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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first act was to raise fresh troops, for now that his strength
was reduced, there were rebellions everywhere. Yet once again, he
succeeded in raising a mighty army, this time made up entirely of
young men.These were the last men left in France,whom Napoleon
now sent to combat the subject peoples. He marched on Germany.
The emperor of Austria sent his chancellor, Metternich, to negotiate
a peace treaty.Metternich talked to Napoleon for a whole day:
‘And what if this army of boys that you have just raised is mown
down?’ At these words, Napoleon turned first white, then purple
with rage: ‘You are no soldier!’ he shouted. ‘You know nothing of a
soldier’s heart. I was raised on the battlefield, and a man such as
I doesn’t give a fig for a million lives!’ With this outburst, so
Metternich related, Napoleon hurled his hat across the room.
그의 첫 조치는 새로운 군대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의 힘이 약해져서 도처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다시 한 번 그는 강군 육성에 성공했다. 이번에는 전부 젊은이로 구성되었다. 이들이 프랑스에 남아있는 마지막 남자들이었고 나폴레옹은 이제 그들을 피지배민족과의 전투에 내보냈다. 그는 독일로 진군했다. 오스트리아 황제는 수상 메테르니히를 보내 평화조약을 협상하게 했다. 메테르니히는 하룻동안 나폴레옹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막 키워낸 이 소년군대가 쓰러지면 어찌하시렵니까?’ 이 말에 나폴레옹은 처음엔 창백해졌다가 분노로 벌게졌다. ‘너는 군인이 아냐!’ 그가 소리쳤다. ‘너는 군인이 심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전장에서 자랐고 백만의 목숨에도 눈 깜짝하지 않는 그런 남자다!’ 메테르니히에 따르면 이렇게 호통치며 나폴레옹은 모자를 방을 가로질러 내던졌다.
Metternich left the hat where it lay and said calmly: ‘Why should
I be the only person to hear this, within the privacy of these four
walls? Open the doors so that your words may resound from one
end of France to the other.’ Napoleon rejected the terms of the
emperor’s peace treaty, telling Metternich he didn’t have any choice.
메텔니히는 모자를 그대로 두고 조용히 말했다. ‘어찌 이 말씀을 사방이 막힌 곳에서 저 한 사람만 듣게 하십니까? 문을 여시고 폐하의 말씀이 프랑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울려퍼지게 하소서.’ 나폴레옹은 황제의 평화 조약 조건을 거절하며 메테르니히에게 말하길 자신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If he wished to remain emperor of the French, he would have to
fight on and win. In 1813 a battle took place, at Leipzig in Germany,
between Napoleon’s army and those of his allied enemies. On the
first day, Napoleon had the upper hand. But when, on the second,
he was suddenly abandoned by the Bavarian troops who were fighting
for him, he lost the battle and was forced to retreat. During this
retreat he fought with another large army of Bavarians which was
pursuing him, after which he returned to Paris.
그가 프랑스의 황제로 나길 원했다면 그는 싸워서 이겨야 했을 것이다. 1813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군과 대불동맹군 간에 전투가 발생했다. 첫쨋날은 나폴레옹군이 우세했다. 그러나 둘쨋날 바바리아군이 돌연 그를 위해 싸우길 포기해서 그는 전투에서 지고 후퇴해야 했다. 후퇴하는 동안 그를 추격하던 다른 바바리아 대군과 싸운 후 파리로 돌아갔다.
He had been right: following his defeat the French deposed him.
He was given sovereignty over the little island of Elba, to which he
retired. However, the princes and the emperor who had brought
about his defeat met in Vienna in 1814 to negotiate with one
another, and share out Europe among themselves. It was their
opinion that the Enlightenment had been a disaster for Europe.
그는 옳았었다. 그의 패배 후 프랑스는 그를 폐위했다. 그는 그가 은퇴한 작은 섬 엘바에 대한 통치권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패배를 야기했던 대공들과 황제는 1814년 빈에서 만나 서로 협상하였고 저들끼리 유럽을 나눠가졌다. 그들의 견해로는 계몽주의는 유럽에 재앙이었다.
The idea of Liberty, in particular, was responsible for all the
disturbances and the countless victims, both of the Revolution and
of Napoleon’s wars. They wanted to undo the whole Revolution.
Metternich in particular was determined that everything should be
as it had been before, and that no similar upheaval should ever be
allowed to happen again. It was therefore vital, or so he thought,
that nothing should be written or printed in Austria without the
approval of the government and the emperor.
특히 자유의 사상은 모든 혼란과 셀 수 없는 희생,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원인이었다. 그들은 혁명 전부를 되돌리길 원했다. 특히 메테르니치는 결심했다. 모든 것은 예전처럼 되어야하고 어떤 유사한 격변도 다시 발생하도록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필수적인 것은 그의 생각이지만 정부와 황제의 승인없이는 어떤 것도 오스트리아에서 쓰여지거나 인쇄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In France the Revolution was totally extinguished. The brother
of Louis XVI came to the throne as Louis XVIII (the title of Louis
XVII having been given to the son of Louis XVI, who had died
during the Revolution). The new Louis ruled with his court in
France with the same pomp and the same lack of judgement as his
unhappy brother, just as if the twenty-six years of revolution and
empire had never taken place. The French became increasingly
discontented.
프라스에서 대혁명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루이14세의 형제가 루이18세로 왕위에 올랐다. (루이17세의 칭호는 루이16세의 아들에게 주어졌지만 그는 대혁명 기간에 죽었다.) 새로운 루이는 프랑스에서 신하들과 통치했다. 불행한 형제와 똑 같이 허세스럽고 똑 같이 판단력이 부족했다 마치 혁명과 제국의 26년이 없었던 듯했다. 프랑스인들은 점차 불만이 쌓여갔다.
When Napoleon heard about this, he secretly left
Elba (in 1815) and landed in France accompanied by a small
number of soldiers. Louis sent an army to fight him. But as soon as
the soldiers saw Napoleon, they deserted and went over to his side,
and were joined by soldiers from other garrisons. After a few days’
march, the emperor Napoleon entered Paris in triumph, and King
Louis XVIII fled.
나폴레옹이 이에 대해 듣고 은밀히 엘바를 떠나(1815년) 적은 병력을 대동하고 프랑스에 당도했다. 루이는 군을 보내 싸우게 했다. 그러나 군인들은 나폴레옹을 보자마자 탈영하여 그의 편으로 넘어갔고 다른 수비대에서도 군인들이 합류했다. 진군 며칠 후 나폴레옹 황제는 승리하여 파리로 들어왔고 루이18세는 도망쳤다.
The princes, still conferring in Vienna, were furious and declared
Napoleon to be the enemy of humanity. Under the command
of the English duke ofWellington, an army, largely made up
of British and Germans soldiers, was assembled in Belgium.
Napoleon attacked without delay. A savage battle followed in 1815
at a place named Waterloo. Once again, Napoleon seemed at first
to be winning.
여전히 빈에서 협의 중이던 대공들은 분노했고 나폴레옹을 인류의 적으로 선언했다. 영국 공작 웰링턴의 지휘 아래 대부분 영국군과 독일군으로 구성된 군대가 벨기에에 소집되었다. 나폴레옹은 지체없이 공격했다. 잔혹한 전투가 1815년 워터루라는 곳에서 벌어졌다. 다시 한 번 나폴레옹이 처음에는 이기는 듯했다.
However, one of his generals misunderstood the
order he had been given and led his troops in the wrong direction.
Towards evening, the commander of the Prussian troops, General
Blücher, gathered together his exhausted men and, with the words
‘It looks pretty hopeless, but we mustn’t give in’, led them back into
battle. It was to be Napoleon’s last defeat. He fled with his army,
was once again deposed and forced to leave France.
그러나 장군 하나가 받은 명령을 오해하여 엉뚱한 방향으로 부대를 끌고 갔다. 저녁 무렵 프러시아 부대장 블뤼쳐 장군은 탈진한 군사를 한데 모아 ‘아주 절망적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굴복해선 안된다.’고 말하며 그들을 이끌고 전투로 돌아갔다. 이것은 나폴레옹의 마지막 패백되었다. 그는 군대와 도망쳤고 또 다시 폐위되어 프랑스에서 쫓겨났다.
He embarked on a British ship, placing himself voluntarily in the
hands of his oldest enemies, the only ones he had never beaten. He
was counting on their magnanimity, and said that he wished to live
as a private citizen under English law. But in all his life Napoleon
himself had rarely shown any magnanimity. Instead the British
declared him a prisoner of war and sent him to a tiny uninhabited
island far out in the Atlantic, known as the Island of St Helena, so
that he might never come back again. There he spent the last six
years of his life, abandoned and powerless, dictating the memories
of all his deeds and victories, and quarrelling with the English governor,
who wouldn’t even let him take a walk on his own around theisland.
그는 영국배에 승선하여 그가 유일하게 이기지 못한 숙적의 손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의탁했다. 그는 그들의 아량을 기대하고 있었고 영국법 아래에서 일반 시민으로 살기 원한다고 말했다. 대신 영국은 그를 전쟁포로로 선언하고 세인트 헬레나 섬이라는 대서양의 외딴 작은 무인도로 보냈다. 그래서 그는 절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곳에서 그는 생의 마지막 6년을 보냈다. 단념하고 무기력한 채, 그의 모든 행적과 승리의 기억을 구술하며 영국 사령관과 말다툼하며. 그는 나폴레옹이 섬 주위를 산책하는 것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And that was the end of the little man with the pale complexion,
whose strength of will and clarity of mind were greater
than those of any ruler before him.Meanwhile the great powers of
the past, those ancient and pious princely houses, once again ruled
Europe. And the austere and unyielding Metternich, who would
not stoop to pick up Napoleon’s hat, guided the destinies of Europe
from Vienna through his emissaries as if the Revolution had never
taken place.
그리고 그것이 창백한 안색의 작은 남자의 최후였다. 그의 의지력과 명확한 정신은 그 이전의 어떤 통치자 보다 위대했다. 한편 과거의 위대한 세력들, 고대의 종교적인 장엄한 건축물들이 다시 한 번 유럽을 지배했다. 그리고 엄격하고 고집 센 메테르니치, 나폴레옹의 모자를 줍기 위해 몸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빈에서 밀사를 통해 유럽의 운명을 좌우했다. 마치 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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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 AND MACHINES
인간과 기계
Metternich and the pious rulers of Russia, Austria, France and
Spain were indeed able to bring about a return to life as it
had been before the French Revolution – at least in its outward
forms. Once again there was all the splendour and ceremony of
courts, where the nobility paraded, their breasts covered in medals
and decorations, and wielded much influence. Citizens were excluded
from politics, which suited many of them very well. They
occupied themselves with their families, with books and, above all,
with music.
메테르니치와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의 신앙심 깊은 통치자들은 정말로 일상을 프랑스 대혁명 전으로 되돌릴 수 있었다. 적어도 외견 상으로는. 다시 한 번 궁정엔 화려함과 예식이 가득찼다. 그곳에서 귀족들은 활보했고 그들의 가슴은 메달과 장식으로 덮여 있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시민은 정치에서 배제되었고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잘 된 것이었다. 그들은 가문과 서적 특히 음악에 종사했다.
For, in the last hundred years, music, heard mostly as
an accompaniment to dancing, songs and hymns in earlier times,
had become the art which, of all the arts, spoke most to people.
However, this period of tranquillity and leisure, known to Austrians
as the Biedermeier era – that of the administrative or professional
middle-class citizen – was only the visible side of things.
왜냐하면 초창기에는 주로 춤, 노래, 찬송가의 반주로서 들었던 음악은 최근 100년 간 모든 예술 중 사람들의 흥미를 가장 많이 끄는 예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인에게는 비더마이어 시대로 알려진 이 평온과 여가의 시기, 행정관료나 전문 중산층 시민의 시기는 오로지 보여지는 면이 다였다.
There was one Enlightenment idea that Metternich could not suppress
– not that he ever thought of doing so. This was the idea
Galileo had had of a rational, mathematical approach to the study
of nature, which had appealed so much to people at the time of the
Enlightenment. And it so happened that this hidden aspect of the
Enlightenment led to a far greater revolution and dealt a far more
deadly blow to the old forms and institutions than the Parisian
Jacobins ever did with their guillotine.
메테르니치가 억누를 수 없었던, 억누를 생각조차 못했던 계몽주의적 발상이 하나 있었다. 이 발상은 갈릴레오가 가졌던 자연 연구에 대한 이성적, 수학적 접근으로 계몽주의 시대 사람들에게 대단한 호소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계몽주의의 이면이 훨씬 더 위대한 혁명을 이끌었고 낡은 형식과 제도에 훨씬 더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파리시민 자코뱅이 단두대로 했던 것 보다 더.
Mastering the mathematics of nature enabled people not only
to understand the forces of nature, but to use them.And they were
now harnessed and put to work for mankind.
수학으로 자연에 정통하게 되자 사람들은 자연의 힘을 이해하게 될 뿐 아니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동력원이 되어 인류를 위해 작동되었다.
The history of all the inventions that followed is not as simple as
you might think. In most cases they began with an idea. This idea
led to experiments and trials, after which it was often abandoned,
only to be picked up again later, perhaps by somebody else. It was
only when a person came along who had the determination and
persistence to carry the idea through to its conclusion, and make it
generally useful, that that person became known as the ‘inventor’.
This was the case with all the machines which changed our lives –
with steam-driven machinery, the steamship, the steam engine and
the telegraph – and they all became important in Metternich’s
time.
이어지는 모든 발명의 역사는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의 발상으로 시작했다. 이 발상은 실험과 시험을 낳았고 그 이후 자주 폐기되었고 아마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나중에 다시 겨우 선택되었다. 그것은 오직 그 발상을 가지고 결론까지 끌고나갈 결단력과 고집이 있는 사람이 함께 할 때였다. 그리고 그것을 널리 유용하게 만들고 그 사람은 ‘발명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생활을 바꾼 모든 기계에 관련된 경우였다. 증기로 움직이는 기계, 증기선, 증기 기관과 전신 등.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메레르니치의 시대에 중요하게 되었다.
The steam engine came first. A learned Frenchman called Papin
had already been carrying out experiments around 1700. But it
wasn’t until 1769 that a Scottish engineer named James Watt was
able to patent a proper steam engine.At first the engine was mainly
used to pump water out of mines, but people soon saw the possibility
of using it to drive carriages or ships. Experiments with
steamships went on in England in 1802, and in 1803 an American
engineer called Robert Fulton launched a steamboat on the Seine.
Commenting on the event, Napoleon wrote: ‘This project is capable
of changing the face of the world.’ Four years later, in 1807, the
first steamship made its way up the Hudson River from New York
to Albany, its huge paddle-wheel churning, with much puffing,
clanking and belching of smoke.
증기기관이 제일 먼저 나왔다. 파팽이라는 박식한 프랑스인이 1700년경 이미 실험을 했었다. 1769년이 되서야 제임스 와트라는 스코틀랜드 기술자가 제대로 된 증기기관을 특허낼 수 있었다. 처음에 증기기관은 주로 갱도에서 물을 퍼내는데 사용됐지만 사람들은 곧 마차나 배를 움직이는데 사용할 가능성을 알아보았다. 증기선 실험이 1802년 영국에서 진행됐고 1803년 미국 기술자 로버트 풀턴이 세느강에 증기배를 진수시켰다. 나폴레옹은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 사업은 세계의 모습을 바꿀 능력이 있다.’ 4년 뒤인 1807년 첫 증기선이 뉴욕에서 알바니까지 허드슨 강을 거슬러 올랐다. 거대한 외륜을 휘저으며 폭폭 덜커덩거리며 연기를 내뿜었다.
At about the same time attempts were also being made in
England to propel vehicles using steam. But it took until 1803 for
a usable engine to be invented, one which ran on cast-iron railway
lines. In 1814 George Stephenson built the first effective steam
locomotive and named it Blücher after the great Prussian general,
and in 1825 the first railway line was opened between the towns of
Stockton and Darlington. Within thirty years there were railway
lines all over Britain, America, throughout almost all of Europe,
and even in India. These lines went over mountains, through tunnels
and over great rivers, and carried people at least ten times as
quickly as the fastest stagecoach.
비슷한 시기 영국에서 증기를 이용해 차량을 추진하려는 시도 또한 이루어졌다. 그러나 1803년에 가서야 실용화할 수 있는 엔진이 발명되어 주철로 된 철로 위를 달렸다. 1814년 조지 스티븐슨은 처음으로 효율적인 증기기관차를 만들고 위대한 프러시아 장군의 이름을 따 블뤼쳐라고 이름붙였다. 그리고 1825년 스탁턴과 달링턴 사이에 첫 열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30년 안에 전 영국, 미국, 유럽 거의 전역, 인도에까지 철도가 깔렸다. 이 노선들은 산을 넘고 터널을 뚫고 큰 강을 건너 갔고, 가장 빠른 마차 보다 최소 10배 빠르게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It was much the same with the invention of the electric telegraph,
the only means of rapid communication before the telephone.
First thought of in 1753, there were many attempts from the
1770s onwards, but only in 1837 did an American artist called
Samuel Morse succeed in sending a short telegraph to his friends.
Once again, hardly more than ten years had passed before use of the
telegraph was widespread.
전화 이전에 유일한 신속한 통신수단이었던 전보의 발명과 상당히 유사했다. 1753년 처음 고안되고 1770년대부터 줄곧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오직 1837년 사무엘 모르스라는 미국 기술자만이 친구에게 짧은 전보를 보내는데 성공했다. 역시 10년이 지나지않아 전보의 사용이 보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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