시한 휘하장군들도 잇달아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그 후 세인들이 이 충의를 길이 높여 추모하기 위하여 상원산을 미숭산이라 이름하게 되어 지금까지 미숭산이라 부르고 있다.]
12:10~12:35 사진촬영
12:35~12:45 천제단으로 이동
12:45~13:55 청금정(聽琴亭)으로 이동
13:55~14:15 주산(310m)으로 이동
14:15~14:45 고령지산동고분군으로 이동
[고령 지산동 고분군(高靈 池山洞 古墳群)
종목 : 사적 (구)제79호(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 830,181m2
시대 대가야
관리 고령군
주소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산8번지
좌표 북위 35° 43′ 28.9″ 동경 128° 15′ 09.9″
연결 http://www.daegaya.net/main/
정보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고령 지산동 고분군(高靈 池山洞 古墳群, 영어: Ancient Tombs in Jisan-dong, Goryeong)은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에 있는 가야의 구성국 중 하나인 대가야의 무덤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79호로 지정되었다.
특징
지산동 고분군에는 200기가 넘는 크고 작은 대가야의 무덤들이 있는데 윗부분은 지름 10m 이상의 대형무덤이, 중간에는 지름 10m 안팎의 중간크기의 무덤이, 그리고 아래쪽에는 작은 무덤들이 주로 모여 있다. 이곳에 위치한 주산의 남쪽 제일 큰 무덤이 금림왕의 능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아래로 큰 무덤들도 대가야의 왕릉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제32호 고분에서는 철제 갑옷, 금동관 등 중요 유물이 출토되어 지배계급의 무덤임이 밝혀졌고 아울러 주인을 위해 생매장된 순장(殉葬) 고분임이 밝혀져 고대의 순장제도를 실제로 밝힐 수 있는 중요한 고분이다.
현지 안내문
고령 지산동 고분군
고령은 대가야의 옛 지역으로서 현재 무덤이 수백 기에 이르고 있다. 그 중 지산동 무덤들은 겉모습이 확실하고 봉분이 비교적 큰 무덤에 한하여 번호를 매겨 지금은 72호 무덤까지 정해져 있다.
이들 무덤의 겉모양들은 모두 원형의 봉토를 하고 있고, 봉토의 규모에 따라서 대형·중형·소형무덤으로 구분한다.
주로 대형무덤은 산등성이의 위쪽에 많이 있으며 중형무덤은 산등성이의 중간 정도에 모여 있고, 작은무덤들은 대형무덤과 중형무덤 주위나 그 밑에서 발견이 된다.
내부구조는 돌널무덤(석상묘) 돌덧널무덤(석곽묘), 돌방무덤(석실묘) 등 여러 형태가 나타나는데, 돌널무덤의 경우 청동기시대 돌널무덤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한 봉분 안에 여러 무덤이 나타나는 것은 가족무덤의 성격이라기 보다 딸려묻기(순장)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대형무덤에서 많은 양의 토기와 함께 금동관·갑옷 및 투구·칼 및 꾸미개 종류가 출토되고 있으며, 4∼6세기 정도에 만들어진 대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지산동 30호분
지산동 30호분은 주산 남동쪽 능선 자락의 끝에 단독으로 자리잡고 있는 고총고분으로 5세기 중엽 개가야 지배층의 분묘이다. 크기는 동서 18m, 남북 15m이며 남아 있던 봉토의 높이는 1.5m였다. 1994~95년에 영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는데, 그 결과 으뜸돌방 및 딸린 덧널이 T자모양, 순장덧널 3기가 ㄷ자모양으로 동·남·북쪽에 배치되었다. 특히 가야지역 고분에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 으뜸돌방의 바닥 아래에 하부덧널이 확인되었다. 남동쪽 경사면에 등고선 방향으로 구(溝)가 둘러져 있었는데 이곳에서 발전된 토기는 제의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들은 바리모양 그릇받침과 목긴 항아리, 손잡이달린 항아리, 굽다리접시 등의 토기류와 덩이쇠, 말갖춤새, 무구, 금도오간 등 다양하다. 한편 하부덧널 덮개돌에 새겨진 바위그림은 선사시대까지 신앙의 대상이었던 바위그림이 더 이상 신상대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음을 추정케 한다.
지산동 47호분
지산동 고분군 가운데 가장 큰 고분으로 1939년에 발굴되었다. 봉분의 직경이 49m, 석실 크기가 93.8m×1.8m로 금림왕릉으로 구전되며 출토 유물로는 금동제 호록, 황어뼈, 금장환두대도, 이형금동제품, 철촉 30점 등이 있고 대가야 15대 이뇌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전형적인 순장형태를 보이고 있다.]
14:45~15:15 지산동 고분군을 탐방
15:15~15:40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대가야로 1203 번지에 있는 대가야박물관으로 이동
[대가야박물관은 대가야 왕릉이 모여 있는 지산동고분군의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대가야왕릉전시관’과 ‘대가야역사관’, 그리고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창제한 정정골에 위치한 ‘우륵박물관’으로 이루어진 대가야와 고령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전시한 국내 유일의 대가야사전문박물관이다.
박물관 정보
주소: 경북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460번지
관람시간: 09시~17시
휴관일: 매주 월요일
관람료: 일반인 2천원, 학생·군인 1천5백원
주요 전시물: 토기·철기·금관·장신구 등 지산동 고분 출토 대가야 유물, 고령 지역 선사~조선시대 유물
전화번호: 054) 950~6065]
[반파국(伴跛國)
목차
1. 개요
2. 국가 이름
3. 역사
3.1. 성립기와 중심지
3.2. 전성기 (5세기 말)
3.3. 신라와의 동맹 (522년)
3.4. 백제와 동맹하다 (541년)
3.5. 멸망 (562년)
3.6. 멸망 이후
4. 문화 및 기타 사항
5. 반파국 연표
6. 주요 유적
1. 개요
가야 시대에 오늘날 경상북도 고령군 지역에 있었던 여러 나라 중 하나. 흔히 삼국유사의 표현인 대가야로 알려져 있으며, 금관가야가 쇠락한 가야 후기의 가야 일대 정세를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시조는 이진아시로 <지리지>에 의하면 520년간 존속했었다고 하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대가야 양식 전파 양상을 보면 전성기에는 오히려 일시적이나마 신라보다 지방 장악력이 더 강했던 측면도 엿볼 수 있지만, 이후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성장한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치이다가 세력을 잃고 562년 신라군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일본서기에서는 가라(加羅: 카라), 반파국(伴跛國: 하헤노쿠니) 등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한다. 한자로 작성된 일본서기의 원문이 아닌, 일본서기 현대 일본어 번역본에서는 임나(任那), 고령가라(高靈加羅) 등의 용법도 등장하는데, 이게 실제로 한문 원문에서 사용되는 표현인지 아니면 현대 일본어 번역자들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달아놓은 주석인지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2. 국가 이름
대가야(大伽耶): 삼국사기 지리지 고령군 기사, 삼국유사 태조 5년(940년) 5가야 기사에서 나오는 명칭.
반파국(伴跛國): 일본서기에서 사용되는 명칭. 양직공도 백제국사에서는 ‘반파(叛波)’로 나온다. 정사 삼국지에 등장하는 반로국(半路國)과도 연관된 이름으로 추정된다.
의부가라(意富加羅): 일본어로 ‘오호카라’로 읽히며 대가야를 지칭하는 말로 파악된다. 금관가야를 지칭한 것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본국(本國): 남제서 만동남이열전의 기록. 479년 하지왕이 보국장군 본국왕으로 착봉되었다.
3. 역사
백제는 물론 신라나, 같은 가야 권역인 금관국보다도 조금 늦은 시기에 성장을 시작했으나, 빠른 속도로 특유의 문화를 성립시켰다.
3.1. 성립기와 중심지
반파국이 자리잡을 오늘날 고령군 지역은 고인돌 유적을 보아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 나오는 변진반로국이 기원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변진반로국은 지금의 대가야읍이 아니라 회천 건너편인 개진면 양전리, 반운리 일대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반운리에 있는 높이 129m의 낮은 언덕인 독산 정상에는 2~3세기의 철제 농경 도구, 철제 무기, 목곽묘가 조사 결과 드러났다. 여기서 출토된 와질토기는 부산 노포동 고분군이나 울산 웅촌면 하대마을 유적과 양상이 비슷해, 낙동강을 타고 타 지방과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소국체는 일찍부터 성립됐지만, 변한 시절부터 초기 가야를 김해 지역의 금관 연맹이 주도하던 시절에는 고고학적으로 4세기 이전 목곽묘 계통 분묘의 규모와 부장품의 양으로 볼 때 김해에 비해 매우 초라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후처럼 가야를 주도하는 나라가 아니라 흔한 여러 가야 제국(諸國) 중 하나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김해금관연맹이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 때 상당히 붕괴당한 즈음부터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5세기 이후 고분에서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이 동시기 김해 지방의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진다. 이렇게 금관국의 몰락과 반파국 부흥의 시기가 맞물린다는 점에서 광개토대왕에게 당한 금관국의 유민들이 유입되었을 수도 있지만 가장 보수적으로 변하는 묘제나 토기 양식은 금관국과 여전히 차이가 있어 일부 고급 제철기술자의 유입은 있었을지 몰라도 주류는 어디까지나 원 지역 주민이 중심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령 지역은 기존의 맹주(로 여겨지는) 김해와 거리가 멀고 중국과 가까운 선진 지역인 고구려나 백제와는 가까우며, 훗날의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논이 기름지고 생산성이 좋은 땅이라 극찬한 땅인 만큼 가야권 다른 나라에 비해 땅의 조건부터가 좋았다.
반파국이라는 국명 또한 주로 초기에 쓰이던 이름으로, 400년 이후 원래 '가라'라는 이름을 쓰던 김해 금관국이 약체화되자 그 이름을 빼앗아 '가라'라는 이름으로 바꾼 듯하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 발굴 결과를 보면 특히 이 시기부터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서 무덤을 만들었으므로 반파국의 국력이 강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본래 반파국의 중심지는 낙동강가에 가까운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와 반운리 일대에 있었으나, 이후 지금의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로 천도했으리라는 것이 현재 학설.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고령초교 운동장 구석에는 대가야의 왕이 물을 마셨다는 우물, 어정이 남아 있다. 1977년 발굴 결과 우물 밑바닥에서 대가야 양식의 목긴 항아리와 적갈색 안질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우물 남쪽으로 500여 미터 떨어진 고령 향교 옆에는 대가야국성지라는 비석이 남아 있는데 이곳이 왕궁 터라고 짐작한다. 1910년 일본인 학자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가 이곳 일대를 조사하여 기와 조각을 발굴했고, 2000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이 축대 근처를 발굴한 결과 부뚜막 2기와 대형 건물터, 그리고 500년 전후 시기의 사발, 그릇받침, 접시 뚜껑 등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하여 추측으로만 남을 뿐이다.
21세기 들어서 다시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하여 대가야궁성지로 알려진 지점 북쪽의 평탄한 땅에서 토성 유적을 발견하였다. 주소는 연조리 594-4번지로 이곳을 대가야 왕성의 일부로 추정했다. 여기서 U자형 해자와 해자 밖 경사면에 석축 3열, 돌 사이에 판축식으로 흙을 다진 토성이 확인되었다. 다만 맞더라도 극히 일부분일 것이고 오랜 세월 교란돼 왕성임을 직접 증명하기엔 미흡하다고 한다.
한편 이 시기쯤인 일본서기 기록상 262년 백제와 유착한 왜인 장수 사지비궤가 신라의 미인계에 넘어가 가라를 공격하는 바람에 왕실이 백제로 도망치고 백제 장수 목라근자가 대신 출진해 가라를 회복시켜 준 사건이 있었다. 일본서기에서 수식어 없이 '가라'라고 하면 보통 반파국을 가리키기에, 이 사건을 반파국에 관련된 일로 보기도 한다. 다만 금관국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어차피 교차검증도 되지 않는 이야기니 적당히 걸러 듣자.
3.2. 전성기 (5세기 말)
5세기 초쯤부터 급격하게 강한 세력이 등장한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특징으로는 5세기 전반부로 편년되는 고분이 매우 많다는 점인데, 단일한 왕가 중심의 정권이라면 이렇게 비슷한 시기 고분이 많을 이유가 없다. 즉 여러 집단이 서로 비슷한 위계를 가지고 같은 묘역을 공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5세기 중반 이후로는 이런 현상이 마무리되고, 다른 가야 지역과 완전히 구분되는 대가야 양식 가야토기가 등장하는 등 특색 있는 문화가 발전해 나가게 된다. 고령 왕성의 부속 산성인 '주산성'은 백제의 부소산성과 입지와 규모가 비슷할 정도로 5세기에는 대가야가 한때나마 백제에 맞먹게 강성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이 주산성을 중심으로 대가야 왕도를 방어하는 다수의 산성이 서로 연계된 성곽 방어망이 축조돼, 낙동강 동편 지금의 대구 지역까지 지배하던 신라는 이후 150년 동안 낙동강 건너 대가야를 공략하지 못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백제는 개로왕이 전장 한복판에서 사형당하고 수도 위례성까지 잃는 등 말 그대로 박살이 나고, 금관가야는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 차츰 주도력을 상실했으며 신라마저 고구려에게 내정간섭을 당하는 반속국으로 전락하자, 이러한 한반도 남부지방의 힘의 공백을 틈타 전성기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고령의 왕릉급 분묘가 모여 있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출토 철기 유물이 다른 가야 지역 고분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과 양 모두 다양하고 많아서 반파국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5세기 후반경에는 고령계 유물이 합천, 거창 등 인접 지역을 넘어서서 김해, 창원, 함안, 함양, 산청, 진주, 의령 등 가야권 대부분 지역에 퍼졌고,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정신 없었을 5세기 무렵에는 소백산맥을 넘어 호남 동부 일부 지역(섬진강 유역)에까지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편 이 시기 호남 동부에서 백제계 유물의 영향력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일반적으로 가야 = 경상남도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5세기 전반에 먼저 대가야의 중심지 고령군과 호남 사이인 서부경남 일대(진주시, 합천군, 거창군, 산청군 등)의 대가야화를 거쳐 5세기 경에는 지금의 여수시, 순천시, 광양시, 남원시, 곡성군, 구례군, 장수군, 진안군, 임실군 등에서도 고령계 가야토기가 백제계 유물이나 이전의 토착 양식을 누르고 다수 출토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토기뿐 아니라 고령 지산동 고분군 32~35호분에서 출토된 철기 축소 모형 같은 특징적인 부장품이 남원 월산리에서 나오기도 하고, 부장품이야 받아와서 묻었다고 쳐도 특히 두락리 1호분처럼 묘제까지 전형적인 대가야식으로 세장한 평면구조를 보이기도 한다. 현대 한국인이 양복을 입고 아파트에 살며 식단도 서구화가 진행됐지만 장례문화의 기본 틀은 옛날과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묘제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두락리 1호분 등에 묻힌 사람이 고령 대가야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입증한다.
호남 동부보다 밀도는 낮지만 광주광역시, 부안군, 해남군, 나주시까지 대가야계 유물이 소수 출토되기도 했다.
대가야는 이 섬진강 교역로를 지키기 위해 산성과 봉수대를 촘촘하게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전북 장수군, 완주군 등지에서 가야의 봉화대 유적이 집중적으로 발견됐다. 이 전북 동부 지역 봉수대 유적에서 가야 토기가 다수 출토되기도 했고, 고려 이후 수도가 중부 서해안 지방에 자리잡았는데 이 전북 동부 지역은 고려나 조선이 봉수대로 사용하지 않았던 경로였기 때문에 고려나 조선의 봉수대가 아닌 가야의 봉수대임을 알 수 있다. 역사스페셜: 제4의 제국 대가야, 백두대간을 넘다
그러나 그렇다고 백제가 이 호남 동부를 그냥 내버려둔 건 아니었다. 반파국보다 분명 반수 아래급이었을 망정 호남 서남부 영산강 유역 세력은 분명 어느 정도는 융성을 자랑했기 때문. 이런 영산강 유역 세력이 호남 동부로 전혀 뻗어나가지 못한 건 백제의 강력한 견제와 감시 탓이었다. 반파국 같은 비마한 계열이야 교역 정도로 만족한다면 후기 마한 영도국인 백제 입장에선 아무래도 상관 없는 얘기였으나, 백제국의 마한 영도국 지위 자체를 한때 정면 부정한 바 있는 영산강 유역 마한 신미국 세력이 같은 마한 소속인 호남 동부까지 장악한다면 백제국은 마한 통합 이데올로기 자체에 크게 생채기를 입는 판이었다.
다만 침미다례가 근초고왕 남벌 기사에서 비하용어인 '남만'으로 표현된 건 이들의 문화가 딱히 이질적이어서가 아니라, 이들이 백제국에게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호남 동부는 이미 4세기부터 소가야와 거래를 텄고 5세기에는 아라가야, 6세기에는 대가야와 거래를 터서 이들 대가야 연합과의 교역을 통해 차차 성장하고 있었다. 호남 동부의 고고학적 발전 속도는 백제와 가야는 고사하고 아예 호남 서남부와도 비교가 안 되는 수준으로 미발전 지역이었으니, 평소부터 오랜 거래 관계로 이 지역을 잘 아는 대가야가 백제가 어려운 틈을 타 침투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백제 변방 영역을 침범한 셈이지만 웅진천도 초기 백제가 워낙 내외로 혼란스러운 상태라 일단은 묵인했는지 백제와 대가야의 우호관계는 한동안은 계속 이어졌다.
다만 대가야가 호남 동부를 직할령으로 다스린 것은 아니고, 이 지역의 문화적 독자성을 강조하는 지역 학계에서는 대가야와 다른 독자적인(즉 영향을 받는 정도) '장수가야', '운봉가야' 등 명칭으로 호남 동부의 가야 문화를 정의하려 하기도 한다.
서해에 면한 지역인 부안군에도 조선시대 고지도에 가야포(加耶浦)라는 지명이 전하는 것과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에서 대가야 계통 유물이 출토된 것을 근거로 일시적으로라도 가야 세력이 서해안까지 진출했다고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 주보돈 교수는 이 루트를 4세기 후반부터 이어져온 백제와 대가야의 우호 관계하에서, 섬진강을 자유롭게 이용하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사용한 통로로 추정했다. 그러나 외부와의 교역 통로를 동맹이라지만 어쨌든 외국인 백제에 크게 의존하는 점은 대가야에게 꽤 부담으로 다가와서 섬진강이란 대체 루트를 장악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위와 같이 백제의 영향력이 강하던 섬진강 유역을 얻은 것을 통해 남방 해상을 통한 중국, 일본 등 외부 교역도 놓치지 않아 동쪽에서 금관국의 쇠퇴와 신라의 강성으로 잃어버린 낙동강 수로를 대체할 수도 있어서 479년에는 하지왕(荷知)이 황해를 건너 중국 남제에 단독으로 조공사신을 보내 백제나 신라와는 차별화되는 독립적인 지배권력의 존재를 알리고 '보국장군 본국왕' 작호를 하사받았다. 사실 당시 중국 남조는 유송(劉宋)이었는데, 마침 대가야가 사신을 보낸 그 해 송의 권신 소도성이 황제를 칭하고 제나라를 건국했다. 따라서 하지왕이 의도적으로 사신을 파견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마치 제나라의 건국을 축하하는 듯한 형태가 되었다. 이는 가야가 중국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낸 유일한 사례.
양직공도에서 다른 가야 국가들이 백제에 딸려서 겨우 조공하고 있었고 같은 시기 신라조차도 중국과 직접교역을 전혀 못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독보적인 것이다(다만 6세기 백제의 남방 진출에 압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왜국이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 대장군'으로 책봉받은 데서도 자극을 받은 듯하다. 또한 삼국사기에서 212년 이후 한동안 사라졌던 '가야' 기록이 481년 이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반파국이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결과물로 풀이된다.
게다가 중국뿐 아니라 일본 방면으로도 교역에 나서서, 5세기부턴 대가야산 금동관이 일본 후쿠이현 니혼마츠야마(二本松山) 고분에서 출토되고 기타 대가야 위신재는 일본열도 여기저기서 나오는 등, 원래 김해가 일본과 가깝다는 위치상 당연하게 금관가야가 맡아왔던 왜국 방향 교섭마저 대가야가 주도권을 빼앗은 정황도 나타난다.
신라 눌지 마립간이 454년경 신라 땅의 고구려 군인들을 몰살시키면서 본격적으로 고구려와 적대관계로 돌아섰고 나제동맹으로 외교 관계가 재편된 뒤에도, 백제와 신라는 전성기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나제동맹으로 막아내는 데에 급급했으므로 이 시기 가야와는 그리 큰 노골적인 마찰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주변과 별 충돌이 없었기 때문인지 이 시기 가야 동향에 대한 기록은 적다. 그러나 고고학 조사에 따르면 5세기 후반 고령에 큰 고분들이 집중적으로 조성되었고 한국사에서 손꼽히게 많은 사람을 순장했을 정도이니, 이 무렵이 대가야 국력의 최전성기임을 알 수 있다.
481년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해 수도 경주 인근 미질부(지금의 포항시)까지 진군하자 백제와 함께 원군을 보내서 신라군을 도와 막았다. 원래 대가야와 신라는 그리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이 때는 고구려가 신라를 때려주는 정도가 아니라 서라벌 털고 멸망시킬 기세로 내려오는데 신라가 아예 없어져 버리고 고구려와 국경이 닿으면 가야에게도 부담이니까. 아무튼 이제 국제 관계에서도 삼국에 이은 제4의 세력, 정치적 변수로 등장한 것이다. 496년에는 희귀한 흰 꿩을 신라에 보내 호의를 표시하고 적당히 친신라 정책으로 정세를 유지했다.
경남 합천군 저포리 고분군에서는 대가야 양식의 토기에서 하부(下部)란 글자가 발견되었고 대왕(大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목긴 항아리도 발견되었다. 이것을 보면 반파국은 왕을 대왕이라 불렀으며 대가야 내부의 통치를 위한 위세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진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도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반까지 대형의 왕릉들이 열상(列像)으로 나란히 배치되기 시작한다. 왕 또는 최고 지배자들의 묘역이 분리된 것으로 왕권의 강화 나아가 성읍국가를 넘어 초보적인 고대국가 단계에 돌입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 외에도 고령, 합천 일부 지역이 포함된 왕도를 신라의 6부처럼 여러 부로 나누어 편제하고 중앙과 지방의 구분이 생겨난 점, 대가야식 금공위세품의 분배, 대가야 산성의 분포를 통해 추정되는 대규모 노동력 동원 체계 등으로써 고대국가 또는 그에 준하는 수준까지 올랐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홍익대 김태식 교수나 계명대 김세기 교수 등이 대가야 고대국가 진입설을 주장한다.
3.3. 신라와의 동맹 (522년)
대가야의 장밋빛 미래에도 한계는 있었다. 대가야가 이렇게 막강한 영역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로 5세기에 대가야가 차지한 경남 서북부와 전라도 동부가 한반도에서 비교적 정치 체제의 발달이 느린 곳이었고, 둘째로는 강적 백제와 신라의 직접적 영향권 바깥이었는데다 마침 5세기에 이들이 고구려 때문에 약해져 신경쓸 수도 없는 무주공산의 타이밍을 잘 노린 것이었다.
허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이 나제동맹의 굳건함에 막히고 백제와 신라가 6세기 초부터 제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자 상황이 다시 급변하기 시작한다.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한 뒤 혼란기를 겪다가 무령왕 재위 무렵부터는 고구려에게 당했던 후유증을 극복하고 장수왕 때까지는 전혀 못하던 반격까지 시작하며, 잃어버린 한강 유역 대신 본격적으로 지금의 전라도 지역 경영을 시작했다. 삼국사기 동성왕 20년(498년)조에 백제가 탐라국을 공격하고자 무진주(광주광역시)까지 내려갔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이 시기 전라도 서남부 일대에 백제가 다시 영향력을 회복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백제는 대가야가 차지한 전라도 동부 지역까지 노렸다. 전라도 동부 지역의 쟁탈전에 관한 국내 기록은 없지만 백제 기록을 인용한 일본서기+대가야의 영향을 받던 전라 동부 재지 세력의 쇠퇴와 소멸이라는 고고학적 성과를 통해 그 정황과 과정을 대략 파악해볼 수는 있다.
일본서기 기록상 512년(게이타이 덴노 6년) '백제가 일본한테 임나국의 상다리(上哆唎)·하다리(下多唎)·사타(娑陀)·모루(牟婁)의 4현을 달라고 요청했다'고 나와 있는데, 일본서기 특유의 무조건 일본을 상국으로 갖다붙이는 기질을 빼고 보면 무령왕이 이끄는 백제가 대가야 영토인 4곳을 얻었다고 이해된다. 이 4현은 지금의 여수, 순천, 광양 지역으로 추정하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바로 다음 513년 6월조 기사에는 백제와 반파국이 기문(己汶)이라는 곳을 놓고 영역을 다투는 모습이 보이는데, 기문이 지금의 어디인 진 여러 설이 있지만 전라북도 동부 지역으로 비정된다. 역시 일본서기 특유의 백제가 신하국이라는 식의 윤색 빼고 사건 자체만 놓고 보면 대가야가 (원래 백제 것인) 기문을 '약탈'해서 보유했음을 백제가 대외적으로 알려서 백제의 기문지방에 대한 침공 명분을 만들고, 동시에 왜국에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를 보내 선진문물을 전하는 등 국제여론을 유리하게 조성했다.
이렇게 호남 동부지역을 획득하게 된 백제는 급기야 반파국의 '전통적인 대외교역 창구'였던 지금의 하동군인 대사진을 노리기 시작한다. 섬진강 하구로 이어지는 이곳 항구까지 잃으면 남해로의 진출이 아예 막히는 셈이므로 필사적으로 막아내야 했고 일본서기 계체8년(514) 3월에 자탄(진주시)과 대사, 이열비(爾列比)와 마수비(麻須比)에 성을 쌓아 마차해(麻且奚)와 추봉(推封) 지역까지 걸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봉수대와 저택들을 설치해 백제 및 왜국의 침략에 대비했다.
이 시기 반파국의 남해바다 제해권 다툼을 말하는 기록이 있는데, 일본서기 계체9년(515) 2월 및 4월조의 기사에서 왜국에 갔다가 돌아오던 백제 사신 문귀(文貴)장군을 왜인 모노노베노무라지(物部連)가 호송했는데, 사도도(沙都嶋)라는 섬(거제도로 추정되기도 한다)을 지날 때 '반파인이 사납게 군다'는 말을 듣고, 문귀 장군을 일단 신라 땅에 상륙시킨 후 모노노베노무라지는 수군 500명을 이끌고 곧장 대사강(帶沙江)으로 진격했는데, 반파국이 군대를 보내 공격하자 무서워서 달아나 문모라(汶慕羅)에 정박했다는 것이다.
결국 513년에 일본은 반파국이 가지고 있었던, 위에서 말한 기문과 대사(帶沙, 혹은 滯沙) 지방을 백제가 달라고 해서 결국 줬다고 일본서기에 기록했는데 이 역시 일본이 맘대로 가야 땅을 백제에 떼준다는 식의 중간과정의 윤색을 빼면 백제가 반파국 땅 호남 동부(기문)와 하동(대사)을 빼앗으려 했고 일본 측은 이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529년 기사에서도 결국 대사지역을 백제가 차지한 것으로 나온다. 기록문헌이 전하는 것처럼 고고학적으로도 6세기 전반 여수 고락산성, 순천 죽내리 고분군과 성암산성, 광양 칠성리, 남원 초촌리 고분군은 양상이 가야계에서 백제계로 바뀌어가는 모습이 나타나, 백제의 지방 지배력이 이곳으로 본격적으로 침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중국과 교류할 수 없으니 바다 건너 중국에도 백제가 일방적으로 언론플레이하는 소식만 들어가서, 521년 '양직공도'에서는 반파를 포함한 가야 각국+기문 등 가야에서 빼앗았던 섬진강 소국+신라(사라)까지 전부 백제에 부속된 속국이라고 쓰고 있다.
이렇게 반파국은 여기저기서 백제에 밀리기 시작했으나, 가야 입장에선 다행이게도 그나마 아직 고구려가 장수왕 때만큼 효과적이지는 않더라도 백제 북쪽 변경을 줄기차게 침공해주던 시절이라 백제는 이 이상 동쪽으로 침입하려 하진 않았다. 사실 웅진백제는 한강유역 고토수복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으므로 반대편인 이 쪽 전선에 지나치게 집중할 이유는 적었다.
한편 반대편의 신라도 나제동맹으로 고구려를 막아냈고 고구려에 반격에도 나서서, 한때 포항까지 밀렸다가도 결국 서서히 수습하고 슬금슬금 북진해서 영덕군과 울진군을 지나 삼척시 지역까지 탈환에 성공하는 등 신라와 백제 양국은 국가의 체급에서 도시국가들의 느슨한 모임 수준에 머무르는 가야를 철저히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데는 장수왕 때부터 그동안 백제와 신라를 열심히 위에서 때려서 정신 못 차리게 해주던 전성기 고구려가 쇠퇴한 것도 그 원인 중 하나. 고구려는 장수왕 시절부터 수십년간 안 뚫리는 백제, 신라 공격에 너무 오랫동안 국력을 낭비해왔고 안에서도 내분이 일어난데다 신흥세력 돌궐의 침입까지 겹쳤다.
신라는 백제와 달리 반파국의 영역을 직접적으로 침범하진 않았지만, 반파국의 본거지 고령에서 멀지 않은 지금의 성주군, 경산시, 대구광역시 지역에 5세기경부터 신라 토기가 늘어나는 등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 대가야는 신라의 침입에도 나름대로 대비했다는 것을 낙동강 서안에 가야의 성을 집중적으로 쌓은 것으로 간접적으로 알 수 있지만 어쨌든 반파국 땅을 더 뺏어가고 더 위협적인 건 백제였기 때문에 그 대신 신라와 친밀하게 지내보기 위해 6세기 초 결혼 동맹을 시도한다. 신라의 법흥왕 역시 가야에 영향력을 늘릴 수 있는, 좋으면 좋았지 나쁘진 않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몇 년간은 신라와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고 두 나라의 왕족 사이에서 월광태자가 태어나기도 했다. 524년에는 법흥왕이 남쪽 변경의 땅을 살펴보는데 가야왕이 직접 나가 만나 정상회담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러나 일이 꼬여서 결혼 동맹은 결렬되고 오히려 반파국은 후기 가야의 맹주 역할조차 타격을 받고 가야 남부권의 주도권을 잠깐 함안 안라국이 쥐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5세기 때보다 다소 쇠퇴하게 된다.
九年 春三月 加耶國王遣使請婚 王以伊湌比助夫之妹送之
9년 봄 3월에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그에게 보냈다.
《삼국사기》 본기 법흥왕 9년(522년)
가라왕(加羅王)이 신라 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드디어 아이를 가졌다. 신라가 처음 여자를 보낼 때 100인을 아울러 보내 그녀의 시종으로 삼았으므로, 받아들여 여러 현에 나누어 배치했는데, 신라의 의관을 입도록 하였다. 아리사등은 그들이 복장을 바꾸어 입었다고 성내며 사자를 보내 돌아가게 하라고 시켰다. 신라는 크게 부끄러워 그녀를 도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다.
"전에 그대가 장가드는 것을 받아들여 나는 즉시 혼인을 허락했으나, 지금 이미 이처럼 되었으니 왕녀를 돌려주길 바라오"
가라(加羅) 기부리지가(己富利知伽)가 대답하였다.
"부부로 짝지워졌는데 어찌 다시 헤어질 수 있겠소? 또한 아이가 있으니 그를 버리면 어디로 가겠소?"
결국 (신라는) 지나가는 길에 도가(刀伽), 고파(古跛), 포나모라(布那牟羅)의 세 성을 함락시키고 또한 북쪽 변경의 다섯 성을 함락시켰다.
《일본서기》계체기 23년(529년) 3월조.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고 가야 각지에 신라인을 분산 배치해서 반파국이 가야의 대표고 모두 반파국의 노선에 따르라는 것을 명확히 하려 했지만 신라 법흥왕은 그 신라인들이 신라식 옷을 입도록 해 오히려 신라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했다. 보란듯이 신라옷을 입은 신라인들이 배치되는 이런 상황에서, 반파국의 과한 친신라노선에 반발한 가야계 소국 탁순국이 먼저 반기를 들었고, 반파국 측이 결례에 분노하자 신라가 파혼하려 했다. 반파국은 파혼만큼은 안 된다며 빌었지만 결국 신라는 동맹을 거두고 신라에 거리가 가까운 금관국과 탁기탄 등 일부 가야 지역이 신라에 흡수되어 버리고 반파국의 리더십에 큰 흠이 생겼다.
가까운 합천은 반파국이 제대로 종속시킨 것으로 보이나 남강 유역권은 산청 아래로는 끝끝내 확장하지 못했다. 안라국(아라가야)이 함안을 벗어나지 못했고, 고자국(소가야) 지역은 고성 일대에서 여전히 큰 세력 없는 분산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음에도 가야 통합을 이루어내지 못한 것은 반파국 자체의 한계 때문이거나 주변국인 백제나 신라의 간섭 때문으로 생각된다. 대가야 왕실은 522년에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는 등 백제의 동진에 대비하려 하였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나제동맹이 유지되던 터라 뚜렷한 효력도 없었고 이 결혼 동맹조차도 결렬돼 버린다. 531년경 안라국이 백제의 속국화, 532년 금관국이 신라에 항복, 탁순국도 어느 시점에 멸망하는 등 가야 소국들이 잇따라 백제와 신라에 굴복하거나 멸망하면서 반파국의 영향력은 낙동강 상류 내륙의 '반파국과 아이들' 정도로 세력이 축소된다.
3.4. 백제와 동맹하다 (541년)
530년대부터 신라가 무섭게 성장, 금관가야를 멸망시키자 위기를 직감한 대가야는 다시 백제와의 동맹을 모색하게 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 동맹 관계는 541년과 544년의, 두 차례에 걸친 사비회의에서 결성되었다. 다만 이시기 백제 쪽 외교는 안라국이 주도하고 반파국은 거기에 비교적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안라가 사비회의에 대표자를 2~3명 보내는 데 반해 반파는 상수위(上首位) 고전해 1명만 보낸다. 이 상수위(上首位)라는 직위도 얼마나 높은지 알기는 힘들지만, 추정하자면 안라가 백제에 파견한 2~3명은 하한기(下旱岐) 지위인데, 여기에서 한기는 왕을 뜻하는 말이라 즉 부왕(副王)급, 왕통 2인자격으로 여겨지며, 다른 가야 소국들은 한기가 직접 백제에 가거나 한기의 아들급을 보냈기 때문에, 상수위가 대략 재상급이라 해도 아무래도 다른 나라의 왕과 왕자보다는 상수위가 급이 낮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지위가 낮은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서 우리나라는 여기에 참가는 하지만 적극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내비치려 한 것. 그리고 그 이름도 가라(반파국)보다 안라가 앞에 기록되어 있다.
이미 김해 금관국과 창원 탁순국이 신라에 떨어진 이상 창원 서쪽의 다음 타깃으로 유력한 함안 안라국이 더 급하기도 했고, 520년대 친신라정책 실패와 일부 신라 합병이라는 어마어마한 외교적 실책을 저지른 반파국을 대신해 2인자쯤 되는 안라국을 일단은 외교 리더로 삼고 여러 가야 국가들이 밀어줬던 듯하다. 그리고 한때 섬진강을 두고 반파국과 백제가 치열하게 대립했던 것도 이제와서 친백제외교를 반파국이 뻔뻔하게 주도하기 껄그러운 점도 있었다. 그러나 백제도 당연히 호구가 아니니 신라한테서 보호 핑계로 백제군 주둔과 백제 성을 쌓고 가야를 속국으로 만들고 나아가 행정구역으로 흡수하려고 했다. 결국 안라국이 백제의 마수를 멈추기 위해 고구려에 백제 공격(독성산성 전투)을 사주했다가 고구려는 깨지고 사주했다는 사실까지 백제한테 들키는 사건 이후 얄짤 없이 백제의 반 속국 신세로 몇 년간 조용히 지내게 된다.
말기 반파국이 잠시 백제의 영향력에 놓였던 건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되는데, 고령 고아리 벽화 고분은 6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며 석실 구조는 전형적인 공주 송산리식이고, 도굴을 당했긴 하지만 남아 있던 토기에도 백제 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는 조족문(鳥足文) 토기가 있어 백제의 간섭을 받던 시기의 고분임을 알 수 있다.
551년, 나제 연합군의 한강 유역 공격을 할 때 가야군이 동원되었다. 가야의 국익에는 크게 도움이 안되는 전쟁이었지만, 백제의 영향력 아래 놓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백제의 요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원군을 보낸 듯하다. 이후 신라의 진흥왕과 백제 성왕의 의견 대립으로 나제동맹이 해체되자 반파국과 가야제국들은 백제 성왕을 지지하게 된다. 사실 사비회의에 따라 가야 땅에 백제군과 백제의 동맹 왜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선택권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휘말린 553년 관산성 전투에서 대패하여 많은 병사들을 상실해버렸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의 기록에서는 목을 벤 병사가 2만 9600여 명이라고 하는데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군이 1만여 명, 왜군이 1천여 명이었다. 나머지는 가야군으로 볼 수 있는데 해당 수치가 정확하지 않더라도 많은 가야군이 전사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3.5. 멸망 (562년)
가야는 그나마 내정간섭을 대가로라도 지켜주던 백제가 성왕이 전사하는 대참패로 밀려나면서 동시에 왜군도 세트로 깨졌고 고구려도 한강 유역 이북 저 멀리로 쫓겨나고, 홀로 거대해진 전성기 신라 앞마당의 한 끼 도시락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제 도와줄 수 있는 세력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고, 우륵과 같이 미래가 없는 나라를 미리 떠나는 사람들도 나왔다.
신라는 관산성 전투가 끝난 이듬해 555년 가야권 한가운데인 비사벌(창녕)에 하주(下州)의 주치(州治)를 설치하고, 556년에는 거창 등 가야 서부로 가는 길목이자 백제 지원군까지 대비해 추풍령을 틀어막을 수 있는 감문(김천)에 하주의 주치를 옮기는 등 신라군 병력이 주둔하는 거점들을 만들었다. 이후 기록이 구체적으로 남지는 않았지만 562년 이전까지 7~8년 동안 안라국을 포함한 10개 가야소국들을 하나하나 신라의 직할영토로 합병했다. 561년에 세워진 창녕 척경비에는 멀게는 한성까지 신라 전국의 사방군주(四方軍主)가 본인의 관할지역을 뒤로 하고 창녕에 집결한 것이 나오는데, 이를 대가야 총공격 준비와 관련시키기도 한다.
결국 관산성 전투로부터 9년 후인 562년, 사실상 고립된 대가야는 진흥왕의 명령에 의해 이사부와 사다함이 이끄는 신라군의 기습적 공격에 결국 항복하여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백제는 아직 패전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음에도 마지막 대가야까지 신라에 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562년 7월 신라의 변경을 왜군과 함께 공격했지만 이 역시 신라가 승리하고 백제+왜군 1천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이 가야멸망전의 정황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에서는 화랑 사다함이 기병 5천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적진에 백기를 꽂은 활약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한편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조에서는 신라군이 휴전의 뜻으로 백기를 걸었는데 반파국을 돕기 위해 온 왜군 장수가 백기의 의미를 몰랐다가 당하는 상황이 기록되었다. 한일 양국 사서에서 가까운 시점에 동일한 백기 일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상황이 다른 입장에서 기록된 모양이다.
이 패배가 왜에게 꽤 치명적이었는지, 일본서기 권 제19 긴메이 덴노 해당 기사에는 왜국의 대장군 키노오미 오마로노스쿠네(紀臣 男麻呂宿禰)는 백제군 진영으로 도망치고, 다른 왜 장수들은 신라군에 붙잡혀 부장군 카와베노오미 니에(河邊臣 瓊缶)는 아내 우마시히메(甘美媛)를 비롯한 여자들을 신라 장군에게 바치는 등 온갖 굴욕을 당하고, 장수 츠키노키시 이키나(調吉士 伊企儺)는 왜국의 장군을 모욕하는 행동을 하라는 신라 장군의 명령을 거부하고 어린 아들인 오지코(舅子)와 함께 당당하게 죽는 그런 에피소드가 꽤 자세하게 실려 있다.
마지막 왕 도설지왕은 대가야 멸망 이전 신라의 장군으로 활동했던 행적이 기록된 금석문이 발견되고 있어서 신라가 반파국을 완전히 지배하기 전 잠시 허수아비격으로 세운 임금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3.6. 멸망 이후
일본서기에서는 가야 10국 멸망기사 이후에 긴메이 덴노가 말하는 형식으로 '신라가 가야의 귀족과 백성들을 모두 잔혹하게 살육했다'는 식으로 강한 논조로 표현했다. 그러나 고령 지산동 고분군 남단에는 횡혈식 석실분과 신라 후기 양식 토기가 대규모로 발굴되어, 대가야 왕족의 후예들이 562년 완전히 몰락한 것이 아니고, 신라 통치를 받으면서 규모가 대폭 축소되긴 했지만 멸망 후에도 한동안 자기들 양식의 무덤을 축조할 정도로 나름대로 세력은 유지했던 모양이다. 마지막까지 저항한 반파국을 어느 정도 탄압하고 격하했을 가능성이야 높지만, 기존 사회를 완전히 해체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봄이 적절하다.
대가야인의 일부는 지금의 강원도 동해시 지역으로 사민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대가야의 원래 영역과 수백 km 떨어져 있어 전혀 관련 없을 듯한 동해시 추암동 고분군에서, 마침 대가야가 멸망하는 6세기 대가야 양식 토기가 신라 후기 양식 토기와 함께 다수 출토된 것이다. 이 무덤들은 조사 지역 동쪽 모퉁이에 집중돼 있어 마치 신라계 구역 속에 작게 대가야계 구역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더 나중에 조성된 고분에서는 대가야식 토기가 나오지 않아 곧 동해 지역의 신라인 사회에 동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중원경(지금의 충주시)에 살면서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이라고 본인의 출신을 밝힌 신라 중대의 학자 강수의 출신지도 금관가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대가야의 귀족 세력들이 562년 대가야 멸망 후 충주로 옮겨졌기 때문에 강수 집안을 대가야 출신으로 보는 설도 있다.
반파국이 멸망하던 때의 절절함은 반파국인이었던 우륵이 가실왕의 명을 받아 12곡을 지었다가 신라인들이 5곡으로 줄이자(즉 대가야에서 우호 국가로 생각하던 가야 7국이 멸망했다는 것이다) 화를 냈다가 어쩔 도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곡이 좋다'고 칭찬한 일화에서 알 수 있다.
신라는 대가야 멸망 후 구 가야 지역의 통치 거점으로 고령 대신 본래 대가야의 변방 지역이던 대야성, 즉 현 합천군 지역을 선택했다. 물론 이는 대야성 문서에도 서술돼 있듯 합천이 백제의 공격을 수비하기 좋은 요새 같은 지형이라는 점이 컸지만, 아무튼 대야주 산하의 일개 고을이 된 고령은 한때 가야 권역의 1인자였던 시절보다 지역 위상은 떨어졌을 것이다. 실제로도 합천 대야성과 달리 고령은 이후로는 대가야 시절만큼 역사에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한편 신라에 협조적인 대가야 왕족 후손은 재지 세력으로 활용하였다.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은 대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802년(애장왕 3)에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받아 옛 대가야 영토인 가야산 자락에 해인사를 창건했다.
신찬성씨록에는 일본에서 이어지고 있는 가야계 성씨가 7개 확인되는데, 그 중 하라 하실왕(賀羅賀室王)의 후예 씨족으로 미치타노무라지(道田連)가 있다는 내용이 있다. 그가 가실왕의 후예가 맞는다면 훗날 일부 고구려, 백제 왕족이 그랬듯 대가야 왕족의 일부도 멸망 후 왜국으로 건너갔을 터이다.
한편 신라는 내친 김에 호남 동부로 밀고 들어가서 임실, 장수, 남원 일대를 백제에게서 빼앗는데, 이 일대는 다름 아닌 대가야가 장악했던 전남북 서부 영역 최대 판도에서 순천, 광양, 여수를 뺀 그대로였다. 대가야는 망했지만 대가야가 무령왕 시절 백제에게 잠깐 반격에 성공해서 차지했던 영역들이 신라 진흥왕의 치세 아래에서 다시 하나가 된 모양새였고, 백제는 이 일대를 되찾으려면 무왕이 즉위할 때까지 무려 30여 년을 기다려야 했다. 무왕 또한 7세기 초반에 경남 동쪽으로 계속 밀고 들어가서 옛 대가야 판도 대부분을 백제 영역으로 만들었음이 특이한 점.
4. 문화 및 기타 사항
종교는 불교가 퍼져 일부가 믿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령 고아리 벽화고분에서 불교의 상징인 연꽃 무늬를 천장에 그려 넣은 것이 지금도 남아 있고, 가야 멸망 후 300여년 뒤 사람인 최치원이 지은 석순응전에서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 월광태자가 등장하고 그는 대가야 멸망 후 불교에 귀의해 살았다고 전한다. 다만 후술된 순장 문화를 고려하면 생명존중 사상을 설파한 불교가 지배적인 종교였을 지는 의문스럽기도 하다.
큰 규모의 순장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실제 대가야는 한국사에서 가장 순장을 활발하게 한 나라였다. 이는 대가야가 6세기 신라에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고령 지산동 고분군 발굴 조사로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이것은 영혼이 사라지지 않듯 삶과 죽음의 세계가 이어진다는 계세사상(係世思想)이 당시 가야인들의 생각이었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주변국이었던 백제는 딱히 순장 흔적이 없고, 신라도 지증왕이 순장을 법적으로 폐지했을 정도이니, 당시 세계관 기준으로도 악습이 맞았다.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도 악습이지만, 인구가 곧 국력인 시대에 별로 크지도 않은 나라가 높으신 분들 한 명 죽을 때마다 인재 수십 명을 죽여서 무덤에 파묻으니 인적 손실이라는 측면에서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흔히 알려진 수로왕이 주인공이 되는 '가야의 시조 신화'는 금관국 중심이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반파국이 중심이 되는 시조 설화가 존재한다. 가야산의 여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하늘의 신 이비가지(夷毗訶之)와 감응하여 두 아들을 얻었다. 맏아들은 뇌질주일이고 둘째 아들은 뇌질청예라 하였다. 뇌질주일은 대가야국을 건설하여 시조 이진아시왕이 되었고, 뇌질청예는 김해에서 가락국을 건국하여 수로왕이 되었다는 신화이다.
이 두 가지 신화를 해석하자면 반파국과 금관국은 일단 형제국 의식은 있었는데, 반파국은 자기가 형이라고 생각했고 금관국은 자기가 형이라고 생각했다 정도. 시대의 변화를 생각하면 반파국에서 힘의 변화에 따라 원래 있던 신화를 뒤집어버렸을 가능성도 커 보인다.
정견모주 신화는 한국의 여러 시조 탄생 신화 중 산신이 중심이 된다는 점이 좀 특이한데,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릉급 무덤들이 평지나 산능선 자락 정도에 있는 것과 달리 아예 산꼭대기 능선에 만들어졌던 것도 특이한 점이다. 이런 점들에서 가야권에 다른 나라에는 없었던 특유의 산악 신앙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왕궁 터 추정 지역에 7대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가 쓴 '임나 대가야국 성지'라는 비석이 있었는데, 1986년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졌다. 비석을 보면 '임나', '남차랑(南次郎)' 등의 글자는 인위적으로 지운 흔적이 있는데,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오기 전 임나일본부설로 이용할 것을 우려한 사람들이 고의로 지웠다고 한다.
금관국이 위치한 김해시에 비해 열약한 고령군의 재정 상황으로 대가야 유적들이 제대로 발굴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2019년 구지가를 연상시키는 토제 방울이 고령군에서 발굴되었다. 가야 건국 신화를 당시 가야인들도 알았다고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기에 학계의 관심을 받았다. 무덤은 4~5세 여자 아이의 무덤이었고, 토제 방울은 여아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으로 추정된다. 5세기경 유적이다.
또한 고령군에서 대가야(반파국) 왕궁지로 추정되는 시설 일부가 발견되었다.
5. 반파국 연표
연도 기록 출처
42년 대가야 시조 이진아시(뇌질주일)왕이 즉위해 대가야를 건국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522년 3월 대가야의 이뇌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니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신라에서 이찬 비조부의 딸을 보냄. 그들 사이에서 월광 태자가 탄생하였다.
529년 3월 탁순국왕 아리사등이 신라인 시종들을 내쫓은 문제로 신라의 공격을 받음 일본서기
541년 4월 상수위(上首位) 고전해가 반파국 대표로 1차 사비회의에 참여 일본서기
544년 11월 상수위 고전해가 반파국 대표로 2차 사비회의에 참여 일본서기
551년 3월 신라 진흥왕이 낭성에 행차했을 때 삼국사기
국원에 있던 대가야 출신 악사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을 불러 음악을 연주케 했다.
552년 3월 신라 진흥왕이 계고, 법지, 만덕 등 세 명에게 우륵으로부터 음악을 배우도록 지시했다. 삼국사기
554년 가야, 백제와 함께 신라 관산성을 공격하다 실패했다. 삼국사기
562년 가야가 신라에 반하다가 신라 장군 이사부가 거느린 군대의 공격으로 멸망. 삼국사기
그곳에 대가야군이 설치되었다.
보다시피 오늘날 반파국 관련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6. 주요 유적
-연조리 추정 궁성 터
-고령 지산동 고분군
-주산성
-합천 매안리비: 지금까지 발견된 유일한 가야 시대 비석. 다만 비문의 마모가 심하고 해석이 갈려 신라 비석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15:40~16:10 대가야박물관과 국내 최대 순장묘인 44호 고분(1977년 발굴) 내부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은 왕릉전시관을 관람
[고령 대가야박물관
눈부신 '신비의왕국'
가야(加耶 ·伽耶)로 간다. 기원 전후부터 서기 562년까지 주로 낙동강 하류 일대에서 번성했던 소규모 국가들을 총칭해 부르는 이름이 가야다. 구체적인 기록이 전하지 않아 ‘신비의 왕국’으로 불리는 연맹체 국가다. 각 기록엔 가라(加羅) ·가락(駕洛) ·구야(狗邪) ·임나(任那) 등으로도 전해온다. 마한·진한·변한 삼한시대에 변한의 12국에서 발전한 6가야 또는 7가야를 말한다. 고령 지역의 대가야, 김해의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함창의 고령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성의 소가야, 창녕의 비화가야가 그 나라들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등에 일부 기록이 전해온다.
두 가지 건국신화…후기 가야시대의 중심국이 대가야
두 가지의 가야 건국신화가 전한다. 하나는 ‘가야산에 살던 산신 정견모주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 이비가 사이에 두 아이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이 됐고, 둘째아들은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또하나는 ‘하늘에서 6개의 커다란 알이 내려왔는데, 가장 먼저 깨어난 동자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 5개의 알에서 나온 동자들은 5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앞엣 것은 신라 말 최치원의 <석이정전>에 나온 이야기를 인용해 실은 조선 초의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이고, 뒤엣 것은 고려 중기에 나온 <가락국기> 내용을 고려 후기에 일연이 인용해 실은 <삼국유사>의 금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다.
김해 지역에서 번성했던 금관가야는 서기 400년 무렵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은 뒤 쇠퇴하기 시작해 서기 532년 신라(법흥왕 19년)에 항복한다. 5~6세기, 후반기 가야의 중심국으로 위세를 떨치던 대가야는 백제·왜 연합군과 신라를 공격하다 패한 뒤, 결국 562년(진흥왕) 신라 이사부가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아 항복했다. 대가야 16대 도설지왕 때였다. 후기 가야시대 중심국가였던 대가야의 눈부신 유물들을 만나러 고령 대가야박물관으로 들어간다.
먼저 대가야 고분 이야기부터 해보자. 고령 지산동 주산 능선을 따라 200여 기의 고분이 흩어져 있다. 웅장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이기까지 한 옛 공동묘지다. 대가야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추정된다’고 하는 까닭은 고분이 거의 도굴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강점기 수많은 고분들이 파헤쳐졌고, 패망한 뒤 이곳에 살던 일본인들이 떠날 때 가야 유물들을 대량으로 제나라로 가져갔다고 한다. 대가야박물관 한 관계자는 “일본 패망 뒤 일인들이 일본으로 철수하기 직전, 고령초등학교 운동장의 지엠시 트럭 3대에 엄청난 유물이 실려 있던 걸 목격한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해마다 주제 바꿔 1년 간 새로운 유물들 전시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발굴작업이 이뤄진 고분은 10개뿐이다. 주인공 무덤은 파헤쳐진 반면, 주변에 함께 묻힌(순장) 이들의 석실들은 다행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유일하게 도굴범들의 손을 피해 살아남은 고분이 73호 고분이다. 발굴된 대개의 고분이 돌판으로 뚜껑을 만들어 덮은 돌덧널무덤인데, 73호 고분은 나무덧널 무덤이었다. 가야 고분은 초기엔 나무를 사용한 목곽분이었다가 후기엔 석실분으로 발전해갔다. 대가야박물관 이용호 해설사는 “능선 아래쪽에 있는 73호 고분은 대가야의 가장 이른 시기의 고분”이라며 “도굴범들이 파들어가다 돌판이 나오지 않고 무너져내리자, 이미 도굴된 줄 알고 포기한 듯하다”고 말했다. 지산동 고분군은 처음 능선 아래쪽에서 고분이 만들어지기 시작해 점차 능선을 따라 위쪽으로 새로 만들어진 고분이 들어서 있다.
대가야박물관은 1층 기획전시실과 2층 상설전시실로 이뤄졌다. 기획전시실에선 해마다 주제를 바꿔 1년간 새로운 유물들을 전시한다. 2007년엔 지산동 44호 고분에서 출토된 인골 등을 전시했고, 2008년엔 7가야의 토기 비교전을 열었다. 2009년엔, 나무덧널 형식의 무덤이었던 까닭에, 유일하게 도굴범들의 손을 피해 온전히 살아남은 73호 고분 출토물을 선보였다. 2010년엔 일본이 반출해간 가야의 유물들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마련된다(3월말 현재 전시 준비중). 2층 전시실에선 선사 유물들과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선사시대 대표적인 암각화 고장
2층 전시관 입구엔 가야인 옷차림을 재현한 마네킹들을 세웠다. 각종 기록과 유물, 벽화 등을 참조해 재현한 비단옷과 삼베옷을 입혔다. 선사시대 유적부터 만난다. 석기류와 암각화들이 다가온다. 고령은 암각화 전시장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곳곳에서 무수한 선사시대 암각·성혈들이 발견되고 있는 고장이다. 대표적인 암각화인 양전리 암각화 바위를 전시관에 재현해 놓았다. 도깨비형 가면 모습과 동심원 등이 새겨진 암각화다. 암각화가 있는 돌은 고분의 석실 뚜껑으로도 사용됐다. 고분 석실 뚜껑으로 쓰였던 사람 모양이 새겨진 돌판 실물도 볼 수 있다.
대가야의 역사와 돌화살촉·돌칼, 그릇받침·그릇 등 숱한 토기류를 만난다. 토기들은 부드러운 곡선미와 안정감이 특징이다. 굽다리접시·항아리 등 유약을 바르지 않은, 한번만 구운 토기들인데, 새겨진 무늬와 장식들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받침대 부분에 네모난 창들이 뚫린 굽다리접시(高杯) 등은 요즘 한정식 밥상에 올려놓아도 아름답게 보일 만한, 아니 호화로운 상차림 모습을 갖출 정도의 멋진 그릇들이다. 닭뼈와 복숭아씨 등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음식과 과일이 담겼던 그릇들도 보인다. 글씨가 또렷이 새겨진 토기들도 있어 흥미롭다(복제품). 토기 허리와 뚜껑에 ‘대왕‘(大王)이란 글씨가 새겨진 긴목단지, 주둥이에 ‘하부사리리’라는 글씨가 새겨진 항아리다. 해설사는 “하부사리리란 합천의 하부 지역의 ‘사리리’라는 이가 만든 토기를 나타낸 듯하다”며 “대왕은 당시 가야 왕의 위상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수십 개 쇳조각 꿰어 만든 정교한 갑옷 눈길
1914년 촬영된 주산 능선의 고분군 사진도 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벌거숭이 산에 무너져가는 고분들 모습이 안쓰럽게 다가온다. 일본인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개를 데리고 능선에 서 있는 사진이다. 고분마다 봉분 일부가 파헤쳐진 듯한 모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도굴된 상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가야왕국은 풍부한 철 생산으로 왜 등과 무역을 하고 있었다. 화폐로 쓰였음직한, 일정한 크기로 만들어진 덩이쇠들과 쇠도끼·화살촉 등을 볼 수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이 정교하게 제작된 투구와 갑옷이다. 투구는 가늘고 긴 일정한 크기의 쇳조각 수십개를 부채 형식으로 겹치게 꿰어 만들었다. 옷감 무늬 흔적이 남아 있는 쇠붙이들도 인상적인 볼거리다.
역시 전시물 중에서 가장 눈부시기는 금관과 금귀고리 등이다. 물론 진품은 아니고 정교하게 새로 만들어 전시한 것들이다. 세계적으로 순금으로 만든 옛 금관은 10개에 불과하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 출토 1개, 스키타이 출토 1개, 그리고 신라 금관이 6개, 대가야 출토 금관이 2개다. 대가야 금관은 도굴된 뒤 전해진 것이어서 어느 고분에서 나온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금장식이 풀잎형, 꽃봉오리형 2가지인데 왕이 직접 썼던 것은 아니고 사후에 제작돼 무덤에 넣은 장식품이다. 꽃봉오리형 금관(국보 138호)은 삼성 리움미술관에서, 풀잎형 금관은 일본 오쿠라콜렉션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30호 고분에서 출토된 어린 왕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금동관(일부)도 볼 수 있다. 45호 고분 등에서 출토된 금귀고리는 섬세하게 다듬고 이어붙이고 깎아낸 모습이 눈이 부실 정도다.
40여 명이 함께 묻힌 대형 순장묘엔 8살짜리 아이도
유물들은 신라시대 거쳐 고려시대 것으로 이어진다. 신라 때 절 물산사 터에서 나온 기왓장 무늬도, 반룡사에서 옮겨온, 탑신 없이 옥개석들만 남은 아담한 점판암 다층석탑도, 고려 초기의 개포리 석조관음보살좌상(복제품)도 아름답다. 조선시대 향교 고문서들과 인명부, 주례목판, 그리고 말안장 등을 둘러보면 전시관 밖으로 나오게 된다. 1층엔 탁본, 목판인쇄 체험, 불 지피기 체험 등을 할 수 있는 어린이체험학습실이 마련돼 있다. 야외전시장의 옛 불상들과 석탑, 돌거북 등도 볼거리다.
대가야박물관 옆엔 국내 최대 순장묘인 44호 고분(1977년 발굴) 내부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은 왕릉전시관이 있어 함께 둘러볼 만하다. 40여명이 함께 묻힌 대형 고분이다. 이용호 해설사는 “유골 조사로 묻힌 이들의 나이를 알 수 있는데 8살짜리 아이를 안고 있는 어른도 있었다”며 “모두 유골 뒷머리가 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묻히기 전에 타살된 듯하다”고 말했다. 이 고분에서 출토된, 백제에서 조의품으로 보내온 금동함과 등잔, 오키나와에서 생산된 야광조개 국자(부서진 조각)도 전시했다. 왕릉 축조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 관람을 전후해 주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고분 무리를 따라 산책을 즐겨보자. 아름다운 주변경치와 대가야 왕릉들의 위용을 함께 만나게 되는 산책로다. 왕릉전시관 앞 길 건너편엔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도 있다. ‘전투를 통해 본 대가야의 역사’란 주제로 대가야의 흥망성쇠를 4D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영상관을 갖췄다. 고령군에선 4월8~11일 대가야박물관 일대에서 ‘용사의 부활’이란 주제로 ‘2010 대가야 체험축제’를 펼친다. 대가야와 고령의 특산물, 악성 우륵 등과 관련된 다채로운 체험행사들이 진행된다.
박물관 정보
주소: 경북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460번지
관람시간: 09시~17시
휴관일: 매주 월요일
관람료: 일반인 2천원, 학생·군인 1천5백원
주요 전시물: 토기·철기·금관·장신구 등 지산동 고분 출토 대가야 유물, 고령 지역 선사~조선시대 유물
전화번호: 054) 950~6065]
[지산동 44호분(池山洞 四十四號墳)
위치 :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산 8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에 있는 대가야시대의 고분.
지산동 44호분은 고령 주산성의 서남쪽 주능선이 완만한 대지를 이루는 지점에서 서쪽의 너른 비탈면을 이루는 부분에 단독으로 위치한다. 중턱 대지의 지산동 제32~제35호분보다 위쪽이고 지산동 제45호분보다 아래쪽에 해당한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1977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의 가야 문화권의 유적 보존을 위한 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경북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였다. 발굴 결과 거대한 봉분 속에는 대형 구덩식 돌방 1기와 남측과 서측에 부장 돌방 2기 및 그 주위에 방사상 및 원주상으로 배치된 순장곽 32기가 들어 있었다. 이 유구들은 모두 일련의 기획에 따라 동시에 축조되어 있어 고분 안의 인물들이 일시에 매장되었음을 보여 준다. 순장곽 속에 순장자가 매장되지 않은 허곽 2기가 있지만, 4기는 2명을 매장하였다. 또 주석실과 부장석실에도 각기 순장자가 있어 순장자의 수는 적어도 37명이 넘는 것으로 밝혀졌다.
형태
중앙부에 매장 주체부인 주석실과 그것보다 작게 만든 부장실 2기[남석실과 서석실]는 할석으로 축조한 전형적인 대가야식의 세장 방형 구덩식 돌방이다. 주변부의 순장곽도 구덩식인데, 석재는 할석 또는 판석으로 만든 두 가지가 있다. 뚜껑돌은 도굴에 의해 파괴된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두꺼워 원상태로 남아 있고, 윗면은 점질토로 밀봉된 상태이다. 둘레돌은 지형이 높은 곳은 3단, 중간은 2단, 낮은 곳은 1단으로 축조되어 있다. 봉토는 최근의 연구에 의해 구획 축조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봉분은 장축[동서] 27m, 단축[남북] 25m 규모의 타원형 대형 분묘이며, 잔존 높이는 뚜껑돌 윗면에서 3.6m이지만 지형이 낮은 호석에서는 6m이다. 이러한 높이는 원래보다 1m가량 낮아진 상태로 추정된다. 주석실의 규모는 길이 9.5m, 너비 1.75m, 깊이 2.1m로 사람이 서서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높다.
출토유물
돌방 출토 유물 중 장신구는 각종 구슬이고 생활용구는 청동합, 야광패 국자, 등잔, 휴대용 숫돌 등이다. 무장·무기류는 투구, 대도, 창, 도끼 등이다. 마구류는 안장 부속, 검신형 행엽(杏葉)[말 띠 드리개], 재갈 멈추개, 띠 장식과 운주, 교구 등이다. 그 밖에 각종 토기류와 꺾쇠 및 쇠못이 출토되었다. 부장실 출토 유물은 거의 토기류만 남아 있었다. 순장곽에서는 작은 토기류가 주류이지만 일부 순장곽에서는 무기류, 마구류, 금·은·청동제 귀걸이 및 팔찌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일부 토기 안에서 닭뼈와 누치[잉어과]뼈가 나왔다.
현황
복원 정비를 위한 기획 조사이므로 발굴 조사한 다음에 봉분은 추정 높이만큼 쌓고 잔디를 입힌 상태로 보존하고 있다. 고분 가까이 탐방로가 있으며, 발굴 내용의 개요와 고분 번호가 새겨진 설명판이 세워져 있다. 또한 대가야박물관의 서쪽에 고분의 실물 크기로 내부 상태를 보여 주는 원형 덮개로 된 전시관이 개설되어 있어 방문객이 쉽게 관람할 수 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79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지산동 44호분은 문헌 기록으로만 알려져 있던 우리나라 고대의 순장을 실증한 고분으로, 대형 구덩식 돌방 3기 및 그 주위에 순장곽 32기가 배치되어 있고 순장자도 37명이 넘는 국내 최대의 순장묘이다. 그리고 순장자의 직능 혹은 역할을 보여 주는 순장곽의 배열 상태는 순장 자체는 물론, 당시 사회상의 일면을 보여 주는 중요 자료가 된다. 특히 출토된 국자는 일본 오키나와산 야광패로 만든 것이었고, 등잔과 금동합은 백제에서 생산되었다고 추정되는 것으로 대가야의 원격지 교역을 보여주는 근거 자료이다.]
16:10~16:15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466-1 번지에 있는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 대형자동차버스주차장으로 이동하여 산행 완료
16:15~16:20 휴식
16:20~20:00 “좋은사람들” 버스로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466-1 번지에 있는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 대형자동차버스주차장을 출발하여 서울 양재역으로 귀경 [285km] [3시간40분 소요]
합천 미숭산 산행지도
고령 지산동고분군 지역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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