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양주 다산 정약용 유적지
실학 싹튼 강변엔 愛民의 애틋함이 흐르고…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마을은 실학의 대가였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의 고향이다. 선생은 문장과 경학(經學)에 뛰어난 학자로서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전라남도 강진으로 귀양 갔다. 다산은 그곳 다산 기슭에 있는 초당에서 머물며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해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로 실학을 집대성했다.
생가 인근엔 기념관·문화관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
능내리 마현마을에 조성된 다산기념관엔 관리들이 백성들을 다스리는 도리를 설명한 <목민심서>를 비롯해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다산의 사상이 담긴 저서와 다산이 직접 그린 서화와 강진유배지의 다산초당 모형, 성을 축조할 때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거중기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옆의 다산문화관은 다산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해보는 공간이다.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떠내려간 것을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여유당 뒤쪽 언덕엔 다산 선생과 부인 풍산 홍씨가 합장되어 있는 묘소가 있다.
다산은 1762년(영조 38) 음력 6월16일 한강의 두물머리(양수리)가 한눈에 보이는 마현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의 행정 구역은 광주군 초부방 마현리. 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다. 능내리(陵內里)라는 지명은 서원부원군 한확(韓確)의 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불린 것이고, 마현(馬峴)은 광주분원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로서 말을 타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던 고개가 있어서라 한다.
다산의 기록에 자주 나타나는 마을 이름은 ‘소내(苕川)’고 다음은 ‘열상(洌上)’이다. 한강의 상류이자 마재 앞을 흐르는 강을 소내라고 불렸기에 그것으로 호를 쓴 것이다. 한편, ‘열상’이란 한강의 상류라는 의미인데, 고려 때는 한강을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 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洌水)'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열초(洌樵)라는 또 다른 호는 ‘한강가에서 나무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마현마을 앞으로 펼쳐진 그 옛날 강변 풍광은 어땠을까. 다음에 소개하는 ‘환소천거’라는 다산의 시는 18세(1779) 때인 어느 봄날, 화순의 부친 임소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것이다.
서둘러서 고향 마을 도착해보니
문 앞에는 봄 강물이 흐르는구나.
기쁜 듯 약초밭둑에 서고 보니
예전처럼 고깃배가 보이는구나.
꽃이 만발한 숲 사이 초당은 고요하고
소나무 가지 드리운 들길이 그윽하네.
남쪽 천리 밖에서 노닐었지만
어디 간들 이 좋은 언덕 얻을 거냐.
이 시를 보면 다산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강촌인 소내마을을 가슴 깊이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은 75년의 일생 중 10여 년의 벼슬살이, 18년의 귀양살이를 제외하고는 50년 가까운 세월을 이곳에 머물렀다.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지은 당호
여유당(與猶堂)은 다산의 당호다. '더불다'는 뜻의 여(與)와 ‘오히려’라는 뜻으로 많이 쓰이는 유(猶)를 당호로 삼은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다산의 회고록이라 할 수 있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나 여유당기(與猶堂記)에 자세히 나와 있다.
여유(與猶)란 말은 노자 도덕경의 ‘여혜약동섭천 유혜약외사린’(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에서 따온 것으로서 ‘겨울의 냇물을 건너듯 사방이 두려운 듯,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에서 지었다. 여(與)는 의심이 많은 동물, 유(猶)는 겁이 많은 원숭이를 가리키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 역사의 서광이던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렇듯 끝없이 자신을 경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산 묘소에 참배하고 내려와 밤나무 숲을 지나 한적한 호숫가로 나간다. 호숫가 겨울바람에 몸을 뒤척인다. 이 호숫가는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위대한 학문적 성과를 이뤄낸 다산을 만나러 온 이들에게 자연이 덤으로 선사하는 선물이다. 하지만 저 물속에는 다산이 배를 타고 고기 잡아 술잔을 들고 시를 읊던 아름다운 강변이 잠겨 있으리라.
다산유적지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공휴일과 토·일요일에는 1시간 연장한다. 관람 종료 1시간 전에 입장하여야 한다. 매주 월요일 휴관이며 주차료와 입장료는 없다. 다산유적지 관리사무소 (031) 590-2481.
다산의 사상과 학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다산 연구가 박석무 선생이 이사장으로 있는 다산연구소 홈페이지(www.edasan.org)를 참조하면 된다.
▲ 여행정보
숙식 마현마을의 장어구이와 민물고기를 차리는 황토마당집(031-576-8087)을 비롯해 감나무집(031-576-8263), 옛나루터집(031-576-8063) 등 식당이 여럿 있다. 이외에도 한강을 끼고 가는 옛 6번 국도변, 북한강을 끼고 가는 45번 국도변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 식당, 숙박업소 등이 많다.
교통 △서울→ 6번 국도(양평 방면)→ 정약용유적지
팔당대교를 지나 다산 정약용 유적지 표지를 보고 우회전하면 된다. 능내리 유적지 입구에서 철도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우회전해 들어가는데, 이 부근이 위험하므로 조심해야 한다.
[유배지 기행] 정약용-강진의 ‘다산초당’
다산초당(茶山草堂) 마루에 앉아 서암(西菴) 추녀 끝을 바라보는데, 솔바람 소리가 햇살자락을 타고 내려와 좁은 마당에 푸르른 그늘을 만들고 있다. 순간, 적요(寂寥)가 느껴진다. 그런데 그 적요가 갑자기 큰 울림으로 다산초당 안팎에서 피어오른다.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다.
‘다산 찻집’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300m 가량 오솔길을 걸어 올라와 밭은 숨을 쉬며 다산초당 마루에 걸터앉는 순간, 나는 다산의 시선(視線)을 보았다. 그의 눈길이 머물던 곳에서 그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푸른 그늘을 만드는 솔바람 소리야말로 그의 숨소리가 아니고 무엇이랴. 솔바람 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데, 지금 다산의 영혼은 저 광활한 우주 어느 곳을 헤매고 있는 것일까.
내가 방금 마루에 앉아 마당에 뿌려진 적요에서 다산 제자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은 것은 물론 환청이지만, 다산은 언뜻 제자들이 기거하는 서암 추녀 끝을 바라보며 그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시선이 무엇을 좇고 있었는지 문득 생각의 미궁(迷宮) 속으로 빠져본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려 보이지 않는데,(小山蔽大山)
멀고 가까운 땅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네.(遠近地不同)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일곱살 때 지었다는 시다. 천재성이 번뜩이는 이 두 줄의 짧은 시구 속에 그의 시선이 들어 있다. 가까이 있는 작은 산 때문에 멀리 있는 큰 산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그가 작은 산 뒤에 있는 큰 산을 보고 있다는 뜻이다. 직관력(直觀力)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산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그것은 내면화된 정신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다산초당의 현판을 바라보니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가 눈길을 휘어잡는다. 원래 다산이 유배시절에 머물던 초당은 말 그대로 초가집이었다. 그동안 관리가 제대로 안돼 다 무너져버린 것을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새로 지어 복원한 것이다. 복원 당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을 얹었는데 다산이 머물던 옛날의 초가집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이때 ‘다산초당’이란 글씨도 김정희의 친필을 모각(模刻)하여 현판을 매달았다.
다산초당의 회랑을 돌아 오른쪽 연못이 보이는 곳으로 가면 문 위에 또 하나의 현판이 붙어 있다. ‘관어재(觀魚齋)’, 즉 다산이 초당 측면에 붙은 문을 열고 바로 앞 연못 속에서 노닐던 물고기를 바라보던 곳이라는 이야기다.
관어재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다시 마루에 걸터앉아 연못을 바라보니 금빛, 먹빛 물고기 여러 마리가 한데 어우러져 꼬리치고 있었다. 다산은 그 물고기들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그는 아마도 물고기의 유영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보았을 것이다. 유배된 몸, 물고기처럼 마음대로 노닐 수도 없는 갇혀 있는 신세…….
다산은 순조 원년인 1801년 셋째형 정약종(丁若鍾)이 신유사옥으로 순교할 당시, 그와 관련하여 문초를 받았으나 간신히 목숨을 건져 경상도 장기현으로 귀양살이를 떠났다. 그런데 그해 가을 다산의 조카사위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이 일어나면서 또 다시 연루되었으나, 아무런 혐의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적(政敵)들에 의하여 형 정약전과 함께 남도 땅으로 유배되었다.
다산초당은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에 살던 해남 윤씨 집안의 귤림처사(橘林處士) 윤단(尹●)이 지은 산정(山亭)이었다. 다산의 어머니는 조선시대 3재의 한명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이고, 윤두서는 다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다. 귤동마을의 해남 윤씨는 바로 그들의 후손이니 다산에게는 외가로 먼 친척뻘이 된다. 그런 인연으로 윤단은 다산을 만덕산 기슭의 초당에 모셔다 자신의 아들 윤문거(尹文擧)를 비롯한 삼형제에게 학문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 소문이 퍼져 나중에는 18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다산초당으로 몰려들어 배움을 청하였다.
다산은 만덕산 기슭의 초당으로 옮겨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그 서쪽에 제자들이 거처하는 서암(西庵)을, 동쪽에 자신이 학문을 닦고 저술활동을 하는 동암(東庵)을 지었다. 그리고 다산초당 옆에는 연못을 만들고, 나무 홈을 파서 계곡의 물을 끌어들여 그 못으로 폭포수가 떨어지게 하였다. 그는 또한 만덕산 앞으로 흐르는 탐진강에서 돌을 주워서 연못 가운데 탑처럼 쌓았으며, 못 주변에는 백일홍과 대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하게 하였다. 그 탑의 이름은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다.
다산이 심었다는 연못가의 백일홍나무 그늘을 지나 동쪽으로 걸어가면 폭포수 소리를 뒤로 하며 또 다시 솔바람이 상쾌하게 길안내를 한다. 동암 현판은 2개인데, 하나는 다산이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체다.
다산이 쓴 것은 ‘다산동암(茶山東庵)’이란 현판인데, 그 집자(集字)하여 만든 글씨가 범상치 않다. 획 하나 하나가 날아갈 듯 운동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글자마다 안정감을 갖추고 있다. 김정희의 글씨로 된 ‘보정산방(寶丁山房)’이란 현판은 그가 이곳 다산초당에 찾아와 정약용을 기리며 직접 쓴 것으로 천하명필의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다산이 지었다는 서암이나 동암은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건립한 것으로, 본래 초당이었으나 기와지붕을 얹어 다산 시절의 모습을 재현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이처럼 초가지붕이 아닌 기와지붕으로 지은 것은 관리상의 문제와 보존에 어려움이 뒤따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오늘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기와지붕으로 된 초당을 보고 다산의 유배생활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잘못된 유추이다. 유배생활의 신산스러움은 다산의 여러가지 시에 아주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동암을 지나 탐진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이르면 천일각(天一閣)이 있다. 이 누각은 강진군에서 지었는데 다산이 유배생활을 할 때는 없었던 것이다. 다만 다산이 동암에서 글을 쓰다가 이곳 언덕에 나와 탐진강을 바라보며, 저 너머 어딘가 바다 위에 떠 있을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둘째형 정약전을 그리워했을 것이라는 추측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멀리 구강포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천일각 옆으로 산길이 있는데, 그 길로 약 800m쯤 걸어가면 만덕산 자락 아늑한 곳에 터를 잡은 백련사(白蓮寺)가 나온다. 다산은 이 길을 걸어가 당시 백련사에 머물던 혜장(惠藏:1772~1811) 스님과 인간적으로 또는 사상적으로 교류를 갖곤 하였다.
백련사로 가려면 땀을 한참 흘려야 하므로 천일각에서 다시 되돌아 다산초당 뒤꼍으로 가본다. 다산이 마셨다는 샘물이 있고, 그 뒤편 바위에 ‘정석(丁石)’이란 다산의 친필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정석’이란 글씨는 다산의 정갈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하며, 그가 바위와의 문답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유배생활의 신산스러움을 그 돌과 함께 의지력으로 버텨 나갔을 것이다.
다시 다산초당 앞마당으로 돌아나오면 마당 가운데 크고 둥근 돌이 있다. 다산이 솔방울을 태워 차를 달이던 곳이라 하여 ‘다조(茶●)’라고 부른다. ‘차 부뚜막’이라는 뜻이다. 원래 만덕산은 ‘다산(茶山)’이라고도 불린 적이 있었는데, 그만큼 이 산에는 자생하는 차나무가 많이 있다. 다산은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자연산 차를 즐겨 마셨는데, 그래서 그의 호도 이 산의 이름을 따서 ‘다산’이 된 것이다.
다산초당을 뒤로 하고 오솔길로 내려오면서 길바닥 위로 꾸불텅거리며 기어나와 사람들의 발길에 닳고 닳은 굵은 나무뿌리들을 보며, 그곳에 다산의 발자취도 남아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다산 정약용
조선 영조 38년(1762)에 경기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행정명으로는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가 된다. 22세에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28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에 나섰다. 33세 때 정조의 총애를 받아 암행어사로 활동하며 농민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38세 때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참의를 맡은 것을 끝으로 벼슬살이에 종지부를 찍었다.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순조가 즉위하면서 곧바로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무려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겪었다. 1818년에야 유배가 풀려 고향에 돌아와 저술활동을 하다가 1836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강진 유배생활 18년과 그 후 고향에서의 저술활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저서를 지었다. 대표저서로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500여권이 있다.
▶여행안내
서울에서는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해 목포까지 가서 다시 약 40분 가량 남쪽으로 길을 잡아 2번 국도를 타고 가면 강진읍이 나온다. 강진읍에서 다산초당까지는 약 8㎞로, 18번 국도가 이어지고 있다. 목포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서울에서 직접 강진까지 가는 버스도 있다. 강진읍에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란 시로 유명한 김영랑(본명 김윤식)의 ‘영랑생가’가 있으며, 도갑사, 무위사, 대흥사 등의 명찰도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강진 여행은 ‘땅끝마을’로 유명한 해남과 함께 묶으면 더욱 다양한 볼거리를 만끽할 수 있다. 〈엄광용·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