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 마의태자와 경순대왕 소고※
- 敬山 김 보경 씀 -
□ 마의태자(麻衣太子) 소고
마의태자(麻衣太子)는 신라 말기 황태자로서 마지막 왕인 경순대왕(敬順大王, 본명 부,傅)의 9남 3녀 중에 맏아들이다.
마의태자(麻衣太子)라는 이름은 삼국을 통일한 천년사직 신라국의 멸망에 그가 황태자 신분으로서 분개하여 금강산(개골산)에 입적(入寂), 삼베옷(麻衣)을 입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여생을 보냈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며, 본명은 김일(金鎰)이고, 신라 제56대 왕인 경순왕의 첫째 부인인 죽방왕후(竹房王后)인 박 씨가 낳았다.
1. 마의태자의 생애
신라의 말기에 국기(國紀)가 문란(진골, 성골의 퇴락 등)해 지자, 토후세력인 후백제(견훤)의 잔여세력과 고려 왕건의 위세가 워낙 강성하여 금성(金城, 경주) 가까이까지 뻗어 와서 그 위협을 감당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당시에 경순왕(敬順王 8년)은 더 이상 버틸 길이 없음을 통감하고, AD935년 10월 문무백관 군신회의(重議)를 소집하고 풍전등화의 국사를 논의하여, 애국애민의 일념으로 피를 흘리지 아니하고 나라(신라)를 신흥국인 고려에 양국(讓國)하기로 하였다.
이를 지켜본 마의태자는,“신라 왕조 천년(992년간)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라고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으나, 결국 아버지인 경순대왕의 의지에 따라 고려국(高麗國)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합병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마의태자는 나라를 잃은 슬픔에 통곡하며 금강산(개골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 평생을 삼베옷을 입고 약초와 풀뿌리를 먹으며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천년사직의 나라(신라)가 없어지자 곧바로 마의태자는 여동생 덕주옹주(德周翁主)와 측근들을 이끌고 신라의 서울인 금성(金城, 경주)을 떠나 개골산(금강산)으로 향하였는데, 당시 전국적으로 신라를 지지하는 유민세력이 아직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마의태자를 따르는 무리들도 많았다고 한다. 덕주공주는 오빠 일행을 따라 문경의 하늘재를 넘어 월악산 아래 제천 땅인 송계계곡에 들어서자 도중에 그만 지쳐서 무리들을 끝까지 따라갈 수가 없게 되었음으로, 오빠(마의태자)의 승낙을 받아 시중들의 엄호 하에 송계계곡에 머물면서 보살이 되어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 후 덕주공주는 이곳 골짜기에 있는 거대한 화강암벽에 새겨진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높이13m)을 찾아가 구국예불(救國禮佛)을 드리고, 그 아래에 자기 이름(德周)을 딴 덕주사(德周寺)를 짓고 독실한 불심으로 혼자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현재까지도 제천과 영월의 충주호와 수안보 근처인 풍광이 수려한 송계계곡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덕주산성(德周山城)과 덕주사는 보호할 가치가 있는 문화제가 되어 가볼만한 명소로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마의태자의 할아버지인 효종랑(孝宗郞)은 1,000여명이나 되는 화랑도(花郞徒)의 우두머리였다고 한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공, 한때 경주를 점령하여 경애왕(景哀王)을 폐위하고 조카뻘인 경순왕을 새 임금으로 옹립한 것도 경순왕이 바로 효종랑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의태자는 그런 훌륭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부왕(父王)인 경순왕이 고려의 왕건(王建)에게 비굴하게 항복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다가 뜻이 수포로 돌아가자, 결연히 개골산(금강산)으로 입산하여 중이 되었다고 한다.
마의태자 일행은 쓰라린 가슴을 안고 경주를 떠나 문경과 영월 땅을 거쳐 처음에는 강원도 인제(隣蹄) 땅인 설악산과 방태산 기슭(인제군 남면 갑둔리 일대)에 한동안 진을 치고 심신을 달래고 고려에 대항하는 군사들을 훈련시키며 머물게 된다. 그러나 고려가 더욱 강성해지자 그 후 마의태자는 이를 접고, 금강산으로 입산하기로 결심하고 외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온정리(溫井里) 입구 골짜기를 통하여 신계사(*최근에 한국 조계사에서 일부 복원시킴) 에 당도하여 여기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불심을 기르게 된다. 그리고 내금강산의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 등 금강산의 명소들을 돌며 매일같이 구국기도를 하고, 만폭동 골짜기와 그 일대 산속을 돌며 여생을 보냈다는 설이 유력하다.
마의태자의 능묘(陵墓)는 금강산 제일봉인 비로봉(毘盧峰) 바로 아래에 있다. 그의 능묘 옆에는 그가 타고 다니던 용마(龍馬)가 돌로 변했다는 용마석도 있다. 그 비석에는 “新羅麻衣太子陵”(신라마의태자릉)이라 새겨져 있다. 그가 영면(永眠)하는 무덤은 둘레가 약 10미터, 높이 1.5미터로 보통 무덤보다 조금 더 크다고 한다.
2. 금(金) 태조와의 관련설
마의태자 후손들이 한반도 북쪽 압록강을 건너 여진(女眞) 땅에 들어가 금(金)나라를 일으켰다는 역사적인 기록은‘고려사(高麗史)’에도 산견(散見)된다.
‘고려사’세가(世家, 권13 예종 10년(1115) 3월조)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기록하기를,‘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모시고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옛적 우리 평주(平州)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거주하였으니, 이가 곧 금(金)의 시조다.’라고 하였으며, 혹은 말하기를,‘평주 승 김행(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라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를 낳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계자(季子)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雄傑)이어서 중심(衆心)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위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하매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또한 ‘고려사’의 같은 예종 4년(1109) 6월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한다. 즉,‘여진국의 사신(使臣)이 고려에 와서,‘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찌기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이 대방(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라고 하였다.
3. 사적(史的) 논란
강원도 인제군 남면의 김부리(金富里)와 갑둔리(甲屯里) 일대에는 지금도 마의태자가 군사를 모아 고려에 항전하여 끝까지 싸웠다는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있으며, 인접한 다른 곳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인제의 방태산 아래 산속으로 간 마의태자와 금강산으로 간 마의태자가 다른 사람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낭설이고, 다만 당시(신라 말기) 경주에서 금강산을 가기 위해서는 영월이나 인제 땅을 거치지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또한, 마이태자의 본명이 김부(金 富)임에 비추어 인제군의 김부리(金富里)는 우연한 이름이 아님을 볼 수 있는데, 경순왕의 본명도 김부(金 傅)인데, 여기 김부리 마을의 끝 자(이름)에 대하여‘傅’자를 쓰지 않고‘富’자를 붙인 것만 보아도 마의태자와 관련된 지명임을 쉽사리 알 수 있다.
금강산과 설악산에 들어가는 입구인 인제군 남면 일대(김부리 등지)는 한 때 번창한 산골 마을이었으나 지금도 군사적인 요충지임에 비추어 군 당국에서 수용(1993년 육군과학화훈련장에 편입)하여, 지금은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다만 이곳에 마의태자를 모셔온 사당인 대왕각(大王閣)만이 길가에 쓸쓸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예부터 이곳(김부리 일대) 주민들은 매년 음력 5월 5일에 대왕각을 중심으로 마의태자를 기리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마을이 번성했을 당시에는 소를 잡아서 대왕각에 바치는 제물로 쓰고, 제사 후에는 마을대항 돌싸움을 벌일 정도로 병정놀이를 하는 성대한 잔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1997년 이후 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을 떠나 인구가 줄어듦에 따라 당제는 그 명맥이 끊어진 상태로서 아쉬움이 남는다. 높은 산간 지대로 둘러싸인 이러한 천연적인 요새인 이곳 김부리(金富里, 마의태자 이름 마을)와 갑둔리(甲屯里, 군 주둔 마을 뜻)등 지역에서 마의태자는 군사력을 기르면서 구국일념으로 고려에 대항하여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음이 지금까지 실증적(實證的)으로 보여주고 있다.
*주: 필자의 직접 탐방조사와‘김부사적기(인제군 갑둔향토사적연구회 1988간)’에 명기됨과 갑둔리 전설 등 자료에 의함.)
금강산과 설악산의 소금강 그리고 김부리 등지에서 각각 전승되고 있는 마의태자에 관한 전설에 따르면 대궐터, 산성, 군사훈련, 전투 등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 지역 일대의 자료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를 보아 전설 속에서 마의태자는 충신들과 군사들을 이끌고 산속에 들어가 신라를 상징하는 대궐을 짓고 산성을 쌓으며, 고려군과 정면 대결을 벌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부 사학자들의 견해는 전설 속에 등장하는 강원도의 험준한 산간지 일대의 한계산성이나 아미산성은 마의태자가 직접 쌓은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모두가 마의태자의 활동무대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가 있다.
☆ 딸 헌숙왕후(獻肅王后) : 고려태조 왕건의 외손녀일 것으로 추측되 며, 고려 5대 경종(景宗 955~981)에게 출가
*별칭 : 헌승황후(憲承皇后)
*시호: 온경공효양혜의목순성회안인후헌숙왕후(溫敬恭孝良惠懿穆順 聖懷安仁厚獻肅王后)
4). 마의태자의 직계 가계
마의태자의 자 : 겸용(謙用)
태자비 : 김영란(金英蘭) - 상국 김유렴(金裕廉)의 딸
▴자녀(2남): 장남 선웅(善雄 930~1015), 차남 순웅(順雄 932~?)
마의 태자는 다음과 같이 4명의 아들을 두었다고도 한다.
장남 : 김선웅(金善雄)
차남 : 김순웅(金順雄) 경주김씨 대장군공파 파조
3남 : 김교(金較) 통천김씨 시조
4남(?) : 김준(金俊) 또는 김행(金幸) - 여진에 건너가 금 태조의 선 조가 되다.
금(金)나라를 건국한 아골타가 마의태자의 후손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금 태조 아골타의 선조인 김준(金俊) 또는 김행(金幸)도 그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순암 안정복에 의하면 김준의 형제가 삼형제였다고 하면서,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 부기: 마의태자는 부안 김씨(扶安 金氏)의 시조라고 주장하는데, 부안김씨는 2000년 전국인구조사에서 1만 7,391가구에 5만 6,3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순왕의 3남 김순웅(金順雄)은 경주김씨 대장군공파 파조가 되었고, 또 4남 김교(金較)는 고려 광종때 통천군에 봉해지고 통천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 경순왕릉과 왕릉의 재발견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대왕(敬順大王)에 대하여는 위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경순왕은 AD935년 10월 군신 회의(重議)를 거쳐 나라(新羅)를 고려 왕건에게 양국(讓國)하고, 신라국을 폐위함과 동시에 문무백관들을 데리고 고려의 서울인 개성으로 갔다.
고려의 왕건태조는 경순왕을 광광순화위국공신(觀光順化衛國功臣) 상주국낙랑왕정승(上柱國樂浪王政丞)으로 제수하고, 나라이름(신라)을 삭제하고 경주(慶州)라 하여 8,000호의 식읍(食邑)을 나리고, 일 년에 1천석의 녹(祿)을 내렸다.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를 계비(繼妃)로 삼고, 많은 신라인들이 고려의 정사(政事)에 참여시키며, 사실상 고려국의 도약과 발전에 일조를 하였다.
한편 개성에 신란궁(神鸞宮)을 재건하여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와 5남 2녀를 낳고 그들의 여생을 여기에서 보냈다.
경순왕은 신라의 금성(金城)에서 개성으로 온지 43년 만인 고려국 경왕(景王 3년) 때인 AD978년 4월 4일 개성의 송경류화궁(松京柳花宮)
에서 생을 마감하고 승하, 무인(戊寅) 8월에 장단부 고랑진(현재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의 성거산 화장룡 아래에 예장(禮葬)되었다.
경순 왕릉은 오랫동안 역사의 변혁기를 겪어오면서 이조의 중세에 까지 실전(失傳)되어오다가 조선조 영조(英祖) 23년(AD1746년에 와서야, 신라 제56대 경순대왕 릉(陵)이 현재의 위치인 연천군 백학면 임진강변 가까이에서 발견되었다. 약초를 캐는 한 농부가 옛날의 비(碑)를 발견(빨래터에서 빨래돌로 사용?)하고, 이 사실을 왕에게 상소하고 왕은 이를 조사케 하였더니 비문의 일부가 경순대왕의 왕릉(王陵)임이 판명되었다.
당시에 진사인 김시후(金時後)의 확증으로 왕릉을 찾게 되어 김응호(金應豪) 외 17인이 왕에게 다시 상소를 올렸고, 지평(持平) 외 7인이 후손들에게 알려 일그러진 경순 왕릉을 재봉축하고, 영조대왕이 직접 치제(致祭)를 올리고 참봉을 두어 수호케 하였다.
이후 다시 역사의 세월이 흘러 나라를 잃은 왜정(倭政)치하에 와서 왕릉 수호 제도마저 끊기고 국민들이 좌왕우왕 도탄에 빠지고 있을 때, 김구(金九)선생이 상해임시정부 입정(入政) 직전에 경순 왕릉을 한번 찾았을 뿐 다시 왕릉은 비운의 세월 속에서 잊혀져갔다.
1945년 8.15해방에 이어 한반도는 38도 선으로 남북이 분단되고, 1950년 6.25 전난(戰亂)으로 경순 왕릉은 치열한 전쟁의 종심 축 지대에서 다시 실전상태에서 미궁으로 오다가, 천행으로 휴전선이 왕릉을 경계로 바로 비무장지대 이남으로 정해진 상태임을 후에야 발견하
게 되었다.
경순왕릉지(11,777m2)는 작전상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민감한 서부의 임진강안 지역으로 미군 제2사단과 국군 제1사단이 교체 관할하게 됨에 따라 1960년대 초에 이 지역을 관할하던 한국군 12연대 11중대(중
대장 呂吉道 대위)가 지뢰제거 작업 중에 왕릉을 발견하고 장병들과 더불어 벌초를 하며 왕릉 수호에 힘쓰고 있다는 소식이 지상에 보도되었다.
이 당시 경주김씨 종친회 김기철부장이 이를 접하고 여길도 대위와 연락(서신)을 취하는가하면, 경주김씨종친회장인 김일환(金 一煥, 전교통부 장관), 김동욱(金東旭, 당시 국회의원) 등 후손들이 정부에 교섭하여 사적(史蹟) 제244호로 지정(1975. 6. 25)받아 정부보조금으로 일차 왕릉을 정화하여 봉축함과 동시에, 경주김씨종친회에서 매년 10월 3일(개천절)을 경순왕릉 향제일(香祭日)로 정하여, 그 후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에 흩어져 사는 경주김씨 자손들이 이를 알고 찾아들며 매년 향사를 봉행(奉行)하고 있다.
신라의 역대 왕처럼 경순왕도 경주의 대왕릉 사지에 함께 묻혔더라면 위와 같은 아이러니칼한 일이 없었을 것을 신라국의 도도한 역사를 잘 지키지 못하고 빗나갔기에, 혼자만이 장례행렬(고려국 국장)이 경주까지 못 내려가고(신라 유민에 의한 민란을 우려하여 고려의 조정에서 개성에서 출발하는 경순왕의 장례행렬이 임진강을 넘지 못하도록) 도중에 묻히게 되어, 현재까지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의 임진강변 야산 골짜기에서 영면하고 있는 것이리라.
현재 경순 왕릉은 능역(陵域)과 주변의 주차장 등 부대시설과 보호책 등이 잘 정비되어 있고 입구(초소)에는 군군이 경비를 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 와서 참배 목적으로 신분이 확실한 민간인의 개별 출입이 허용되고 있다.
◊주(註): 1. 필자(김 보경) 관련 탐방지역: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DMZ)의 경순대왕릉, 인제군 남면 김부리 대왕각, 금강산과 외금강, 온정리 일대 신계사, 경주의 신라 역대왕릉과 감은사지 수중
왕릉(문무왕), 상주시 백화산 견훤산성, 제천/수안보 송계계곡의 덕주산성 및 덕주사 마애석불, 문경군 하늘재와 가은 아자개(견훤의 아버지) 마을 등
2. 문서 자료: 신라의 삼국통일과 문화(문예마당 발행), 삼국유사, 경주김씨족보(6권 중 제1권), 경주김씨 종친회 자료와 기타 인터넷 검색자료 외 지방지(인제군지)
첫댓글 잘 읽었어요
신라천년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긴 자료는 아직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족친 이은식박사님이
그 작업을 하고있습니다. 곧 세계문화기록물로 등제 된다고 합니다