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시 연재 칼럼 16 (2024년 12월)
내 등이 가려울 때
손이 닿지 않는 내 등이 가려울 때 꼭 집어 긁어준 사람은 없었지. 그래서 벽 모서리에 대고 마구 긁어대곤 했지, 마치 짐승들도 등이 가려울 때 땅에 뒹굴거나 나무에 문지르듯이. 그래서 머리 좋은 인간들은 효자손을 만들었겠지. 타자의 등이 가려울 때 내가 먼저 긁어줘야지,라고 마음먹은 건 그때부터이니 제법 오래 전이군. 문제는 타자들이 부담스러워한다는 것. 나는 다만 내 등 가려울 때의 고통이 생각해서 한 것뿐인데. 그렇다고 내 등도 긁어달라는 것은 아니었어. 슬그머니 내 등도 긁어 주길 바랬을지는 몰라도. 내 이런 속내가 낯설기 때문이겠지. 하긴, 내가 안 긁어줘도 다들 별 탈 없이 살더군. 별 탈 없이 살게 내버려 두는 일이 타자들의 등을 긁어주는 일이라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아챘지. 그런데도 자꾸 습관처럼 타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싶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나는 별 할 말이 없다.
그는 세상에 할 말이 많다. 나는 세상에 별 할 말이 없다. 나는 그의 글들만 읽었을 뿐 한번도 독대해보았거나 어울려 커피를 같이 마셔본 적도 없다. 그렇다고 그를 간절히 만나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가 처음부터 세상에 할 말이 많았는지, 언제부터 세상에 말을 하기 시작했는지 궁금하다. 그가 한 말은 늘 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까지 세상에 옳은 말을 하도록 부추기지는 못했다. 이는 내가 옳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도 된다. 나는 한번도 그가 주장하는 옳은 일을 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正義라는 말은 내 체질에도 맞지도 않는다. 正義의 편에 서서 투쟁해본 적도 없다. 鬪爭이란 말을 나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한번도 鬪士인 적도 없다. 나는 종종 正義라는 말 속에 꿈틀거리는 감상적 꼼수에 강한 저항감이 들곤 한다. 不義의 실체를 보았을 때 격렬한 분노를 느꼈듯이. 그래서 어쩌면 꼼수가 별로 없는 <종합격투기> 시청을 좋아하는 걸 지도 모른다.
나는 한 번도 不義의 편에 서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정의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이 불의의 편에 서는 거라면 별 할 말은 없다. 그는 죽어서도 세상에 할 말은 다 하고 있다. 나는 죽어도 세상에 별 할 말이 없다. 지금 세상에 대해 횡설수설하고 있지 않냐고? 그대가 질타한다면 나는 별 할 말이 없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어*
퇴직하면, 여행을 많이 갈 줄 알았어. 있는 게 시간일 테니까.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더군. 체력도 체력이지만,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마음은 왜 이리 번거로운지. 그리고 점점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졌기 때문이겠지. 퇴직하면, 음악카페를 운영할 수 있을 줄 알았어. 평생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였으니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더군. 현상 유지하려면 술을 팔아야 하는데, 취기들이 올라 웅성거리는 분위기에서 술 한잔 마시지 못하는 내가 무대에 올라 연주할 자신도 없고, 좋아하는 뮤지션을 초대하기도 뻘쭘하기 때문이지. 인생엔 만약(If)란 없겠지만, 장사하는 일엔 젬병인 나는 그냥 우물쭈물하다가 세월만 보낸 셈이야. 지금이라도 하면 되지 않는냐고? 말이 쉽지,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겠어? 별 벌어놓은 것도 없는 노후가 비틀거릴 수도 있는데?
* 세익스피어 이후 가장 위대한 극작가로 평가되기도 하는 버나드 쇼의 묘미문
"I knew if I stay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이 "저와 같이 뛰어난 용모의 여자와 당신처럼 뛰어난 자질의 남자가 결혼해 2세를 낳으면 휼륭한 아기가 태 어날 것"이라며 구혼의 편지를 보내오자, 버나드 쇼는 "나처럼 못생긴 용모에, 당신처럼 멍청한 아기가 태어날 수도 있지 않겠소?"라는 답장을 보냈 다.
마태복음 24장
그는 나만 보면 교회에 가자고 한다. 내 방 서재 창 정면 산 중턱 붉은 십자가가 밤새 내 방을 기웃거리는 교회. 마약같은 생 이라고 나는 젊었을 때 멋 모르고 썼다. 생이라는 마약이라고 쓰진 않았다. 그는 틈만 나면 예수님 말씀을 진지하게 전도한다. 그에겐 내가 생이라는 마약 중독자로 보일 지도 모른다. 니코틴도 일종의 마약이라면 나는 마약 중독자임에 틀림없다. 오늘은 그와 함께 연주하고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불쑥 마태복음 24장을 읽고 다음에 토론해 보자고 했다. 그는 전직 색스포너, 현직 늦깍기 목사이고 나의 오랜 벗이다. 나는 그가 좋다. 일찍 이혼하고 가족도 없고 혼자 살면서도 외로움을 타지 않는 그가 부럽다. 하지만 수입은 단 한푼도 없는 외로움이라는 나의 직업을 그는 끝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마태복음 24장을 이야기할 때 나는 갑자기 빌리 할리데이의 <I am a fool to want you>란 노래가 떠올랐다. 불쌍한 여자 빌리 할리데이의 노래를 난 좋아한다. 치유 불가능한 마약 중독으로 죽은 여자. 거리의 창녀에서 불세출의 재즈 가수가 된 전설적인 그녀의 목소리를 내가 사랑하는 이유는 잘 설명할 수 없다. 그는 빌리의 목소리는 너무 축축하고 슬퍼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가 빌리를 좋아해주면 주었으면 좋을탠데 라고 생각만 했다.
* 마태복음 24장 ; 성전이 무너질 것을 이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